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타계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이하 경칭 생략)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였다. 그는 1979년 10월 16일 방한했다. 박정희는 포항제철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리콴유는 자존심이 강했다. 경주의 문화유산만 보겠다고 우겼다. 우리 정부는 포항공항에 내린 리콴유 일행을 포철을 가로질러 경주로 안내하는 꼼수를 부렸다. 하지만 그는 차창 밖의 포철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리콴유의 마음을 흔든 건 가을 햇볕 속에 영그는 황금 들판. “한국 농촌은 정말 대단하군요.” 안내하던 한국 외교관이 새마을운동과 통일벼를 자랑했다. 리콴유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였다. “놀랍네요. 농민들 배가 든든해지면 공산 혁명은 끝입니다.” 출국 전날 열린 청와대 만찬에서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이 눈앞의 정치만 따졌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리콴유는 회고록에서 “한국을 번영시키겠다는 박정희의 강한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서 “그 후 5일 만에 시해 소식을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줄곧 박정희와 덩샤오핑,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아시아 3대 지도자’로 꼽았다. 덩샤오핑은 다 아는 중국의 개혁·개방 인물이요, 요시다는 전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설계한 총리다.
요즘은 초·중·고교생들이 밥이 싫어 먹다 남기는 시대다. “또 옛날이야기냐?”고 해도, 70년 무렵엔 2월의 보리밟기와 10월의 이삭줍기는 학생들의 의무였다. 그만큼 한 톨의 식량이 아쉬웠다. 이미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기적으로 대접받지만, 솔직히 리콴유의 눈이 더 예리할 수 있다. 박정희의 녹색혁명이야말로 반만년 굶주린 한민족의 배를 채웠다.
미국은 50년대부터 ‘적색 혁명’을 막기 위해 ‘녹색 혁명’에 착수했다. 전 세계 농촌을 절대 빈곤에서 구원한 비밀병기는 ‘난쟁이 밀’. 줄기가 짧고 빳빳해 이삭이 많이 달려도 잘 버티는 신품종이었다. 연구 책임자였던 록펠러 재단의 노먼 볼로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박정희도 녹색 혁명에 안달했다. 중앙정보부까지 동원해 전 세계의 신품종 벼를 밀반입했으나 연거푸 실패했다. 통일벼의 아버지는 64년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연수를 간 서울대 농대의 허문회 교수였다.
허문회는 IRRI에서 이미 개발해 놓은 난쟁이 인디카 벼에 주목했다. 다수확이었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자포니카와 품종이 다른 게 문제였다.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교배는 불가능으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일본 농학자들에 의해 이 둘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허문회는 수백 차례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해 얻은 일부 돌연변이 종자를 다시 난쟁이 인디카와 교배해 번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는 통일벼를 밀어붙였다. 가을엔 김제평야 논에 직접 들어가 통일벼 낱알을 하나씩 셌다. 80~90알뿐이던 이삭마다 140알 이상 열렸다. 그날 박정희는 너무 기분이 좋아 막걸리 잔을 연거푸 비웠다. 통일벼 덕분에 50% 이상 쌀이 증산되면서 77년엔 자급자족까지 이뤘다. 한민족의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던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이다. 허문회는 2010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으며 두 달 뒤 타계했다.
지난해 총리 후보에서 물러난 문창극의 『역사읽기』엔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한 공동체가 번영을 누리려면 과거의 영광보다 고난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은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유월절마다 빙 둘러앉아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딱딱한 무교병(無酵餠)과 쓰디쓴 나물을 함께 씹어먹는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어제 리콴유의 부음에 전 세계가 떠들썩하다. 까다로운 입맛에 밀려 이 땅에서 통일벼가 사라진 지도 오래다. 정치가들 덕분(?)에 어느새 학교 무상급식은 물론 유기농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사치까지 누린다. 한편에선 몸에 좋다면 보리밥도 다시 찾는 시대다. 그렇다면 한번쯤 빙 둘러앉아 옛 통일벼로 만든 밥도 먹어보면 어떨까 싶다. 고통을 기억하고 오래도록 번영을 누리려면….
* 중앙일보 -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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