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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

Bawoo 2015. 6. 27. 00:54

 

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
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The Massacre at Chios, 1824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가 약관 26세 때 그린 [키오스섬의 학살] 역시 매우 드라미틱한 작품이다.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고전주의자들은 "이건 키오스 섬의 학살이 아니라 회화의 학살이다"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들라크루아는 파리 시를 불태워버릴 사람"이라는 비방도 했다. 그의 낭만주의적 지향이 초장부터 얼마나 격렬한 반발을 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추하고 비참하고 잔인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있다고 주장한 이 화가는 견고한 고정관념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키오스섬의 학살' 사건은 1822년 그리스가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키오스섬 주민들이 식민 종주국인 오스만 튀르크의 잔인한 진압으로 수없이 학살되고 노예로 팔려간 사건이다. 유럽인들의 공분을 산 이 '인종 청소' 소식에 들라크루아 역시 격분했으며, 마침내 그림으로 표현해 살롱전에까지 출품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순도높은 상상을 통해 뒤쪽으로는 약탈과 방화 진압 · 처형 장면이 이어지고 앞에서는 포로로 잡힌 민중이 처형을 기다리는 장면을 구성했다. 피를 흘리고 몸부림치며 자포자기한 주민들의 모습은 공포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뿐아니라 상당히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비극적인 현실을 이렇듯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림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당대의 미술애호가들이 이 그림에 상당히 저항감과 반발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비록 단두대가 피를 부르는 격동의 역사를 살고 있었지만, 고전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예술이란 여전히 고상하고 품위 있는 그 무엇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이 그림은 일종의 모욕이고 도발일 뿐이었다.

    "이 그림 이후 19세기 미술은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라는 후대 미술사가들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 [키오스 섬의 학살]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우뚝 서게 된다. 낭만주의의 위대한 외침으로 자리 잡게된 것이다. 늘 자신의 미학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던 신고전주의 미학을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차가운 정확성은 예술이 아니다. 그런 기술은 완성된 기교를 보여주지만 거기에는 표현이 없다‥‥‥‥ 불행하게도 그 기교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냉각되고 내공상은 날개를 접는다. 들라크루아는 애써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바로 자기 안의 '위대한 열정'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낭만주의자로서 그는 "우울증 환자였고, 언제나 불만에 찬 사람이었으며, 영원히 미완성인 사람"(아르놀트 하우저)이었다. <출처: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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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afe.daum.net/jsseo43
    1822년 지중해의 작은 섬 키오스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이 그림은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르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부정적인 면이 더 컸지만.
    그리스인들이 많이 산다고는 하지만, 키오스 섬은 그리스라기보다 터키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리스 전체가 이미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사그라들던 19세기 초반, 유럽은 보수 반동의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대프랑스 동맹전쟁을 이끌던 오스트리아가 중심이 된 이 시기를 역사는 '빈체제'라고 소개합니다.

↑ 키오스섬의 학살 그림 구도

나폴레옹 시절, 오랜 독립 운동과 유리한 외교 지형을 통해서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던 그리스는 '나폴레옹 이전으로 모든 것을 돌린다'는 빈체제의 지도자 메테르니히의 정책 탓에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로 되돌아가는 유례없는 일을 당합니다.

1820년부터 그리스 독립전쟁이 격렬해지자 당연히 빈체제는 이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결정하죠. 그리스 독립 전쟁의 기세를 누르려는 목적으로 1822년 5월 말 투르크 군은 키오스 섬에 상륙합니다. 10만~12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키오스 섬에서는 곧 대규모 학살과 체포가 일어나고, 목숨을 잃은 이들 이외에 5만여 명의 남녀가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섬의 인구는 2만 명이 채 안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3개의 대륙에 걸친 강대국이었지만 19세기 후반 모든 지역에서 밀리면서 힘을 못 쓰던 오스만 투르크가 만만한 그리스를 상대로 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과잉 진압을 한 것은 누가봐도 분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곧 유럽 전체, 특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을 자극합니다. 역사와 문화의 가치가 점점 더 중요시 되던 때에 서구 문명의 요람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진 것, 그것도 다름 아닌 이슬람에 의해 주도되고, 현 체제는 그것을 방조하고 지원했다는 것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거대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하는가 하면, 각지에서 모금 운동과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게 되죠.

이 그림 역시 그런 흐름의 한 모습입니다.

"들라크르와는 역사가와 증인들이 전한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려 애썼다. 오스만 투르크 병사에 의해 납치 되어가는 젊은 여인과 이미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 혹은 망연자실한 인물들은 당시 유럽 언론에 전해져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키오스 섬 참상의 일부분이다."

들라크르와는 자신이 존경했던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이 두 개의 삼각형이 겹치는 구도를 시도했던 것을 모범삼아 자신도 이 그림을 희생자들이 모인 두 개의 삼각형을 만들어 완성하고 있습니다. 이 삼각형 구도는 하나로 있을 때 처럼 안정적이나 두 개 세력의 대립되는 점도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비평가들은 인체 묘사가 전통적인 법칙을 충분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과, 붓 자국의 파격적인 면을 들어 이 그림을 비난합니다. 그림이 전하고자 했던 주제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 비평가들은 키오스 섬의 학살 장면이 대중에게 줬던 충격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1912년에서야 비로소 그리스에 귀속되었을 때 들라크루와가 열정을 바쳐 그린 이 그림으로 기록된 학살과 비극의 역사는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

 

 

 

 

 

히오스 섬
원이름: Χίος

Chios NASA satellite image.jpg

지리

Nomos Chiou.png

위치

에게 해

좌표

북위 38° 24′ 동경 26° 01′ / 북위 38.400° 동경 26.017° / 38.400; 26.017좌표: 북위 38° 24′ 동경 26° 01′ / 북위 38.400° 동경 26.017° / 38.400; 26.017

면적

842.289㎢

최고점

펠리네온 오로스

행정 구역

그리스 그리스

북부 에게 주

히오스 현

인구 통계

인구

51936명 (2001 기준)

히오스 섬(그리스어: Χίος)은 그리스의 섬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에게 해에 자리잡고 있으며, 소아시아 해안과는 7km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강력한 상인 선적 공동체와 고유의 유향수지 및 중세 마을들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는 17세기의 수도원인 네아 모니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히오스 섬의 주요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의 이름도 "히오스"인데, 지역 주민들은 이 도시를 '호라'(Χώρα, 문자 자체의 뜻은 땅이나 시골을 뜻하는데, 보통 그리스의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나 중심 도시에 붙는 이름이다.)라고 부른다. 행정 구역상 히오스 섬은 북부 에게 주의 개별 을 이룬다.

 

고대에 이 섬은 "오피우사"(뱀이 있는) 또는 "피튀우사"(소나무가 있는)라고 불렸으며, 수많은 해외 강국들의 지배를 받았던 중세 시대에는 '시오'(제노바 방언: Scio), '키오'(이탈리아어: Chio), '사키즈'(오스만 투르크어: صاقيز)로 불렸다. 중심 도시는 '성'을 뜻하는 '카스트로'(Castro) 또는 '카스트론'(Kastron)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