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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자찬 묘지명에 나오는 인물 5인 약력

Bawoo 2015. 6. 15. 22:19

* 민명혁(閔命爀)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명여(明汝). 할아버지는 응수(應洙)이고, 아버지는 백헌(百憲)이며, 어머니는 홍중주(洪重疇)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진사가 되고 곧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98년 홍문록(弘文錄)에 4점을 얻어 홍문관에 기용되었다.

 

1801년(순조 1) 부응교(副應敎)로서 황해도암행어사에 발탁되어서는 해주판관·수안군수·신천군수와 황해도의 병사·수사 등의 부정을 철저히 적발하여 징치하였다. 이때 해주지방의 염세(鹽稅)와 장연지방의 어전(魚箭)의 폐단을 통박하여 시정하게 하였고 군역의 불합리성을 바로잡게 하였다.

1803년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대사간이 되어서는 의리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어 그 토대 위에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1807년 이조참의에 올랐는데, 여기서도 그의 능력을 발휘하다가, 3년 뒤 다시 대사간의 지위에 올라 극진한 간쟁을 통하여 왕의 전횡을 막고 국정의 합리화를 꾀하였다.

총부(摠府)의 변통초기(變通草記)에 대한 말썽으로 중화(中和)로 귀양갔다. 3년 뒤 호군(護軍)이 되고, 다음해 1814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뒤 감독책임을 진 남묘(南廟)의 수리공사가 허술하다는 말썽이 생겨 파면되었다. 1년 뒤 다시 우참찬이 되고, 다시 3년 뒤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그해에 죽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 목만중( 睦萬中)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 목천성(睦天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경연(睦慶衍)이고, 아버지는 목조우(睦祖禹)이며, 어머니는 한명익(韓命翼)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6년(정조 10) 도사(都事)로 재직중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다. 1789년 태산현감(泰山縣監)으로 있으면서 불법을 자행하다가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대사간으로서 당시의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남인시파(南人時派)계열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주도하였다. 뒤에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다.

 

* 홍낙안( 洪樂安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노암(魯庵). 뒤에 이름을 희운(羲運)으로 바꾸었다. 안동 출신. 중우(重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보(亮輔)이고, 아버지는 복호(復浩)이며, 어머니는 박상진(朴象眞)의 딸이다.

남인이면서도 같은 남인들이 신봉하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공서파(攻西派)에 속하였다. 1787년(정조 11)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 등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의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다는 것을 이기경(李基慶)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들을 고발해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을 일으켰다. 1790년 증광문과에서 크게 만연하게 될 사학(邪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답안을 써서 병과로 급제, 가주서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진산에서 정약용의 외사촌이 되는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 권씨의 상장(喪葬)에 예를 지키지 않았으며, 외제(外弟)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죄인의 체포와 가택수색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당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는 사학의 무리를 섬멸하라고 재촉해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건의 확산을 바라지 않았던 채제공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단서가 없는데도 홍낙안이 모함할 마음에 사건을 과장했다고 정조에게 간하였다.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가주서(假注書) 자리에서 쫓겨난 뒤 그는 권일신(權日身)·이승훈 등을 천주교 두목이라고 지적해 신문을 받게 하였다. 권일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배길에서 죽고, 이승훈은 그의 고발이 모함이라고 주장해 석방되었으나, 평택현감의 관직이 박탈되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달레(Dallet,C. C.)에 따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주도로 귀양가서 20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아들 원모(元謨)도 기해교난 때 천주교를 박해하다가 경원으로 귀양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이기경( 李基慶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휴길(休吉), 호는 척암(瘠菴). 진일(震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봉령(鳳齡)이고, 아버지는 지평 제현(齊顯)이며, 어머니는 정언실(鄭彦實)의 딸이다.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89년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쁩힌 뒤 지평·감찰·예조정랑을 지냈다. 이때 이승훈(李承薰)·이벽(李檗) 등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 본 뒤 종래의 주자학과 다름을 알고 이를 배척하였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때 이에 온건적이었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경원에 유배되었다.

1794년 풀려나 1795년에 다시 지평이 되었으며, 이어 병조정랑·정언·이조좌랑을 지내고, 1802년(순조 2) 집의를 거쳐 1804년정순왕후(貞純王后)가 재차 수렴청정하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다시 단천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이남규(李南圭)의 탄핵을 받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1809년 다시 풀려났으나 이후 계속 탄핵을 받았다. 천주교를 공격하기 위하여 편찬한 『벽위편(闢衛編)』은 정조·순조시대의 천주교사연구(天主敎史硏究)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편서로 『사교징치(邪敎懲治)』가 있다.

 

* 서용보-http://blog.daum.net/wwg1950/496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