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김시성이 김우명의 집에 전복을 보냈다. 김우명은 이 전복을 궁궐에 보낸다. 문제는 후임 통제사 정부현이 이 일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이다. 남구만이 탄핵한다. “이런 사사로운 진상이 한 번 시작되면 뒤 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전복 상납은 국가 체모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추고하소서.” 임금 장인의 잘못을 잘 따져보라는 것이다. 현종은 탄핵을 받아들인다. 김시성은 파직된다(‘조선왕조실록’).
전복은 충청, 호남, 제주, 경상 전 해역에서 생산되었지만 전복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루 종일 물속에서 일을 해도 전복 한두 마리 구하는 게 고작’일 정도라는 기록도 있다. 전복 공물로 인한 폐해도 많았다. 중앙에서 전복 매입 대금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면 중간에 공금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전복 값을 제대로 주지 않으니 결국 민간에 폐가 되었다. 큰 전복을 따러 외진 바다로 나갔다가 왜구를 만나 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귀하게 구한 것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1452년 5월, 즉위 2년 차의 문종이 세상을 떠났다. 이날의 왕조실록은 문종을 애도하면서 아버지 세종에 대한 문종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기록한다. ‘세종이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문종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문종이 기뻐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문종이 아버지 세종에게 올린 ‘복어’나 상납사건의 ‘복어’는 모두 전복(全鰒)이다. 생선 복어는 ‘하돈(河豚)’이고 복(鰒) 혹은 복어(鰒魚)는 전복이다.
전복 종류도 다양했다. 껍데기가 붙어 있는 ‘유갑생복(有甲生鰒)’, 건조한 ‘건복’, 반쯤 말린 ‘반건전복(半乾全鰒)’, 살아 있는 ‘생복(生鰒)’, 익힌 ‘숙복(熟鰒)’, 그리고 염장한 전복도 있었다. 전복 조림인 전복초(全鰒炒)와 전복죽, 전복만두를 비롯해 요리법도 다양했다. 허균은 “제주에서 생산되는 ‘큰 전복(大鰒魚)’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경북 해안 사람들은 전복을 꽃 모양으로 썰어서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花鰒)이라 한다. (전복) 큰 것은 얇게 썰어 만두를 만드는데, 역시 좋다”고 했다(‘성소부부고’).
민간에서도 전복을 귀하게 사용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 갈암 이현일은 유학자 하홍도의 삶을 기록하면서 “(하홍도의 아버지께서) 병이 위중할 적에 복어(鰒魚)를 먹고 싶어 했는데, 미처 맛보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하홍도는) 이를 지극한 한으로 여겨 평생토록 이 음식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복은 효도의 상징이기도 했다.
전복껍데기인 석결명(石決明)은 약재로도 사용했다(‘해동역사’). ‘결명’은 두 종류다. 초결명(草決明)은 식물 결명자 씨앗이다. 안질 등에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돌같이 생긴 결명’이 바로 석결명, 전복껍데기다. 눈을 밝게 하고 혈압을 낮춘다고 믿었다.
[동아일보 - 황광해 음식평론가]
[참고자료]
1. 김시성[ 金是聲 ](1602/선조35년~1676 /숙종2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 증조부는 영(瑩)이며,
아버지는 사행(四行)이다.
1637년(인조 15)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44년 익찬(翊贊)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시종하여 심양에 다녀왔다.
귀국 후 1646년 황주판관에 임명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용천부사(龍川府使)가 되었는데, 그 지역에 호랑이 두마리가 수시로 나타나 사람을 해치므로 그가 활로 쏘아 모두 잡아 피해를 막았다.
1648년 충청수사가 된 뒤 강계부사·함경남북병사·어영중군(御營中軍)을 거쳐 1656년(효종 7) 경상병사가 되었고, 1663년(현종 4) 통제사(統制使)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금포실기(錦浦實紀)』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송세형[宋世珩]?∼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계성(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리(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연손(演孫)이다.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형은 교리 세림(世琳)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1524년(중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에서 수업하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28년 진사로서 사행무역(使行貿易)의 폐단 등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거의 모두 채납시켰다.
153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 일당에게 배척되어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잠저시(潛邸時 : 왕에 즉위하기 전의 시기) 그의 아버지 연손이 중종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어려서 중종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중종이 이를 잊지 않고 자주 불러 안부를 물었는데, 김안로 일당은 그들의 간사한 행동의 정상이 위로 알려질 것을 염려, 모함하고 배척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려나자 비로소 중용되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올랐다.
이 때 이황(李滉)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장령·사간을 거쳐, 1544년 국왕의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국가 재정을 절약하였다.
그 해에 이조판서가 되어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연결되어 불교 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보우(普雨)의 불법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고 탄핵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판서를 연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면서 행정 능력도 있었는데, 특히 재정에 밝아 시폐 개혁에 힘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현일(李玄逸, 1627년 1월 11일 - 1704년 10월 3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남인 중신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조선 현종, 숙종 때의 남인 중진으로 남인의 이론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이현일은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태어났으며, 이황의 적통인 류성룡, 김성일의 학통을 모두 이은 퇴계학파의 적통인 외조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을 사사하였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인조 26)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그 뒤 1668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1652년(효종 3)에는 형 이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저술에 참여하였다. 1666년(현종 7)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김수항 등의 기년복 예론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숙종 초에 학행(學行)으로 미수 허목(眉叟許穆)과 백호 윤휴 등의 추천을 받고 지평에 특채되었나 견해를 다소 달리하였다. 좨주(祭酒)·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그 후 이조참판으로서 세자시강원찬선(贊善)이 되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조사기(趙嗣基)의 죄를 구원하려 하다가 함경북도 홍원군(洪原)으로 귀양 갔으나, 서인 사헌부장령 안세징(安世徵) 등의 계속된 핵청(覈請)으로 종성군에 이배됐다가 곧 석방되었다.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이론가로 출사하였으나 허목, 윤휴 등 북인계 근기남인과는 견해를 다소 달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영남 남인과 퇴계학파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 확대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가 1699년 방귀전리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후에 이이의 견해를 논파하는 견해를 짓기도 했다. 서인과 노론의 종주인 이이의 학설을 정면 비판한 덕에 관직과 사후에 내린 시호을 여러번 거두어 들이기 까지 했으며 문집을 간행했을 때 관할 수령을 파면시키고 문집들은 수거하여 불살랐다. 그 뒤 추탈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1909년에 가서야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홍범연의(洪範衍義)》 등이 있다.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석계 이시명과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장계향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의 문인.[위키백과]
4.하홍도(河弘度, 1593년 ~ 1666년)는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중원, 호는 겸재, 본관은 진주이다.
일찍이 조식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해군 때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인조 때 여러 번 벼슬에 불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암천산에 살면서 집을 짓고 영귀대라고 이름붙였다. 1662년 암행어사로 내려온 남구만과 가까이 지내면서 예론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남구만은 그의 깊은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니, 왕은 곡식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저서로 《겸재집》 12권이 있다.[위키백과]
5.기건(奇虔, ?~1460)
본관 행주(幸州). 호 청파(靑坡). 시호 정무(貞武). 포의(布衣)에서 발탁되어 1442년(세종 24) 지평(持平)이 되고 병조 ·형조 ·이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448년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겸직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1451년(문종 1)에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이때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남용 ·농단하는 신하들이 있어 이들을 탄핵하였다.
1457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전남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