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제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논문
당나라와 싸우다 포로가 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공로를 돌에 새겨 무덤에 묻은 글)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유민의 이름은 고을덕(高乙德)으로 고구려 귀단성(貴端城) 성주였다가 당나라에서는 절충도위(折衝都尉·정4∼5품)까지 올랐다.
○ 고구려 귀족의 기구한 운명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계간지 ‘중국고중세사 연구’ 38호에 실릴 예정인 논문 ‘어느 고구려 무장의 가계와 일대기’에서 최근 발견된 ‘고을덕 묘지’를 번역하고 분석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을덕은 고구려 최고 귀족인 5부 중 순노부 출신으로 618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조부가 영류왕, 보장왕 2대에 걸쳐 왕실 재정을 맡았던 권력자 집안이었다. 고을덕도 귀단성 도사(道史·성주)가 되지만 당나라와 싸우다 43세 때 포로가 돼 끌려간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까지 발굴된 고구려 유민 묘지들은 자발적으로 당나라에 귀부(歸附)한 이들 또는 그 후손들의 것”이라며 “당에 대항하다 끌려간 유민의 묘지명은 고을덕 묘지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의 운명은 기구했다. 당으로부터 무관직을 받아 번장(蕃將·이민족 장수)이 된 그는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기도 했다. 그는 699년 81세로 사망한다. 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을 “동방의 땅이 천명을 당나라에 되돌렸다(東土歸命西朝)”라고 표현해 고구려를 ‘동토’, 당나라를 ‘서조’로 대비했다. 이 박사는 “묘지 역시 장사지내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를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두릉(杜陵) 북쪽에 묻혔다고 돼 있으나 묘지명의 출토 경위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 뤄양(洛陽) 주변 고미술상 등이 갖고 있는 묘지 자료를 조사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방한해 고을덕 묘지명 탁본을 처음 소개한 거지융(葛繼勇) 중국 정저우대 외국어대 교수는 “올 3월 묘지명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해 7월 탁본을 보게 됐다”며 “지개(誌蓋·묘지명의 덮개)가 전서가 아닌 해서로 쓰인 것이 이례적이지만 제작된 시대에 맞게 측천문자(則天文字·당 측천무후가 일부를 바꾼 한자)가 사용됐고, 궐자(闕字·황제 등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글자를 띄움)도 당대의 율령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 성 지안 현에서 발견된 퉁거우 12호분의 고구려 무사 벽화 모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고구려 말까지 ‘태왕(太王)’ 호칭
“조부 과(과)는 건무태왕(建武太王)에게서 중리소형(中裏小兄)의 관등을 받아….”
고을덕 묘지명에는 건무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건무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한 영류왕(?∼642)으로 살아 있을 당시 건무를 왕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돼 왔는데 그 실례(實例)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건무 ‘왕’이 아니라 ‘태왕’이라고 표현한 것이 주목된다. 태왕이라는 표현은 4세기 재위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으로 지칭한 모두루묘지(牟豆婁墓誌)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번 고을덕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말기까지 사용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연구위원은 “태왕이 여러 왕호 형식 중 하나인지, 왕을 높여 부른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묘지명은 고구려 지방제도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연구위원은 “묘지에 고을덕의 부친과 조부가 요부도독(遼府都督), 해곡부도독(海谷府都督)을 지냈다고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 최상위 지방관인 ‘욕살’”이라며 “고구려 지방 편제 연구에 관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 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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