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자레스키
미 휴스턴대 역사학 교수
미 휴스턴대 역사학 교수
부강한 큰 나라들끼리 뭉쳐 만든 연맹의 대표단이 지중해 소국에 찾아와 최후통첩을 했다. 소국이 연맹에 져 온 빚을 당장 갚고 주권을 이양하지 않으면 파멸을 각오하라는 서슬퍼런 협박이었다. 그러나 소국 사람들은 “우린 자유를 포기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자 연맹은 곧바로 이 소국을 공격해 파멸시켰다.
그저께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로 거부한 그리스와 유럽연합(EU)의 대치 상황이 아니다. 2500년 전 도시국가 아테네가 이끈 델로스 동맹과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밀로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자세하게 묘사한 이 밀로 섬의 비극은 지금 지구촌의 핫이슈인 그리스 사태를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면서 밀로 섬에 그리스 국가들의 연합체인 델로스 동맹에 들어오라고 요구했다. 아테네의 압박으로 동맹에 가입한 소국들은 아테네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밀로 섬은 이 때문에 동맹 가입을 거부했다가 멸망을 당하게 된다. 아테네의 그 유명한 민주주의는 주변의 소국들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이를 아테네의 ‘공포정치’라 불렀다. 아테네는 20년째 이어진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지친 시민들의 불만이 위험 수준에 도달한 것을 감지했다. 위기감을 느낀 아테네는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소국들을 적으로 몰아세우며 시민들에게 단합을 호소했다. 내부 모순을 밖으로 돌려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쥐어짜 정권을 유지하는 ‘야만정치’의 전형이었다.
그리스는 2000년대 초반 유로화가 출범하면서 10여 년간 호황을 누렸음에도 경쟁력을 키우는 대신 빚잔치를 즐기기에 급급했다. 그리스가 지금 겪는 고통은 모럴 해저드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를 밀로 섬처럼 일방적인 ‘피해자’로 간주해 동정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지금의 위기를 오로지 그리스 탓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그리스 사태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테네와 밀로 섬의 대립 당시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국가 주권과 초국가적 기구의 대립이다. 유럽연합은 스탈린이 지배하는 러시아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공포 때문에 탄생했다. 하지만 2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 위협이 사라지자 델로스 동맹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 또한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구성원들을 한데 묶을 힘을 잃어버렸다.
이런 진공 상황에서 돌연 새로운 형태의 ‘경제독재’가 유럽연합을 장악해버렸다. 유로화를 좌지우지하는 독일의 강압적 긴축정책과 인플레 방지에 혈안이 된 유럽중앙은행의 전횡이 그것이다. 여기에 결코 민주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유럽연합 각료이사회가 가세해 유럽은 전례 없는 ‘민주주의 결핍(democratic deficit)’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그리스 사태도 이런 민주주의 결핍이 부른 희생양이다.
역사가 토니 주트는 “‘이곳’의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의사결정이 ‘저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떤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는 밀로 섬에 ‘저곳’이었던 아테네 사절단과 다를 게 없다. 아테네나 유럽연합 모두 밀로 섬과 그리스에 거절의 여지가 없는, 강요나 다름없는 제안을 했다. 유럽연합은 “그리스가 좋든 싫든 그리스는 유럽에 속한다”면서 그리스 내부의 사회 불안과 정치 마비를 무시하고 긴축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그리스의 역대 정부와 벌였던 협상 내용도 일축했다. “강한 자는 힘으로 원하는 걸 행하고, 약한 자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로 밀로 섬에 델로스 연맹 가입을 강요한 아테네와 흡사한 행태다. 반면에 유럽연합의 전횡에 맞서 그리스 국민들이 구제금융 협상안을 거부한 건 밀로 시민들의 저항을 연상시킨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이 “모든 시대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책이 역사 속에서 갖는 의미가 어리석고 맹목적인 인간의 속성만큼이나 불변한다는 의미였다. 그의 친구였던 희곡작가 소포클레스도 고대 아테네를 망친 원인인 아테네인의 맹목과 오만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져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걸 보고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역설의 미학을 아는 투키디데스라면 어리석은 그리스 후손들이 유럽연합이란 새로운 델로스 동맹에 매달려 빚잔치를 벌인 끝에 아테네의 황금시절에 지어진 신전과 석상들을 경매에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될 것임을 생전에 예감했을 것이다.
* 중앙일보 - 로버트 자레스키 미 휴스턴대 역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