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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z Peter Schubert - String Quartet 전곡 *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은 16곡이 전하는데(구 전집에는 15곡인데 후에 1곡이 추가됨), 실제로 그가 몇 곡의 현악 4중주곡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짧은 생애에 많은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한 것은 그의 가정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린 시절 슈베르트는 국립신학교에 들어갔는데, 휴가 기간에 집으로 돌아와 있을 때에는 아버지가 첼로를(매번 틀려서 슈베르트에게 놀림 당하곤 했다), 두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가 바이올린을, 자신이 비올라를 맡아 현악 4중주를 연주하였다. 이런 환경이니 그가 많은 현악 4중주 작품을 작곡한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1810년(13세)부터 1813년까지 작곡한 제1기 8곡의 현악 4중주는 집에서 줄기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1814년부터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든다(제2기). 고전적인 절제와 낭만적인 표출과의 융합이 점차 자연스러워졌고 1916년에 작곡한 11번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동안 슈베르트는 현악 4중주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다 드디어 4년 후인 1820년 12번 ‘콰르테트자츠’(Quartettsatz, Quartett는 ‘4중주’, satz는 ‘악장’, 그러니까 4중주를 위한 하나의 악장이라는 뜻)를 내놓는다. 비록 한 악장만 작곡된 미완성이지만 이전의 작품들과는 매우 다른 틀에 격정적인 감정과 풍부한 서정성을 담아냄으로써 제3기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또다시 4년 후인 1824년에 슈베르트는 13번 ‘로자문데’와 14번 ‘죽음과 소녀’ 두 대작을 완성한다. 이 두 작품에서는 관현악적인 서법이 사용된 점이 특징적인데, 슈베르트 자신 이 두 작품을 ‘교향곡으로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작곡했던 것이다. 이어 1826년에 작곡한 마지막 현악 4중주곡 15번은 대규모 스케일과 대담한 표현법으로 이미 전통적인 실내악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교향곡으로 가는 길’로 생각하고 작곡한 13번 ‘로자문데’ 후기 3대 현악 4중주곡 중 첫 번째 작품인 13번 ‘로자문데’를 작곡할 무렵 슈베르트는 오랜 정신적 신체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창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품기도 하였는데, 1824년 3월 31일 친구 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네. 건강이 회복될 기미도 안 보이고 그러한 절망 속에서 작곡도 풀려가는 방향이 아니라 점점 나빠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 이 인간을 생각해보라.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 찬 행복이 고통으로 채워지며 아름다움에 대한 열광도 사라져가는 이 인간을 생각해보라. (...) 가곡은 새로운 것을 거의 만들지 못했지만 기악곡은 몇 곡 완성했지. 두 곡의 현악 4중주곡과 한 곡의 8중주곡을 작곡했는데, 다른 현악 4중주곡도 작곡할 생각이야. 이런 것이 규모가 큰 교향곡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편지에서 작곡했다고 한 두 곡의 현악 4중주곡이 13번 D.804 ‘로자문데’와 14번 D.810 ‘죽음과 소녀’이며, 작곡에 들어간다는 다른 한 곡이 15번 D.887이다. 13번 현악 4중주의 ‘로자문데’라는 명칭은, 2악장 주제로 슈베르트 자신이 그 전해에 작곡한 극음악 <로자문데>의 3막과 4막 사이의 간주곡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슈베르트는 이 선율을 특히 좋아해서 훗날 작곡하는 <즉흥환상곡> OP.142 3번에도 주제로 사용하였다. 이 곡의 초연은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24년 3월 14일 빈 악우협회에서 슈판지히 현악 4중주단의 연주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 중에서 그의 생전에 공개적인 모임에서 연주된 유일한 곡이었다고 한다. |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31세)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8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가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다.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슈베르트는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저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de)는 바이올린, 아버지는 첼로,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취미가 음악이었기 때문이었지,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으로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 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친구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의 친구였던 포글을 만났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존중하여 슈베르트가 지은 노래를 많이 불러 그의 노래는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유랑인>이나 <제5교향곡>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유랑인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를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 | |
—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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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죽고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 11월 17일에 원인모를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되고 헛것이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죽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에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5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 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 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 약 650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D.667(1819년). 보통 피아노 5중주라고 하면 현악 4중주에 피아노가 추가되는 것이 상례이나, 이 곡에서는 제2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사용하고 있다.
D.759(1822년). 제2악장까지밖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제3악장은 단편(斷片)과 초고(草稿)밖에 없으며, 제4악장은 전혀 씌어져 있지 않다.
D.795(1823년).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에 붙여진 전 20곡으로 된 가곡집이다.
D.911(1827년).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보다 4년 후, 즉 사망하기 전해인 182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작곡된 24곡으로 된 가곡집이다. 시는 빌헬름 뮐러의 같은 이름의 연작시에 의거하고 있지만 전작과는 달라 음울한 기분에 뒤덮여 있고, 시의 순서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와 같은 일관된 줄거리는 없으나, 그래도 시의 순서를 따라가면, 사랑에 찢긴 상심한 사나이의 정처없는 나그네길에 시작되고, 쓸쓸한 설경(雪景) 속을 헤매는 나그네의 기분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제5번 <보리수>는 이 곡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며, 그 밖에 <봄의 꿈>, <우편마차>, <까마귀>, <이정표> 등도 명작이다. '겨울 나그네'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어 제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이다.
D.957(1827년).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빈의 출판가 하즈링거는 사망한 해에 작곡된 14곡을 하나로 모아 <백조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여 출판하였다. 백조는 다만 죽음의 직전에만 운다는 전설을 토대로 하여 이것이 최후의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작자가 의도한 연작 가곡집이 아니다. 14곡 중에서 처음의 7곡은 레루슈타프의 시에, 다음 6곡은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였고, 모두 8월에 작곡되었다. 남은 1곡 <비둘기의 심부름>은 자일드의 시에 의해 10월에 작곡되었으며, 이것이 슈베르트 최후의 작곡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세레나데>, <바닷가에서>, <비둘기의 심부름> 등은 슈베르트의 전작품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은 사후 미발표곡이 계속 추가 발표되어 여러 번 바뀌었다.
2012년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식은 두 번째 방식으로, 이에 역시 편곡은 되어 있지 않은 D.936a(Die Letze(마지막))까지 번호를 붙여 10번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편의상 임의로 관용 방식이라 함). 첫 번째 부번방식은 오래된 음반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정도이며, 세 번째 부번방식(편의상 임의로 개정 방식이라 함)은 정통성이 있다 하겠으나, 독일어권과 일본 외에는 그다지 퍼지지 못했다. 그 외에 절충하여 6번까지는 그대로 두고 그 뒤의 곡들에 대해 번호 대신 별칭이나 조성 등으로 구분하는 방식도 있다(편의상 임의로 절충 방식이라 함). 위키백과에서는 대부분의 언어판에서 관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3]
부번 방식 | D.729 E 장조 | D.759 B 단조(미완성) | D.944 C 장조(대 교향곡) | D.936a D 장조(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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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방식 | 7번 | 8번 | 9번 | 10번 |
개정 방식 | (번호 없음) | 7번 | 8번 | (번호없음) |
절충 방식 | E 장조 | 미완성 | 대 교향곡 | D 장조 |
* 해설 자료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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