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데레프스키
-
1860.11. 18 러시아령 폴란드 포돌리아 쿠리우우프카~ 1941. 6. 29 미국 뉴욕 시.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정치가1919년 폴란드의 총리가 되었다. 폴란드 지주의 집사 아들이었던 그는 1872년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1878년부터는 그곳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1880년 제자 안토니나 코르자크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다음해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여배우 헬레나 모제예프스카의 격려와 재정적인 도움 덕택에 그는 빈에서 1884~87년에 테오도르 레셰티츠키 밑에서 공부하면서 기교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그동안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1887~91년 사이에 빈·파리·런던·뉴욕 등지에서 피아니스트로 공식적인 데뷔를 했고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무대에서 보여준 개성적인 연주는 피아노의 대가이자 선배였던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신비스러운 열정을 불러일으켰지만 동료들 사이에서는 존경받기보다 오히려 시샘을 받았다. 쇼팽(그는 쇼팽의 작품을 편집했음)·바흐·베토벤·슈만의 곡을 주로 연주했다.
1898년 스위스 모르주 근처 리옹보송에 정착했고 이듬해 로젠 남작 부인이었던 헬레나 고르스카와 결혼했다. 1901년 드레스덴에서 타트라 산맥에서의 생활을 다룬 오페라 〈만루 Manru〉를 공연했다.
1909년 보스턴에서 교향곡 B단조(Symphony In B Minor 'Polonia')
같은 해 그는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
일생 동안 열렬한 애국자였던 그는 1910년 튜튼 기사단을 물리쳤던 폴란드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크라쿠프 시에 기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폴란드 국립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미국측에 대한 위원회의 대표로 임명되어 폴란드 독립의 대의명분을 지지하도록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결과 윌슨은 1918년 1월 8일에 발표한 14개 조항 속에 폴란드 독립을 13번째로 언급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의 임시 총리였던 유제프 피우수츠키는 바르샤바에 당성이 배제된 전문가들의 정부를 수립해달라고 파데레프스키에게 부탁했고, 1919년 1월 17일에 마침내 정부가 수립되었다.
파데레프스키는 외무장관직을 겸한 총리가 되었지만 임기 동안 정치적으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파데레프스키는 아첨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비평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목표로 삼았으나 어느 정당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1919년 11월 27일 총리직을 사임하고 리옹보송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폴란드를 찾지 않았다.
1921년에 다시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주로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무렵 1939년 10월 부아디수아프 시코르스키 장군을 총리로 하여 수립된 폴란드 망명 정부는 파데레프스키에게 폴란드 국립의회 의장직을 부여했다. 1940년 프랑스가 점령되자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뒤 곧 죽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 * Sonate pour Piano, Op. 21
Minuet in G major Op. 14 No.1
'♣ 음악 감상실 ♣ > [1860년 ~188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Felix Woyrsch (0) | 2015.03.03 |
---|---|
[체코계 오스트리아]Emil von Reznicek (0) | 2015.03.03 |
[영국]Ralph Vaughan Williams (0) | 2014.11.22 |
[항가리]Ernő Dohnányi (0) | 2014.11.11 |
[스웨덴]Wilhelm Stenhammar (0) | 2014.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