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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버지, 할아버지를 죽게 한 명나라 장수]이성량

Bawoo 2015. 12. 10. 22:14

 

이성량(李成梁, 리청량, 1526년 - 1615년) 은 명나라의 무관이다. 요동총병(遼東總兵)으로서 요동(遼東) 일대를 통괄해, 여진족의 진무에 해당된다.

생애

자는 여계(如契). 일찍이 명나라로 건너간 이영(李英)의 4대손으로, 요동철령위(랴오닝 성 톄링)의 지휘첨사의 자리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융경 4년(1570년)에 요동총병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에 대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이성량은 군비를 확충하면서, 건주 여진, 해서 여진 등에 나뉘어 있던 여진족이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싸 싸우고 있는 것에 개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한 것으로,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올렸다. 이 시기,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후의 청 태조 누르하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요동을 통괄해, 지방의 실력자로서 할거 한 이성량은, 한편으로 군비의 유용 등 독직이나 전단이 많아, 만력 19년(1591년)에 탄핵 되어 실직되었다. 잠시 복직했지만, 만력 36년(1608년)에 파면되었다.

소생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운 이여송, 임진왜란과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 등 9명의 자식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이라 불렀다 한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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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李成梁)
《명사(明史)》 제238권 열전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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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은 자를 여계(汝契)라 했다. 고조부 이영(李英)이 조선에서 내부(內附)하여 세습 철령위지휘첨사의 관직을 받아 집안을 일으켰다. 이성량은 영용하고 강인했으며,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여 장수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세습 관직을 잇지 못하다가 40세게 겨우 제생(諸生)이 되었다.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의 기량을 인정하여 북경으로 데리고 왔다가 마침내 관직을 이을 수 있었다. 공을 쌓아 요동 험산(險山)의 참장(參將)이 되었다. 융경(隆慶) 원년인 1567년에 토만(土蠻)이 대거 영평(永平)을 침공했다. 이성량은 자원하여 공을 세우고 부총병으로 승진했다가 험산을 지키다가 요양(遼陽)으로 이동했다.

3년 4월에 장파실(張擺失) 등이 새하(塞下)에 주둔하자 이성량이 나가 싸워 참수하고 졸병 150여명을 섬멸했다. 남은 무리들이 멀리 도망치자 그 지역은 공지로 변했다. 이 전투의 공으로 다시 관직이 1등급 올랐다. 4년 9월에 신애(辛愛)가 대거 요동을 침입했다. 총병관 왕치도(王治道)가 전사하자 이성량을 발탁하여 도독첨사대리로 삼았다. 이 무렵 엄답(俺答)이 요새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삽한(揷漢)부의 우두머리 토만과 종부 흑석탄(黑石炭), 동생 위정(委正), 대위정(大委正), 종제(從弟) 난토(煖兎), 공토(拱兎), 아들 복언태주(卜言台周), 조카 황태길(黃台吉) 등의 세력도 자라고 있었다. 태령부(泰寧部)의 우두머리 속파해(速把亥), 초화(炒花), 타안부(朶顔部)의 우두머리 동호리(董狐狸), 장앙(張昂) 등이 그들을 도왔다. 동쪽의 왕고(王杲), 왕올당(王兀堂), 청가노(淸佳砮), 양길노(楊吉砮) 등의 무리도 역시 새하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과의 전쟁에서 10년 동안 은상질(殷尙質), 양조(楊照), 왕치도(王治道) 등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성량이 군비를 강화하고 장교들을 선발하여 4만의 병력을 확보한 후에 후하게 대접하자 명군의 위세가 재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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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5월, 적이 반산역(盤山驛)을 침공하자 지휘 소성훈(蘇成勛)이 나가 싸웠지만 막지 못하자 토만이 대거 국경으로 진입했다. 이성량은 탁산(卓山)으로 진출하여 부장 조완(趙完) 등에게 협격하여 적의 수미를 끊게 했다. 승세를 타고 적의 본거지를 공격한 이성량의 군대는 적의 부족장 2명과 군사 580명을 참수했다. 이 전투의 공으로 도독동지서리로 승진했으며, 세음(世蔭) 1천호를 받았다. 이듬해 10월, 토만이 600기를 거느리고 옛 요양의 북하에 주둔하여 주변 200여리를 장악하자 수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이성량이 다시 그들을 격파했다. 만력(萬曆) 원년에 다시 전둔(前屯)을 요격했다. 이어서 철령(鐵嶺) 진서(鎭西)의 여러 보(堡)를 격파했다. 이러한 공으로 다시 2등급 승진했다. 타안부의 올로사한(兀魯思罕)이 4천기를 이끌고 진입하자 이성량이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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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도지휘(建州都指揮) 왕고는 무순(撫順)의 마시(馬市)와 통했다. 왕고가 비어(備禦) 배승조(裵承祖)를 유인하여 죽이자 이성량은 그를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10월, 왕고가 다시 대거 침입했다. 이성량은 부장 양등(楊騰), 유격(遊擊) 왕유병(王惟屛)에게 병력을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참장 조보(曹簠)에게 나가 싸우라고 명했다. 사방에서 명군이 일어나자 적은 왕고의 영채로 모였다. 왕고의 영채는 높은 산악지대에 있었다. 그는 명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튼튼하게 구축했다. 이성량은 화기를 동원하여 공격하고 방책을 깨뜨렸다.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와중에서 파총(把總) 우지문(于志文), 진득의(秦得倚)가 먼저 성으로 올라가자 다른 장수들도 뒤따랐다. 높은 누대로 올라간 왕고가 우지문을 사살했다. 마침 거센 바람이 불자 사방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성량은 적 1,100여명을 죽이고 보루를 무너뜨린 후에 귀환했다. 이 공으로 좌도독으로 승진했으며, 세음 도지휘동지로 임명되었다. 큰 손실을 입은 이고는 병력을 동원하지 못하고 아합납(阿哈納)의 영채로 도망가 숨었다. 조보가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하자 이고는 남관(南關)으로 도망쳤다. 도독 왕태(王台)가 그를 잡아 바치자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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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3년인 1575년 봄, 토만이 장용보(長勇堡)를 침공하자 이성량이 격퇴했다. 겨울에 초화가 흑석탄, 황태길, 복언태주, 이아등(以兒鄧), 난토, 공토, 도자아(堵刺兒) 등 2만기를 모아 평로보(平虜堡)를 거쳐 남쪽으로 침략했다. 부장 조보가 격퇴하고 심양(瀋陽)까지 반격했다. 성 바깥에 진영을 펼친 것을 본 명군은 서북쪽의 높은 곳으로 이동했다. 명군이 화기를 발사하자 적은 치중을 버리고 도망쳤다. 명군은 하구까지 추격하여 승세를 타고 도강한 다음 1천여명을 죽였다. 이성량은 이 공으로 태자태보로 승진했으며, 세음으로 금의(錦衣) 1천호를 받았다. 이듬해 흑석탄과 대위정이 대청보에 바깥에 진지를 구축하고 금주(錦州)와 의주(義州)를 노렸다. 이성량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200리를 진격하고 적의 병영을 압박했다. 이 전투에서 적의 부족장 2명을 죽이고, 60여명을 사로잡았다. 만력 5년 5월에 토만이 다시 침입하여 하동(河東)에 병영을 구축한 다음 영기(零騎)를 파견하여 서쪽을 약탈했다. 이성량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한 다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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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만력 6년 정월, 속파해가 토만을 규합하여 침입한 다음 벽산(劈山)에 진을 쳤다. 이성량이 정자박(丁字泊)까지 진출했을 때 적은 막 기병대를 나누어 성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성량은 밤중에 요새를 나가 200여리나 진격하여 벽산의 적진을 공격하고 적의 부족장 5명을 침수하고, 430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태보로 승진하고, 세음 본위지휘사로 임명되었다. 3월에 유격 도승곡(陶承嚳)이 적의 장정보(長定堡)를 공격하여 470명을 죽이고 보고했다. 황제는 교외와 종묘에 제사를 올리고 대규모의 포상식을 거행했다. 이성량은 세습 지휘첨사를 받았다. 마침 어떤 자가 도승곡이 토만의 부곡(部曲)을 죽이고 가축을 훔쳤다고 떠들었다. 도승곡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그 자를 죽였다. 급사중(給事中) 광무(光懋)가 도승곡의 죄를 물어 죽여야한다고 주장하자, 어사가 광무의 말대로 처리하려고 했다. 병부상서 방봉시(方逢時), 독무(督撫) 양몽룡(梁夢龍), 주영선(周詠先) 등 도승곡과 같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사의 주청으로 여러 신하들의 은명을 모두 박탈했다. 6월에 적이 진정보(鎭靜堡)를 침공하자 다시 격파했다. 12월에 속파해, 초화, 난토, 공토가 사만, 황태길, 대소위정, 복아해(卜兒亥), 황홀태(慌忽太) 등 3만기를 모아 요하를 건너 동창보를 공격한 다음 요주까지 들어왔다. 이성량은 제장들을 요충지마다 파견하고, 친히 정예병을 선발하여 요새를 나가 200여리나 진격한 후 환산(圜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적의 부족장 9명을 포함한 840명의 적을 참수하고 말 1,200필을 노획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적은 황급히 물러났다. 논공행상에서 이성량은 영원백(寧遠伯)으로 봉해졌으며, 세록(世祿) 800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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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토만은 여러 차례 공시(貢市)를 요구했지만, 관문의 관리들이 허락하지 않자 원한을 품었다. 만력 7년 10월에 토만은 다시 4만기를 동원하여 전둔(前屯)의 금천영(錦川營)에서 깊숙이 들어왔다. 이성량은 제장들에게 진지를 지키라고 명한 후에 스스로 참장 양속(楊粟) 등을 거느리고 반격했다. 마침 척계광(戚繼光 1528~1588)도 지원에 나서 적을 격파했다. 아감자기 속파해가 홍토성(紅土城)을 거점으로 삼아 해주(海州)로 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병력을 나누어 금주와 의주로 들어왔다. 이성량은 요새에서 200리나 진격하여 곧바로 홍토성을 공격하여 적을 패주시키고 적 470명을 참수했다. 이동도독(迤東都督) 왕올당(王兀堂)은 오래 전부터 관전(寬奠)의 시장을 통해 명과 거래를 해왔다. 나중에 참장 서국보(徐國輔)와 그의 동생 서국신(徐國臣)이 시장 가격을 강제로 억누르자 왕올당은 조쇄라골(趙鎖羅骨)와 함께 자주 변경을 침략했다. 이듬해 3월에는 600기를 거느리고 애양(靉陽)과 황강령(黃岡嶺)을 침범하여 지휘 왕종의(王宗義)를 죽였다. 다시 1천기로 영전(永奠)을 침입하자 이성량이 반격하여 요새에서 200리나 추격했다. 적은 기병대를 앞세워 갑자기 반격하고, 보병은 산으로 올라가 북을 치며 소란을 피웠다. 이성량은 적을 크게 격파하고 750명을 참수한 다음 적의 진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 공으로 이성량은 홍토성을 받았다. 가을에 왕올당이 다시 관전을 침범하자 이성량의 부장 요대절(姚大節)이 격파했다. 이후로 왕올당은 세력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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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침략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토만은 다시 여러 부족의 병력을 모아 금주와 의주로 진출하여 우둔(右屯)과 대릉하(大陵河)까지 침투했다. 명군은 성과 보루를 견고하게 수축하고 강하게 저항했다. 이성량과 계진(薊鎭)의 병력이 힘을 합쳐 적을 물리쳤다. 성과를 얻지 못한 투만은 다시 2만기로 대진보(大鎭堡)를 통과하여 금주로 침공했다. 참장 웅조신(熊朝臣)은 굳게 수비를 하면서 부장 주지망(周之望)과 왕응영(王應榮)을 출전시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져 모두 전사했다. 적은 곧바로 소릉하, 송산(松山), 행산(杏山)을 공격했다. 이성량이 출격하자 적은 국경 바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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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9년인 1584년 1월, 토만은 다시 흑석탄, 대소위정, 복언태주, 뇌모대(腦毛大), 황태길, 이아등, 난토, 공토, 초호아(炒戶兒) 등과 연합하여 광령(廣寧)을 침범한 계획을 꾸몄다. 이성량은 경기병을 이끌고 대령보(大寧堡)에서 출격했다. 요새에서 400리까지 진출하여 오랑토(襖郞兎)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가지 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다. 명군이 철수하자 적은 다시 추격했다. 이성량은 반격하면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이성량은 적의 부족장 8명과 340명을 참수했다. 이 공으로 세록 100석과 세음 1등을 받았다. 4월에 흑석탄, 이아등, 소알청(小歹靑), 복언토(卜言兎)이 요양으로 들어왔다. 부장 조모가 장안보(長安堡)까지 추격했지만 적의 매복에 걸려 천총(千總) 진붕(陳鵬) 이하 317명과 말 460필을 잃었다. 적은 많은 사람과 가축을 끌고 퇴각했다. 이성량은 조보 이하 장병들의 패전을 불문에 붙였다. 10월에 다시 토만이 속파해 등과 연합하여 10만기를 이끌고 광령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단산보(團山堡), 반산역(盤山驛), 십삼산역(十三山驛)로 병력을 돌려 노략질을 한 후에 의주를 공격했다. 이성량이 출격하여 퇴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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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10년 3월, 속파해가 동생 초화와 아들 복언토를 이끌고 의주를 침입했다. 이성량은 진이보(鎭夷堡)에 매복하고 적을 기다렸다. 속파해가 침입하자 참장 이평호(李平胡)가 활로 겨드랑을 맞혀 말에서 떨어뜨렸다. 창두(蒼頭) 이유명(李有名)이 재빨리 달려나가 참수했다. 도적이 도망치자 추격하여 100여명을 죽였다. 초화 등은 통곡하며 후퇴했다. 속파해는 20년 동안 명의 변경을 괴롭히다가 마침내 전사했다. 보고를 받은 만력제는 크게 기뻐하며 이성량을 세음 금의지휘사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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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타이는 왕태(王台)의 장남 호아한(虎兒罕)에게 의탁했다. 아타이는 왕태를 아버지로 받들며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다. 왕태가 죽자 호아한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아타이는 북관(北關)에 붙어서 호아한을 공격했다. 또 여러 차례 고산(孤山)과 신하(汛河)를 침공했다. 이성량이 출격하여 조자곡(曹子谷)에서 격파하고 1천여명을 죽였으며, 말 500필을 노획했다. 아타이는 다시 아해(阿海)와 연합하여 침입했다가 심양성의 남쪽 혼하(渾河)에서 대패하고 도망쳤다. 이성량은 무순을 나가 고륵채에 화공을 퍼붓고 아타이를 사살했다. 이어서 아해의 성채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2,300명을 죽였다. 이로써 왕고의 부족도 전멸했다. 이 공으로 이성량은 세록 100석과 세음 지휘첨사를 상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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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의 청가노와 양길노는 평소에 남관과 원수지간이었다. 왕태가 죽은 후에 여러 차례 왕태의 차남 맹골패라(猛骨孛羅)를 공격했으며, 토만, 난토, 황홀태에게 군사를 빌려서 변경을 침범했다. 11월에 순무 이송(李松)이 비어(備禦) 곽구고(霍九皐)를 시켜 공시를 허락하게 했다. 청가노, 양길노가 2천기를 이끌고 진북관으로 왔다. 이송과 곽구고는 그들의 병력이 강한 것을 보고, 겁이나서 300기만 들어오게 했다. 이송은 무사들을 곁에 숨겨두고 두 사람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공격하려고 했다. 마침 청가노와 양길노는 관문에서 저지되자 말에 앉아서 불손한 태도로 노려보았다. 이송이 꾸짖자 곽구고가 휘하에 명을 내리려는 순간 두 사람을 호송하던 무사들이 칼을 뽑아 곽구고를 공격했다. 잇달아 호위병 10여명도 피살되었다. 소란이 발생하자 매복했던 명군이 달려 나와 두 사람과 호위병들을 공격했다. 청가노와 그의 아들 올손패라(兀孫孛羅), 양길노와 그의 아들 합아합마(哈兒哈麻)를 비롯한 전원이 피살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성량은 요새를 나와 남은 무리들을 공격하여 1,500명을 참수했다. 이성량은 이 공으로 세록 200석을 받고, 전에 받은 세음 지휘첨사에서 금의위지휘사로 바뀌었다. 이성량이 요새에서 나왔을 무렵 초화 등의 수 만기가 포하(蒲河)와 대령보를 공격했다. 6일 동안의 방어전 끝에 적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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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13년인 1588년 2월, 파토아(把兎兒)가 아버지 속파해의 원수를 갚으려고 움직였다. 그는 종부 초화, 고종사촌 화대(花大)와 함께 서부의 이아등과 연합하여 수 만기를 이끌고 심양을 침공했다. 적은 곧바로 퇴각하여 요하(遼河)에서 유목을 하면서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침범할 것이라고 떠들었다. 이성량은 순무 이송(李松)과 함께 몰래 부교를 설치하여 요하를 건넌 후에 요새를 넘어 150리 진출하여 재빨리 진지를 구축했다. 적도 미리 그 사실을 알고 무리를 정돈하여 반격했다. 이성량은 친히 진지 앞으로 나와 싸움을 독려했다. 이송의 후진도 잇달아 출격하여 적 800여명을 참수했다. 이 승리로 이성량은 세록 100석을 받고, 금의지휘사에서 도지휘사로 승진했다. 5월에 적이 다시 심양을 침범하여 정예기병대를 매복하고 명군을 유인했다. 유격(游擊) 한원공(韓元功)이 추격하다가 전사했다. 윤 9월에 다시 여러 부족장들이 포하(蒲河)로 침공하여 비장 여러 명을 죽이고 대규모의 약탈을 자행했다. 이어서 서부의 은등(銀燈)도 요양과 심양을 노렸다. 이성량은 무장 이평호을 시켜 요새를 나가 350리 진출하여 은등의 진영을 격파하고 적 108명을 참수했다. 여러 부족장들은 그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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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14년인 1589년 2월, 토만의 부장 일극회정(一克灰正)이 파토아, 초화, 화대 등과 규합하여 토만의 여러 아들과 함께 요양을 침공하려고 했다. 이성량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부장 양섭(楊燮), 참장 이령(李寧), 이흥(李興), 손수렴(孫守廉) 등을 이끌고 경기병과 함께 진변보(鎭邊堡)로 나갔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행군하여 200리를 진격하자 가가무림(可可毋林)에 이르렀다. 마침 거친 바람과 번개가 몰아치자 적은 명군의 진격을 깨닫지 못했다. 도착했을 무렵 거짓말처럼 날씨가 말아지자 적은 크게 놀라 빗발처럼 활을 쏘았다. 명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출전하여 적의 장교 24명과 군사 900명을 참수했다. 10월에 적은 약 8만기의 병력으로 진이보를 비롯한 여러 보를 공격하다가 5일 후에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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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15년인 1590년 봄, 동서부가 연합하여 침범했다. 8월에 다시 약 8만기가 진이보를 침공했다. 10월에 파한대성(把漢大成)이 토만과 규합하여 10만기로 진이보와 대청보를 침입했다가 며칠 후에 퇴각했다. 북관이 무너지자 청가노와 그의 아들 복채(卜寨), 양길노와 그의 아들 나림패라(那林孛羅)가 점차 강송해졌다. 그들은 남관의 호아한과 그의 아들 알상(歹商)을 괴롭혔다. 남관의 세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안 이성량은 그들에게 북관을 함께 치자고 권유했다. 이듬해 5월, 이성량은 직접 그들의 소굴을 공격했다. 복채는 도망쳤다가 나림패라와 힘을 합쳐 성에서 버텼다. 사방에서 성을 포위했지만 함락하지는 못했다. 결국 공성용 투석기를 사용하여 성의 외곽을 무너뜨린 후에 간신히 2개의 성을 함락하고 500여명을 죽였다. 복채가 항복하겠다고 하자 다시 침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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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17년인 1592년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해였다. 3월에 적은 의주를 침범했다가 다시 태평보로 들어와 파총(把總) 주영수(朱永壽)와 그의 부대를 전멸시켰다. 9월에 뇌모대가 백홍대(白洪大), 장앙(長昂) 등과 함께 3만의 병력으로 평로보(平虜堡)를 침공하여 비어 이유년(李有年)과 파총 풍문승(馮文昇)을 살해했다. 이성량의 선봉도 수 백명이 죽었다. 적은 심양의 포하와 유림(楡林)를 약탈하고 8일 후에 철수했다. 이듬해 2월, 복언태주, 황태길, 대소위정 등 4부족이 차한탑탑아(叉漢塔塔兒)와 연합하여 5만기를 이끌고 요양, 심양, 해주, 개주(蓋州)를 침입했다. 이성량은 몰래 요새를 나가 기습했다가 매복에 걸려 군사 1천여명을 잃었다. 그러나 곧바로 반격하여 적 280명을 참수한 공으로 녹봉과 관직을 더 받았다. 토만족의 동생 토흑태저(土黑台猪)는 서부의 청파도(靑把都), 흡불신(恰不愼)과 장앙, 곤토(滾兎)에게 군사를 빌려 10만기로 해주를 침공했다. 이성량이 감히 반격을 하지 못하자 며칠 동안 약탈하고 돌아갔다. 윤3월에 이성량은 급사(給事) 후선춘(侯先春)의 검열을 기회로 적의 소굴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부장 이령 등에게 진이보를 나가 몰래 판승(板升)을 공격하고 적 280명을 참수했다. 그러나 철수하던 도중에 적을 만나 수천의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성량과 총독 건달(蹇達)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순안어사 호극검(胡克儉)이 전후의 사정을 모두 조사하여 정부에 보고했다. 이성량은 이 사건으로 명성과 자리를 모두 잃을 위기에 처했다. 조정으로 돌아간 후선춘이 더욱 이성량을 비방하자 황제도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량은 질병을 핑계로 사직하겠다고 요청했지만 그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에 황제는 어사 장학명(張鶴鳴)의 건의에 따라 이성량을 해임하고 요령백으로 조정을 받들라고 명했다. 이듬해 영하(寧夏)에서 보바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어사 양국정(楊國楨)이 이성량을 기용하자고 건의했지만, 급사중 왕덕완(王德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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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은 요동에서 22년 동안 주둔하면서 큰 전투의 승리에 대한 보고만 10여 차례 올렸을 정도로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황제는 교사(郊祀)와 종묘의 제사를 올릴 때마다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축하를 받았으며, 그때마다 엄청난 상과 관직을 하사했다. 변방의 장수로서 세운 무공으로 치면 지난 200년 동안 이성량보다 높았던 사람이 없었다. 명왕조는 몽고족이 세운 원을 북방으로 축출하고 한족의 왕조를 세웠지만, 건국 초기부터 북방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 명으로 귀부한 조상의 후예였지만, 이성량은 명왕조 최고의 무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수로서 발탁된 후 그는 출전할 때마다 승리하여 위엄을 사방에 떨쳤다. 전공이 높아지자 그의 관직도 나날이 높아졌으며, 동생들과 아들들의 관직은 물론 그를 따라던 사람들이나 집안의 노복들까지 현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분이 높아지자 점차 교만과 사치로 절도를 잃었다. 군자금, 말의 판매 차익, 소금에 대한 세금, 상금, 세비까지도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요동의 상인과 백성들의 이익은 모두 그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러한 수입은 권문으로 흘러갔으며, 조정의 관리들 가운데 그로부터 재물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그의 뇌물공세는 중국을 넘어 외국의 요인들까지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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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첩보를 올릴 때마다 내부에서는 내각과 부에서, 외부에서는 독무(督撫) 이하에서 큰 경우는 관직을 올리고 자식들에게 음관을 주자고 건의했으며, 작은 경우는 녹봉을 올리고 상금을 주자고 건의했다. 은혜와 포상이 넘치자 위세가 당세에 빛났다. 그러므로 그의 전공은 새외(塞外)를 다스릴 정도로 높아져서 조작되는 경우도 많았다. 만약 적이 내지로 들어오면, 견벽청야(堅壁淸野)를 전술로 삼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출전시키지 않고 관망했다. 심지어 패한 경우에도 이겼다고 보고했으며, 양민을 죽이고 적의 수급을 베었다고 자랑했다. 각 부에서는 다투어 이러한 잘못을 숨겼으며, 독무와 감사도 점점 소임을 잊고 그의 과오를 들추지 않았기 때문에 법에 따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순무 진등운(陳登雲)과 허수은(許守恩)이 잇달아 그가 항복한 자를 죽여서 공을 조작했다고 탄핵하자, 순무 이송(李松)과 고양겸(顧養謙)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다. 물의가 비등하자 어사 주응곡(朱應轂), 급사중 임응징(任應徵), 첨사 이관(李琯)이 번갈아 이성량을 공격했다. 사건의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더 높은 곳에서 지원하여 오히려 그를 탄핵하는 사람들이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신시행(申時行), 허국(許國), 왕석작(王錫爵) 등이 잇달아 정무에서 손을 떼면서 이성량은 내부의 지지자를 잃고 마침내 자리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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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의 전공은 그를 따르던 용사들에게로 이어졌다. 이평호(李平胡), 이령(李寧), 이흥(李興), 진득의(秦得倚), 손수렴(孫守廉) 등의 무리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며 자신의 성을 차지했다. 부패했지만 이성량이 지휘하던 명군은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부하들은 서로 세력을 다투느라고 전력을 소모했다. 이성량이 요동에서 물러난 이후 10년 동안에 8명의 장수가 교체되자 변경의 방비가 더욱 해이해졌다. 만력 29년인 1603년 8월, 마림(馬林)이 죄를 지게 되었다. 대학사 심일관(沈一貫)은 이성량이 비록 늙었지만 아직도 군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76세의 이성량은 다시 요동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이 무렵 토만, 장앙, 파토아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북방민족의 침입도 거의 사라졌다. 개원(開原)과 광령(廣寧)에 다시 마시(馬市)와 목시(木市)가 열렸다. 북방의 여러 부족들은 다투어 시장에서의 이익을 추구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이성량이 복직하여 변경을 지켰던 8년 동안 요동의 왼쪽에서는 거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성량은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태부(太傅)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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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초기에 병부시랑 왕도곤(汪道昆)은 변경을 검열하다가 이성량으로부터 고산보(孤山堡)를 세워 장기합자전(張其哈刺佃)을, 험산보(險山堡)에는 관전(寬佃)을, 강가에 있는 신안(新安)의 4개 보에는 장전(長佃)과 장령(長嶺)을 이주시킨 후에 고산과 험산에 2명의 참장을 파견하여 주둔하게 하면 800리의 땅을 개척하고 경작과 목축으로 인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왕도곤이 조정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로 이 지역은 점차 번성하여 64,000여호로 성장했다. 40년이 지난 후 이성량은 고립된 이 지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독무 건달(蹇達)과 조즙(趙楫)에게 주민들을 내지로 옮기고 포기하자고 건의했다. 주민들이 떠나지 않으려고 버티자 대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압박했다. 충돌이 발생하자 많은 주민들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이성량 등은 오히려 도망치는 주민들을 다시 모으는 공을 세웠다고 하여 승진과 포상을 받았다. 병과(兵科)의 급사중 송일한(宋一韓)이 땅을 포기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순안어사 웅정필(熊廷弼)이 송일한의 주장을 지지하자, 송일한은 계속 강하게 건의했다. 이성량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던 황제는 이주책을 중지하라고 명했다. 이성량은 얼마 후에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90세였다.

이성량의 동생 이성재(李成材)는 참장을 역임했다. 아들 이여송(李如松), 여백(如柏), 여정(如楨), 여장(如樟), 여매(如梅)는 모두 총병관을 역임했으며, 여재(如梓), 여오(如梧), 여계(如桂), 여남(如楠)도 모두 참장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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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장차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격변의 첫걸음을 내디딘 해는 1583년이었다. 이 해부터 시작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누르하치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단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직접 명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누르하치는 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리고 명은 왜 누르하치가 댕겼던 불씨에 휘말려 끝내 자신의 온몸을 태우고 말았는가?

 

●명, 건주·해서·야인 여진을 주무르다

명나라 시절 만주의 여진족은 거주지역에 따라 크게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여진으로 구분되었다. 누르하치를 배출한 건주여진은 주로 요동에 가까운 조선의 압록강 너머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다. 해서여진은 과거 금을 세웠던 아구다의 직계로서 오늘날 하얼빈 부근과 송화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 북방, 흑룡강 남쪽에 거주했다. 명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데다 주로 수렵에 종사했기 때문에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되었다.

여진족 내부에서 아구다와 같은 패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명나라는 정치적 통제 이외에도 경제적 통제 수단을 교묘히 활용했다. 당시까지 여진족들은 곡물을 비롯해 소금, 포목, 철제 농기구 등 생필품을 자급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인 말(馬), 모피, 인삼, 진주 등을 주고 명나라 상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했다.

 

명 조정은 상인들끼리 교역하는 장소를 엄격히 제한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 황제 명의의 칙서(勅書:교역허가증)를 소지한 여진족 유력자에 한해서만 교역을 허가했다.

명이 정한 규칙을 위반하거나, 명의 권위에 도전하려 할 경우 칙서는 가차없이 회수되었고 교역은 금지되었다. 생필품 공급이라는 '목줄'을 틀어쥠으로써 여진족들을 길들이려는, 명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하지만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수단이었다.

그같은 명의 지배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건주여진 출신의 왕고(王)였다. 누르하치의 외조부로 알려진 왕고는 1574년,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했다. 명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신에게 교역을 금지시킨 데 따른 반감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3000여명에 불과했던 왕고의 병력은 6만명에 이르는 명의 진압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왕고는 겨우 탈출해 해서여진의 하다부(哈達部)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하여 명군 사령관 이성량(李成梁)에게 넘겼고, 왕고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값으로 얻은 기반

이성량이 왕고를 진압할 무렵,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覺昌安)와 부친 타쿠시(塔克世)는 이성량의 편에 서서 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타쿠시는 장인인 왕고를 진압하는 명군의 작전에 협조했고, 그 대가로 명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했다.

1583년, 더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다. 자신의 부친을 죽게 만들었던 하다부와 명군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왕고의 아들 아타이(阿台)가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아타이는 하다부와 대립했던 해서여진의 예헤부(葉赫部) 등을 끌어들여 하다부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성량이 걸림돌이었다. 이성량은 교창가와 타쿠시, 누르하치까지 이끌고 아타이가 쫓겨 들어간 고륵채(古勒寨)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성이 거의 함락될 무렵, 교창가와 타쿠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타이의 아내가 교창가의 손녀(누르하치의 백부의 딸, 누르하치의 사촌)였기 때문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타이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윽고 명군은 성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교창가 부자도 그 와중에 적으로 오인되어 피살되었다.

눈앞에서 조부와 부친이 피살되는 장면을 목도했던 누르하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명은 이제 그에게 '만세불공의 원수'가 되었다. 누르하치가 훗날 명에 선전포고하면서 일곱 가지 원한(七大恨)을 내세웠는데, 그 가운데 명군에 의한 부조(父祖)의 피살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난감해진 것은 이성량과 명 조정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피살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누르하치에게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주었다. 동시에 그에게 타쿠시가 명으로부터 받았던 도독(都督) 직함을 물려주었다.

 

이윽고 1583년 5월, 누르하치는 부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 대상은 명이 아니라, 명에게 협조적이었던 주변의 건주여진 부족이었다. 당시 스물다섯의 약관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에게 명은 아직 상대하기가 몹시 버거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명으로부터 받은 칙서 30통은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줄이 되었다. 칙서를 많이 가진 누르하치에게로 명 상인들과 무역을 원하는 여진의 인삼, 모피, 진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인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했으며 무역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이제 군사 지휘관인 동시에 확실한 기반을 지닌 거상(巨商)이기도 했다.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했다. 누르하치에게서 '아구다'의 재림(再臨) 조짐을 간파한 이성량은 경악했다. 그는 명 조정에 건의하여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를 명의 관직체계 속으로 끌어들여 견제하기 위한 응급수단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채수(債帥)' 이성량

이성량(1526∼1618)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초기에 요동으로 건너가 철령(鐵嶺)에 정착했다. 뒤에 군공을 세워 철령위 지휘첨사(指揮僉使)가 되었고 40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1570년부터 1591년까지 만주에서 여진과 몽골 세력을 견제하는 명의 최고 군사책임자를 역임했다.

승패가 무상하고, 그에 따른 상벌이 엄격할 수밖에 없는 무장의 세계에서 무려 22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는 이성량을 '채수(債帥)'라고 부른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조정의 고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 자리를 유지하는 장수를 말한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와 결탁하여 만주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모피와 진주를 밑천으로 명 조정의 중신들을 구워삶았다. 그 결과 그의 패전은 '없었던 일'이 되고, 시원찮은 승전은 '대첩(大捷)'으로 둔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이여백(李如柏)은 누르하치 동생의 딸을 첩으로 맞이했다.

요동에서는 '오랑캐 추장의 사위가 요동을 지킨다.'는 비아냥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부를 한손에 거머쥔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제대로 견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장기집권'으로 타락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부패한 명 조정의 중신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뒤에는 태만하고 무능한 만력(萬曆) 황제가 있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1583년은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성량의 군대가 좀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누르하치의 부조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누르하치가 복수심에 불타 명과의 전쟁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는 조선도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며, 명·청 교체와 같은 대격변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지만 누르하치와 이성량의 행보를 보면 문득 '나비효과'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한달 후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물리학의 비유 말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의 행동 하나가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졌던 역사의 거울 앞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출처: 정보 -책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 수집: 검색 자료-출처 별도 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