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며, 파리에 가서는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아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었다. 뛰어난 기교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낭만시대 음악에 큰 공헌을 했다.
리스트는 헝가리의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리스트는 여섯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금방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열두살이 되던 1822년 12월 데뷔했다. 카를 체르니는 리스트의 첫 정식 피아노 교사이자 마지막 스승이었다. 리스트는 프레데리크 쇼팽과도 친해졌지만 이는 곧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프레데리크 쇼팽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작곡가였던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 내 펜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
리스트가 지금 나의 연습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가 나의 머릿속의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네.
그의 연주를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라네.
1823년 파리로 옮겨간 리스트는 1824년부터 파에르와 레이하 밑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잠시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다. 1832년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의 공연에 다녀온 후 리스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고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한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 슈만, 장차 그의 사위가 되는 바그너 등의 당대의 음악가들과 화가 앵그르, 시인 하이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과 친분을 다졌다. 그는 연주 활동을 하면서 특히 작곡에 힘을 쏟아 많은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이 시절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을 알게 되는데, 이때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6] 스위스에서 동거를 하고, 1남 2녀를 둔다. 그러나 이중 아들은 폐렴으로, 큰딸은 출산 중 사망해 둘째 딸 코지마만이 아버지보다 오래 산다.
1847년 리스트는 바이마르의 궁정에서 케펠마이스터로 일한다. 이 시기 리스트는 자인-비트겐슈타인 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피아노 공연보다는 작곡에 주력할 것을 권한 사람도 공작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남편은 아직 살아 있었고, 교황청은 공작부인의 이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리스트는 1861년 로마로 옮겨갔다. 1865년 리스트는 예전의 희망대로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바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리스트는 <순례의 해>, <초절기교 연습곡>, <소나타> 등 원숙한 작품들을 써내기도 하였고, 단악장의 표제 관현악곡인 교향시를 창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페라의 선율을 기초로 화려한 환상곡을 써내기도 하는가 하면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 슈베르트의 <송어>, <마왕>등의 가곡들, 생상의 <죽음의 무도>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였다.
1876년부터 죽기 전까지 리스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쳐 바인가르트너, 실로티, 자우어 등의 명인을 배출하였다.
1886년 7월 31일 리스트는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최후 연주 여행을 가던 도중에 감기에 걸렸는데 이것이 폐렴이 되어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1개의 오페라(미완성의 오페라도 몇곡 있다.), 수십개의 합창곡과 교향시, 수십곡의 성악곡과 몇곡의 실내악곡, 천곡에 다다르는 피아노곡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 중 리스트가 가장 중점적으로 작곡한것은 피아노곡이다. 리스트는 그 스스로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매우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을 즐겨 작곡했다.
Dante Symphony S.109
리스트의 수 많은 피아노 곡들중 대부분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것인데, 그 당시 규모가 커 일반인은 듣기 힘든 곡들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일반인들도 즐길수 있도록 하였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곡에 음악적 영향력이 있는 리스트의 이름이 붙어져 출판됨으로써 그 작곡가가 알려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기 곡들은 반음계적 진행과 모호한 조성을 활용함으로써 인상주의를 예견해주고 있는 곡을 작곡하였다.
Hungarian Rhapsodies, S244/R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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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헝가리의 도보르얀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광대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영지를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었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후작의 궁전에서 열린 귀족들의 연회에서 아들의 피아노 솜씨를 선보이고, 이들로부터 매년 600굴덴의 후원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821년, 리스트는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거기서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수인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빈 궁정 악장인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11살의 나이로 빈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리스트는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당시 원장이던 케루비니가 외국인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교칙을 내세워 그의 입학을 불허했다. 음악원 입학이 좌절된 후, 리스트는 파에르와 레이하에게 개인적으로 푸가와 대위법을 배웠다. 이 무렵 그는 소년 피아니스트로 널리 이름을 날렸다.
182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피아노 레슨으로 돈을 벌며, 독서와 작곡에만 몰두했다. 그러던 중 첫사랑이 찾아왔다. 피아노 제자인 카롤린이라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카롤린의 아버지가 반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고, 이로 인해 리스트는 엄청난 절망에 빠졌다. 그는 신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했다.
2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면서 리스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핸디캡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그리고는 18살 때, 지적으로 무장한 핸섬한 청년이 되어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10년간 그는 위고, 발자크, 뮈세, 하이네, 비니, 들라크루아, 베를리오즈, 쇼팽 등 파리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1831년의 어느 날,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에 14시간씩 연습에 매진했으며, 그 결과 파가니니에 버금가는 달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1835년, 리스트는 파리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알게 된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 백작부인은 리스트보다 6살 연상으로 아이까지 있었지만 남편을 떠나 리스트에게로 온 것이다. 두 사람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10년 넘게 함께 살며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1839년에 리스트가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재개하면서 사이가 벌어졌고, 1844년에 완전히 헤어졌다. 백작부인과 헤어진 후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어린 시절에 떠난 이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헝가리 땅을 밟고, 헝가리 민속음악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47년,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있었던 한 연주회에서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공작부인은 리스트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줄이고, 작곡에 전념하라고 권유했다. 같은 해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 악장으로 취임했는데, 공작부인의 충고대로 이때부터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접고 궁정 악장 일과 작곡에만 몰두했다. 리스트는 궁정 악단의 지휘자로 수많은 작품을 지휘했는데, 이 경험이 관현악곡을 쓰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리스트의 대표적인 교향시가 대부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리스트는 공작부인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 공작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원천적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실망한 리스트는 또다시 성직자가 되겠다는 열망을 품었으며, 1865년에 마침내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를 '신부의 옷을 입은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리스트는 1869년까지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았는데, 이때 르네상스 음악을 들으며 종교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미사를 비롯한 대규모의 종교작품을 썼다.
1869년, 리스트는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 악장의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고국으로부터 새로 설립된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말에 리스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바이마르에서의 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 년 중 3개월만 부다페스트에 머무르기로 했다.
1886년 7월, 리스트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심한 감기에 걸렸고, 이것이 나중에 폐렴으로 발전했다. 그 길로 몸져누운 리스트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7월 31일, 75세를 일기로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피아노로 가능한 모든 테크닉을 작품 속에 구현한 작곡가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1838년에 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Grandes études de Paganini)〉이다. 모두 여섯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다섯 곡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위한 무반주 카프리스〉에서 주제 선율을 가져왔다. 연습곡 제1번은 〈카프리스〉의 5번과 6번, 제2번은 17번, 제4번은 1번, 제5번 〈사냥〉은 9번, 제6번은 24번을 주제 선율로 한 것이다. 그리고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라는 제목이 붙은 제3번의 주제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3악장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라 캄파넬라는 '종'이라는 뜻인데, 멜로디가 종이 땡땡거리며 경쾌하게 울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피아니스트에게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곡이다.
그 외의 피아노곡으로는 〈초절기교 연습곡〉과 〈사랑의 꿈〉, 〈죽음의 무도〉, 〈헝가리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이 있다.
리스트는 어린 시절에 헝가리를 떠나 헝가리 말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성공해 헝가리를 찾은 후 민속음악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은 이런 관심의 결과물이다. 리스트는 환상적이고, 영웅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이 강한 자유로운 형식의 작품을 광시곡(랩소디)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작품에서 낭만적인 감정과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 헝가리 집시의 정열적인 멜로디를 결합시켰다. 헝가리 광시곡은 헝가리 마자르 지방의 춤곡 차르다스(Csardas)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차르다스는 느린 템포의 랏산(Lassan)과 빠른 템포의 프리스카(Freska)로 구성되어 있는데, 랏산은 어둡고 우울하며, 프리스카는 빠르고 정열적이다. 리스트의 광시곡도 느린 부분과 빠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피아노를 위해 작곡했지만, 피아노를 관현악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 중 몇 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지금은 관현악 버전이 원곡인 피아노 독주곡만큼이나 자주 연주된다. 모두 12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2번이 가장 유명하다.
리스트는 교향시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교향시들은 다양한 상념과 이미지를 포괄한다. 한 부분에서는 낭만적인 사랑, 다른 부분에서는 전원 풍경, 또 다른 부분에서는 긴장과 갈등을 그리다가 끝에 가서는 마침내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다. 리스트의 교향시 중에서 1854년에 쓰인 〈전주곡(Les Preludes)〉은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의 〈시적 명상〉이라는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이 곡을 통해 리스트는 운명과 싸우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1부 〈봄의 정서와 사랑에의 욕망〉, 2부 〈생명의 폭풍우〉, 3부 〈사랑의 위안과 평화로운 목가〉, 4부 〈싸움과 승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교향시로 〈탓소, 비탄과 승리〉, 〈프로메테우스〉, 〈마제파〉가 있다. 리스트는 교향시뿐만 아니라 교향곡에도 제목을 붙였는데, 〈파우스트 교향곡〉과 〈단테 교향곡〉이 바로 그것이다.<다음백과>
* 영문 자료-Franz Liszt(영어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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