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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 '동방박사의 경배' '비너스의 탄생''봄'

Bawoo 2014. 9. 16. 23:04

▲ 〈도판〉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나무판에 템페라, 111×134㎝, 1475~76,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예술의 꽃을 피운 메디치가의 세 사람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의 왕이자 박사였던 세 사람이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새로 나신 아기예수에게 황금과 유황,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예배했다는 마태복음 제2장의 장면을 담고 있다. 사실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주제는 서양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즐겨 다뤄진 인기 주제였다. 겉으로는 이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린 다른 그림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 그려진 세 명의 동방박사의 얼굴은 실제 메디치 가문사람들의 초상이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백발의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원로인 코시모, 붉은 망토를 걸친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첫째 아들인 피에로, 그 옆의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동방박사는 코지모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이다. 이외에도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반니 옆의 검정 옷을 입고 서있는 남자는 조반니의 아들인 줄리아노이다. 지금 이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공화국 토스카나의 초대 대공이 된 코시모 데 메디치 1세의 청사사무실로 쓰였던 메디치가의 궁전이다. 1584년에 완성된 이 우피치 미술관에는 메디치 가문이 약 200년간에 걸쳐 주문 제작하고 수집한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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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너스의 탄생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미의 여신인 비너스의 탄생 신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지중해의 깨끗한 물거품에서 태어난 나체의 여신이 바람의 신에게 부드럽게 밀려져 옷을 들고 있는 요정이 기다리는 해안까지 다다른 장면이다.

 

화면 오른쪽에서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벌거벗은 비너스에게 겉옷을 건네주고 있으며, 왼쪽에서는 비너스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제피로스가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다. 바다의 요정인 크리로스의 양팔이 이 바람둥이 제피로스의 허리를 감아쥔 채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포옹하고 있는 자세로 보인다.


주변에는 장미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수줍어 하고 있는 비너스의 신체는 10등신이며, 모델은 당시 피렌체의 최고 미인이었던 시모네타로 전해져 오고 있다.

 

제작년도 : 1485 ~ 1490년
원작 사이즈 : 175.5 ×278.5cm
소장처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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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판에 템페라/ 203*314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1482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세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봄은 섬세하고 매끄러운 선과 가벼운 느낌의 옷, 여리고 서정적인 선율과 같이 보티첼리의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베누스(비너스)와 에로스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퓌로스클로리스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케뤼케이온를 든 메르쿠리우스가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플로라카리테스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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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스폰서, 르네상스와 메디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꽃의 도시, 피렌체(Firenze)는 그 이름이 이야기하듯 르네상스를 꽃 피운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유럽 상공업과 금융업의 중심지였던 도시 공화국 피렌체는 14세기 무렵 문화의 중심지로도 발돋움하게 된다. 피렌체 번영의 중심에는 금융가문으로 유명한 메디치(Medici)라는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가는 학문을 장려하고 예술 보호활동을 벌여 나갔다. 종교적인 주제의 미술작품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데 많은 돈을 기부하고 가문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수많은 예술가들을 고용했다. 당시 피렌체의 부요한 상인들과 금융가들 대부분이 이런 활동을 했지만, 피렌체 최고 부자였던 메디치가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아버지'로 불리는 코시모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부터,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광범위한 분야의 학문과 문화예술을 후원했다. 당시 사람들이 "피렌체에 만약 독재자가 필요하다면 메디치가보다 더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정계와 재계는 물론 문화예술계를 선도했다. 또 네 명의 교황을 배출해 종교계까지 장악했다. 화가 미켈란젤로는 15세에 역사상 최고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이 운영한 조각학교에서 실력을 인정 받아 메디치가의 양아들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테 7세는 미켈란젤로에게 가문의 묘당인 메디치 예배당(Cappelle Medicee, 1520∼1534년)을 장식하는 일을 맡겼다. 이 예배당에는 메디치가의 인물들의 초상조각이 있어 300년에 걸친 메디치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본명은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5 피렌체~ 1510. 5. 17 피렌체.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

개요

그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1485경)·〈봄 Primavera〉(1477~78)은 현대인에게 르네상스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해 보여주는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피렌체의 모든 주요교회들과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이름은 일 보티첼로(맥주통)라고 불리는 전당포 주인인 형 조반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초기의 발전

보티첼리에 관한 믿을 만한 전기적 자료는 많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58년 당시 13세가 다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에 관한 전기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보티첼리는 처음에는 금세공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후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 밑에서 공부한 것은 확실하다. 초기 대부분의 작품들은 리피나 그의 유파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다. 보티첼리는 리피에게서 피렌체 회화의 위대한 혁신자인 마사초의 웅장한 양식에 친밀감을 첨가한 그림을 배웠다. 그가 배운 양식은 마사초의 명암 처리법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마사초와 달리 세부묘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으며 보다 부드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초기 그림에서는 동시대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색인 : 고딕 예술).

1470년 이전에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그해 아르테디메르칸치아 회관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 Fortitude〉을 그렸고 1474년 1월 무렵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St. Sebastian〉를 완성했다. 1470년대초부터 보티첼리의 그림은 부드러운 명암을 이용하여 형태를 완전히 3차원적 개념에 맞추어 표현하는 양식에서, 밝고 고르게 빛을 받은 형태를 흐르는 듯 율동적인 선으로 윤곽지은 평부조 같은 표현양식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이러한 후자의 초기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활동의 전성기

'봄의 비유'(Allegory of Spring)라고도 불리는 〈봄〉(1477경)은 보티첼리의 다음 발전단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비너스의 탄생〉(1485경)은 그 절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그림은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별장을 위하여 그린 것이지만, 지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선명한 색채와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특징인 14세기 후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이 〈봄〉에 크게 나타나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표현이 더욱 부드러워졌고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불굴의 정신〉·〈봄〉·〈비너스의 탄생〉은 가장 잘 알려지고 유명한 보티첼리의 작품으로서, 그의 미술을 평가할 때 16세기의 바사리가 묘사한 '우아함'이나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 이후 20세기의 미술사가들이 말한 '선의 율동' 등 항상 거론되는 그의 대표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1481년 여름부터 1482년 봄까지 머물며 교황의 초상화 몇 점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면에 대형 프레스코 3점을 그렸는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시뇨렐리, 핀투리키오, 피에트로 디 코시모 등의 유명한 화가들도 이 일에 함께 참여했다. 〈코라의 처벌 Punishment of Korah〉을 비롯한 이 작품들에는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로마 양식에 대한 핀투리키오 식의 현학적 표현이 자연주의 및 그 웅장함과 함께 융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1482년 10월경 페루지노 및 기를란다요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갔다. 1483년 자노초 푸치와 루크레치아 비니의 결혼에 쓰일 2개의 결혼 예물함(카소니)을 위한 4점의 그림을 설계·감독했다. 비슷한 시기에 볼테라 근처에 있는 로렌초의 빌라 델라 스파달레토에 페루지노와 기를란다요 및 리피와 함께 중요한 프레스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외에도 그는 1480년대에 피렌체의 예배당과 교회에 많은 프레스코와 그림들을 남겼다. 1491년 보티첼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다. 1494년에는 그의 형 시모네와 함께 산프레디아노의 입구에 집과 약간의 땅을 샀다. 1496년 여름 산프레디아노 근처에 있는 산타마리아디몬티첼리 수도원에서 〈성 프란키스쿠스 St. Francis〉를 그렸고, 1497년에는 몇 명의 조수들과 함께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별장에 그림을 그렸다. 1498년에는 피렌체에서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근처에서 살았으며, 그 다음해에 '아르테 데이 메디치 에 델리 스페치알리'에 들어갔다.

후기 양식 및 말년

보티첼리의 후기 양식, 즉 1490~1510년의 작품은 그 성격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참고자료가 되는 작품 제작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후기 양식의 발전 과정을 밝히기도 어렵다. 1490년대 초기에 보티첼리는 그 규모와 개념에 있어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매우 가까운 웅장한 그림들을 그렸다. 틀에 박힌 감상적인 주제를 정성들여 각색한 보티첼리의 연작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지만, 다 빈치가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의 경계를 부드럽게 스푸마토식으로 처리한 데 반해, 그는 그러한 기법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특히 이런 점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은 2점의 〈피에타 Pietà〉인데, 하나는 뮌헨(알테 피나코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밀라노(폴디 페촐리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들에서 보티첼리가 사용한 색채와 빛의 효과, 양감의 처리, 평부조 양식 등은 〈도니 마돈나 Doni Madonna〉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다 빈치의 양식보다는 미켈란젤로의 초기 양식에 훨씬 더 가깝다. 〈요한의 묵시록〉의 예언을 묘사하고 있는 수작 〈신비한 탄생 Mystic Nativity〉은 보티첼리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규모는 작지만 이전보다 풍부하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붓놀림은 유연해지고 형태는 더욱 단순화되었다. 공간은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색채와 함께 북유럽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심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1501년으로 연대가 적혀 있는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예언적 신학이론에 몰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인용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형의 일기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점과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신봉자였다는 바사리의 진술을 근거로 강력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플랑드르의 화가인 휘고 반 데르 구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 Portinari Altarpiece〉와 도상학적인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는 성모를 일종의 예언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를 본받아 신비한 양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견해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관례적인 길을 따르는 성공적인 생애를 보냈으며 강력한 후원자들을 통해 재정적으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적 불안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는 것은 보티첼리가 자신의 돈에 무관심했다는 바사리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피렌체의 모든 중요한 교회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으며, 마침내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에 불려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에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행정중심지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와 메디치가의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 있다. 그의 주요후원자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였으며, 위에서 말한 작품들 외에도 후원자를 위해 단테의 〈신곡 Divina commedia〉에 붙인 뛰어난 삽화 연작들을 남겼다.

'장엄 양식'을 이루어나갈 무렵인 1490년대 중반, 보티첼리는 1495년경의 〈아펠레스의 명예훼손 The Calumny of Apelles〉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가장 말기 작품으로 알려진 성 제노비우스의 생애를 다룬 연작물까지를 모두 다시 손보았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북유럽의 양식과 그가 젊었을 때 배운 화가들의 전통에 따라 의식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 눈에 띈다. 그는 해부학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표현적·장식적으로 형태를 왜곡하여 묘사했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또한 무지개 색조에 기초를 둔 보다 선명한 색조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성 제노비우스 연작에 나타난 특징은 이전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위에서 약술한 양식상의 특징들을 기본으로 하되 크게 수정을 가한 일련의 환상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배경은 건축가인 루치아노 라우라나가 사용한 초기의 건축적 원근법의 명료함을 떠올리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완전히 추상적이고 비자연적인 색채는 15세기초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과 비슷하다. 보티첼리는 목판에 그린 이 그림에 매우 단순하며 정감있는 인물들을 가득 그려넣었다. 1502년 11월 보티첼리는 남색(男色) 행위로 고발되었지만 결국은 혐의를 벗었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David〉를 놓을 곳을 결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속한 종교단체인 '콤파냐 디 산 루카'에 낼 회비가 밀려 있었다(1503~05)는 사실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보티첼리는 1510년에 죽었으며 피렌체의 오니산티 교회에 묻혔다.

 


* 자료출처:책 '금융의 지배' 51쪽 '메디치가 이야기" / 그림 및 해설-블로그 '고병식 언어 논술,위키백과, 오픈지식,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