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기차를 잘못 내리고
날이 저물어 초저녁인데
사람이라곤 없는 시골 정거장,
모자에 금테 두른 역장이 나와
차표를 살펴보며 말을 걸었다.
손님이 내릴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아직도 몇 정거장 더 가야 하지요.
그런데 역장님,
왜 이렇게 힘이 들지요?
의자가 망가져서 치받는 것도 아닌데......
어느덧 역사 안에 불이 켜지고
난로 위의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역장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철없는 길손이여,
이리 와서 차나 한잔 드시고 가소.
다음 번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시_ 민영 - 193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59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에 첫 시집 『단장(斷章)』을 상재한 이후 『용인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유사를 바라보며』, 『해지기 전의 사랑』, 『방울새에게』와 시선집 『달밤』을 간행했다.
낭송_ 송바울 - 배우. '세일즈맨의 죽음', '독짓는 늙은이' 등에 출연. 극단 '은행나무' 대표.
배달하며
간혹 잘못 내릴 때가 있습니다. 난감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나의 일생 또한 너무 일찍 내렸거나 너무 늦게 내린 것만 같습니다. 이 간이역에 내린 길손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내린 겁니다. 그러나 역장님이 마침 친절했고 외로웠습니다. 금세 외로운 동지가 되었습니다.
왠지 이 간이역이 시에 대한 은유 같습니다. 외로운 이가 있고 그 외로운 이를 위해 잘못 내리는 이가 있는 곳. 아픈 승객이 더 참지 못하고,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내린, 아프고도 한적한 시공! 그 따스한 난로 곁에서 주전자 끓는 소리를 같이 듣고 싶습니다. 인생의 답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출전_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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