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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가들의 사랑 이야기

Bawoo 2013. 10. 24. 23:13

화가.

캔버스 위에 모든 것을 쏟아내는 그들의 열정 그리고 사랑.

그들이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세기의 명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네, 고흐, 클림트, 모딜리아니의 작품,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사랑이야기.

 

모네와 까미유
빛의 화가 모네.

화가와 모델로 만나 죽는 순간까지 모델이 되어주었던 까미유.

봄 햇살 같은 모네와 까미유의 따뜻한 사랑이야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는 모네.

누구보다도 가정적이고 꽃과 나무를 사랑했던 화가.

그에게 가장 큰 정서적 안정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까미유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등잔불을 켤 수도 없었고, 음식과 물감을 살 돈도 없을 때도 있었고, 젖이 나오지 않아 구걸 까지 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행복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모네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델이 되어줄 수 있던 까미유.

그 당시 모네가 그렸던 그림속의 주인공은 거의가 까미유였을 정도였다.

 

<파라솔을 든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산책, 까미유 모네와 그녀의 아들 장>이라는 작품, 양산을 들고 산책을 하는 도중 화가를 바라보는 까미유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뒤에 서 있는 그의아이, 그리고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그리고 있는 화가.

그들의 사랑은 모네가 그리는 빛만큼이나 따뜻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도 오래가지 않아, 까미유는 병에 걸리게 된다.

까미유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던 모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가엾은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완전히 낙담해 있습니다. 당신께 또 하나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돈을 동봉해 드리겠으니 일전에 우리가 몽드 피에테에 저당잡힌 메달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 메달은 까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이라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주고 싶습니다.”

 

까미유의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는 모네는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뿐일 것이다.

 

까미유가 죽은 뒤 인상파는 몰락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외에서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던 모네는 꽃과 과일 등 정물화에만 집중했다.

아내를 잃은 슬픈 감정을 빛이 없는 아틀리에 안에서 정물화에 쏟아 부은 것은 아닐까.


후에 다시 파라솔을 든 여인과 같은 야외인물 습작을 남겼는데, 죽은 까미유를 상상하면서 그린 그림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까미유의 얼굴을 기억하고 표현할 수 없어서인지 흐릿하게 표현된 얼굴이 그려져 있다.

영원한 사랑이자 모델이었던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이 모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 <파라솔을 든 여인>1875 워싱턴, 국립미술관
2 야외 인물 습작 1886 파리, 오르세미술관
3 <까미유의 임종> 1879 파리, 오르세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했던 남자, 고흐.
사랑에 실패한 상처받은 영혼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채를 표현한 건 아닐까.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얼마 전까지 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고흐의 전시는 82일만에 관람객 600만 명돌파, 단일 전시관에서 국내 최대 관람객의 기록을 세우며 화제 속에 마감되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고흐를 외치고, 작품을 꼽아보라고 하면 해바라기를 외친다.

고흐의‘닥터 가세의 초상’은 현재까지 최고경매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생전의 고흐는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물감을 살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가난으로 동생 테오에게 돈을 받아 작품활동을 하고, 정신착란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결국에는 권총자살로 짧고 불행한 삶을 마치게 된다.


왜 고흐의 삶은 이토록 불행했을까 사람들은 고흐의 광기 어린 삶과 그의 불멸의 작품 속 색채들을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것들이라고도 말한다.

고흐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진 사촌 케이.

그것도 다섯 살 아이를 둔 엄마.

근친간의 금기된 사랑이었기 때문에 고흐의 사랑은 거절당할 수 밖에 없었고, 고흐는 그녀에게 매일 편지를 썼지만 읽히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왔다.

 

어느 날 고흐는 케이의 집에 찾아가게 되는데, 외삼촌은 그녀가 외출해서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테이블에는 아직 먹다 남은 그릇이 빈자리에 남아있었고, 고흐는 외삼촌이 그녀를 숨긴 사실을 알게 된다.

고흐는 테이블 옆에 있던 촛불에 손등을 대고“이 불꽃 속에 손을 넣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지방을 떠돌다 헤이그에 머물 때 동거한 매춘부 크리스틴(시엔)은 나중에 고흐가 귀를 잘라 선물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슬픔>이라는 작품 속의 모델인 시엔을 고흐는 태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여자에게 어떤 색깔을 입혀야 하나 창녀들, 심장이 토해내는 듯한 홍등가의 색깔과 헤이그 노동자들

헤어진 작업복 군청색...

 어떤 영혼들은 자신들 색깔을 튕겨내는 것만 같아. (중략)어떤 색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내 영혼의 빛깔이란다. 내 심장이 그녀 가슴에 닿는 순간 색칠하지 못한 이 그림의 여백은 그녀 심장 속에서나 꿈틀대겠지.”

 

이 편지 속에서 시엔을 생각하는 고흐의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진다.

 

4<귀를 자른 자화상> 1889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5 <슬픔> 1882 뉴욕, 근대미술관
6 사촌 케이와 그녀의 아들

클림트와 에밀리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이 작품 속의 아슬아슬한 키스를 기다리는 여인.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정확한 선묘, 화려한 색채, 금박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표현한 천재 화가 ‘클림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인 <키스>.

 

꽃이 만발한 들판 위에 금빛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된 두 남녀의 입맞춤을 그린 이 작품은 보고만 있어도 아슬아슬한 입맞춤의 순간이 느껴진다.

클림트는 이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감추어 싶어했고 끝끝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 그림을 위한 스케치에서 ‘에밀리’라는 이름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의 카사노바 클림트는 임산부의 나체를 표현해서 큰 논란이 되었던 <희망>의 모델로 알려진 미치 침머만을 비롯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열 네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살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에밀리의 청혼에도 클림트는 결혼이란 것은 시민사회의 가증스런 행위라며 끝내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청혼을 거절당하면서도 평생 그를 사랑했던 여인, 에밀리 글쓰기를 싫어하는 클림트가 4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에밀리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미치 침머만에게 보낸 것처럼 낯 간지러운 사랑이야기는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클림트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정신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

 

(클림트와 에밀리는 단 한번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에로티시즘이나 그의 문란한 사생활을 볼 때 에밀리는 확실히 특별한 존재였다.

클림트와 에밀리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이 작품 속의 아슬아슬한 키스를 기다리는 여인.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정확한 선묘, 화려한 색채, 금박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표현한 천재 화가 ‘클림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인 <키스>.

 

꽃이 만발한 들판 위에 금빛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된 두 남녀의 입맞춤을 그린 이 작품은 보고만 있어도 아슬아슬한 입맞춤의 순간이 느껴진다.

클림트는 이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감추어 싶어했고 끝끝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 그림을 위한 스케치에서 ‘에밀리’라는 이름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의 카사노바 클림트는 임산부의 나체를 표현해서 큰 논란이 되었던 <희망>의 모델로 알려진 미치 침머만을 비롯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열 네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살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에밀리의 청혼에도 클림트는 결혼이란 것은 시민사회의 가증스런 행위라며 끝내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청혼을 거절당하면서도 평생 그를 사랑했던 여인, 에밀리 글쓰기를 싫어하는 클림트가 4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에밀리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미치 침머만에게 보낸 것처럼 낯 간지러운 사랑이야기는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클림트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정신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

 

(클림트와 에밀리는 단 한번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에로티시즘이나 그의 문란한 사생활을 볼 때 에밀리는 확실히 특별한 존재였다.

클림트는 작품 속에서도 에밀리를 다른 여인들처럼 화려하고 육감적이기보다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꽃이 없어서 꽃을 그려드립니다.”

 

클림트가 에밀리에게 보낸 엽서의 글이다.

돈이 없어 꽃을 그려 보내는 클림트와 사교계의 일원으로 많은 부유한 남자들에게 숱한 선물을 받았을 에밀리에게 그 엽서는 어떤 의미였을까? 심장발작으로 죽음 가까이에 선 클림트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에 에밀리를 찾았고, 에밀리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밀리는 36년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클림트의 기억을 안고 살았다.

카사노바의 삶을 산 클림트였지만,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에밀리와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1 <키스> 1907-1908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2 <희망> 1903 오타와, 캐나다 국립 미술관
3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1902 빈, 역사박물관
4 클림트가 에밀리에게 보낸 자필 엽서 1908

모딜리아니와 잔느
미술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을..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만삭의 몸으로 생을 마감한 잔느의 사랑이야기.

지난 3월 16일까지 고양아람전시관에서 전시되었던‘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
고흐나 모네처럼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긴목의 여인을 보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행복하고 슬픈 사랑’왜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을까.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이 그의 재능을 탐낸 것인지 중학시절의 늑막염이 폐렴으로 폐렴이 다시 폐결핵이 되면서 그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 여러 곳을 다니며 조각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되었고, 후에 파리로 가서 조각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하지만, 병의 후유증으로 약해진 그의 체력으로는 조각이라는 육체적 노동을 감당할 수가 없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에 정착했으나 명성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집념과 경제적 불안정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술집을 전전하며 삶과 건강을 소진했다.

모딜리아니가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 때문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당시 미술학도였던 잔느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뛰어넘고 결혼해 딸을 낳는다.

 

이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잔느는 둘째를 임신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모딜리아니의 음주벽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어느 날 모딜리아니는 피를 토한 채 쓰러지고, 그 옆에 만삭의 잔느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잔느는 죽어가는 모딜리아니에게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게요”

 

라며 그의 임종을 지키고 다음날, 만삭의 잔느는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모딜리아니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모딜리아니는 잔느와의 3년이 짧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 많다.

 

눈동자가 없는 초상화를 그리는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는“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질문을 했고,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 것이다.”

 

후의 잔느의 초상화에는 모딜리아니를 바라보는 연민과 사랑을 담은 슬픈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데 모딜리아니는 단 하나의 자화상만을 남겨놓았다.

서로 마주보고, 눈을 통해 영혼을 알아가면서 그림을 그렸던 모딜리아니는 자신과 이야기를 하며 그리는 것은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5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느> 1917 개인소장
6 <잔느 에뷔테른느> 1918 예일대학 미술관
7 모딜리아니 사진과 자화상

7 모딜리아니

참고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마로니에 북스‘반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Magica Mel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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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주화실
글쓴이 : 행 복 한 나 그 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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