♣ 미술(美術) 마당 ♣/- 화가[畵家]

[네덜란드: 15세기 중~ 16세기 초]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또는 Jerome Bosch)

Bawoo 2014. 10. 16. 23:26

에로니무스 보스

<초상화 -1560년경>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또는 Jerome Bosch, 1450년경 ~ 1516년 8월)는

네덜란드의 화가이다.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스타일과 작품

판에이크 형제 이후의 대표적인 종교화가로 특이한 색채로 이상한 괴물, 속의 유령, 텅 비어 있는

특이한 을 가진 사람 등 무서운 지옥세계를 많이 그렸다.

보스는 나무 판넬에 그려진 3개의 그림이 서로 맞붙은 3연작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세속적 쾌락의 동산》이다.

 

 

 

 이 작품의 왼쪽 판넬에는 아담이브와 수많은 경이로운 동물을 담은 낙원을 묘사하며, 중간 판넬에는 다수의 벌거벗은 사람들과 거대한 과일 및 새를 담은 지상의 쾌락의 모습을 그리며, 오른쪽 판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을 향하여 공상의 징벌의 묘사를 그린 지옥의 모습을 담는다. 관람자가 볼 수 있는 외부 판넬이 닫힌 곳에, 그리사유 기법으로 신이 지구를 창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보스의 그림은 채색의 방법에 의해 거친 표면을 가진다. 이는 전통적인 플랑드르 화풍 이 매끄러운 표면의 그림으로, 인간에 의한 것임을 숨기려 했던 것과 대조된다. 그의 그림에는 무서움이나 잔인한 모양 그리고 악덕과 범죄 등이 나타나 있다. 뛰어난 상상력으로써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환락의 땅》, 《성 안토니오의유혹》

 


 
 '성 안토니오의 유혹', 캔버스에 유채, 131.5 x 119 cm, 리스본,

 국립 고미술박물관.

 
<그림 해설>성 안토니오 은수자(251∼356)는 251년 이집트 북부의 고마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복음의 이 구절이 성 안토니오의 마음에 깊이 와 닿은 것은 지주였던 부친이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는 말씀대로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한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20세 전후였다. 이후 그는 오래된 공동묘지로 홀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13년간 수도생활을 했으며, 35세가 되었을 때 또다시 인적 없는 더 깊은 곳으로 수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또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생명을 연명할 정도로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하고 극단의 외로움을 견디며 기도 생활을 했다.

306년 그는 은둔자의 삶에서 나와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제자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웠다. 311년에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막시미아누스 황제 시절 박해를 받고 있었던 그리스도 교인들을 위로했고, 박해가 잦아들자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일강 근처의 피스피르라는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제자들과 함께 수도원 생활을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물고기가 물이 마르면 죽듯이, 수도자도 수도원에서 멀어져서 세속 사람들과 섞여 기도를 멀리하면 스스로를 잃게 된다.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들의 기도방이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흔히 그를 최초의 수도자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수도원을 설립했고, 엄격한 수도 생활의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338년 87세가 됐을 때 아리안 파를 반박하기 위해 한 차례 더 알렉산드리아에 간 것을 빼고는 이후 줄곧 수도원에서 생활했으며, 105세라는 긴 생을 살다가 영면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수도원 설립과 수도생활은 이후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규칙 및 생활에 모델이 되었다.

성 안토니오 은수자와 관련해서는 그가 홀로 수도생활을 하던 중에 마귀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성인이 마귀로부터 숱한 유혹을 당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마귀에 화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멋진 예술작품으로 둔갑했다. 이 그림에서 성인은 높은 하늘까지 들려진 후 떨어지는가 하면, 돈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이 장면은 그 중에서 마귀들이 금욕, 금식 생활을 하던 성인을 온갖 음식으로 유혹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공주로 변장한 마귀가 유혹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가의 관심은 여인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에도, 맛깔스러운 음식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에도 있지 않고 보다 기괴하고, 창의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데 있다. 괴상한 마귀가 들고 있는 계란을 접시에 담아 들고 오는 하인, 코가 나팔처럼 생긴 가상의 동물, 다소 모자란 듯한 사람들의 표정 등 무엇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수사 복장을 한 성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분홍색 옷의 공주 역시 장신구로 치장한 것을 빼고는 유혹에 넘어갈 미인이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인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사실주의가 지배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이 진정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제작된 지 5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였다. 보쉬의 작품이야말로 원조 초현실주의 회화였던 것이다.

해설: 고종희(한양여대 교수·http://blog.naver.com/bella4040)

-------------------------------------------------------------------------- 


보스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를 기록한 적이 없으며,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다른 서명들은 그가 직접 남긴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25개 미만의 그림이 오늘날 보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보스가 죽은 후, 그의 그림 다수를 획득하였다. 그 결과로 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은 이제 《세속적 쾌락의 동산》을 비롯하여 보스의 작품 여러 점을 소유한다.

처음에는 경시됐지만 후에는 그의 이상한 예술성이 대 피터르 브뤼헐 (1525? ~ 1569)등의 영향으로 높이 평가됐다. 대 피터르 브뤼헐은 보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죽음의 승리》(1592년)등 여러 점을 그렸다.

보스는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위키백과 및 검색 자료>

============================================================================

 

1. 소개

네덜란드 출신 화가. 본명은 히에로니무스 반 아켄. 환상적이고도 독특한 그림체가 특징이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라 불렸다.

사실 이름과 작품 외에 자세한 신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자신과 비슷한 화풍을 지닌 피터 브뢰헬이 제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도 처음엔 브뢰헬이 보스를 자신의 스승이라 말했다가, 나중에 실제 사제관계가 아닌 그림을 참조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설정이 바뀌었다.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둘의 활동 연대를 비교하면 두 사람이 실제로 사제관계였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보스의 사망 추정연도는 1510년, 브뢰헬의 출생 추정연도는 1520~1530년 사이다.

2. 독특한 화풍

그림체가 어떻게 보면 경쾌하고, 어떻게 보면 기괴하다. 벽화라는 것을 감안해도 인간의 크기를 작게 그리고, 대신 수많은 인간을 그려넣어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연출한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지독한 염세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죄악을 풍자하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이 죄악의 풍자라는 게 굉장히 에로틱하면서도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을 집어삼키면서 동시에 배설하고 있는 새 머리 괴물이라든가, 꼬챙이에 꿰뚫리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그렇지만 이 풍자들 중 많은 것들은 현대 미술에나 등장할 법한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500년을 앞서간 천재로 불린다. 또한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도는 작게 그려놓은 인간들과 달리 정말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위의 현대 미술에나 등장할 법하다는 그림들 때문에 미래인 내지는 외계인 떡밥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확실히 저런 주장이 튀어나온 게 이해가 될 정도로 현대적인 구도가 많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동시에 배설하는 새머리 괴물이 앉아 있는 의자는 수세식 변기를 연상시키고, 머리에 둥근 유리구를 뒤집어 쓴 사람은 우주인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허리가 끊어진 채 속이 텅빈 한 남자의 토르소는 확실히 그 시대 사람의 작품이라기보다 현대 미술의 느낌이 강하다.

bosch_1.jpg
[JPG image (367.9 KB)]

대표작인 삼면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혹은 정원)의 왼쪽면 하단 디테일.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이것이 논란이 되는 외계인/미래인 떡밥의 중점. 저 의자는 수세식 변기, 혹은 외계의 발전된 변기이며 괴물 밑의 초록색에 둥그런 유리 머리를 가진 생명체는 외계인/미래인 이라는 이야기다. 다른 그림에 나오는 성채는 로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고 저 떡밥을 진짜로 믿으면 곤란.

기괴한 그림 때문에 이런 저런 오해를 많이 받은 화가이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이 그림을 인간의 무의식에 빗대어 표현했다는 건데 이것도 미래인 설 만만치 않은 병크. 15세기 중세인을 20세기의 관점으로 이해하려 든 데서 벌어진 실수다. 사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은 상당히 교회의 메세지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그를 꾸준하게 후원했으며,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의 기괴한 그림과 풍자는 대부분 네덜란드 속담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말하자면 그림으로 표현된 언어 유희에 가깝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라는 속담을 나타내기 위해 발이 없는 '동물' 말이 빠르게 달리는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는 지옥을 만드는 괴팍한 노인이자 출연한 화가 중 유일하게 악역에 가깝게 묘사되었는데... 실제로는 고지식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을 확률이 99%다. 수도원에 돈 안 받고 공짜로 봉사하며 그려준 그림만 해도 수두룩하고 저 지옥같은 그림도 '지옥을 만들어야지 우헤헤' 라는 사고방식보다 '너네 착하게 안 살면 이렇게 된다 이 우민들아'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천재성이 수그러 드는 것은 아니다. 언어 유희적 요소라 해도 이런 수많은 인간 군상과 조형을 현대에 와서도 세련되어 보일 정도로 배치해 놓은 것은 그의 천재성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보스의 그림은 후대 초현실주의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엔하위키 미러>
<

                Hieronymus Bosch

Hieronymus Bosch (/ˌh.əˈrɒnɨməs ˈbɒʃ/; Dutch: [ɦijeˈɾoːnimʏs ˈbɔs]; born Jheronimus van Aken [jeˈɾoːnimʏs vɑn ˈaːkə(n)];[1] c. 1450 – 9 August 1516) was an Early Netherlandish painter. His work is known for its use of fantastic imagery to illustrate moral and religious concepts and narratives.[2]

Hieronymus Bosch was born Jheronimus (or Joen,[3] respectively the Latin and Middle Dutch form of the name "Jerome") van Aken (meaning "from Aachen"). He signed a number of his paintings as Jheronimus Bosch (pronounced Jeronimus Bos in Middle Dutch).[4] The name derives from his birthplace, 's-Hertogenbosch, which is commonly called "Den Bosch".

 

Little is known of Bosch’s life or training. He left behind no letters or diaries, and

what has been identified has been taken from brief references to him in the municipal records of 's-Hertogenbosch, and in the account books of the local order of the Illustrious Brotherhood of Our Blessed Lady. Nothing is known of his personality or his thoughts on the meaning of his art. Bosch’s date of birth has not been determined with certainty. It is estimated at c. 1450 on the basis of a hand drawn portrait (which may be a self-portrait) made shortly before his death in 1516. The drawing shows the artist at an advanced age, probably in his late sixties.[5]

 

Bosch was born and lived all his life in and near ‘s-Hertogenbosch, a city in the Duchy of Brabant. His grandfather, Jan van Aken (died 1454), was a painter and is first mentioned in the records in 1430. It is known that Jan had five sons, four of whom were also painters. Bosch’s father, Anthonius van Aken (died c. 1478), acted as artistic adviser to the Illustrious Brotherhood of Our Blessed Lady.[6]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either Bosch’s father or one of his uncles taught the artist to paint, but none of their works survive.[7] Bosch first appears in the municipal record on 5 April 1474, when he is named along with two brothers and a sister's-Hertogenbosch was a flourishing city in fifteenth century Brabant, in the south of the present-day Netherlands, at the time part of the Burgundian Netherlands, and during his lifetime passing through marriage to the Habsburgs. In 1463, 4,000 houses in the town were destroyed by a catastrophic fire, which the then (approximately) 13-year-old Bosch presumably witnessed. He became a popular painter in his lifetime and often received commissions from abroad. In 1488 he joined the highly respected Brotherhood of Our Lady, an arch-conservative religious group of some 40 influential citizens of 's-Hertogenbosch, and 7,000 'outer-members' from around Europe.

 

Sometime between 1479 and 1481, Bosch married Aleyt Goyaerts van den Meerveen, who was a few years his senior. The couple moved to the nearby town of Oirschot, where his wife had inherited a house and land from her wealthy family.[8]

An entry in the accounts of the Brotherhood of Our Lady records Bosch’s death in 1516. A funeral mass served in his memory was held in the church of Saint John on 9 August of that year.[9]

Art

Bosch produced several triptychs. Among his most famous is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This painting, for which the original title has not survived, depicts paradise with Adam and Eve and many wondrous animals on the left panel, the earthly delights with numerous nude figures and tremendous fruit and birds on the middle panel, and hell with depictions of fantastic punishments of the various types of sinners on the right panel. When the exterior panels are closed the viewer can see, painted in grisaille, God creating the Earth. These paintings—especially the Hell panel—are painted in a comparatively sketchy manner which contrasts with the traditional Flemish style of paintings, where the smooth surface—achieved by the application of multiple transparent glazes—conceals the brushwork. In this painting, and more powerfully in works such as his Temptation of St. Anthony, Bosch draws with his brush. Bosch also produced some of the first autonomous sketches in Northern Europe.

 

Bosch's paintings with their rough surfaces, so called impasto painting, differed from the tradition of the great Netherlandish painters of the end of the 15th, and beginning of the 16th centuries, who wished to hide the work done and so suggest their paintings as more nearly divine creations.[10]

 

Bosch never dated his paintings. But—unusual for the time—he seems to have signed several of them, although some signatures purporting to be his are certainly not. Fewer than 25 paintings remain today that can be attributed to him. In the late sixteenth-century, Philip II of Spain acquired many of Bosch's paintings, including some probably commissioned and collected by Spaniards active in Bosch's hometown; as a result, the Prado Museum in Madrid now owns The Adoration of the Magi,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the tabletop painting of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 the The Haywain Triptych and The Stone Operation.

Interpretations

In the twentieth century, when changing artistic tastes made artists like Bosch more palatable to the European imagination, it was sometimes argued that Bosch’s art was inspired by heretical points of view (e.g., the ideas of the Cathars and putative Adamites) as well as by obscure hermetic practices. Again, since Erasmus had been educated at one of the houses of 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 in 's-Hertogenbosch, and the town was religiously progressive, some writers have found it unsurprising that strong parallels exist between the caustic writing of Erasmus and the often bold painting of Bosch. "Although the Brethren remained loyal to the Pope, they still saw it as their duty to denounce the abuses and scandalous behaviour of many priests: the corruption which both Erasmus and Bosch satirised in their work".[11]

The Owl’s Nest. Pen and bistre on paper. 140 × 196 mm. Rotterdam,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Others, following a strain of Bosch-interpretation datable already to the sixteenth-century, continued to think his work was created merely to titillate and amuse, much like the "grotteschi" of the Italian Renaissance. While the art of the older masters was based in the physical world of everyday experience, Bosch confronts his viewer with, in the words of the art historian Walter Gibson, "a world of dreams [and] nightmares in which forms seem to flicker and change before our eyes". In one of the first known accounts of Bosch’s paintings, in 1560 the Spaniard Felipe de Guevara wrote that Bosch was regarded merely as "the inventor of monsters and chimeras".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the Dutch art historian Karel van Mander described Bosch’s work as comprising "wondrous and strange fantasies"; however, he concluded that the paintings are "often less pleasant than gruesome to look at".[12]

 

In recent decades, scholars[who?] have come to view Bosch's vision as less fantastic, and accepted that his art reflects the orthodox religious belief systems of his age.[citation needed] His depictions of sinful humanity and his conceptions of Heaven and Hell are now seen as consistent with those of late medieval didactic literature and sermons. Most writers attach a more profound significance to his paintings than had previously been supposed, and attempt to interpret it in terms of a late medieval morality.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Bosch’s art was created to teach specific moral and spiritual truths in the manner of other Northern Renaissance figures, such as the poet Robert Henryson, and that the images rendered have precise and premeditated significance. According to Dirk Bax, Bosch's paintings often represent visual translations of verbal metaphors and puns drawn from both biblical and folkloric sources.[13] Howeve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that his works still elicit raises profound questions about the nature of "ambiguity" in art of his period.

 

In recent years, art historians have added a further dimension again to the subject of ambiguity in Bosch’s work. They emphasized his ironic tendencies, which are fairly obvious, for example, in the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oth in the central panel (delights),[14] and the right panel (hell).[15] By adding irony to his morality arenas, Bosch offers the option of detachment, both from the real world and from the painted fantasy world. By doing so he could gain acceptance among both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viewers. Perhaps it was just this ambiguity that enabled the survival of a considerable part of this provocative work through five centuries of religious and political upheaval.

A recent study[16] on Bosch's paintings alleges that they actually conceal a strong nationalist consciousness, censuring the foreign imperial government of the Burgundian Netherlands, especially Maximilian Habsburg. By systematically superimposing images and concepts, the study asserts that Bosch also made his expiatory self-punishment, for he was accepting well-paid commissions from the Habsburgs and their deputies, and therefore betraying the memory of Charles the Bold.[17]

Debates on attribution

Bosch' signature spelling Jheronimǔs boſch from The Hermit Saints triptych

The exact number of Bosch's surviving works has been a subject of considerable debate. He signed only seven of his paintings, and there is uncertainty whether all the paintings once ascribed to him were actually from his hand. It is known that from the early sixteenth century onwards numerous copies and variations of his paintings began to circulate. In addition, his style was highly influential, and was widely imitated by his numerous followers.[18]

Over the years, scholars have attributed to him fewer and fewer of the works once thought to be his, and today only 25 are definitively attributed to him.

Works

Main articles: List of paintings by Hieronymus Bosch and Hieronymus Bosch drawings

 

 

* 출처: 영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