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우리에게 프란시스코 데 고야는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로 더 유명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옷을 벗은 마하’가 성인물 광고하는데 쓰인 걸 보고
기가 막혀서 웃었던 적이 있는데 전쟁과 폭력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처참함을 극도로 표현한 ‘1808년 5월 3일’ 이라는 작품과 ‘마하’를
한 작가가 그렸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제목이 ‘1808년 5월 3일’인 그림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은 조명의 위치나 인물의 크기, 시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색한 작품
이지만 화면 가득히 풍겨 나오는 공포와 처참함이 모든 것을 잊게 합니다.
우선 고야부터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고야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까지 궁정화가로 비교적 큰 문제 없이 화가로서의 생활합니다.
당시 스페인 왕이던 카를로스 3세의 궁정화가로 왕과 그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지금도 고야가 그린 초상화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야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그의 나이 47세 때 심한 고열을 앓고 난 후
양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일 입니다.
이 때부터 고야는 사람의 입술을 보고 의사 소통을 합니다.
68세가 되던 해에는 종교 재판에 출석해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유럽의 독재자들에게 맞선
우리의 영광스러운 봉기가 지닌 영웅적 행위’를 그렸다는 이 그림은 ‘1808년
5월 2일’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하루 차이가 나는 그림의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이 두 그림은 이틀 동안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그림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당대의 스페인 역사를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1790년 말 스페인은 아직도 100여년 전 ‘무적함대’를 보유하고 있던
당시의 영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부패가 심했고 프랑스에도 뒤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788년, 카를로스 4세가 아버지 카를로스 3세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습니다.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 (마리 앙트와네트의 남편입니다) 와는
사촌간이었습니다. 카를로스 4세는 왕비인 마리아 루이자, 수상인 고도이와 함께
프랑스 혁명이 끝난 프랑스의 자유주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고도이 수상은 좀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왕비인 마리아 루이자의 지지를
받았는데 세간에서는 지지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사람들은 수근 거리기도 했습니다.
고도이 수상은 나중에 고야에게 ‘옷 벗은 마하’ 와
‘옷 입은 마하’를 주문합니다.
모델은 고도이 수상의 숨겨 놓은 애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원래는 밀실에
‘옷 벗은 마하’ 위에 ‘ 옷 입은 마하’를 겹쳐서 걸어 놓았다가 위의 그림을 옆으로
치우면 바로 밑에 그림이 나오는 식으로 해 놓았다고 합니다.
스트립쇼를 연상하면 되는데 고야는 이 그림 때문에
나중에 종교 재판에 끌려가게 됩니다.
아래 ‘마하’ 시리즈 두 편을 눈여겨 보세요! .
어쨌든 세 사람이 스페인 정국을 주무르는 것에 반감을 품은 사람은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인 페르난도 왕자였습니다.
페르난도 왕자는 부왕을 폐위하고 아버지의 동지를
처단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연합할 계획을 세웁니다.
1807년 프랑스군이 포르투칼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오게 되고 1808년 카를로스 4세는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페르난도 왕자는 페르난도 7세가 됩니다.
이로서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지아 왕비, 고도이 수상의 3인 정치는 끝이 나고
왕위를 얻게 된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 군대의 요청을 적극 들어주라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근처의 조그만 도시로 카를로스 4세와 왕비,
페르난도 7세의 식구들을 초대하자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의
속 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아들인 페르난도 7세에게 다시 왕위를
부왕에게 돌려주라고 설득합니다.
아들도 할 수 없이 왕위를 부왕에게 다시 돌려주는데
아버지 카를로스 4세는 왕위를 받는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나폴레옹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왕비와 함께 넉넉한
생활비를 받는 조건으로 이탈리아로 자리를 옮깁니다.
아들은 6년 후 다시 왕위에 오르지만 그 동안은 프랑스의 한 성에서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왕족 식구들이 프랑스 국경 근처로 간 다는 소식이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알려지자 마드리드
시민들은 왕궁 앞에서 출발 준비 중이던 왕가의 마차들을 가로 막습니다.
시민들이 보면 정부의 주요 인원 전체가 프랑스의 포로가 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시민들도 처음에는 6~70명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립니다.
군중 심리는 묘한 것이어서 한 두 사람의 과격한 행위가 들 불처럼 모두에게 번져 나갔습니다.
프랑스 군인 몇 사람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군대에게는 가담하지 말라는 지시가 이미 내려져 있었지만
무기고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장교가 무기고에서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줍니다.
이날이 바로 ‘1802년 5월 2일’ 이었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2일' 입니다.
프랑스 군은 기회다 싶었을 것이고 이 날만 100명이 넘는 스페인 사람이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즉 ‘1803년 5월 3일’ 프린스페 피오 언덕에서 44명이 처형을 당하는데 고야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제 그림을 조금 자세히 드려다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가운데 흰 옷을 입을 사람과 총을 쏘는 군인들 입니다.
군인은 뒷모습만 보이는 익명의 존재로서, 자기들에게 맡겨진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더 섬뜩하고 차갑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은 앞에 놓인 등불을 혼자 받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더구나 이미 숨진 사람들과 옆의 사람들에 비해 거인처럼 느껴질 만큼 몸이 큽니다.
오른손 바닥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과 같은 자국이 있어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떠 올리게 됩니다.
더구나 숨거나 피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저항하는 듯한 모습에서
오히려 이 장면은 더 처연함을 줍니다.
흰 옷은 잠시 후 피로 붉게 물 들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의 혼란 속에 휩쓸려간 사람들 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나 주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피로 물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검은 하늘과 대비되어 흰 옷은 더욱 강하게 머리에 각인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 옆에 수도사 복장을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가톨릭이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수도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
피하고 싶은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계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고야가 비난의 뜻을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수도사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나 생생한 그림 때문에 한 때 고야가 ‘귀머거리 집’ 에서 망원경으로
이 장면을 보았다는이야기가 있었지만
고야가 ‘귀머거리 집’을 만든 것은 이 사건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틀린 이야기임이 밝혀졌습니다.
‘귀머거리 집’은 고야가 나중에 거주하는 집으로 집안에 끔직하게
무서운 그림들로 채우는 집입니다.
그 그림은 제가 가지고 있는 도판에서 보아도 정말 무섭습니다.
이 그림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은 공포입니다. 아마 그가 겪었던
전쟁에 대한 공포가 녹아 들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중에 ‘거인’ 이라는 그림입니다.
또한 고야는 자신의 피를 물감에 섞어서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칠고 즉흥적인
그의 그림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피카소가 그린
‘ 한국에서의 학살’ (625 전쟁을 묘사한 그림입니다)과 마네의
‘막시밀리아 황제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등을 돌린 차가운 병사들의 모습을 차용한 것들입니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이 두 그림은 산페르난도 학사원 창고에 있다가
나중에 미술관 창고로 옮겨졌고 훗날 프라도 미술관의 어두운 복도 한 켠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취향의 문제가 미술사 최대의 적’이라는 말은 이 작품에도 유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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