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러시아]Alexander Scriabin[알렉산더 스크랴빈]

Bawoo 2014. 9. 22. 21:16

   Alexander Scriabin




Alexander Nikolayevich




 [1872.1.6~1915.4.27]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모스크바 출생. 1888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사포노프에게, 작곡을 타네예에프와 알렌스키에게 사사하였다. 1894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이래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고, 미국에도 다녀왔다.

그의 74곡에 이르는 작품은 6곡의 관현악곡을 제하고는 모두 피아노곡으로, 이들은 쇼팽의 모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을 확립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신지학(神知學:theosophy)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스스로 ‘신비화음’으로 명명한 화음을 곁들여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주요작품으로는 교향곡 《법열의 시》(1908) 《불의 시》(10)와 소나타 10곡, 그 밖에 피아노소품도

많다.


[작품 모음]

 

*  Symphony No.1, Op. 26

Radio Sinfonie Orchester Frankfurt- Eliahu Inbal: director
Doris Soffel: mezzosoprano
Fausto Tenzi: tenor
Frankfurter Kantorei

I. Lento
II. Allegro dramatico
III. Lento
IV. Vivace
V. Allegro
VI. Andante


The full translation of the text of the final movement is roughly as follows:

O wonderful image of the Divine,
Harmony's pure Art!
To you we gladly bring
Praise of that rapturous feeling.
You are life's bright hope,
You are celebration, you are respite,
Like a gift you bring to the people
Your enchanted visions.
In that gloomy and cold hour,
When the soul is full of tumult,
Man finds in you
The spry joy of consolation.
Strength, fallen in battle, you
Miraculously call to life,
In the exhausted and afflicted mind
You breed thoughts of a new order.
An endless ocean of emotion you
Breed in the enraptured heart,
And sings the best songs of songs,
Your high priest, by you enlivened.
On Earth gloriously reigns
Your spirit, free and mighty,
Man lifted by you
Gloriously conducts the greatest feat.
Come, all peoples of the world,
Let us sing the praises of Art!
Glory to Art,
Glory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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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mphony No.2 in C-minor, Op.29 (1901/ 29세)

Picture: Reign of Fire by Gate To Nowhere

Mov.I: Andante 00:00
Mov.II: Allegro 08:50
Mov.III: Andante 18:13
Mov.V: Tempestoso 33:37
Mov.VI: Maestoso 39:12

Orchestra: USSR Symphony Orchestra/Conductor: Evgeny Svetla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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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metheus, the Poem of Fire ( Sympony No 5)

Vladimir Krainev is the pianist here in Scriabin's Prometheus, the Poem of Fire, Op. 60.

Dmitri Kitayenko conducts the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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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렌산더 스크리아빈은 1872년 1월 6일, 법률가를 아버지로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얼마 안가서 어머니가 별세하여 숙모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안툰 루빈스타인과,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제자로 러시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중 한 사람이었는데, 알렉산더가 두살때 죽었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곁을 오랬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숙모의 손에서 키워졌으나, 숙모는 일찍기 알렉산더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스크리아빈은 청년기와 유년기에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노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설, 생생한 상상력, 종교적인 것에 대한 사랑 ... 고대의 성악과 선지자에 대한 소박한 믿음"

12세데 코누스에게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고, 그후 한때 군인을 지망하여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금 뜻을 바꾸어 피아노를 즈베리에프에게 이론을 타녜에프에게 배웠다. 20세기 되던 해, 무리한 연습으로 인하여 그의 오른손에 부분적으인 마비가 왔다. 이 사건은 종교적인 열정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고, 창착 세계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철학자들과 친교를 맺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지각을 하게 된다.

"나는 밝은 빛, 가장 위대한 태양이 되고 싶다. 나는 나의 빛으로 세계를 밝히고 싶다.... 나는 내가 창조한 것일 뿐이다."

오른손 염증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상을 타고 피아노를 졸업, 그대로 음악원에 남으면서 아렌스키에게 푸가를 배웠는데 시험애 실패하여 작곡과를 졸업하지 못한채 음악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자작의 피아노곡만으로된 리시이틀을 열고 있었다. 그것이 출판업자 벨랴에프에게 인정되어 작품 출판의 편의를 받는 한편 1896년에는 벨랴에프의 후원으로 베를린,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헤이그에 연주 여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주;동문 라흐마니노프와는 달리 스크리아빈은 오직 자신의 곡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하여 존경을 지닌, 서로를 정말 좋아하는 건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스크리아빈의 급작스런 죽음 후에도 라흐마니노프는 먼저간 작곡가의 음악만을 위한 음악회 시리즈를 여는 등 그의 음악에 대한 높은 추앙을 표명했다고 전합니다.)

1897년 젊은 피아니스트 베라 이바노브나와 결혼, 1897~98년 파리에서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었다 귀국 후의 1898~1903년까지 모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사임한 193년부터 부유한 제자 모로조바의 원조도 있고 해서 스위스로 갔고, 1905년에는 다시 파리로 옮겼다.

그리고 1903년에 완성된 <신성한 시>는 니키시의 지휘로 1905년 5월 29일에 초연 되었다. 그 무렵 아내 베라는 사포노프의 전력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피아노 교사가 되었고 스크리아빈의 작품에 의한 연속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스크리아빈은 베라와 별거하고 애인 타티아나 시뢰더와 동거 생활을 했다.

1906년 12월, 뉴욕의 러시아 교향악 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열고, 다시 시카코 신시내티, 와싱턴, 디티로이트, 등에서 연주, 1907년 1월 뉴욕에서 타티아나와 합류했는데 그 스캔들 때문에 <법열의 시 >초연을 예정한 연주회를 취소당했다. 1908년당시 베를린의 러시아 음악 출판협회의 리더였던 세르게이쿠세비쯔와 알게 되었다.

190년~1910년을 브뤼셀에서 보낸 스크리아빈은 신지학(theosophy)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1910년쿠세비쯔키의 오케스트라와 볼가 지방을 연주여행하고, 1911년 3월2일 <프로메테웃, 또는 불의 시- The poem of fire>를 초연, 이어서 멩겔베르크와 콘세르트헤보우를 대동하고 네덜란드를, 1911년~12년 다시 러시아를 여행했다.  1914년 초,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고 헨리우드의 지휘로 <프로메데우스>를 재연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다시 러시아 국내의 연주여행을 뜻 했는데, 병으로 이루지 못한채 입술에 생긴 악성 종양이 악화되여, 1915년 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리아빈은 후기 낭만파의 가장 개성적인 작곡가였다. 니키시 쿠세비쯔, 멩겔베르크 등 당대의 지휘자들의 원조 아래 세계적 명성을 차지 했는데, 너무나도 개성적 혹은 개인적 양식과 신비사상에 뒷받침된 과장된 작풍 때문에, 그후 한때 거의 망각된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사후 반세기 거친 오늘날 마땅히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스크리아빈은 처음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출발하고, 수 많은 소품을 썼다. <녹턴>,<에튀드>,<전주곡>이라는 표제가 보여 주듯이 거기에는 쇼팽의 영향이강하게 보이는데, 이미 후년의 스크리아빈의 색채감의 경향를 엿볼수가 있다.다시 그후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는것과 동시에 인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그의 음악기법의 변천은 1892~1913년에 걸쳐 쓰여진 10여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똑똑히 더듬어  볼 수 있다.

제6번 이후의 소나타에 있어서는 서정적으로는 신지학에 입각한 신비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법상에서 <신비화음>이라 불리는 특유한 화성법에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제9, 제10번의 소나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관현학 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리스트,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차츰 독자적인 양식에 이르는 경과를 더듬는 것이 가능하며, 1903년의 교향곡 제3번<신성한 시>에서 <법열의 시>를 거쳐 최후의 <프로메테우스>에 있어서의 <색광 피아노>(7색의 무지개가 건반에 의해 스크린에 투사)의 사용까지 도달하고, 신비주의적 사상과 독자적인 화성법과의 일체화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실현되지 못한채 끈난 <신비>에 있어서는, 음악, 색광뿐만 아니라 무용이나 더 나아가서는 '향기'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시비화음> 또는 <프로메테 화음>이라 불리는, 변격 하행을 수반하는 4도 겹침에 의한 특유한 화음을 포함해서,기능화성에서 벗어난 화성법은 무조음악에의 접근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신비화음> 및 그 화성법은 단순히 구성 수단으로서 중요했을 뿐 만 아니라, <신비주의 사상>의 음악적 표현의 상징적 수단이기도 했다, 이 점이 뒤에 그를 등한시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해설 출처: 웹사이트>


알렉산더 스크랴빈은 187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고모의 손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좋아해 늘 피아노를 치며 놀았다. 때로는 인형들을 관객 삼아 자기가 직접 작곡한 음악이나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음악에서만큼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피아노 연주뿐만 아니라 조립에도 소질이 있어 틈만 나면 피아노를 조립했으며, 직접 조립한 피아노를 남에게 주기도 했다. 고모에게 어느 정도 피아노의 기초를 익힌 후 스크랴빈은 유명한 피아노 교사 니콜라이 츠레에프에게 갔다.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해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많이 길러 낸 유능한 교사였는데, 제자들에게 연습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다.

1882년, 10살이었던 스크랴빈은 모스크바 제2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수줍은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학교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한 후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학과 성적이 좋았지만 몸이 약해 교련 수업을 면제받았으며, 그 시간에 피아노를 연습했다.

1888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9도를 겨우 짚을 정도로 작은 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피아노 연주 실력이 뛰어나 1892년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를 졸업할 때 금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작곡 부문에서는 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의 음악관과 작곡 경향이 스승인 아렌스키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렌스키는 그의 학위를 인정하는 서류에 끝내 서명할 것을 거부했다.

20살 때, 리스트의 〈돈 주앙〉과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를 연습하다 오른쪽 손가락을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의사로부터 재기불능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 그럭저럭 오른손의 기능을 회복했지만,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왼손을 위한 〈야상곡〉과 〈전주곡〉을 썼다. 스크랴빈의 피아노곡은 왼손 테크닉이 오른손 테크닉과 같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오른쪽 손가락을 다친 사건과 관련이 깊다.

1894년, 스크랴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같은 해 출판업자 벨야예프와 악보 출판 계약을 맺었다. 그 후 본격적인 피아니스트로 러시아는 물론, 다른 나라로도 연주 여행을 다녔는데 특히 1898년에 있었던 파리 연주가 성공적이었다.

1898년, 26살이던 스크랴빈은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 교수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작곡가로도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연습곡과 전주곡 시리즈, 세 곡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당시에는 그의 동기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작곡자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겉으로는 친하게 지냈지만 속으로는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있는 5년 동안 스크랴빈은 두 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옛 스승 사포노프가 초연에서 지휘를 맡았는데, 연습할 때 오케스트라 단원 앞에서 〈교향곡 제2번(Symphony No.2 in c minor, Op.29)〉의 악보를 흔들며 "여기 새로운 바이블이 있습니다."라고 극찬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1903년, 스크랴빈은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 안정된 직장인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건너갔다. 스위스에서 살 때, 그는 니체의 초인사상에 심취했다. 그 후 신지학의 창시자 헬레나 페트로브나 브라바츠키의 지도를 받으며 니체의 철학을 대체하는 자신만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6년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브뤼셀 등지에서 살았으며, 아내와 이혼하고 젊은 제자인 타티아나 표도로브나 쉴레저와 재혼한 후에는 파리에 정착했다. 타티아나는 스크랴빈의 음악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그는 작품에 시적이고 공상적인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피아니스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멀리 미국까지 연주 여행을 다녔고, 파리에 정착했을 때에는 발레 뤼스의 뛰어난 흥행사 디아길레프가 기획하는 연주회에도 참가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몇 년을 보낸 스크랴빈은 1909년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히말라야에서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종합예술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의 제목은 '아마겟돈'이었다. 하지만 이 야심찬 계획은 앞부분만 스케치한 상태에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1915년, 스크랴빈은 탄저병을 옮기는 파리에 입술이 쏘여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살이었다.

스크랴빈의 작품 세계는 신비주의 음악으로 요약된다. 종교와 철학의 결합체인 신지학(神智學)과 니체의 초인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색과 소리의 결합을 시도하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화음을 만들어 냈다. 색과 소리의 결합을 위해 그는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것을 사용했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그에 해당되는 색깔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감상자가 소리와 색채를 동시에 보고 듣도록 하는 피아노이다.

스크랴빈의 창작 활동은 크게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에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전주곡〉과 〈연습곡〉, 〈야상곡〉,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쇼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순수 낭만주의 시기로 꼽힌다.

작품번호 53번부터는 제2기에 해당된다. 이 무렵부터 관현악의 비중이 높아진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08년 작인 〈교향곡 제4번 '법열의 시(Le Poeme de l' extase')〉가 있다. '법열(法悅)'이란 '매우 기쁘다'라는 의미의 종교적 용어인데, 여기서는 예술가가 누리는 창조의 기쁨을 의미한다. 단악장 형식으로, 프롤로그와 소나타 형식으로 쓰인 주부(主部), 장엄한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안단테의 느린 서주부로 두 개의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과 인류의 노력을 의미하는 선율을 플루트가 연주하고, 자아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선율은 클라리넷이 연주한다. 주부의 제1주제는 하늘을 나는 정신을 그린 것이고, 제2주제는 인간애를 그린 것으로 바이올린이 연주한다. 그런 후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트럼펫의 제3주제가 등장한다. 전개부에서 이 주제들이 힘차고 황홀하게 전개된다. 에필로그에서는 트럼펫에 오르간까지 가세한 장엄한 승리의 찬가를 들려준다.

제3기로 접어들면서 스크랴빈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 주기 시작한다. 1910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5번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Prometheus, Le poeme du feu')〉에서 그는 소리와 색깔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 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일종의 협주곡 형식을 띠고 있는데, 피아노, 오케스트라 파트 외에 '색채'가 제3의 파트로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서 스크랴빈은 색광 피아노를 사용해 건반을 누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색깔이 스크린에 투사되도록 했다. 스크랴빈은 각각의 색깔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했다. 초록색은 물질세계를, 붉은색은 언젠가는 파멸할 이승의 세계를, 푸른색과 보라색은 이성과 지혜를 뜻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신비 코드를 사용했는데, C, F#, B플랫 등 여러 종류의 4도를 쌓아서 만든 코드를 기반으로 전개된다. 이 밖에도 10개의 음을 쌓아 올려 만든 화음이나 6성부의 대위법 등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화음 체계를 보여 주는 곡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 〈환상 소나타〉,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 관현악곡 〈몽상〉,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독주곡 〈비극적 시곡〉, 〈불꽃을 향해서〉 등이 있다.

출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진회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