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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Bawoo 2014. 12. 27. 04:22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계포구(堺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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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서행(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대간(臺諫)·종실(宗室)들은 사직(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계속(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사세(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권협(權悏) 등이 청대(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혁(赫)을 비롯, 이기(李墍)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 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轎)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의하면, 왕이 서울을 떠나자 난민(亂民)이 그의 문적(文籍: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고니시가 이끄는 1번대를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지인『서정일기(西征日記)』에 의하면 5월 7일 경복궁이 전소되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불탔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출성(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 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의 활동]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학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인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馣)·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䞭)·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현풍(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기병(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칠백의사(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국(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조ㆍ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1차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석성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을 논의하여,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의 제2차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임진년 10월 재정비된 관군과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1월에는 의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진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화의차 적진에 있으니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합세하여 진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으로 때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이여송의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 근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했고,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여 명도 이에 합세하여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칠성(七星)·보통(普通)·함구(含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니 고니시 등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내성(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도 모란봉 격전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여 평양 수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니시는 주야로 속행하여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했던 구로다는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황해도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를 시켜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군의 퇴로를 끊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자, 이여송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무르게 하고, 조선 제장(諸將)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퇴진하였다.

 

한편, 함경도 방면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서울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서울로 퇴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다.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그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여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마저 끝내 결렬되었다.

[정유재란]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䞭)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 7년 동안의 중요전투 상황을 보면 앞의 [표]와 같다.

 

[표] 임진왜란 중의 대소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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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의 사회상]

왜란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식량난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가(宮家)나 내수사(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募粟)·무속(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모곡(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관(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効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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