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세종의 후궁>신빈 김씨(愼嬪 金氏)

Bawoo 2015. 6. 29. 00:34

 

신빈 김씨
별명 소의 김씨 (昭儀 金氏)
귀인 김씨 (貴人 金氏)
배우자 조선 세종
자녀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왕조 조선 왕조
부친 김원 (金元)
출생 1406년
조선
사망 1464년 음력 9월 4일
조선
매장지 신빈 김씨 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국적 조선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년 ~ 1464년 음력 9월 4일)는 조선의 제4대 세종후궁이다.

 

 

 

생애

본관은 청주이며 김원(金元)의 딸이다. 원래 내자시(內資寺)에서 일하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에 원경왕후의 발탁으로 13세에 소헌왕후의 궁인이 되었다.[1] 훗날 세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고, 1427년(세종 9년) 첫 아들인 계양군을 출산하였다. 그 후 소의(昭儀)를 거쳐 1439년(세종 21년)에 귀인(貴人)에 진봉되었다. 당시 세종이 도승지 김돈에게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고 묻자 김돈이 신개 등과 의논해 귀인으로 승격시켰다.[1] 이후 정1품 신빈(愼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乳母)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1] 또한 그녀는 평소에 불교를 신봉했었는데, 세종이 죽고나서는 아예 여승이 되어 살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망한 막내아들 담양군을 위한 경문 인쇄 비용으로 조정에서 쌀 500석을 하사받았으며,[2]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단종이 그녀의 아들 의창군의 청원에 의해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

 

1464년(세조 10년) 음력 9월 4일 5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세조는 쌀, 콩등 모두 70석(石)을 부의로 내렸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산 131~7번지)에 있으며, 1994년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음력 9월 7일에 묘역에서 그 후손들이 제향을 하고 있다.

신빈 김씨 묘(경기 기념물 153호)                   

                                                                 

신빈 김씨의 묘역은 일반 사대부의 묘역을 따르지 않고 왕실의 원묘(園墓)를 따르고 있다.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묘역의 가장

윗부분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에 높이 2.2m, 둘레 24m의 봉분과 상석(가로100,세로 180cm), 혼유석, 향로석이 위치해

있다.   묘 주위에는 높이 230㎝의 묘비, 높이 200㎝의 4각 장명등, 250×55×50㎝의 문인석 2개, 가로 100㎝와 세로 180㎝의 상석

등이 있다. 묘갈은 전체 높이가 230㎝이나 비신은 157×57×25㎝으로 종 모양의 비갓이다. 문인석은 섬세하게 장식하여 여성적인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 곡항은 높이 1.5m에 50m로 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이는 성하원년(聖下元年)에 세운 것으로, 김수온(金守溫)이 찬(撰)하고 안혜(安惠)가 서(書)했다고

전한다.

가족 관계

신빈 김씨가 등장한 작품

주석

  1. 이동: 《조선왕조실록》 세종 84권, 세종21(1439) 1월 27일 2번째 기사
  2. 이동 《조선왕조실록》 문종 1권, 문종 즉위년(1450) 3월 16일 2번째 기사
  3. 이동 《조선왕조실록》 단종 3권, 단종 즉위년(1452) 9월 12일 1번째 기사

참고 자료

* 출처: 정보- 책 "조선노비열전"조선노비열전 / 자료 수집-위키백과 및 검색자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