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20년 ~1839년]

[프랑스]조르주 비제 [Georges Bizet]

Bawoo 2014. 11. 1. 12:10

비제 [Georges Bizet]

 

비제

 

 

본명은 Alexandre César-Léopold Bizet. 1838. 10. 25 프랑스 파리~ 1875. 6. 3 파리 근처 부지발.

프랑스의 작곡가.

오페라 〈카르멘 Carmen〉(1875)으로 잘 알려졌다. 사실주의적 접근으로 19세기말 베리스모 오페라에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성악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재능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이들은 비제의 재능을 어려서부터 정확하게 파악하여 10세가 되기도 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뛰어난 작곡가였던 샤를 구노와 프로망탈 알레비 등에게 배웠고, 어린 나이부터 상을 타기 시작하여 1857년 마침내 〈클로비스와 클로틸드 Clovis et Clotilde〉로 로마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정부로부터

5년간 장학금을 받았고, 프랑스 아카데미가 보내주는 2년간의 유학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보인 그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첫 극음악 작품인 1막짜리

오페레타 〈기적 박사 Le Docteur miracle〉(1857, 파리 초연)는 당대의 오페레타 어법에 통달한 세련된 작품이다. 1855년에 작곡된 교향곡 C장조

곧 분실되어 1935년이 되어서야 초연되었다. 그가 17세에 쓴 이 작품은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이 같은 나이에 쓴 작품들과 쉽게 비견될 만하다. 이 작품은 흔히 흐르는 듯 재치가 넘치는 대위법과 관현악 기법, 빈의 고전주의 양식과 프랑스적 선율의 절묘한 결합 등이 특징인데, 비제의 작품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의 재능뿐 아니라 자칫 빠지기 쉬운 허점까지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나는 세련된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곡을 쓰기 전에 아이디어를 갖고 싶지만 파리에서의 작품들은 그렇지가 못했다"라고 썼다. 로마에서 그는 로베르트 슈만,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펠릭스 멘델스존, 샤를 구노 등에게 배웠으며, 당시 인기를 누렸던 프랑스의 작곡가 다니엘 오베르의 찬양자들은 그를 독일적인 작곡가로 생각했다. 독일에서 3년을 보내기로 했으나 그는 대신 로마에 계속 머무르기로 작정했다. 로마에서 받은 인상들을 가지고 그는 결국 교향곡 2번 C장조 〈로마 Roma〉를 작곡했다(1869 초연).

당시에 쓴 이탈리아어 가사에 의한 오페라 〈돈 프로코피오 Don Procopio〉에서는 도니체티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었고, 〈바스코 드 가마 Vasco de Gama〉는 주로 구노와 마이어베어의 작품 양식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1860년 가을 친구 에르네스트 기로(The Pearl Fishers(비제가 죽은 뒤 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음)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비제 자신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인생관이 성숙되지 않은 면이 있었고(특히 여성에 대한 태도에 젊은이다운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음), 자신이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아닌 외면적 달콤함을 좋아한다는 데 대한 예술가적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또한 동시대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를 찬미하고 이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으며, 통찰력과 신념을 갖춘 진정한 낭만주의 작곡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찼다(그는 결국 이러한 열망을 완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음). 1866년 10월 친구이자 제자였던 에드몽 갈라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떻게든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고 썼다. 사실 그는 당시 지배적 사조였던 실증주의 철학의 회의적·물질적 태도로 줄곧 고통받았다. 그가 자신의 지성과 감정을 서로 화해시키지 못하고 계획한 많은 오페라 작품들을 결국 완성하지 못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인물됨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 청중들의 요구대로 극(劇)을 쓰기에는 종종 부적합한 경우가 많았다. 파리로 돌아와 완성한 첫 오페라 2편이 허점있는 작품으로 그친 것은 청중의 취미를 너무 많이 의식한 탓이라기보다는 극에 대한 관심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진주잡이 The Pearl Fishers〉(1863 초연) 〈아름다운 퍼드의 아가씨 La Jolie Fille de Perth〉(1867)의

대본들은 한결같이 비제가 장차 드러내게 될

음악적·극적인 잠재력을 유도하기에 부족했다. 〈진주잡이〉의 주된 매력은 동양이라는 이국적 배경과 합창 서법에서 찾을 수 있으나 구노의 오랜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며, 따라서 비제 특유의 서정적 음악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퍼드의 아가씨〉는 월터 스콧 경의 소설에서 형식적 틀만 빌려온 것이지만, 인물의 성격 구현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났고(집시 맵과 '보헤미안의 춤'에서 이미 〈카르멘〉의 특징이 나타남), 야간순찰이나 합창에 의한 음주 장면, 무도회 장면, 여주인공의 광란 등과 같이 이전 오페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적 특징들 조차도 신선하고 우아한 어법으로 구사되어 있어서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전반적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당시 그는 베를리오즈, 구노, 생 상스, 리스트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팔기 위해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프랑스에서는 소수의 아주 인기있는 작곡가들만이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음). 감상적이고 쉽사리 싸움에 말려드는 성향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청년기의 내적 불안과 냉소, 쉽사리 마음이 상하는 성향으로 인해 아직 인생에 대한 성숙한 정서적 태도를 갖추지 못했는데, 그의 이러한 성향은 1869년 6월 3일 오페라 〈유대 여인 La Juive〉(1835)으로 유명한 작곡가 플로망탈 알레비의 딸 주느비예브와 결혼한 뒤 차츰 극복하게 되었다. 약혼한 뒤 결혼하기 전인 1867년 그는 스스로 "나는 나 자신을 정화시키고 있으며, 무언가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으며, '예술가로서나 인간으로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퍼드의 아가씨〉에 대한 악평에 자극받은 그는 '장식음과 거짓으로 일관된 하찮은 무리'들과 결별하고, 대신 그의 음악의 가장 커다란 강점인 2가지 특징, 즉 이국적 분위기의 창조와 극적 진실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이중 첫번째 특징은 1막 오페라 〈자밀레 Djamileh〉(1872)에서, 이 작품은 "기괴함과 기묘함이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을 넘어섰다"라고 평가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독창적이었고, 2번째 특징은 알퐁스 도데의 희곡을 가지고 만든 부수음악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1872)에서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아를의 여인〉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이전의 그의 음악에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특징이었다. 같은 해 7월 아들이 태어나 결혼의 행복은 정점에 달했고, 이와 더불어 그는 당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깊이 자극받았으며, 파리 함락 기간 동안에는 국토 방위군으로 복무했다.

대작 은 전쟁에 참여해 경험한 인간적 성숙과 더불어 젊은 열정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작곡되었다. 〈카르멘〉은 동시대 프랑스 작가 메리메의 소설을 기초로 만든 작품으로, 사실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1875년 초연 당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면서 오페라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오페라는 현란한 지역적 색채와 진솔한 감정이 기술적 화려함, 풍부한 선율과 한데 섞임으로써, 전문 음악가와 일반 청중에게 모두 인기있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 작품을 바그너의 독일적 음향에 대해 해독제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지중해적' 음향이라 평했다. 그러나 〈카르멘〉이 일으킨 물의는 비제가 급작스럽게 죽고 나서 비로소 열정적인 찬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출처: 위키백과-Du P. Cooper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