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97년 ~ 1543년)은 독일의 화가이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큰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능하여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동등하게 그려진 종교적인 기풍 등으로 인해 독일 최대의 화가로 일컫는다. 작품으로는 <헨리 8세>, <모레테 상>, <에라스무스>, <죽음의 무도>, <대사들> 등이 있다.
생애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화가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동명인 부친도 당시의 중요한 화가였고 아들인 홀바인도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배웠으며, 1515년 당시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바젤에 가서 그곳에서 화가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곳에서 1526년까지 머문 후에 약 2년간을 런던에 체재하였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1526∼1528). 이 제1차 런던 체재중에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있던 그는 재차 런던 행차를 결의, 일단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에 갔다가 1532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안주하여 1543년에 사망하였다. 그 동안의 1536년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에 임명된 적도 있다.
평가
홀바인은 유럽에 있어서 고금을 통하여 최대의 초상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뒤러와 크라나흐가 대표하는 독일 르네상스의 빛나는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그 정점에까지 끌어 올린 공적은 매우 크다. 모델에 대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과 정확하고 극명을 다한 세부 묘사, 명쾌한 화면 구성, 나아가서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이해력 등을 그의 특색으로 하는 홀바인의 예술은, 가령 <로트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와 <게오르크 초상>(1532년, 베를린 다름미술관)에 그 진가를 찾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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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 II세 [대사들] 1533년 패널에 유채 ㅣ 207×209.5cm ㅣ 런던 내셔널 갤러리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GNC media, Seoul 런던 내셔널 갤러리 지엔씨미디어
홀바인의 [대사들](1532)은 두말할 것 없는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걸작중 하나다. 홀바인은 이 그림을 두 번째 영국 체류(1532) 시기 초반에 완성했다. 야심찬 화가였던 그는 영국에서 한자동맹 상인들, 궁정인들, 영주들, 상류층 방문자들을 위한 그림을 제작하는 생산력이 왕성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대사들]은 [에라스무스 초상화]와 [헨리 8세의 초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그의 명성높은 작업인 동시에 바로크 정신의 만개한 개가이자 성취(tour de for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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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들]의 주인공인 두 인물은 각각 라보르의 주교였던 조르주 드 셀브(de Selve)와 프랑스의 프랑소와 I세의 외교사절이었던 장 당트비으(Danteville)로 밝혀져 있다. 둘다 영국 국교회의 가톨릭 교회로부터의 탈퇴와 관련 프랑스 왕이 위탁한 외교 업무를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름을 밝혀낸 것은 마리 에르브와의 공헌이다. 1890년대에 시드니 콜빈 경은 최초로 왼편 인물이 폴리씨의 영주이자 헨리 8세에게 외교사절이었던 장 당트비으일 것이라고 제안했고 이후로 이같은 해석이 정설로 인정되었다.
한스 홀바인(홀바인 II세)은 본래 아우구스부르그 출생이며 젊은 시절 당시 독일 문화의 주요한 장소 중 하나였던 바젤에서 활동했다. 한스는 화가 집안 태생으로 형 또한 화가였으며 재능이 남다른 아우였다. 한스는 젊은 나이에 바젤에서 화가이자 판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종교개혁기 성상파괴 운동 때문에 독일을 떠난 그는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인문학자였던 에라스무스의 추천으로 영국에 정착 궁정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홀바인은 북구 전통의 유산과 재능을 고루 계승한 뛰어난 초상화가이다. 그는 인물의 지위와 개인성을 묘파하는 정확한 데생과 세부묘사에 능력을 발휘했다. 치밀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의 능력에서는 반 에이크를 비롯 프랑스 프랑스와 I세의 궁정화가 장 클루에(Clouet)와의 영향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클루에와 마찬가지로 그는 인물들의 표정과 성격 뿐 아니라 머리모양과 장식, 의복의 질감, 주름, 보석이라든지 장식 끈에 떨어지는 빛의 반짝임까지도 대단히 정교하게 표현했고 인물들 주위에 놓여진 정물의 묘사를 통해 신분과 직업 내면까지도 암시했다. 주교 드 셀브 팔꿈치 아래 있는 라틴어로 쓴 책에 쓰인 글로 미루어 드 셀브의 나이는 25세이며 대사가 들고 있는 단검에 새겨져 있는 숫자 29로 추정하여 당트비으의 나이를 29세로 추정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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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영광, 세속세계의 모든 영화와 지식
드 셀브와 드 당트비으 두 사람은 화면 중심의 온갖 과학 도구를 올려놓은 선반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화면 양편에 서서 관람자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같은 배치는 다른 초상화들과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구성인데, 과학도구를 비롯한 사물들이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림 주문은 왼편에 위치한 당트비으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 영국으로 파견된 공식 프랑스 대사였다. 오른편에 있는 성직자 옷차림의 조르주 셀브 역시 임무는 정보 수집과 관련된 은밀한 형태의 외교 활동이었다. 두 사람의 옷차림은 세속과 성직을 나타낸 것처럼 대조적이지만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다. 두 남자는 십자가상이 걸린 어두운 커튼을 배경으로 ‘과학’을 나타내는 정물들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인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대칭 형태로 정물적 요소를 강조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주문자의 요구이거나, 혹은 아마도 홀바인이 인물들의 외양만큼이나(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의 내면, 학식, 기질을 나타내는 사물의 상징적 의미 또한 중시했음을 나타낸다. 인물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내는데 있어 정물적 요소의 활용은 북구 미술의 특색이다. 이들이 팔꿈치를 올려놓고 있는 가구는 ‘골동품 선반(에따제레 étagère)’이라 불리우며 그 위에는 온갖 과학 도구들이 즐비하다. 이는 이 두 사람이 당시로서는 최신의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탐구하는 지식인었음을 말해준다. | |
[대사들] 세부 – 과학도구들 |
[대사들] 세부 – 지구본과 류트 |
당시의 최신 과학도구들 특히 나침반, 천구의와 해시계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과 무관치 않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부터 우주를 해명하는 구조를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개인적 사건인 이혼문제가 시발점이 되긴 했으나,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분리를 시도했던 헨리 8세 역시 세속 세계에서 이같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골동품 선반 위에는 별의 운행을 나타내는 천구의와 나침반이 놓여 있다. 아래편에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지구본이 놓여 있는데, 이것은 천구의와 하나의 축으로서 연결되어 그림의 구성상의 수직적 축을 형성한다. 이것은 지상적 세계에 대한 천상의 혹은 별 영역의 영향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지구본의 극지점에 뾰족한 나무 손잡이가 달린 것은 관찰자가 이 손잡이를 잡고 지구의를 들어올려 살펴볼 수 있게 함이었다. 홀바인은 위도와 경도를 따라 몇몇 대륙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유럽 대륙은 특별히 밝게 채색되어 강조되고 있고, 그 아래에 아프리카가 보이며 아메리카는 불명확하게 그려졌다. 당시로서는 정확한 지식이 결여되었던 까닭이다. 유럽 지도는 드 당트비으의 영지의 성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류트는 현악기로서 일반적으로 화합과 조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당시 고조되던 신구교간 그리고 로마 교황청과 영국 국교회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렇게 볼 경우 펼쳐져 있는 찬송가책은 갈등이 사라진 통합된 교회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유한 속의 끝없이 무한한 세계: 노부스 오르비스 레지오눔
홀바인은 [대사들]을 제작하기 한 해 전에 [새로운 세계전도 Novus Orbis Regionum](1532)를 목판화로 제작했는데, [대사들]의 지구본과 마찬가지로 당시 알려진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 전도에는 세계의 가장자리로 간주되는 지역에는 식인종 삽화가 들어있으며 바다에는 세이렌과 같은 바다 님프들이 노닐고 있다. 이 지도는 대사들의 지구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정확한 지리적 묘사를 제시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뮐러는 해골과 함께 홀바인의 지구의가 또다른 ‘불가능’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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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바인 [새로운 세계전도Novus Orbis Regionum] 15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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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가능이란 다음과 같다. 구(球)인 지구의 표면에서는 평면을 따라 아무리 이동하더라도 ‘세계의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즉, 천구 뿐 아니라 지구의의 둥근 표면 묘사는 무한한 평면에 대한 표상이다. 동쪽으로 항해를 한다면 옛 사람들 생각처럼 낭떠러지와 인어와 식인종이 있는 ‘세계의 끝’이 아닌 단지 서쪽에 닿을 뿐이며, 이 경우 정착지 끝은 단지 또다른 시작일 뿐이다. 이같은 무한한 평면적 여정에 대한 인식은 시지각의 한계에도 적용되어 자연적 지각(혹은 과거의 우주론적 가설)의 한계를 드러냈다. [대사들]에는 세계의 모든 사건은 비가시적인 자연적 섭리의 결과이며, 천구의가 나타내는 것처럼 낮 동안의 태양경로에 따라 자연적 인식 자체가 변화한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당대의 자연과학적 인식을 십분 활용할 뿐 아니라 직물 혹은 거의 정밀한 금속 세공을 방불케하는 궁정 취향의 정확한 묘사는 홀바인의 특기였다. 사실상 이같은 치밀함의 시각은 자연적 지각이 아니다. 통상의 자연적 지각에서는 언제나 대상의 한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고 나머지는 다소 흐릿하면서도 거리는 살짝 휘어져 만곡되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인간의 눈은 근경 혹은 코 앞만 바라보기에 이같은 왜곡의 정도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보려 시도할 경우 이같은 자연적 지각의 문제점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사실상 홀바인의 묘사는 자연적 지각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상이라기 보다는 기계와 같은 정밀한 지각으로 바라 본 세계이다. 이같은 치밀한 묘사는 멀리 중세까지 그 연원을 갖는 북구 미술의 한 특성이기도 했다.
녹색빛 도는 커텐 뒤 왼편 모서리 부분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상이 보인다. 수난의 정점인 이 예수상은 이 작품에 내재된 바니타스(Vanitas)적인 차원을 한단계 고양시킨다. 대사들이라는 이들의 높은 지위와 그들이 지닌 지상의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으며 해골이 암시하는 것처럼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바니타스 정신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축약된다. 이것은 성서에서 언급되는 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로 칭송되었던 솔로몬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 vanitas vanitatum ...’기에, 죽음을 마주보고 지상의 삶으로부터 천국을 예비하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정신이다. 비스듬히 보았을 때에만 그 형상이 정립되는 해골은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는 죽음처럼, 알아보기 힘든- 바게뜨빵 혹은 오징어뼈처럼 보인다 - 형태로 이미 화면 안에 들어와 있다. 홀바인이 중세적 주제인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은 그의 마카브르 춤을 묘사한 목판화에서도 드러난다.
거울 안의 아나모르포시스 혹은 아나모르포시스적 거울
[대사들]은 바니타스적 의미뿐 아니라 왜상적 형상을 사용한 예로서 푸코 이후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는 왜상이라고도 번역되며 르네상스 시기부터 제작,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고 18세기까지도 빈번히 만들어졌다. 아나모르포시스 그림에서 그리스어 ‘아나 ana’는 ‘다시 again’ 모르프 morphe는 ‘형상 shape’이라는 뜻이다. 왜상 그림에서 관람자는 그 자신의 위치라든지 동작 시선에 의해 상의 정립, 요컨대 그림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게 된다. 관람자는 처음에 이것을 혼돈스러운 얼룩으로 지각하지만 관점을 바꾸거나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여 볼 경우 혼돈 속에 의미없는 얼룩에 지나지 않거나 전도된 형태로 그려졌던 알 수 없는 상들은 의미를 가진 형상으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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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들] 세부 – 화면 중앙의 해골 왜상 |
해골 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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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에 대한 실험과 함께 게르만어권의 지역에서 지적 놀이를 목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던 아나모르픽 실린더(원통) 형 그림들은 원반 모양으로 마치 물 위에 떨어진 회오리치는 기름 얼룩처럼 혼돈스럽게 펼쳐져 있다. 이런 그림들은 정상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그 자체로는 일종의 의미없는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 혹은 거울처럼 반사하는 은박지와 같은 원주를 빈 중심의 중앙부에 세울 경우 상들이 중심주의 곡면에 모이며 반영되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 생겨나는 원리로 되어 있다. 거울 안에 - 요컨대 다른 차원의 타자적 세계에 - 일종의 일루전으로서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생겨나는 것이다.
홀바인의 [대사들]에서의 길다란 바게뜨 빵 모양 혹은 오징어뼈 모양의 해골은 실제 이 그림이 걸렸던 장소를 고려한 것으로 층계에서 내려오며 비스듬한 각도로 바라볼 때 이 길다란 이상한 형상은 단축되어 보이며 동그랗게 해골로 정립되어 현재 안에 이미 진입해 있는 ‘죽음’이라는 메멘토 모리의 바니타스적 의미를 드러낸다. 죽음은 현재 안에 이미 깃들어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해골 왜상은 지상의 모든 학식과 지위를 갖춘 두 사람의 세계의 일관성을 와해시키는 불가해하며 불가능한 요소이기도 하다. | |
왜상과 원근법에 관심을 둔 화가들
왜상 연구를 시도한 것은 홀바인만은 아니었다. 알려진 왜상 작업 기록중 가장 오래된 것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Codex Atlanticus](약 1485-1499, 비블리오테카 암브로시아나, 밀라노)에서 발견된다. 레오나르도는 이 저작에서 루이 12세를 동반하고 밀라노를 방문했던 프랑스 화가 장 페렐의 체류와 그의 작업을 또한 언급하는데 홀바인은 이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이런 연구들은 마치 현대의 3D작업처럼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그리드의 틀을 이용하여 진행되었다. 상의 왜상적 변형은 그리드를 통과한 상이 거울 혹은 벽면에 투사된 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금술에 열중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요절한 마니에리즘 화가 파르미지아니노 역시 왜상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체 비례를 무시한 길게 늘여진 왜곡된 인체가 적용된 [파르미지아니노의 성모]라든지, 괴물처럼 늘어진 손이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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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의 선원근법 연구 |
장 프랑수아 니세롱 [상의 펼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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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원근법은 선원근법만이 알려져 있지만 원근법은 선원근법만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화가들은 또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퍼스펙티브를 연구했고 이같은 화가들 대부분은 왜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뒤러는 왜상적 현상을 인쇄술의 활자와 관련하여 논한다. 만테냐와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 다니엘레 바르바로(Daniele Barbaro), 파올로 지오반니 로마쪼(Paolo Giovanni Lomazzo), 에냐찌오 단티(Egnazio Danti), 귀도발도 델 몬테(Guidobaldo del Monte), 사무엘 마로르와(Samuel Marolois) 등이 퍼스펙티브 문제에 전문적 관심을 가졌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원근법 원리에 관한 책에는 왜상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
에르하르트 쇤 [변신적 형상 풍경화] 1535년경 |
에르하르트 쇤 [왕들의 초상] 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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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바인과 유사한 시기에 활동했던 뒤러 문하에서 공부했던 에르하르트 쇤(Erardt Shöen)은 이와 같은 원리를 사용하여 왜상적 목판화를 제작한 대표적 화가이다. 뒤러의 제자이자 독일의 목판화가였던 쇤은 뒤러의 일련의 작업처럼 대단히 정교한 목판화를 작업했다. 쇤의 아나모르포시스 작업에서 마치 카오스의 지평을 열어젖히는듯 바로크 바이올린의 선율과도 같은 곡선적 평행선들로 이루어진 들판 모양은 옆으로 일정 각도에서 축도해 바라보았을 때 인물의 두상으로 정립된다. 쇤이 제작한 초상화적 작업이 풍경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들뢰즈가 말한 얼굴성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준다. 쇤의 왜상적 작업은 테마에 있어서나 기법에 있어서나 대단히 전형적인 무엇을 보여준다. | |
눈속임 그림과 어려운 것에 대한 취향
바로크 시대에는 장엄하고 장려하고 화려한 것 외에도 이상하고 기이하며 기계장치를 이용한 것과 극소수의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어려운 것’에 대한 취향이 존재했다(이와 유사한 현상으로 현대의 어떤 이론가들은 현학화된 대중문화 혹은 난이도 높은 게임 역시 어려운 것에 대한 취향을 반영한다고 본다). 기계장치를 이용한 절묘한 무대 효과라던지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시라든지 운문의 까다로운 해석에 대한 선호 역시 어려운 것에 대한 취향의 결과이다. 아나모르포시스 또한 어려운 것에 대한 취향에 들어간다.
눈속임 그림 ‘트롱프 뢰이으 Tromp l'oeil’를 그리는 반 호흐스트라텐과 같은 화가들은 이같은 현상에 관심을 가져 오늘날의 3D 그래픽 원리의 구현인 ‘퍼스펙티브 상자’와 같은 작업에 응용하였다. 퍼스펙티브 상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즉 지정된 관람자 위치에서 구멍을 통해 상자 안을 들여다보게 만들어 펼쳐진 그림들이 적당한 길이의 거리 단축에 의해 정립되도록 만들어 마치 연극 무대를 실제로 관람하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낸다. 이차원적 평면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보다 생생하게 그림이 입체적으로 시각장에 잡혀 마치 실물을 보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기획이었다. | |
원근법에 의한 입체적 효과가 살아있는 안드레아 델 포초의 천정화.
왜상과 궁정적 사랑의 알레고리: 휘어지고 뒤틀린 공간에 대한 관심
홀바인의 [대사들]을 계기로 뒤틀린 공간이라든지 왜상의 위상학에 대해 관심을 보인 현대의 철학자로 라캉과 지젝이 있다. [대사들]을 논함에 있어 이들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캉은 그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구축에 있어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시선을 되돌리는 응시 구조를 설명하면서 [대사들]을 이용해 설명의 틀을 만들었다. 라캉주의 학파의 연구자들은 [대사들]에 나타난 왜상을 대상을 범접할 수 없는 사물의 지위, 즉 숭고한 사물의 지위로 승화하여 언제까지나 닿을 수 없이 연모하는 '궁정풍 사랑'의 전통과 관련시켜 논한다. 자크 알랭 밀레는 [정신분석학의 윤리]에서 이같은 구조를 불가능성이 하나의 조건이 되어 사랑의 가능성 자체를 영원히 지속시키는 구조로서 왜상을 궁정적 사랑(courtly love)의 알레고리에 견주어 언급하기도 했다. 궁정적 사랑은 마치 오늘날 젊은이들의 ‘소울 메이트’에 대한 담화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도 위상학적으로 꼬인 뫼비우스 띠처럼 꼬인 같은 평면선상에 있는 것과 같고 마치 만나지 않는 평행선의 공리와 같이 끝없이 지속되는 숭고한 사랑이자 대상으로부터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는 이지적 사랑이다.
왜상이 드러내는 이러한 시선을 되돌리는 사랑의 구조는 각각의 개인에 있어 삶의 핵심, 삶 자체가 그 주위를 우회하며 형성되는 공백, 기존의 재현체계에서는 표상불가능한 실재가 언뜻 드러나 일견되는 것과 닮았다. 라캉주의 입장에서 이같은 표상불능한 실재는 하나의 일관된 의미세계 내에서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정립된 형태로서 등장할 수가 없다. 일관된 체계 혹은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고서 그것은 등장할 수 없거나 그 체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에 그러한 공백 요소는 주어진 체계나 프레임 안에서는 다만 의미없는 얼룩일 뿐이다. 그것은 그 의미체계에 구멍을 내거나 혹은 왜상 혹은 흠결을 만드는 얼룩으로서만 등장한다. | |
파르미자니노 [자화상] c.1524 패널에 유채, 지름 24.4cm, 빈 미술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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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호흐스트라텐 [퍼스펙티브 상자: 네덜란드 주택의 실내] 1660년 |
이 얼룩은 개인이 삶 가운데 경험불능한 것으로서 죽음의 자리, 혹은 영화라면 화면 바깥으로 반드시 빠져나와 있어야만 하는 카메라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구조화하는 가능조건인 이같은 카메라의 위치란 반드시 주어진 퍼스펙티브 바깥에 위치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나자신이 바라보는 나, 다분히 상상적인)와 타인이 보는 내가 같지 않듯이, 여기엔 이율배반적 최소 차이가 있다. 욕망이 욕구하는 대상인 타자의 시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라는 불가능한 가상의 위치와 내 자신이 생각하는 상상적 나의 위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언제나 근소할 망정 빈틈 내지 차이를 지닌다. 때로는 그 최소 차이는 휘어진 곡면에 새겨지며 일정한 시점과 거리를 전제할 때에만 형상으로 정립되는 왜상과도 같은 모습으로, 혹은 내 의미체계에서 불가해한 것이자 지칭할 수 없는 요소인 얼룩으로 나타난다.
그 혹은 그녀를 사랑할 때 나는 얼룩이 되버린다
[대사들]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 두 대사들이 매우 닮은 일종의 거울상 분신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대사들은 그들의 외교적 임무뿐 아니라 외양마저 매우 닮아 있으나 외교사절인 드 당테비으는 화려한 세속적 옷차림으로 두드러진 반면 유사한 다른 하나인 드 셀브는 어둡고 수수한 주교복 차림으로 두드러지지않는 두 중심을 만들어낸다. [대사들]에 대해 아무 사전 지식을 갖지 않은 관람자가 이들을 볼 경우 이들이 마치 거울상처럼 닮아있다는 것은 관람자 편에 또하나의 의미의 실마리가 될 법하다.
비단 외모뿐 아니라 학식과 취향에 있어 닮은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물고 진기한 일이며 이들 또한 그렇게 느꼈기에 오늘날 우리가 기념 사진을 찍어두듯 초상화를 주문했을 법하다. 마치 우정을 기념하는 것처럼 한 평면에 나란히 그려져 있으나 외교 업무를 마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을 경우 이들은 마치 뫼비우스 띠의 반대편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상으로 대단히 먼 위치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예컨대 이들의 만남은 현대로 치면 어떤 불가능한 인터페이스 상황의 우발적인 일어남에 견줄 수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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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정은 / 미술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및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책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 있다.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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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소 한스 홀바인
아티스트 |
소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le Jeune) 국적 독일 출생-사망 1497~1543 |
제작연도 |
1539 ~ 1
헨리 8세출처: © Zenodot Verlagsgesellschaft mbH이미지갤러리 540 |
사조 |
르네상스 |
종류 |
유화 |
기법 |
목판에 템페라 |
크기 |
75 Ⅹ 88.2 cm |
소장처 |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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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1540년경 제작된 소(小)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 ~ 1543)의 <헨리 8세(Henry VIII)>는 그가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를 그린 초상화 중 가장 이상적으로 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역대 영국 왕의 초상화중 수작으로 꼽힌다. 이 초상화는 모사본으로, 원본은 1536년에서 1537년 사이 런던 화이트홀(Whitehall) 궁전의 벽화로 제작되었으나 169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홀바인이 헨리 8세의 초상화 작업에 착수하기 전 그린 예비작을 비롯하여 당대 많은 모사본이 전해진다. 홀바인은 본래 독일 출신으로 1536년 영국 국왕의 초상화가로 임명된다. 홀바인은 기념비적으로 인물의 모습을 우상화하는데 출중하였다. 그는 정확한 관찰력과 고도의 리얼리즘으로 면밀하게 인물을 작품화하였고, 홀바인이 제작한 헨리 8세의 초상화는 이후의 헨리 8세 초상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초상화는 헨리 8세가 등극할 당시 몰수한 화이트홀 궁전 내 그만의 사적인 방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조형적 특징 이 초상화는 일반적인 유럽 군주의 초상화와는 다르다. 왕관이나 긴 칼, 지휘봉과 같이 일반적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소품 없이도 위압적인 포즈로 위엄을 드러낸다.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 있으며, 직접적으로 관람자와 대면하고 있다. 헨리 8세 안면의 가장자리는 똑바르게 수직으로 그려진 반면 그의 어깨는 초상화 전체를 가로지르며 수평을 이루었고, 왕의 상반신을 전체적으로 사각형이 되도록 만들었다. 얼굴과 어깨의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직각 외부의 배경은 군청색으로 칠했다. 또한 오른쪽으로 흘러내린 모자와 귀, 눈, 배경에 새겨진 글씨들과 가슴의 장식은 평행하는 새로운 수평을 이루어 형식상 전체적으로 안정된 조화로움을 이루고 있다. 초상화 속 헨리 8세는 다리는 넓게 벌리고 손은 허리춤으로 들어 전사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이마는 마치 조여진 듯 모자가 정확하게 들어맞아 있다. 한 손에 장갑을 쥐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찬 화려한 단검에 닿아있다. 그의 옷은 린넨, 모피, 자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박을 이용하여 부를 강조하였다. 검정 실로 놓아진 자수 무늬와 보석이 박힌 큰 반지, 가슴에 늘어뜨린 목걸이는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당대 유럽 남자들이 착용했던 바지 앞 샅주머니인 코드피스(codpiece)와 커다란 어깨장식은 그의 남성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기존의 평평하고 밋밋한 군주의 형상을 벗어난 그의 체구는 실감나는 부피감을 보인다. 안면의 피부 또한 양감과 질감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미술사적 의의 이 초상화는 헨리 8세의 왕권을 더욱 드높일 수 있도록 고안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해석된다. 고의적으로 헨리 8세의 모습을 더욱 눈길을 끌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헨리 8세의 갑옷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실제로 그의 다리는 작품 속 모습보다 더 짧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가 당시 틸티야드(tiltyard)로 인해 부상당한 것을 비롯하여 건강상에 문제가 많았었고, 40대였던 것에 반해 초상화는 매우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헨리 8세는 홀바인이 제작한 초상화의 정치적, 예술적 힘을 인식하고, 다른 화가들에게 이를 다양한 버전으로 모사하여 나라 전역에 퍼뜨리도록 하였으며, 그의 동료, 대사들에게 선물로 증정하였다. 이는 초상화이자 헨리 8세의 분신(substitute effigy) 그 자체로, 자국민에 대한 권력 공표이자 외교적 사명을 띤 것이었다. 많은 귀족들은 헨리 8세에게 그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모사본을 주문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사본이 다수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 초상화는 원본이 소실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어 오랫동안 헨리 8세의 공적 페르소나를 상징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8세(Henry VIII)> 또한 이 초상화를 통해 헨리 8세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것이다.
- 감수
- 유정아/서울대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00년대 미술사』(세미콜론, 2007) 공역했으며, 서양미술사를 강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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