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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Voltaire]

Bawoo 2014. 11. 26. 00:05

볼테르 (Voltaire)

 

볼테르

 

 

본명은 François-Marie Arouet. 1694. 11. 21 프랑스 파리~ 1778. 5. 30 파리.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오늘날까지 읽히는 그의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는 18세기 유럽의 전제 정치와 종교적 맹신에 저항하고 진보의 이상을 고취한 인물로 아직도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고전주의 말기에서 프랑스 혁명기 직전에 걸친 생애를 통하여, 그는 비판 능력과 재치 및 풍자 같은 프랑스 정서 특유의 자질들을 구현한 작품과 활동으로 유럽 문명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볼테르는 전형적인 중산층 출신으로, 아버지는 한때 공증인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파리 시청의 재무관이 된 인물이며,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7세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에 반항심을 느낀 반면 그의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에게 애착을 느꼈다. 샤토뇌프 신부는 이 소년을 당시 살롱의 여왕이라 불렸던 고급 창녀 니농 드 랑클로에게 소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사상가들의 모임에도 자주 데리고 다녔다. 이런 환경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0세에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루이 르 그랑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에는 귀족과 상류 중산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는데, 동창생으로는 나중에 외무장관이 된 다르장송 후작과 염문으로 유명한 리슐리외 공작이 있었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고전문학과 연극 및 사교생활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부 교사들의 종교적 훈육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그는 루이 14세의 슬픈 말년을 목격했고, 1709년의 패전이 가져온 고통과 종교적 박해의 공포를 평생 잊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군주를 존경했고, 계몽된 왕은 진보에 없어서는 안 될 주역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색인 : 종교적 관용, 군주제).

루이 르 그랑 학교를 졸업한(1711) 뒤,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문학에만 전념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네덜란드 주재 프랑스 대사의 서기관이 되어 헤이그로 갔다. 그러나 연애 사건을 일으켜 대사의 비위를 건드려 파리로 송환되었다(1714). 이듬해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그는 자유사상가들의 사교적 중심이었던 '탕플'(Temple)에 출입하면서 재치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섭정 오를레앙 공의 추문을 풍자한 필화사건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었고(1716), 이듬해 또다시 비슷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번에는 11개월 동안 바스티유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숨어 있는 문학적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718년에 무대에 올린 그의 첫번째 비극 〈오이디푸스 Oedipe〉가 성공한 뒤, 그는 위대한 고전주의 극작가 장 라신의 후계자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부터 볼테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는데, 이 필명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아직도 확실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아버지를 싫어했던 그가 집안이름 아루에 2세(Arouet l[e] j[eune])의 철자 순서를 바꾸어 '볼테르 씨'(M. de Voltaire)라는 필명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같은 대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망은 서사시 〈앙리아드 Henriade〉(1723)를 집필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종교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앙리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를 현학적으로 모방한 것이 흠이지만, 당시에는 작품이 구현하는 종교적 관용 덕분에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이런 문학적 성공 덕분에 그는 섭정한테서 연금을 받게 되었고, 젊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의를 얻었다.

볼테르는 이성의 유효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문인과 과학자)과 궤도를 같이한 '필로조프'(Philosophe:계몽 철학자를 가리키는 18세기 용어)였다. 그는 살롱에서 공격적인 이신론(理神論)을 공언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격분시켰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사상 자유를 용인하는 영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프랑스에서 망명해 있던 토리당의 지도자 볼링브룩 자작을 찾아갔다. 볼테르는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볼링브룩을 존경하여 그를 키케로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볼링브룩의 충고에 따라 그는 존 로크의 철학 서적을 읽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그무렵 우연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인 슈발리에 드 로앙과 말다툼을 벌였다가 로앙의 하인들한테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볼테르는 결투를 신청했고, 이 불손한 행위로 그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5일 뒤에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전제정치와 불평등에 대해 그가 겪은 첫 경험으로, 그의 지적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26년 5월에 칼레를 거쳐 런던으로 떠났는데, 이때부터 망명과 저항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3년 가까이 계속된 망명 생활 동안 그는 영어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알렉산더 포프, 조너선 스위프트, 윌리엄 콩그리브 등의 문필가와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 그리고 신학자인 새뮤얼 클라크를 만났다. 그는 궁정에 들어가 캐롤라인 왕비에게 〈앙리아드〉를 바치기도 했다. 그는 영국 정치제도의 자유주의를 존중했지만, 격렬한 당파 싸움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종교 및 철학 문제를 두려움 없이 토론하는 영국인의 대담성을 부러워했고, 특히 퀘이커교도에게 흥미를 가졌다. 영국인들, 특히 아이작 뉴턴과 존 로크가 과학 사상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인간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상인과 선원의 나라인 영국이 루이 14세를 이긴 것은 경제적인 우월 덕분이었다. 그는 문학에서도 프랑스가 영국에 배울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셰익스피어 연극은 그를 압도했고, 바로 '조잡하고 천박한' 연출에 충격을 받았지만, 등장 인물들의 활력과 줄거리의 극적인 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728년말에 영국을 떠나 이듬해 초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영국을 본보기로 제시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신중한 투기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막대한 재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모방하여 프랑스에 비극을 되살리려 시도했다. 런던에서 쓰기 시작한 〈브루투스 Brutus〉는 1730년에 상연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죽음 La Mort de César〉(1735)은 학교에서만 공연되었고 〈햄릿 Hamlet〉과 마찬가지로 유령이 등장하는 〈에리필 Eriphyle〉(1732)은 관객의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의 군주인 오로스마네가 모호한 편지에 속아, 독실한 그리스도교도인 그의 포로 자이르를 살해하는 내용을 담은 〈자이르 Zaïre〉는 이국적인 주제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한편 볼테르는 새로운 문학 장르인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의 친구였던 파브리스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 위대한 군인의 유별난 성격에 흥미를 느낀 그는 〈카를 12세의 역사 Histoire de Charles ⅩⅡ〉(1731)라는 전기를 썼다. 이 책은 실증자료를 이용한 세부묘사로 사실을 생생하게 재현해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그의 철학적 개념은 차츰 부각되기 시작했다. 즉 스웨덴 왕의 위업은 황폐를 가져온 반면, 그의 경쟁자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제국을 문명국으로 바꾸어놓은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위대한 인물은 전쟁을 도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명을 발전시키는 사람인데, 이것은 영국의 본보기와도 일치하는 결론이었다. 볼테르의 이러한 생각은 오랜 성찰을 통해 〈철학 서간 Lettres philosophiques〉(1734)이라는 간결한 작품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허구적인 편지들은 주로 종교적 관용이 갖는 효과를 논증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존 로크의 현명한 경험주의 심리학과 르네 데카르트의 불확실한 억측을 대비한다. 철학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뉴턴 같은 사람은 알맹이 없는 선험적 추론을 경멸하며, 사실을 관찰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볼테르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상업, 문학, 프랑스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셰익스피어를 소개한 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을 공격한다. 삶의 목적은 참회를 통해 천국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에게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볼테르는 결론짓는다. 작지만 뛰어난 이 책은 사상사의 이정표로서 18세기 철학을 집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 정신의 기본 방향을 노정해준다.

 

기존 종교와 정치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책인 〈철학 서간 Lettres philosophiques〉은 즉각 세상의 반감과 악평을 몰고왔다. 결국 1734년 5월에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볼테르는 샹파뉴의 시레에 있는 샤틀레 부인의 성으로 피신했다. 그리하여 이 젊고 지적인 여인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가 이 은신처를 벗어난 것은 1736년 12월에 네덜란드로 잠시 여행했을 때뿐으로, 이 여행은 일종의 망명이었다. 쾌락주의를 대담하게 설파한 그의 짧은 시 〈르 몽댕 Le Mondain〉이 유포되자, 그는 몇 주일 동안 프랑스를 떠나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두 사람의 생활은 사치스러운 동시에 학구적이었다. 볼테르는 국가적 비극을 다룬 희극 〈아델라이드 뒤 게클랭 Adélaïde du Guesclin〉(1734)에 이어 1736년에는 〈알지르 Alzire〉를 무대에 올렸다. 스페인에 정복될 당시의 페루 리마를 무대로 한 〈알지르〉는 잔인한 폭력보다 인도주의적 문명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비극은 고귀한 미개인을 인습적으로 묘사한 것이었지만, 거의 1세기 동안 코메디 프랑세즈의 공연 목록에 포함되었다. 샤틀레 부인은 과학과 형이상학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고, 이런 점에서 볼테르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성에는 물리학 실험실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들은 과학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불의 성질을 연구했다. 샤틀레 부인이 뉴턴의 저서와 베르나르 드 망드빌의 〈꿀벌들의 우화 The Fable of the Bees〉를 번역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동안, 볼테르는 〈뉴턴 철학의 요소들 É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1738)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영국 과학의 새로운 발견을 널리 소개했다. 동시에 역사 연구도 계속해〈루이 14세 시대 Le Siècle de Louis ⅩⅣ〉의 집필에 착수했고, 국왕과 전쟁, 문명과 풍속의 보편적 역사를 다룬 저서 〈풍속론 Essai sur les moeurs〉 집필을 위한 자료를 모았으며 성경 해석에도 뛰어들었다. 볼테르가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한 측면 가운데 하나인 백과사전적 교양을 얻은 것은 시레에서 지낼 때였다.

볼테르는 1739년 5월에 샤틀레 부인과 함께 브뤼셀로 갔고, 그후 브뤼셀과 시레 및 파리를 끊임없이 왕래했다. 이무렵 볼테르는 나중에 프리드리히 2세가 된 프로이센 왕세자와 서신을 교환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자,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를 프랑스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명을 띠고 베를린으로 갔다(1742~43). 게다가 그는 나중에 전쟁장관과 외무장관이 된 친구 다르장송 형제를 루이 15세의 새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에게 소개해주었기 때문에, 다시 베르사유 궁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는 퐁트누아의 승리(1745)를 찬양하는 시를 쓴 뒤, 사료편찬관이자 왕의 시종으로 임명되었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 여왕을 다룬 그의 비극 〈메로페 Mérope〉 는 첫 공연(1743)에서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창시자를 사기꾼으로 묘사한 〈마호메트 Mahomet〉는 1742년의 첫 공연이 성공한 뒤,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샤틀레 부인과 관계를 계속하면서도, 과부가 된 조카딸 드니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그를 싫어했고, 궁정의 가톨릭 파벌은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샤틀레 부인이 왕비와 함께 도박을 하다가 큰 돈을 잃자 그는 샤틀레 부인에게 영어로 말했다. "상대는 카드 놀이의 사기꾼이오."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들었고, 그는 1747년에 멘 공작부인의 시골 저택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병들고 지친 그는 마침내 그의 신랄한 재기에 들어맞는 '콩트'(단편소설)라는 문학 형식을 찾아냈다. 〈미크로메가 Micromégas〉(1752)는 거대한 우주에 비하여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이야기한다. 〈바부크의 환상 Vision de Babouc〉(1748)과 〈멤논 Memnon〉(1749)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알렉산더 포프의 철학적 낙관주의를 반박하고 있다. 〈자디그 Zadig〉(1747)는 일종의 비유적 자서전으로, 바빌로니아의 현인 자디그는 박해를 받고, 늘 불운에 쫓겨다니다가 결국에는 인간을 보살피는 신의 자상한 섭리를 의심하게 된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1748년에 그는 샤틀레 부인과 시인 생 랑베르의 정사를 알게 되었다. 이 어리석은 열정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1749년 9월 10일에 볼테르는 15년 동안 그의 반려이자 조언자였던 이 여성이 아기를 낳다가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 절망에 빠진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과 함께 살았던 파리의 집으로 돌아갔고, 한밤중에 일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둠 속을 헤매곤 했다.

 

연극 몇 편이 실패하자, 그의 패배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 희극'을 시도했다. 그는 방탕한 아들을 주제로 한 〈방탕아 L'Enfant prodigue〉(1736)에 이어, 윌리엄 위철리의 풍자극 〈정직한 상인 The Plain-Dealer〉을 〈정숙한 여자 La Prude〉로 각색했고,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 〈파멜라 Pamela〉를 각색한 〈나닌 Nanine〉(1749)을 발표했지만,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세미라미스 Sémiramis〉(1748)에서는 유령을 등장시키고 호화로운 무대 장치를 고안했지만, 이것도 대중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의 적들은 그를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작가인 크레비용과 비교했다. 볼테르는 〈오레스트 Oreste〉와 〈세미라미스〉에서 크레비용과 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파리 관중은 크레비용의 연극을 더 좋아했다. 분노와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초대를 받아들여 1750년 6월 28일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가 떠날 무렵,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문학 세대가 등장하고 있었다. 드니 디드로와 돌바크 남작을 비롯한 이들은 철저한 유물론을 제창하면서 볼테르의 이신론은 진부한 것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장 자크 루소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시를 재발견했다. 모두가 이성의 계몽보다는 감성과 열정의 매력을 더 좋아하는 것이었다. 해가 갈수록 볼테르는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처음에 그는 베를린과 포츠담에 체류하면서 그곳 생활에 매혹되었으나 곧 어려움이 닥쳤다. 모페르튀(프리드리히 대왕이 세운 베를린 아카데미 원장)와 학문적 문제로 논전을 시작한 그는 〈아카키아 박사의 독설 Diatribe du docteur Akakia〉(1752)이라는 소책자에서 모페르튀를 조롱한 나머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결국 1753년 3월 26일에 프로이센을 떠났는데, 여행중에 프랑크푸르트의 한 여관에 연금당하기도 했다. 루이 15세는 그가 파리로 오는 것을 금지했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콜마르에 1년 정도 머물다 스위스로 가 제네바와 로잔에 각각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20년 동안 준비해온 역사 연구서 〈루이 14세 시대〉(1751)와 1740년에 착수한 〈풍속론〉을 끝냈다. 〈루이 14세 시대〉에서 그는 '위대한 시대'의 예술과 과학 및 사회 생활을 검토함으로써 프랑스의 역사를 쓰고자 했지만, 군사적·정치적 사건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관습과 도덕에 대한 연구서인 〈풍속론〉은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세계사의 흐름을 추적한 책으로서, 동양과 극동 지방의 나라에도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제네바에서 그는 처음에는 종교적 관용의 옹호자로 환영받았지만, 곧 주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시작했다. 제네바 공화국은 그가 집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것마저도 금지했다. 그의 경쾌한 지성에 끌린 칼뱅교 목사들, 여자들, 젊은이들은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지만, 스위스의 중요한 지식인들은 곧 그에게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1757년 11월에 디드로의 〈백과전서 Encyclopédie〉 제7권이 간행되자 폭풍이 몰아닥쳤다. 장 달랑베르가 제네바로 볼테르를 찾아온 뒤에 쓴 〈백과전서〉의 항목이 제네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볼테르는 제네바에서도 더이상 신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런 논쟁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1758년에 볼테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캉디드 Candide〉를 썼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낙관주의를 신봉하는 팡글로스의 젊은 제자 캉디드는 온갖 불운을 격으면서, 이것이 '가장 좋은 세계'라는 믿음을 더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프로폰티스 해안으로 은퇴한 그는 행복의 비결이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것,' 즉 극단적인 이상주의와 막연한 형이상학을 배제한 실제적인 철학에 있음을 발견했다. 볼테르 자신의 정원은 스위스 국경 가까이의 페르네와 투르네가 되었다. 이 영토는 그가 1758년말에 사들인 영지였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앞발은 로잔과 제네바에 걸치고 뒷발은 페르네와 투르네에 걸침으로써,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가는 식으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페르네에서 볼테르는 생애의 가장 활동적인 시기를 맞았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농업개혁 문제에 참여하면서 근대적인 영지를 개발했다. 그는 제네바의 정치에도 참여하여 노동자 편을 들었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 양말 및 시계 공장을 세웠다. 그는 쥐라 지방의 농노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쥐라 주와 제네바를 잇는 도로에 설치되어 있던 관세 장벽을 폐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 도로는 쥐라 주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밖으로 실어낼 때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이제 세계적인 것이었다. 그는 제임스 보스웰, 조반니 카사노바, 에드워드 기번 같은 문필가나 철학자들과 교제했고, 필로조프들, 그의 작품에 출연한 여배우와 배우, 그리고 리슐리외 공작, 슈아죌 공작,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는 마담 뒤 바리 같은 궁정 고관 및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방대한 양의 서신을 교환했다. 그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빠짐없이 발언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였지만, 진보적인 왕들의 권위도 존중했다. 그는 화석 문제에 대하여 프랑스의 유명한 박물학자인 뷔퐁 백작과 논쟁을 벌였고, 자연발생설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의 과학자 라차로 스팔란차니 신부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17세기 철학자인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와 니콜라 말브랑슈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

그러나 이무렵 그의 주요관심사는 '교회' 특히 교회의 불관용에 대한 반대였다. 그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종교란 단순한 유신론에 그치고 국가의 세속 권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70년경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및 스페인 궁정이 교황과 갈등을 일으키자, 그는 이 목표가 달성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 단체의 유대와 전통적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잘못 판단한 섣부른 생각이었다. 유명한 평론가 엘리 프레롱이 그를 공격하자, 볼테르는 감상적 희극 〈스코틀랜드인 L'Ecossaise〉(1760)에서 엘리 프레롱을 두 스코틀랜드 가문의 말다툼에 개입하는 비열한 언론인으로 묘사하여 조롱하고, 〈시민의 감상 Le Sentiment des Citoyens〉(1764)에서는 자식들을 버린 루소를 공격했다. 그는 이런 글들을 익명이나 온갖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는 또한 개인 백과사전인 〈철학 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1764)을 만들었고, 동양의 환상과 〈자노와 콜랭 Jeannot et Colin〉의 사실주의를 대비한 철학적 이야기 〈백과 흑 Le Blanc et le noir〉, 유럽 철학들을 개관한 〈바빌론 공주 Princesse de Babylone〉와 성경이야기 〈하얀 황소 Le Taureau blanc〉 등을 썼다.

볼테르는 그가 선택한 주제(종교적 관용의 확립, 물질적 번영의 성장, 고문과 쓸모없는 처형의 폐지, 인권존중)로 끊임없이 되돌아왔다. 그가 이무렵에 일어난 몇몇 사건에 개입한 것은 이런 원칙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칼라스 사건이었다. 툴루즈의 상인인 신교도 장 칼라스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이들을 죽였다는 혐의로 고발당해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능지처참형을 받았다(1762. 3. 10). 분개한 볼테르가 이 사건에 개입한 덕분에, 불행한 칼라스는 명예를 회복하고 가족은 피해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 행렬을 모욕하고 십자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참수된(1766. 7. 1) 19세의 청년 슈발리에 드 라 바르의 사건에서는 볼테르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론은 그런 야만적인 행위에 냉담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이 사건에서는 재심 판결조차 얻어내지 못했지만, 다른 오심들은 무효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철학 운동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한편 문학은 그가 싫어하는 낭만주의 쪽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그는 폭력과 이국적인 장면을 좋아하는 대중에게 양보해서라도 비극을 구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면 〈중국 고아 L'Orphelin de la Chine〉(1755)에서 주인공 칭기즈 칸 역을 맡은 배우 르캥은 몽골 의상을 입고 나와서 물의를 일으켰다. 볼테르가 당대의 가장 위대한 비극 배우라고 평가한 르캥은 〈탕크레드 Tancrède〉에도 주역으로 출연했는데, 화려한 무대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볼테르의 마지막 성공작이었다. 그후에 쓴 비극들은 관중의 야유를 받고 공연이 중단되거나 아예 무대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에 놀랐다. 그는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극작가인 피에르 코르네유의 작품집을 출판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를 뒤에 덧붙였다. 코르네유와 셰익스피어를 이처럼 대결시키면, 프랑스 극작가의 우월함이 입증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으나, 그 비고전적 요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쓴 몇 편의 희곡에서 엄격한 고전주의로 돌아왔지만, 이것도 낭만주의로 가는 시대적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1778년 2월 10일 그는 〈이렌 Irène〉의 리허설을 참관하기 위해 28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이튿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3월 30일에는 아카데미에 출석하여 기립 박수를 받았고, 열광하는 관중들과 함께 〈이렌〉을 관람했는데 이런 흥분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 5월 18일 그는 요독증에 걸려 며칠 동안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5월 30일에 숨을 거두었다. 죽음은 평화로웠던 것 같다. 조카이기도 한 미뇨 신부가 유해를 셀리에르 수도원으로 옮겼고, 그는 이 수도원 묘지에 그리스도교식으로 묻혔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기인 1791년 7월에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볼테르에 대한 평가

 

볼테르라는 이름은 항상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에 그는 루소 추종자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1800년 이후에는 프랑스 혁명의 책임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왕정복고 시대와 제2제국 시대에 교회 반동주의자들의 지나친 처사는 중산층과 노동 계층에게 볼테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말에도 보수적 비평가들은 여전히 볼테르에게 적대적이었지만, 귀스타브 랑송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촉발했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이 모두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고는 볼테르 자신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서사시와 서정시는 사실상 죽어버렸고, 희곡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의 '콩트'는 계속 재발행되고 있으며, 그의 편지는 프랑스 문학의 가장 위대한 기념비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인류에게 값진 교훈을 남겼고, 이 교훈은 지금도 그 가치를 잃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의 정신은 엄격한 동시에 너그러웠다. "볼테르는 관료와 기술자 및 생산자들의 세계에서 꼭 필요한 철학자"라고 랑송은 말했다. < 출처: 다음백과-R.H.Pomeau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