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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정책, 세계화, 민주주의

Bawoo 2015. 3. 21. 11:09

달러는 미국 통화지만 국제 통화이기도 하다. 미국은 이에 따른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미국의 통화정책은 전 세계경제에 지대한 파장을 미친다. 반면 미국의 통화정책은 늘 자국의 경제 상황에 입각해 결정돼 왔다. 1970년대 초 코널리 미 재무장관은 유럽의 재무장관들에게,

 “달러는 우리 돈이지만 당신들 문제다(Dollar is our currency, but it’s your problem)”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후 미국의 일방적 통화정책 성향을 꼬집는 말로 자주 인용돼 왔다. 2008년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취했을 때도 이의 향후 국제적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금융위기와 공황의 위험에 빠진 미국 경제를 구해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 미국도 이제 통화정책을 자기들 마음대로만 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내려감에 따라 미 연준은 금리 인상 시기를 재고 있다. 시장은 올 6월이냐 그 이후냐로 촉각을 세워 왔다. 그러나 그저께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은 금리 인상에 대해 다시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 중 인상을 시작하더라도 인상 속도는 매우 더딜 것임을 시사했다. 금리를 올려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달러 강세를 더 부추길까 두려운 것이다.

 지난 8개월간 미 달러는 실질실효환율 기준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같은 기간 내 최대의 절상 폭을 보였다. 주 이유는 미국이 곧 금리 인상을 시작할 것으로 예견된 반면 유럽은 제로금리에다 지난달부터 대규모 양적완화를 시작했고, 일본도 아베노믹스로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를 지속하고 있으며 중국마저 통화완화정책으로 대응해 상대적으로 달러 값이 크게 오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내 경제상황으로 보면 금리를 올려야 하나 유럽·일본·중국 등의 통화정책을 보면 금리를 올리기 어렵게 된 상황이다. 예전 같으면 수퍼 301조 같은 무역제재 수단을 내세워 다른 나라 통화, 환율정책에 압력을 넣기도 하겠지만 WTO시대에 그런 수단을 쓸 수 없을뿐더러 미국 스스로 취한 정책을 다른 나라들에는 못 하게 할 명분도 없다. 결국 미국 금리 정상화는 지연되고 다른 나라들의 통화완화정책도 지속돼 통화전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세계경제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20년 후 경제학 교과서에 오늘날의 통화정책이 어떻게 기록될지 몹시 궁금하다. 지도에 없는 길로 들어선 오늘날 각국의 통화정책이 세계경제를 침체의 늪에서 구해내고 정상적 성장궤도로 올려놓을 것인지, 아니면 1920~30년대처럼 통화전쟁으로 세계 교역을 위축시키고 다시 경제위기를 초래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개별국가의 경제상황과 입장으로 보아선 이해되는 정책이 전체의 조합으로 보아서는 앞길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금융시장에서는 국경이 없어졌으나 각국의 통화정책은 분명한 국경 논리로 진행되고 있다. 미 연준 의장은 미국 대통령에 의해 지명되고 미 의회에 출석해 통화정책을 보고한다. 다른 중앙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정책은 국경 밖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국경 내의 정치·경제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처럼 금융시장이 통합된 적 없지만 제도와 국경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제도와 시장 현실의 괴리가 오늘날처럼 커진 적은 없었다.

 민주주의 정치는 이러한 제도적 결함의 위험성을 더 깊게 하고 있다. 통화정책은 재정정책과 달리 의회의 통과 없이도 가능하다. 지금 주요 선진국들은 모두 심각한 정부 부채와 재정적자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경기대책은 통화정책에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 2008년 이후 경제성장은 정체돼 왔으나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자산은 3배가 늘었다. 미 연준의 경우는 5배 이상 늘었다. 국민은 통화완화정책이 세금처럼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비용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금리 부담이 낮아지고, 주가와 집값이 올라 반기게 된다. 기업은 자금 구하기가 쉬워져 좋고 금융기관들은 보유 채권의 가격이 올라 좋다. 이렇게 좋은 것을 과거에는 왜 하지 않았던가. 인플레 폐해와 금융위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 인플레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으며 각국은 물가 잡기보다 올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 사이 주가 등 자산거품은 계속 자라고 있다.

 저금리의 중독성은 매우 강하다. 세계경제는 이런 혼돈 속의 행진을 앞으로 더 지속하게 될 것 같다. 한국의 시중 여론과 정부는 한국의 통화정책도 이 행진 대열에 참여할 것을 압박해 왔다. 한국은행은 지난 주 기준금리를 0.25% 내려 이 행진 대열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러나 그 대열이 과연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어디로 인도하게 될지는 모르고 내디디는 발걸음이다.

* 중앙일보 - 조윤제 서강대학교·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