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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쪽에서 본 임진왜란과 이순신

Bawoo 2014. 12. 27. 11:38

7년전쟁에서 倭軍은 兵站線을 유지하지 못해 패전했다. 李舜臣의 制海權 장악에 의해 히데요시의 水陸竝進 전략은 파탄을 빚었다. 倭軍은 대량수송이 가능한 海上 보급로를 포기하고, 陸上 보급로에 의존했지만, 이것도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義兵들의 게릴라戰에 의해 봉쇄당했다.
 

東아시아 정치 地形 전면 재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誇大妄想家(과대망상가)’에 의해 저질러진 壬辰倭亂(임진왜란)에 의해 참전 3개국 모두가 치명상을 입었다.   
전쟁을 도발한 도요토미(豊臣) 정권은 終戰(종전) 2년 만인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망했다.

明은 막대한 戰費(전비) 부담과 遼東兵(요동병)의 원정 때문에 때마침 興起한 滿洲族(만주족: 建州衛의 女眞族)의 누르하치(후일 淸의 太祖)를 견제하지 못한 탓으로 1618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참패함으로써 亡國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참혹한 戰禍(전화)를 입은 朝鮮은 戰後에도 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허덕였다. 더욱이 國益보다 名分 중시의 졸렬한 외교에 의해 또 한 번의 침략전쟁(1636년의 丙子胡亂)을 당하고 말았다. 다만, 국왕(仁祖)이 三田渡(삼전도: 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淸 太宗)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함으로써 王朝의 명맥만은 이어가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망상은 이렇게 東아시아의 政治地形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東아시아 세계의 마이너리티였던 滿洲族(당초 인구 10만에 불과했음)은 3國의 7년전쟁 기간에 漁父之利(어부지리)를 획득, 東아시아의 覇者(패자)가 되었던 것이다.

滿洲族은 고구려와 발해의 하층계급인 靺鞨族(말갈족), 그리고 신라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女眞族의 후예이다. 서기 1115년,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정복국가 金의 太祖가 되었던 女眞族의 阿骨打(아골타)는 新羅金氏 함보의 6代孫임을 자처한 바 있다.


방위전쟁의 승리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는 임진왜란 이후 倭에 대한 포비아(공포심)가 짙게 배어 있는 것 같다. 히데요시의 戰爭指導(전쟁지도)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악랄했기 때문이다. 그는 戰果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군의 전사체에서 코를 베어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왜병들은 조선군 전사자뿐만 아니라 非전투원, 즉 여성·아이들의 코까지 소금에 절여 가마니떼기로 본국으로 보냈다.

그 증거물이 지금도 교토(京都) 東山 方廣寺에 남아 있는 ‘미미츠카(耳塚)’라고 불리는 귀무덤이다. 코를 묻었다면 당연히 ‘하나츠카(코무덤)’가 되어야 할 터인데, 왜 ‘귀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先祖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가 ‘用語의 장난’으로 다소간이나 완화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 있어 임진왜란은 침략군을 물리친 방위전쟁의 승리였다. 히데요시는 前後 30만 명의 大軍을 침략전쟁에 투입하고도 당초의 전쟁목표 달성은 커녕 땅 한 평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왜군의 침략을 앞두고 나름대로는 방어대책에 전전긍긍했다. 이를테면 三南 곳곳에 城을 축조하거나 보강했고, ‘將材’로 평가된 武將들을 三南의 兵使·水使로 배치했다. 각종 火砲와 板屋船(판옥선) 등 전함도 증강시켰다.
문제는 國初 이래의 文官 우월주의에 짓눌려 武將들이 제대로 육성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또한 明에 대한 事大外交로 ‘공짜 安保버스’에 편승해 온 타성에 의해 유사시에 작동시킬 국가 총동원 체제를 정비해 놓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100여 년 동안의 戰國시대를 거치면서 野戰 기술에 관한 한 ‘莫强’이라고 평가할 만했다. 왜군의 야전 능력을 뒷받침했던 新무기가 바로 그들이 ‘鐵砲(철포)’라고 불렀던 鳥銃(조총)이었다.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製 철포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3년. 곧 사카이(堺: 오사카) 등지에서 量産체제가 갖춰져 1575년 나가시노 싸움에서 鐵砲隊(철포대)가 등장했다. 나가시노 合戰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은 철포대를 3열 횡대로 배치하여 연속사격의 효과를 냄으로써 당시 일본 최강으로 지목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騎馬軍團을 궤멸시켰다.

이것은 地上戰의 양상을 변화시킨 혁명적인 新전법이었다. 조총을 主力으로 하는 전법은 이후 더욱 발전했다. 조총에 의한 사격과 기동은 임진왜란의 야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 왜군이 開戰한 지 1년도 못 돼 守勢(수세)로 몰린 까닭은 무엇일까.


倭軍이 兵站에 실패한 까닭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패전은 그들의 수송능력에 비해 兵站線(병참선)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병참선은 전쟁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生命線이다. 그것을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로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고 만다. 왜군이 兵站線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制海權(제해권)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閑山島 해전의 승리에 의해 李舜臣 함대는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의 水軍으로 하여금 부산포 일대의 좁은 해역을 벗어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水陸竝進(수륙병진) 전략을 파탄시키고,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의 육군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北進(북진)을 불가능하게 했다.

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을 점령한 후 ‘일본 水軍 10여만이 또 西海로 오게 될 것인데,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겠느냐’는 글을 宣祖에게 보낸 바 있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고니시는 왜군의 제해권 확보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宣祖 26년(1593)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1598)까지 영의정 겸 三南 도체찰사를 역임하며 뛰어난 戰時행정 역량을 발휘한 柳成龍(유성룡)은 그가 쓴 ‘懲毖錄(징비록)’에서 閑山島 해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초 敵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한번의 싸움에서 李舜臣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게 하여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柳成龍의 분석은 역시 명쾌하고, 그 視野도 넓다. 다시 이어지는 ‘懲毖錄’의 기록.

<또한 遼東의 金州·復州·海州·蓋州와 天津 등지에 敵의 사나운 발자국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明의 구원병이 육로로 나와 우리를 도와 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이 李舜臣의 한 번 싸움에 이긴 功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李舜臣 함대의 연속적인 승전 소식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에게 ‘이 전쟁에선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을 주었다.


조선 水軍을 얕잡아 본 일본 水軍將

개전 이후 陸戰의 연전연승과는 달리 海戰에서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水軍將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李舜臣 함대와 결전을 하도록 명했다. 위의 세 왜장은 히데요시의 국내 통일을 완성시킨 1590년의 오다하라(小田原) 전투에서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軍을 해상에서 봉쇄한 직속 정예 水軍將들이다.  

壬亂(임란) 개전 초기, 와키사카를 비롯한 구키·요시아키 등 왜군의 水軍將들은 陸路로 漢城 방면에 진출하고 있었다. 경상좌·우수군이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자 조선 수군의 능력을 아주 얕잡아 보고 육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특히 와키사카는 경기도 龍仁에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전라·경상·충청 3도 관찰사가 거느린 號曰 ‘근왕병 5만 명’을 단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붕괴시켜 기고만장하고 있었다.

당초 일본 수군은 부산포 방면에서 한반도 남해안을 西進한 후 서해를 북상하여 漢江을 통해 漢城으로 들어가는 병참선, 다시 북상하여 대동강 河口에서 평양에 들어가는 병참선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출격과 제2차 출격을 통한 7회 해전의 全勝에 의해 조선 수군은 부산과 김해 해역을 제외한 南海의 제해권을 회복했다.  

그제서야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에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군 측은 漢城 방면으로 북상한 와키사카 등 수군장을 남하시켜 함대의 재편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구키의 제2함대와 요시아키의 제3함대보다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사카의 제1함대는 7월6일 金海를 떠나 출전을 감행했다. 와키사카의 함대는 層樓船(층루선) 7척을 포함한 대선(아타케·安宅船) 36척과 중선(세키부네·關船)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이었다. 개전 이후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다.

한편 李舜臣 함대는 제2차 출전(1592년 5월29일~6월10일)을 마치고 본영(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와 일본 수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가덕도·거제도 해역에서 일본 군선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7월4일 李舜臣 함대는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 함대와 전라좌수영에서 합류했다. 7월6일, 연합함대는 西進해 오는 일본 수군을 틀어막기 위해 제3차 출동에 나섰다. 남해의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元均의 함대도 가세했다. 연합함대의 세력은 전라좌수영의 23척, 전라우수영의 25척, 경상우수영의 7척 등 板屋船(판옥선) 55척을 主力으로 하는 90여 척으로 구성되었다.

李舜臣이 이끄는 연합함대와 와키사카 함대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결전 하루 전인 7월7일, 샛바람(東風)이 심하게 불어 선박의 항행이 어려웠다. 연합함대는 唐浦(당포: 지금의 통영)까지 와서 숙영준비를 했다.

이때 경상도 牧者(목자: 말 먹이는 사람) 金天孫이 달려와서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거제도의 북단) 앞바다에서 見乃梁(견내량)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성과 거제도 사이의 견내량은 최소 폭 약 180m, 최소 수심 2.8m, 수로 길이는 약 4km의 긴 해협이다. 암초도 많아 판옥선·거북선 등 대형선이 싸우기에는 불리했다. 舊일본군 참모본부가 발행한 ‘日本戰史 朝鮮役’에 따르면 당일 이곳의 조류는 0.5노트 이하로 해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였다. 

7월8일 새벽, 연합함대는 거제도 서쪽 閑山島 해역으로 나아갔다. 李舜臣은 閑山島 앞바다를 決戰場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전투계획을 세웠다. 閑山島 앞바다는 넓고 수심이 깊어 연합함대의 작전에 매우 유리했다. 李舜臣은 花島·大竹島·解甲島(해갑도) 일대에 함대를 분산 배치했다.

와키사카의 함대는 견내량의 좁은 해협 안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연합함대는 왜군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먼저 판옥선 5~6척이 견내량으로 진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다가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했다.


閑山島 해전의 전투상보

와키사카 함대는 일제히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왜군 함대가 견내량을 거의 벗어나 넓은 바다로 나왔을 때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작은 섬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연합함대의 主力이 일시에 선회하여  鶴翼陣(학익진)을 형성하여 돌격을 감행했다. 鶴翼陣이라면 화기의 효율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횡대의 陣形이다.

연합함대는 왜군 함대를 포위망에 집어넣은 다음 地字銃筒(지자총통), 玄字총통, 勝字총통을 비롯한 화약무기로 일제사격을 가하여 먼저 적함 3척을 격침시켰다. 유인전술에 걸려든 왜함들은 사기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조류의 흐름이 변했다. 왜함들은 조류가 역류하는 견내량의 좁은 水路로 도주할 수 없었다. 李舜臣은 경상도 방면의 물길에 밝은 光陽현감 魚泳潭(어영담)의 건의를 받아 閑山島 해역의 조수 변화 등을 實査를 통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합함대는 틈을 주지 않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연속공격을 가하며 불화살과 철환을 쏘아 적선을 불태우고 적병을 사살했다.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판옥선은 전속력으로 다가가 왜함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부딪치기만 하면 왜함에 3尺(90cm)이나 되는 구멍이 뚫렸다. 이른바 撞破戰法(당파전법)이었다. 

順天부사 권준이 탄 배는 먼저 층각을 세운 왜의 대선 1척을 갈고리로 끌어당긴 다음 그 위로 뛰어올라 육박전을 전개함으로써 지휘관 이하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 광양현감 魚泳潭 역시 층각선에 뛰어올라 왜장 1명을 사로잡아 旗艦(기함)으로 보내왔다. 왜장은 이미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데다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장은 다른 왜병 11명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

사도첨사 김완은 아타케船 1척을 나포하여 왜장을 포함한 16명을 참수했다. 같은 방법으로 흥양현감 裵興立은 왜병 8명의 목을 베었고, 방답첨사 李純信도 왜병 4명의 목을 잘랐다.

이같은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은 倭寇 이래의 일본 수군이 長技로 삼던 전술이었다. 조선 수군의 등선육박전, 이것은 조선 수군의 드높은 사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 撞破전법에 의해 깨어진 왜선도 적지 않았다.

연합함대가 소멸시킨 것은 왜군의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이었다. 적군으로서 칼을 맞아 목이 잘린 자만 해도 90여명, 그 밖에 화살에 맞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3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와키사카는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 14척을 수습해 간신히 金海 방면으로 탈출했다. 그의 副將으로 유명한 해적 출신인 와키사카 사베에(脇坂左衛兵)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 등은 전사하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閑山島에 상륙했다가 할복 자살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되다 날이 저물어 연합함대는 견내량 서쪽에 진을 치고 휴식에 들어갔다.
閑山島 해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敵들의 함선을 불태워 소멸하는 데 치중했던 종전의 전법과는 달리 바짝 다가가서 적선을 요구금으로 끌어당긴 다음에 적선에 뛰어올라 왜장 이하 적병들의 목을 자른 것이었다. 이같은 등선육박전에 의해 9척 이상의 왜선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연합함대 수군의 불 같은 적개심과 투지, 그리고 그에 앞선 일곱 차례 해전의 경험에 의해 갑판 위에서의 短兵接戰(단병접전)의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와키사카 야스하루(1554~1626)는 누구인가. 오미(近江) 지방의 아사이(淺井)郡 태생인 그는 일찍이 히데요시의 막하에 들어가 1583년 ‘시즈가다케 싸움의 七本槍’으로 武勇을 떨쳤다. 시즈가다케 싸움은 戰國시대 최강의 武將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망 후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사이에 후계자의 지위를 걸고 전개되었던 결전이다. ‘七本槍’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곱 용사라는 의미이다.    


戰果 확대─安骨浦 해전

閑山島 해전 다음날인 7월9일, 安骨浦에 왜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구키의 2함대와 요시아키의 3함대가 와키사카 함대의 뒤를 따라오다가 閑山島 패전의 급보를 듣고 안골포로 숨어든 것이다. 

연합함대는 7월10일 새벽 안골포 앞바다로 진출했다. 안골포 선창에는 왜의 대선 12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현재 건설 중인 釜山新港과 바로 인접한 안골포는 입구가 병목처럼 좁고 수심이 얕아 大함대가 돌입하기 어려운 포구다. 연합함대가 두세 번 유인해 내려고 했지만, 敵들은 견내량-閑山島 해역에서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참패한 경험이 있는지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李舜臣은 판옥선의 지휘관들에게 교대로 안골포 선창으로 돌입할 것을 명령했다. 판옥선들은 종대 대형을 이뤄 연속적으로 진입, 각종 총통과 長片箭 등을 퍼부어 왜선 42척을 격파했다. 왜의 패잔병들은 육지로 올라 도주했다. 그렇다면 안골포 해전에서 패전한 왜장들은 어떤 수준의 장수들인가.

구키 요시다카(1542~1600)는 구마노(熊野)의 해적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 장수로 활약했다. 1578년 거대한 장갑선 6척으로 당시 일본 최강의 毛利 水軍에 궤멸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戰國水將 중 제1인자로 평가받아 이세(伊勢)·시마(志摩)의 3만5000석 영주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히데요시 밑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水軍 조직의 핵심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丁酉再亂을 앞두고 쓰시마에서 니혼마루(日本丸)라는 거대한 장갑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기동성의 저하로 實戰에는 사용되지 못한 것 같다.

가토 요시아키(1583~1631)는 16세부터 히데요시의 주고쿠(中國) 지방 공격전에 종군, 미키(三木)성 포위전에서 功을 세웠고, 시즈가다케 合戰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구키와 함께 ‘七本槍’의 1인으로 용명을 떨쳤다. 히데요시가 關白이 되면서 從五位下에 올랐다.  
          
閑山島 앞바다 싸움과 그 연장인 안골포 선창 싸움에서 연합함대는 도합 101척의 적함을 격침·소각했다. 이 두 번의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 장수들이 모두 대패함으로써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의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축성을 하도록 지시하는 등 전략의 변화를 도모한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수군은 약세를 면치 못했던 것일까.


일본 水軍의 근원은 海賊

우선 왜선의 구조가 취약했다. 예컨대 규모가 크고 견고하게 건조되었다는 아타케船(길이 약 33m, 폭 12m)조차 龍骨(용골)을 쓰지 않은 구조였기 때문에 포격을 받으면 쉽게 붕괴되고 말았다. 또한 일본 군선은 그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끼우고 ‘ㄷ’형 꺾쇠로 양쪽을 이은 사춤넣기(Dove-tail Join) 공법으로 제조돼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太宗 때부터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되었다. 주력선인 판옥선은 밑면이 평탄한 平底船으로 尖底船(첨저선)에 비해 물속에 잠기는 吃水(흘수)가 깊지 않고 선회 반경이 작아 배의 운동이 자유로우며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登船肉薄戰術을 어렵게 했다. 또한 外板의 겹이음 구조와 나무못(木釘)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군선을 압도했다.    

왜군이 보유한 조총의 명중률이 높았다고 하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서는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 정도여서 조선군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에서 열세였다.

조선은 1555년 乙卯倭變 이후 1563년(明宗 18년)까지 화포 제작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10만 근 이상의 銅鐵(동철)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明宗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총통 등 대형 화포를 만들었는데, 이때 제작한 화포류가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수군의 人的 자질 면에서도 일본 측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근원은 해적 집단이었다. 예컨대 海戰경험이 가장 풍부했던 구키(九鬼嘉隆), 李舜臣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水軍將들이 해적 출신이었다.

농민 출신 조선 수군의 강점

해적이란 기습전이나 게릴라전에는 능할지 모르나 통일적인 지휘체계 아래 전개되는 정규 해전에서는 취약하게 마련이다. 깡패 출신 병사보다 얌전한 농민 출신 병사가 전투를 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임란의 初戰에서 경상좌수사 朴泓(박홍)과 경상우수사 元均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휘하의 전선들을 불태우고 도주했던 것일까. 8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목격하고 전쟁공포증(war-phobia)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임란 발발 당시 李舜臣이 경상좌수사 또는 경상우수사였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數的 劣勢 함대였던 만큼 필승을 기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朴泓이나 元均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李舜臣은 7년전쟁 기간을 통틀어 敵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名將의 조건이다.

李舜臣은 임진왜란 全기간에 23戰23勝을 기록했다.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공이 눈부셨다. 5월7일의 玉浦해전에서 9월1일 부산포해전까지 10戰10勝을 거두었다.

李舜臣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소수의 敵 함대를 이길 만한 곳으로 끌어들여 싸웠다. 예외적 경우라면 일본 수군의 집결지를 기습한 부산포해전과 1597년 8월16일에 전개된 鳴梁해전 정도이다.  이제 임란의 全국면을 개괄함으로써 李舜臣의 역할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玉浦해전 승리에 의한 自信感

壬亂 도발을 앞두고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서해안에 위치한 나고야(名護屋)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30만 명의 大軍을 집결시켰다. 동원된 왜군 30만 명 중 15만8000명이 8개 부대의 원정군으로 편성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軍(1만8000명)을 선봉에 세운 왜군은 이키島와 쓰시마(對馬島)를 징검다리로 삼아 부산포에 잇달아 상륙했다.

왜군의 北上 속도는 재빨랐다. 4월30일 새벽 宣祖 임금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평안도로 몽진했다. 고니시의 제1軍은 5월3일 오후 8시경에 東大門을 통해 漢城에 1번 입성했다. 부산포에 상륙한 지 20일 만이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3만 명)은 다음날인 5월4일 오전 8시경에 南大門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漢城을 점령한 왜군은 1주일 정도의 휴식을 취했다.

바로 그 무렵인 5월7일, 거제도의 玉浦灣(옥포만: 지금의 大宇조선소 자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해전이 벌어졌다. 李舜臣 함대(전선 28척·협선 17척)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호리우치(堀內氏善)가 거느린 왜선 30척과 조우전을 벌여 敵의 대선 13척과 중선 6척 등 26척을 격파하고, 다수 왜병을 사살했다. 조선으로서는 임란 최초의 승리였다.

도도(1556~1630)는 수병을 옥포에 상륙시켜 분탕질을 하다가 李舜臣에게 기습을 당했다. 그런 만큼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패전에 대해 대수롭잖게 생각했지만, 조선 수군에겐 ‘한번 맞붙어 보니 일본 수군도 별것 아니더라’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도도는 전투가 약한 장수가 아니었다. 5년 후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元均의 함대(180척)를 궤멸시켰다. 그는 元均의 戰死로 통제사로 복귀한 李舜臣과 명량해전에서 다시 격돌, 군선 31척을 잃었다.       

漢城에 입성한 왜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5월11일.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에는 여러 왜장들에게 진격 및 점령목표를 정했다.
 
평안도에는 고니시 軍, 함경도는 가토 軍, 황해도는 구로다 나카마사 軍, 강원도는 모리 軍과 시마즈 軍이 진격하기로 했다. 병참선 확보가 主임무가 될 남부지방의 점령은 고바야가와 軍이 맡았다. 漢城에는 우키타 軍이 머물면서 경기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원정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1572~ 1655)는 당시 만 20세에 불과했다. 대장감은 아니었지만, 히데요시의 양녀 豪姬를 아내로 맞을 만큼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했다.

고니시 軍과 가토 軍은 임진강을 건너 開城을 함락시켰다. 開城에서 가토 軍은 함경도 방향으로 진격하고, 고니시 軍은 宣祖의 뒤를 추격했다. 이 시기에 李舜臣 함대는 사천해전(5월29일), 당포해전(6월2일), 당항포해전(6월5일) 등에서 전승하여 도합 적선 67척을 분멸했다.

특히 당포해전에서는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 1557~1612)가 소지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金부채를 노획했다. 가메이는 호키(伯耆)의 시카노(鹿野) 城主였다. 그는 대규모의 新田 개발, 동남아型 벼의 재배, 양잠, 製紙, 말의 사육 등 식산흥업에 성과를 올려 제1급 民政家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히데요시는 琉球(류구: 오키나와)를 점령하면 그곳을 가메이에게 영지로 주겠다는 뜻에서 지휘용 금부채에 ‘龜井琉球守’를 써서 주었다. 가메이는 조선반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여 그것을 처음으로 히데요시에게 상납했다. 당포해전에서 그는 침몰하는 旗艦에서 金부채를 엉겁결에 그냥 두고 퇴선했다. 李舜臣에게 노획된 金부채는 宣祖에게 진상되었다.   
    
고니시 軍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두 달 만인 6월16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미 宣祖는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義州에 피란해 있으면서 왜군이 더 북상하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가 明國에 歸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2000여 리에 달한 왜군의 兵站線

왜군 제1군(1만8000명)의 기동거리는 水陸 2000여 리에 달하고 있었다. 나고야로부터 부산까지 海路 약 150km, 부산에서 서울까지 陸路 약 400km, 서울에서 평양까지 陸路 약 300km였다. 가토 軍은 두만강변의 회령까지 진격해 있었다. 문제는 兵站이었다.  

병사 1명에 대한 하루 보급량을 1kg으로 잡으면 15만 병력에게는 150t의 물자가 필요하다. 30일간의 원정이라면 보급해야 할 물자는 4500t. 원정기간이 1년이라면 보급량은 5만4000t에 달한다. 임란 당시 왜군의 수송능력이나 해상·육상에 걸친 輸送路 사정으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운 수량이었다.
 
굶기지 않고 먹이기만 하는 보급이라 할지라도 병사 1명에 하루 500g이 소요된다. 문제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1만의 군사를 먹이기만 하려 해도 하루 5t의 식량이 필요하다. 500kg을 적재하는 수레 10대분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10일 걸린다면 100대분이다. 도로 사정이 나빠 20일을 요한다면 200대분이다. 

왜군의 병참에 있어 불리했던 것은 부산포 이후의 열악한 도로 사정이었다. 당시 부산포에서 漢城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제4대로)의 폭은 8자(2.5m)에 불과했다. 도로 사정을 나쁘게 해놓은 것은 조선왕조의 ‘소극적 국방대책’ 중 하나였다. 외침을 받아 퇴각할 경우 들판을 불질러 곡식 한 톨 남겨 놓지 않는 淸野작전도 高句麗 이래 韓民族 국가의 전통적인 방어 전략이었다.

수송을 담당하는 사람과 말도 길바닥에서 식량을 소비한다. 그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부대도 있다. 거기에도 물자를 떨구고 가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보급대는 적어도 마차 100~ 120대 정도로 편성된다. 그것으로 제1선 부대 1만 명은 겨우 10일 정도를 버틴다. 牛車를 사용하는 경우 적재력은 크게 늘어나지만, 戰線에 도착하기까지 馬車보다 훨씬 많은 날짜가 소요된다. 어떻든 수송대를 1개월에 3회 가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5만 대군의 장기 원정은 병참상으로 至難한 일이다. 만약 왜군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지대를 일거에 점령할 수 있었다면 왜군의 병참은 성공했을지 모른다. 거기서 수확한 곡물로 왜병을 먹일 수 있었을 터이다.    


先鋒將 고니시의 계산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의 대표적 武將은 누가 뭐래도 고니시 유키나가(?~1600)이다. 그의 多重人格을 이해하지 않는 한 임진왜란의 진상을 조감하기 어렵다.

그는 지금 오사카의 항만지역인 사카이(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조선 인삼과 꿀, 明國으로부터 들어오는 화장품의 원료(납제의 白粉)을 취급한 豪商이었다. 중계무역으로 번영한 사카이港에는 규슈의 하카타(博多)의 海商들이 출입하는 등에 의해 巨萬의 富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고니시는 家業인 무역에 종사하여 계획성과 실행력, 그리고 국제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것을 주목한 것이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1587년 사쓰마(규슈 南端의 가고시마)의 藩主 시마즈(島津)를 항복시킨 직후 쓰시마의 島主 소오(宗)에 대해 조선 국왕의 入朝를 교섭하도록 엄명하고 고니시에게 이를 감독토록 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얼마나 非현실적이고 무모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출병을 하여 조선을 피폐시키면 對조선 무역에 파탄을 일으키고 사카이의 번영도 쇠퇴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히데요시의 妄想을 깰 만한 힘은 없었다.

쓰시마 島主 소오 요시시게(宗義調)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 국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對조선 무역으로 살아온 宗氏였다. 入朝를 요구하는 使者를 조선에 보낼 처지도 아니었고, 조선 국왕이 入朝할 리도 만무했다. 조선을 침략하게 되면 前進基地가 될 쓰시마가 황폐화할 것 또한 뻔했다.

히데요시에게 엄명을 받은 요시시게는 고민 끝에 病死했다. 뒤를 이은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고니시는 그의 딸 ‘마리아’를 요시토시에게 결혼시키고, 宗氏의 가신들과 머리를 짜낸 결과 조선 국왕과 히데요시의 쌍방을 모두 속이는 ‘妙策(묘책)’을 추진하기로 작심했다. 즉, 히데요시가 日本열도를 통일했다고 통고하는 ‘일본국 王使’를 조선에 보내고, 답례의 通信使를 파견하도록 요청한다는 방식이었다.

1589년 6월, 고니시와 친밀한 겐소(玄蘇)를 正使, 소오 요시토시를 副使로 한 ‘일본국 王使’가 바다를 건너 서울로 들어와 필사의 교섭을 벌인 끝에 통신사를 부르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다. 黃允吉을 正使, 金誠一을 副使로 한 通信使는 1590년 11월 교토(京都) 소재 쥬라쿠다이(聚樂第: 히데요시의 私邸)에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조선 국왕의 國書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면서 ‘講信修睦(강신수목)으로 隣好(인호)를 두텁게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答禮의 國書로서 당연한 문구였다.


히데요시의 自尊妄大

고니시 및 소오가 漢文을 잘 모르는 히데요시를 어떻게 기만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이 파견한 ‘入朝’의 사신을 받아들인 것으로 오해했다. 自尊妄大한 히데요시는 더 나아가 조선통신사에게 ‘征明嚮導(정명향도)’, 즉 明國으로 진격할 왜군의 길 안내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武將들 사이에서는 조선 침략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았다. 히데요시의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히데요시의 동생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히데나가(秀長)도 內心 반대였다. 히데요시 다음의 실력자들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도 비판적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심리상태가 非정상적인 국제적 트러블 메이커였다. 高山國(臺灣)과 呂宋(필리핀)의 스페인 총독 등에도 외교문서를 보내 ‘태양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복속을 강요했다. 포르투갈領(고아) 印度 총독에게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일본 전토를 통일했다고 잔뜩 제 자랑을 한 후 복종을 요구했다.

고니시는 다시 한 번 ‘재주’를 넘었다. 히데요시가 말한 ‘征明嚮導(정명향도)’를 ‘假道入明(가도입명)’으로 바꿔치기 해서 통신사에게 전했다. 즉, ‘明國에 朝貢(조공)하러 가는 길을 조선으로부터 빌리고 싶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이 그런 사기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성격이 대쪽 같은 副使 김성일은 겐소와 소오에 대해 “이웃 나라를 속이지 않는 것이 信…, 利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義”라고 힐난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고니시는 조선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침략군 제1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그는 확전을 피하기 위해 早期 終戰에 매달리게 된다. 동래성 함락 때 생포된 울산군수 李彦誠(이언성)에게 書狀을 지참시켜 서울로 올려보냈던 것이다.

곧이어 尙州전투에서 생포된 日本語 通事인 景應舜(경응순)에게 書狀을 주어 上京시켰다. 이 書狀은 李德馨(이덕형)과 충주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李德馨은 겐소 등이 ‘일본국 王使’로서 조선 조정에 왔을 때 宣慰使(선위사)로서 서로 안면을 텄던 만큼 교섭에 도움을 될 인물로 판단된 듯하다.

이덕형은 경응순을 데리고 충주로 남하했지만, 충청도 竹山 땅에 이르렀을 때 충주의 敗報를 들었다. 이에 이덕형은 敵情을 탐지하기 위해 경응순을 先行시켰는데, 경응순은 北上하던 가토 軍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경응순이 협상에 반대한 가토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忠州회담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의 대응을 전혀 알지 못했던 고니시는 안달했다. 5월1일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렸지만, 그는 선두에서 말을 달렸다. 그로 인해 한때 후속부대와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후속부대가 그를 따라잡은 것은 5월2일. 왜군의 제1군은 楊根을 거쳐 龍津渡를 도하, 5월3일 오후 8시 東大門을 통해 漢城에 돌입했던 것이다.

고니시가 본 漢城은 죽음의 거리로 변해 있었다. 국왕, 조선군, 백성들도 모두 도주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浙江으로 가지 않고…”

漢城을 점령한 후에 히데요시가 발표한 구상은 氣高萬丈, 그것이었다. 明을 정복하여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을 北京으로 옮기고, 일본의 천황은 요시히토(良仁) 친왕이나 토모히토(智仁) 친왕, 中國의 關白에는 도요토미 히데츠쿠(豊臣秀次), 일본의 關白에는 하시바 히데노부(羽柴秀信)나 우키타 히데이에, 조선의 지배는 하시바 히데노부(羽柴秀信) 또는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 그 자신은 중국의 寧波에 居所를 두어 印度까지 아우르는 大아시아 제국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겠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히데요시, 그는 ‘日本 神國사상’의 원흉이었다.
漢城 점령 후 왜군은 1주일쯤 여기에 머물렀다. 보급과 병사의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다시 화평 교섭을 추진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생각대로 무력정복을 꿈꾼 가토는 고니시의 교섭에 불만이었다.

고니시의 태도는 확실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늪 속에 빠지는 것은 왜군 측이고, 조선의 참화를 깊고 넓게 하는 것은 화평에 의한 무역의 再開를 어렵게 만들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상인 출신답게 계산이 빠른 그에게는 화평 교섭을 벌이는 것 이외엔 최선책이 없다고 느낀 것 같다. 對馬島主 소오도 마찬가지였다.

5월13일, 고니시의 지시를 받은 승려 텐케이(天荊)와 소오의 家臣 야나기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는 임진강 對岸의 조선 군진에 가서 화평 교섭을 요구하는 서간을 건넸다. 그런데 가토는 그 다음날 교섭을 무시하고 전단을 열었다. 고니시의 기도는 좌절하고,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위장 화평교섭’으로 되고 말았다.

왜군은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 북상하여 開城을 점령했다. 여기서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눠져 가토·나베지마의 제2軍은 東進하여 동해안으로 나와 함경도로 북상했다. 고니시의 제1군은 그대로 북상하여 6월7일 대동강변까지 진출했다.

고니시는 여기서 부대를 머물게 하고 또 교섭을 벌이려고 했다. ‘懲毖錄’에 따르면 당시 柳成龍은 평양에 있으면서 고니시 軍의 병사 하나가 대동강의 東岸에 나무를 세워 글을 걸어놓고 가는 모습을 練光亭(연광정)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것을 수거해 본즉 예조판서 李德馨에게 보낸 고니시·야나기가와 시게노부·겐소의 서신으로서 화평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宣祖實錄’에 의하면 李德馨은 야나기가와·겐소와 대동강 위에 띄워 놓은 배 위에서 회담했다. 겐소가 말했다.

“일본은 귀국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동래·상주·용인에서 書契(서계)를 보냈는데도 귀국에서 답하지 않고 兵을 갖고 相接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遼東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않겠는가” 
 

李德馨의 입장에서 보면 겐소 등은 이미 세 번 이상 약속을 깬 장본인이었다. 즉, 1589년 가짜 ‘일본국 王使’로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통신사를 파견해 주면 좋겠다”고 속이고, 지난 4월28일에는 충주에서 회담을 하자고 해놓고 그전에 북상을 개시했고, 임진강에서는 사흘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 후 그 다음날 공격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측이 말하는 ‘교섭’이라는 것은 북상 태세를 정비하기 위한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李德馨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귀국이 中原을 범하려고 한다면 왜 浙江(절강)으로 가지 않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는가”

이것으로 회담은 끝났다. 교섭의 계기를 잡으려 했던 고니시의 희망은 단지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 고니시는 공세를 펼쳐 평양성을 점령했다. 그때 그는 조선군이 후퇴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유기한 양곡 10만 석을 노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고니시는 李德馨의 당당한 태도 때문에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이때까지의 교전상대는 조선의 지방 잡병이고, 조선 중앙군 主力은 패전하고 있지만 再정비를 통해 반격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고니시는 서전에서 승전했지만, 그 심리상태는 오히려 초조했다.

고니시가 만약 평양에서 앞뒤를 재지 않고 북진을 계속했다면 조선왕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宣祖는 압록강을 건너 明國에 歸附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니시 軍이 평양성에 머물고 있는 사이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왜군에 점령당한 지방에서 백성들의 저항이 전개된 것이다. 먼저 선비와 하급관리,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승려들도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義兵으로 불리면서 처음에는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점차 조직적인 반격에 나섰다.

경상도에서는 尙州 패전이 전해지면 郭再祐가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궐기, 순식간에 1000여 인의 勢를 이뤄 의령·합천을 해방시켰다. 郭再祐에 이어 金沔(김면)·鄭仁弘 등이 각지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고, 9월에 들면 朴晉이 이끄는 의병이 慶州를 탈환했다. 그리고 10월에는 牧使 金時敏 등의 분전으로 晉州城의 守城戰에 승리했다. 진주성 대첩으로 왜군의 전라도 공략작전이 좌절되고 말았다. 

전라도·충청도·경기도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나 각지에서 왜군의 행동을 제한하고, 兵站線을 차단했다. 평안도에서도 1000명의 승병부대가 활약했고, 함경도 의병은 鏡城(경성)을 탈환했다. 가을바람이 불자 왜군은 守勢에 몰리기 시작했다.


海戰의 定石에 충실했던 제독

경상좌수군·우수군은 개전 초기에 일전도 교환하지 않고 와해되었지만, 李舜臣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건재했다. 그는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수역에 출동, 玉浦·赤珍浦에서 왜선 41척을 침몰시켰다(1차 출동). 이어 泗川·唐項浦의 해전에서 왜선 60여 척을 불태웠다(제2차 출동).

남해의 연안 해역은 조류의 干滿이 격렬하고, 多島海의 특성상 해류가 복잡하다. 李舜臣은 조류 이용 등 南海의 지리적 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李舜臣은 천재적인 제독으로 회자되지만, 사실 水軍 지휘관으로서는 경험이 별로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壯年에 해당하는 32세 때(1576년) 무과에 급제한 늦깎이 장교였다. 곧 북변 女眞族 방비를 위한 武官으로 명을 받아 2년간 복무 후 서울로 돌아왔다. 1586년 다시 북변 함경도에 파견되었지만, 그의 결벽성이 상관의 미움을 사 女眞族 방위 실패의 죄를 뒤집어쓰고 병졸로 강등되는 ‘白衣從軍’의 처분을 받았다.
 
白衣從軍에서 풀린 그는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1580년 처음으로 수군 지휘관인 발포만호가 되었다. 발포만호도 재직 1년8개월 만인 1582년 1월 꼿꼿한 직무태도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했다.

그후 복직하여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그가 정읍현감에 제수된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기도하고 있던 1589년 12월이었다. 1년3개월 후인 1591년 2월, 진도 군수의 사령을 받고 막 부임하려고 하던 무렵, 이번에는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좌의정 柳成龍의 적극 薦擧(천거)도 있었지만, 그만큼 戰運이 급박하여 조정에서 장수감을 물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남해안의 조류에 해박한 부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대기동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海戰에 관한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해전의 ‘定石’에 충실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결전에 구사했던 鶴翼陣만 하더라도 그가 창안한 전술이 아니라 함대의 화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陣法인 것이다.

거북선도 이순신 휘하의 羅大用(나대용)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太宗 때 이미 건조한 바 있었던 돌격선이다. 왜군이 장기로 삼는 登船肉薄戰에 대처하기 위해 板屋船의 갑판을 철갑으로 방호한 船種인 것이다.    

閑山島 해전에서 대패한 사실을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大驚失色했다. 그는 閑山島 해전 직후인 7월14일,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 수군장들에게 앞으로 경솔하게 해전을 도전하지 말고, 거제도·가덕도와 낙동강 하구 일대에 築城할 것을 엄명했다.

이것은 일본 수군에게는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거제도 등지의 海口를 막아놓으면 조선 수군으로선 부산포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낙동강 하구와 이어지는 海路에는 높은 파도에 의해 水宗(물마루)가 형성되어 이곳을 통과하려면 노를 젓는 水夫들의 노동강도에 따른 피로 때문에 막상 海戰이 벌어지면 전선의 기동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후일의 얘기지만 원균이 지휘했던 함대가 대패했던 까닭도 무모한 부산포 진격작전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본 수군에 있어 전략의 大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해와 황해의 제해권 장악 기도를 포기하고, 어떻게든 쓰시마-부산 보급로의 확보에만 全力을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히데요시의 竹馬故友인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세 奉行(봉행: 히데요시 정권의 장관)과 더불어 4軍監의 하나가 되어 대본영인 나고야를 출항, 6월6일 부산포에 상륙했다. 마에노는 부하 2000명을 데리고 7월16일에는 漢城에 도착, 왜군의 전선사령부에 복무하게 된다. 그는 부임 직후인 7월 중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는다.

“南海 일대의 포구에 敵海賊이 출몰하여 그 위력을 떨쳐 와키사카·구키(九鬼)의 水軍이 한 번 싸운 바 대패해서 대선 150여 척을 대파당했다”(‘武功夜話’ 중에서)

위에서 ‘敵海賊’은 조선수군이다. 마에노는 또 ‘武功夜話’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먼저 파견한 兵糧船 다수가 敵海賊에게 不意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어 海中에 침몰했고, 양륙된 兵糧도 바닥을 보였다. 入京한 諸將들이 모여 협의, 이번에 殿下(히데요시)의 渡海(도해: 히데요시는 督戰을 위해 조선에 건너올 예정이었음)를 내년 봄까지 연기해야 하는 사정을 전달했다>

드디어 10월이 되면 부산포와 漢城을 연결하는 병참선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이에 왜군은 부산포와 漢城 사이에 22개 거점을 설치, 병력 4만~5만을 배치했지만, 부산포에 양륙된 병량은 제1선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倭兵

開戰한 지 6개월, 병참선은 단절된 왜군은 병량 부족에 허덕였다. 이에 더하여 한파가 몰아쳤다. ‘武功夜話’에 의하면 왜군은 凍傷으로 手足의 자유를 잃었고, 凍死者와 逃亡者가 끊이지 않았다. 軍議를 열어 대책을 협의해도 異見이 구구하여 결론을 얻지 못했다. 漢城의 전선사령부에서조차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일선부대의 형편은 더욱 비참했다. 더욱이 왜군은 夏服에다 짚신(草履) 차림이었다. 

1593년 1월7일, 李如松이 이끄는 明軍 4만, 조선군 1만이 평양성에 쇄도,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전투는 곧 끝났다. 병참선의 단절로 戰力을 유지할 수 없었던 고니시 軍이 야음을 틈타 평양성을 탈출했던 것이다.

고니시 軍은 140리 남쪽의 鳳山에 도착했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부대는 먼저 도주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주둔해 있던 白川(배천)으로 다시 南下했다. 당시 고니시를 따라 종군했던 선교사 프로이스는 로마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크리스천 영주인 甲斐 태수(黑田長政)가 주둔하고 있는 城塞(성새)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사흘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더욱이 고니시 부대는 군량을 1일분밖에 준비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는데, 주위 일대에는 눈이 덮여 먹을 풀도 발견할 수 없어 눈을 삼켜 겨우 연명했다. (中略) 조선인 및 중국인이 신고 있는 두꺼운 가죽신의 사용도 알지 못해 추위와 물기에 약한 짚신을 신었던 탓에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많은 병사는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떨어져 나가…”  

고니시는 또다시 開城으로 남하 제6군(대장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가게)과 합류, 1월16일 漢城까지 물러났다. 평양에서 승리한 李如松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輕旗兵 2만을 이끌고 1월27일 새벽 惠陰嶺(혜음령)을 넘어 碧蹄(벽제)의 골짜기에 이르렀다. 이제 곧 漢城이다. 안개가 짙게 끼어 視界가 불량했지만, 그대로 전진했다.

한편 漢城의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3奉行과 협의, 고바야카와 軍 2만을 북상시켜 明軍을 迎擊(영격)하기로 했다. 1월26일 고바야카와·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軍이 북상을 개시했고, 우키다도 本隊 2만을 이끌고 뒤를 받쳤다.

1월27일 오전 7시경 礪石嶺(여석령)에서 쌍방의 선봉대가 조우하여 격돌했다. 明軍은 騎兵이었고, 倭軍은 鳥銃과 刀槍을 지닌 步兵이 주력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내린 진눈깨비로 酒幕里 일대는 진흙탕이 되어 李如松의 기병은 말발굽이 빠져 기동력을 잃은 반면 왜군의 조총부대과 장창부대가 위력을 발휘했다. 참패를 한 李如松은 평양까지 후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 光州목사 權慄(권율)의 부대가 북상하여 幸州山城에 진을 쳤다. 幸州山城이라면 한강 하구와 漢城을 연결하는 목구멍에 해당된다. 더욱이 幸州山城에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왜군으로선 당면의 식량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幸州山城을 함락시켜야 했다.

2월12일 우키다 히데이에는 3만의 大軍을 투입했다. 1번대는 평양에서 후퇴한 뒤 휴식을 취했던 고니시 軍, 2번대는 이시다 미쓰나리·마에노 나카야스(前野長康), 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 4번대는 우키다 히데이에 자신이 지휘했다.

겨우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왜병 4000명이 전사하고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한 마에노(前野長康), 요시가와(吉川廣家), 이시다(石田三成) 등 무장이 부상했다.


왜군의 漢城 철수

幸州山城 전투의 패배 후 우키타 히데이에는 2월20일 漢城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왜장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앞으로 1개월, 정확히 말하면 4월1일에는 한 톨의 양곡도 없게 된다. 부산의 병량을 수송하려 해도 人馬를 입수할 수 없고, 수송대를 가동한다고 할지라도 도처의 산림에 도적이 충만, 飛脚 1인을 통과시키려 해도 城과 城 사이에 기병 50기 또는 30기와 弓矢·철포 100 또는 200정을 붙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昨今의 실정이다”

왜군의 再정비를 위해 부산포 주변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이에 왜장 전원의 동의를 얻어 히데요시 에게 보내는 書狀을 작성했다. 奉行인 구마야(熊谷直盛) 등이 書狀을 가지고 나고야로 급행했다.

3월20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漢城 주변에 포진한 왜군을 점검했다. 이 점검에서 고니시의 제1군은 64.5%의 병력을 잃고, 가토 軍도 45%의 소모율을 나타냈다. 제일선부대의 병력은 11개월 사이에 절반 가깝게 줄어들었다. ‘實員’ 중에도 부상자 및 병자가 많아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모리(毛利輝元)와 하시바 히데가쓰도 전염병을 앓았고, 다른 왜장들도 허깨비처럼 수척해졌다.

明國의 沈惟敬(심유경)이 漢城의 일본군 진영을 찾은 것은 이런 무렵이었다. 벽제관의 대패로 明측이 약세를 보였지만, 왜군 측도 골병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기뻐하며 심유경과의 협상을 고니시에게 맡겼다. 히데요시로부터 퇴각명령이 漢城에 도달한 날짜는 4월7일. 왜군은 4월18일 철퇴를 개시, 울산-부산포-웅천을  연결하는 남부 해안지대로 물러났다.

부산포로 후퇴한 왜병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武功夜話’에 따르면 쇠잔해진 그들은 먹이를 놓고 전우끼리 싸움질을 하는 약탈집단으로 변했고, 철포에 벌건 녹이 슬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전염병은 조선의 軍民들 사이에도 만연했다. 식량 부족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참담한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고니시의 모략전에 넘어간 宣祖

明과 日本은 沈惟敬과 고니시를 내세워 강화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강화협상은 진전될 수 없었다. 히데요시의 희망사항은 조선의 남부 4道를 할양받는 것이었지만, 明國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冊封(책봉)하는 선에서 강화를 성립시키려고 했다. 

강화협상은 1596년 11월에 완전 깨졌다. 재침을 기도한 히데요시는 그동안의 소강기를 육군과 수군의 재건 기간으로 활용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시고쿠(四國)의 왜장들에게 再침략의 준비를 다그쳤다. 왜군 14만1000명이 부산포 일대에 집결을 완료했다. 1597년 丁酉再亂의 발발이다.

이번에도 고니시는 제1군(1만4700명)을 거느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부산포에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던 고니시는 일대 모략전을 전개했다.

고니시는 곧 뒤따라 올 가토 기요마사 軍(제2군)의 도착일시와 항로를 알고 있었다. 가토 軍 1만여 명은 1월15일 울산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고니시는 이 기밀을 이용하여 李舜臣을 제거할 작정이었다.  

고니시는 가카케하시 시치다이후(梯七大夫)라는 밀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 자는 조선어를 잘해 고니시의 심부름으로 조선군의 진영에 들락거렸는데, 우리 역사책에는 ‘要時羅(요시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니시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진영으로 보냈다.

“和平을 방해하는 자는 가토 기요마사다. 가토가 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1월15일 바다를 건너 蔚山으로 들어온다. 조선군은 해전을 잘하니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 싸운다면 쉽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고니시는 가토를 李舜臣의 손을 빌려 죽이고, 곧이어 李舜臣도 요격하여 敗死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니시로서는 一石二鳥의 毒手를 구사한 셈이다.
 
李舜臣은 고니시의 술책을 꿰뚫어보았다. 劣勢 함대를 거느리고 蔚山 해역까지 진출하여 설사 가토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귀로에 일본의 優勢 함대에 포착되어 함대의 전부를 상실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도 宣祖 조정은 王命으로 李舜臣의 출전을 다그쳤다. 李舜臣은 그런 무모한 출전을 감행할 장수가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180척 규모의 함대를 위기에 빠뜨리기보다도 王命에 불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王命을 거부한 그는 함거에 실려 漢城으로 압송되어 고문까지 받았다. 李舜臣은 투옥된 지 28일 만에 출옥하여 일개 병졸로 白衣從軍을 하게 되었다.

7월15일, 삼도수군통제사 元均이 지휘한 180여 척의 조선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했다. 元均은 宣祖 조정의 강요로 일본 수군의 집결지 부산포를 공격하러 갔다가 아무런 戰果도 올리지 못하고 귀항 중에 요격을 받아 전사했다. 8월3일, 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再임명되었다.


作戰 내용을 사전 공개한 敵將

고니시는 연구가 더욱 필요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심복 要時羅를 다시 경상우병사 金應瑞에게 보내 가토를 놓친 것을 애석해하면서 일본군이 8월에 전라도로 침범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가토 기요마사 軍은 慶州로부터 밀양 혹은 대구를 통해 전라도로 진군하고 나의 부대는 의령·진주를 통과한다. 따라서 進路에 해당되는 지역의 노인과 아이들을 북쪽으로 피란시키고, 장정들을 뽑아 山城에 올라가 응전하는 것이 좋다. 또 경상우도로부터 전라도에 이르는 지방의 들을 쓸고 벼는 일찌감치 베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약탈이 불가능, 군량이 떨어지고 만다. 전라도를 점령하기도 전에 회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싸우는 상대에게 작전의 내용까지 사전에 귀띔하는 장수는 戰史에 유례가 드믄 일이다. 그렇다면 고니시는 왜 그런 통보를 했던 것일까.

히데요시는 再침공을 앞두고 勇戰의 증거물로서 ‘敵’의 코를 잘라 올 것을 왜장들에게 명했다. 당연히 저항력이 부족한 여자나 아이들이 희생될 것이 뻔했다. 천주교도였던 고니시는 이것을 예견, 나름대로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측이 고니시의 ‘통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 백성의 피난과 淸野작전은 민심 불안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李舜臣의 ‘亂中雜錄’에 의하면 도체찰사 李元翼과 도원수 權慄은 7월 公山山城(大丘府: 大邱市)·黃石산성(安陰縣: 咸陽郡)·岳堅산성(三嘉縣: 陜川郡)·鼎蓋산성(하동현: 하동군)을 방어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악견산성과 정개산성에는 병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즉, 전라도 방어를 위한 대책은 강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1597년 8월 초, 왜군은 수확기를 선택, 행동을 일으켰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이끄는 右軍 6만4000명은 양산에 집결해 밀양-거창을 거쳐 전주로 향발했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左軍 4만9000명은 사천에 집결, 河東으로 진격했다.

8월10일, 일본의 수군 7000명은 섬진강 하류 河東에 상륙, 고니시 부대에 합류해 북상하여 전라도 공략을 개시했다.

일본의 左軍은 8월18일 南原을 함락시키고 8월19일 全州에 입성하여 右軍과 합류했다. 그러나 경기도 남부까지 진출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가 稷山전투에서 明軍에게 패전하고, 9월16일에는 鳴梁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패전함으로써 일본 수군의 西海 진출이 저지되었다.

任亂 최후의 勝戰와 맞바꾼 名將의 죽음

西海 진출에 실패함으로써 일본군은 이번에도 兵站線을 구축할 수 없었다. 겨울철에 들어서자 朝明 연합군의 압력이 차츰 강화되었다. 일본군은 남해안지대로 퇴각, 倭城을 축조하거나 보강하여 농성했다. 이후 일본군은 守勢를 면치 못했다. 

1598년 8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교토의 후시미(伏見)城에서 병사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완전한 실패가 명백해졌다. 히데요시의 죽음이 감춰진 채 전선에는 철퇴를 촉구하는 지령이 전해졌다.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五大老는 공동으로 왜장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통보하면서 부산포에 집결하여 철퇴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순천 倭橋城(왜교성)에 농성 중이던 고니시는 바다를 봉쇄한 李舜臣에 의해 퇴로가 막혔다. 그는 사천 倭城에서 明의 西路軍을 대패시킨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昌善島에 주둔해 있던 소오 요시토시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500척의 함대를 몰고 고니시 구원에 나선 시마즈와 소오 요시토시를 李舜臣과  陳璘(진린: 明의 水路軍 대장)의 연합함대가 河東과 南海 사이의 해협에서 요격했다. 11월19일에 전개된 이 露粱海戰(노량해전)에서 李舜臣-陳璘의 연합함대는 왜선 200척을 격파했지만, 李舜臣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名將의 생명과 7년전쟁 최후의 승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海戰이 진행되던 가운데 고니시는 順天 왜교성에서 탈출했다. 왜군의 최후부대가 11월25일 부산포로부터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써 名分 없는 7년전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