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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어사 박문수 이야기

Bawoo 2014. 10. 18. 10:47

<박문수 선생 영정/보물 1189호>

 

“아! 영성(靈城 : 박문수의 봉호)이 나를 섬긴 것이 벌써 33년이다. 예로부터 군신 간에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실록 원문>

" 영성(靈城:박문수)이 춘방(春坊: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4월 24일

1756년 박문수(朴文秀)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그를 이와 같이 회고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유대감이 있었다. 탕평책, 균역법 등 영조의 치세를 대표하는 업적들은 박문수의 활약으로 빛을 발하였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박문수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극중에서 그는 배배 꼬인 궁중 미스터리의 한복판에 서 있다. 당시 박문수가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감안하여 극적 상상력을 덧입히고 각색한 것이다.

그동안 사극에서 그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그려져 왔다.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요,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였다. 그의 암행어사 이미지는 설화로 구전되며 형성되었다. 설화 속 박문수는 탐관오리의 비리를 밝히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선판 히어로’였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다. 박문수는 사실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없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말 그대로 은밀히 지방관을 감찰하고 민심을 살피는 직책이다. 그런데 <영조실록>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소임은 ‘별견어사(別遣御史)’였다. 어사는 어사지만 은밀하지 않았다. 특별임무를 띄고 공개적으로 파견된 것이다.

박문수는 ‘실무에 두루 통달했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유능했다. 그는 대사간, 도승지, 병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일에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날 때마다 박문수는 재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1727년 영남안집어사, 1731년 호서감진어사, 1741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네 차례나 별견어사를 맡아 기아에 처한 백성을 구휼했다.

민심을 수습하는 데 있어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밥이었다. 백성에겐 밥이 하늘이다. 함경도의 식량이 모자라면 경상도에서 실어왔다. 환곡을 정비하고 토지측량을 다시 했다. 백성을 굶기는 탐관오리는 임금에게 처벌을 요청했다. 소임을 마친 후에도 왕래하면서 구휼이 잘 이뤄지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쌓은 현장경험은 세정개혁으로 이어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된 박문수는 ‘양역(良役)’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18세기 중반 양인 장정(16~60세)들은 군역 등의 부역의무를 짊어졌는데 이를 면하려면 두 필의 군포를 내야 했다. 그 폐단은 심각했다. 친척(족징)이나 이웃(인징)에게 걷는 것도 모자라, 어린 아이를 군적에 올리고(황구첨정), 죽은 사람까지 군포를 부과했다(백골징포).

박문수의 개혁안은 불필요한 관직과 군병을 줄이고, 어염세 등의 세원을 확보해 두 필의 군포를 혁파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의 머릿수에 맞춰 부과해온 양역을 가구나 토지 단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1750년 그는 임금을 모시고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아갔다. 유생과 평민들을 모아 놓고 양역 개혁안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이 안은 양반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관직을 줄이는 것도 불만인데, 감히 양반에게 세금을 걷겠다니! 그들은 백성을 위해 특혜를 양보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국 영조는 대안으로 균일하게 군포 한 필을 부과하는 균역법을 채택했다.

박문수는 소론의 당인으로서 노론에 둘러싸인 임금의 신임을 얻었고, 심지어 같은 소론 계열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영조의 총신답게 ‘탕탕평평(蕩蕩平平 : 치우침 없이)’ 백성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그가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한 것은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 세월 각인된 결과다. 박문수가 실제로 암행어사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거기 투영된 민초들의 한과 열망이 진짜배기다. 백성의 밥그릇을 빼앗으면 천벌 받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머니 투데이-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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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수 (朴文秀)1691(숙종 17)~ 1756(영조 32) 65세. 조선후기의 문신.

박문수 생가

 

소론계열의 인물이나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군정과 세제의 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부정한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다. 본관은 고령,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할아버지는 세마(洗馬) 선(銑)이며,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향한(恒漢)이고, 어머니는 문경공(文敬公) 이세필(李世弼)의 딸이

다.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에게서 배웠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설서·대교를 거쳐 병조정랑에 이르렀으나, 17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관직을 당했다. 1727년 영조가 당쟁을 조정하고자 소론을 등용한 정미환국 때 사서로 다시 기용되었고, 같은 해 9월 영남암행어사로 나갔다. 1728년 부교리를 겸하던 중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뽑히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대사간·도승지 등을 지내고, 이듬해 호남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1732년 선혜청당상, 1733년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으며, 1734년 형조참판·호조참판에 오르고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에는 도승지·병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 받아 풍덕부사로 물러났다. 1739년 형조판서를 거쳐 함경도진휼사로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2년 병조판서, 1745년 어영대장,1748년 호조판서, 1750년 판의금부사, 1751년 예조판서 겸 세손사부(世孫師傅), 1752년 한성판윤 등을 두루 지냈다.

이해 내의원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 풀려나와 예조판서·우참찬에 올랐다.

그는 소론계열의 인물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비판하고 당색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농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부담으로서 군포의 폐단을들고, 이를 적절히 감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지적했다. 세정에 관해서는 호조판서로 있던 1748년 〈호조일정지례 戶曹一定之例〉를 제정하여 출납에 있어서 엄정을 기하도록 했다. 암행어사 때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편저로 〈탁지정례 度支定例〉가 있으며, 글씨로 안성의 〈오명향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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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수 선생 과거 급제 시 *

 

낙조(落潮)

 

>문주란<낙조 /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尋寺歸僧杖不閑(심사귀승장불한)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望夫臺上妾低鬟(망부대상첩저환)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리)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찬 하늘에 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나루를 묻는 길손의 채찍질 급하고
절 찾아 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뒷동산 풀어 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다.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3]

 

<해제>

 

야사에 따르면 '귀신에게서 신시(神詩)를 받고' 장원에 급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관련

 에피소드가 소개된 바 있다. 과거를 보러 가다 어떤 초립 동자에게 '과거가 이미 치뤄졌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멘붕상태에

빠졌는데[1], 그 동자는 당시 과거시험 시제나 장원급제자의 시문이 이러이러했다며 가르쳐주고 갔다.

그래도 올라온 김에 한양에 사는 집안 어른에게 인사나 드리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그냥 서울로 올라가 찾아 뵈었더니 그 어른 왈, "뭔 소리야? 아직 시험까지 3일 남았는데?"(…). 결국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었고 과거 시제에 동자가 가르쳐준 시문의 앞부분이 나와 그 덕에 급제했다는 소리.[2] 이 전설에서 동자가 알려준 시제가 위 시 낙조(落潮)이다.

 

* 출처: 엔하위키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