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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소작쟁의 [巖泰島 小作爭議]사건

Bawoo 2021. 5. 3. 00:53

 

 

암태도소작쟁의 [巖泰島小作爭議]사건

 

1923년 9월, 암태도에서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소작인들이 1년 동안 친일 대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쟁의를 벌여 마침내 소작료 인하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것이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에 편승한 대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의 통치 권력에 항거한 1920년대 초반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꼽힌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했다. 이에 소작농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 등을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불납동맹을 결성했다. 그러자 지주는 소작료 강제징수를 감행했고, 목포경찰서는 수십 명의 경찰을 보냈다. 소작회는 쟁의를 강화했고, 일경은 소작인 50여 명을 체포하여 간부 13명을 목포로 압송했다. 600명의 농성단이 목포경찰서 등지에서 구속자 석방 시위를 했다. 농민들은 목포법원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한 데 이어, 문재철의 집으로 가 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26명이 체포되었다. 전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잇따르자, 일제는 구속자를 석방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소작료 조정 약정서가 교환되었고, 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도에 약 140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 문재철(文在喆)은 마름을 둔 농장경영을 했는데,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이 감소하자 집조제(執租制)에 의해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했다.

 

1923년 8월 농장의 소작농들은 추수기를 앞두고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농사비용과 노동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과 1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 비용은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작회원들은 추수를 거부하고 불납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지주는 소작인들을 개별적으로 협박·회유하면서 소작료 강제징수를 감행했고, 목포경찰서에서도 수십 명의 경찰을 보내 시위순찰을 했다. 소작회는 순찰대를 조직하여 불납동맹을 보호하는 한편, 1924년 3월 27일 동와촌리에서 지주규탄면민대회를 개최하고 쟁의를 강화했다.

 

그러나 소작회는 지주와의 대결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4월 15일부터 열리는 전조선노동대회에 서태석·박응언(朴應彦)·손학진(孫學振)을 대표로 파견했으나, 일경에 의해 저지당하여 실패했다. 일제와 지주의 탄압에 대항해서 소작인들은 수곡리의 문재철의 송덕비를 파괴하다가 지주측과 충돌했고, 이를 빌미로 일경은 소작인 50여 명을 체포하여 소작인회 간부 13명을 목포로 압송했다. 암태소작인회·청년회·부녀회 등의 농민 1,000여 명은 6월 2일 면민대회에서 목포로 가 항쟁할 것을 결의, 4일 김용학(金龍學) 이하 600명의 농성단이 목포경찰서 및 법원에서 구속자 석방 시위를 했다. 시위는 8일까지 계속되었고, 이 사실은 〈동아일보〉의 보도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어 7월 8일 600여 명의 농민들은 목포법원에서 아사동맹을 맺고 3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한 데 이어, 11일 문재철의 집으로 가 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26명이 체포되었다. 목포의 노동·청년 단체는 단식농민들에게 자금과 식량을 제공했고, 조선노농총동맹은 서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사건의 진상 홍보와 지원을 호소했다. 전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잇따르자, 일제는 쟁의확산을 막기 위해 7월 14일 구속자 중 26명을 석방하고, 간부 13명도 1주일 내에 석방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일제는 문제 무마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개작업을 하여 8월 30일 소작료 조정 약정서가 교환되었다. 조정내용은 "소작료는 4할로 하고 지주는 소작회에 2,000원을 기부하며, 전년의 미납소작료는 3년 분할상환한다"는 것 등으로 쟁의는 소작인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 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강한 단결과 전국적인 지원, 항일운동으로의 발전 등 소작쟁의의 모범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서해안 섬지방의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다음백과]

 

 

[동아일보 기사 원문]

소동까지의 경과

일시 농락으로 무시한다고
아사(餓死)각주[1] 동맹(同盟)의 의기(意氣)를 보이면서
군중의 한 사람은 말한다


지주 문재철(文在哲)과 소작쟁의 중인 전남 무안군 암태도 소작인 남녀 500여 명은 지난 8일 오후 6시경에 범선 9척을 나누어 타고 또다시 목포로 건너와서 바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몰려들어 왔는데 때는 마침 이미 사무 시간을 지냈으므로 군중은 그대로 법정 구내에 혼잡을 이루었는데, 경찰 당국에서는 정사복 경관을 늘어세우고 엄중한 감시를 하는 중인 바 군중의 대답이 우리들이 □주일 전에도 목포 형무소 구금 간부 13명 방석(放釋)각주[2] 하기를 요구할 목적으로 이 법정에 왔을 때에 당국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종속히각주[3] 조사를 마쳐가지고 자기들의 요구와 같이 방면하겠다 하고 여러 날을 두고 설유각주[4] 하며 이 길로 해산하여 달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만 믿고 각각 해산이 되었는 바 오늘날까지 아무 조치가 없으므로 당국에서는 우리 민중을 너무나 무시적 행동을 취할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속이는 수단으로 농락하여 군중을 해산케 함은 너무나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바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철저히 이해하기 위하여 지난 7일 면민대회를 개최한 벽두에 필사적으로 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므로 오늘날 또 다시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났다 하며 이와 같이 극도에 달한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두려운 죽음을 불구하고 다시 이 법정에 들어온 것은 사활 문제가 이때에 있다 하며 또는 우리가 결속하기를 이 문제가 해결토록까지 동맹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열지혈서(裂指血書)각주[5] 에 참가한 자가 수십 명에 달하였다 하며 이번 운동의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면 아사 동맹을 결속하고 자기 들의 집에서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식사를 폐지하였다 하며

서장(署長) 체임(遞任)각주[6]
근본 사건의 책임자로서 장 체임

경찰 측에서는 재판소의 명령에 의지하여 군중을 처분하는 모양인데 전 상송(上松) 서장이 자기 일신상 일로 사직하였다고 하나 이번 사건의 책임으로 사직한 것인 듯하며 새로 중도(中島)씨가 지난 달 24일 경성으로부터 부임한 터이라 하더라.

장면 비참
어린애는 울고 노인들은 기진

이 군중 가운데는 노약자가 반 수는 되는 듯한데 그 중에도 어떤 한 여인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하루 세 때를 연하여 식사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젖 달라고 우는 아이의 목 메인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으며 또 노약자는 기갈을 못 이겨 여기 저기 앉아서 꼬박꼬박 조는 양은 차마 보지 못할 형상이더라.

해설

소작쟁의란 소작료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 간의 다툼이다. 1920년대엔 그런 소작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1922년 24건이었으나 1929년엔 1590건이나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1923년 전남 무안군 암태도에서 조선 농민 500여 명이 벌인 소작쟁의다. 7, 8할에 이르는 소작료를 못 견딘 농민들은 그해 8월 소작회를 만들어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지주가 응하지 않자 소작료 불납(不納) 동맹에 들어갔고 이어 1924년 4월 면민대회를 열어 그를 규탄했다. 지주 측이 폭력단을 동원해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서 소작회 간부 13명이 검거되는 등 사회 문제로 번졌다.

1년 가까이 끈 이 쟁의는 농민들이 아사 동맹을 맺고 목포 재판 현장에 가서 단식 투쟁을 벌인 끝에 소작료를 4할로 내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사는 이 재판 과정을 보도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소작쟁의의 상징이 되어, 1929년의 원산 총파업과 더불어 지주와 이들을 비호하는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인 민중운동으로 꼽힌다.

이처럼 소작쟁의가 잦았던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의 농간으로 조선 소작농이 급증한 데다 농민들의 민족의식이 성장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농민들의 삶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팍팍해진 탓이 컸다.

농민들은 고율의 소작료 외에 수리조합비 등 각종 공과금과 소작미 운반비 등 갖가지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소작료가 실질적으로는 수확의 80퍼센트에 달했으니 벼랑 끝에 몰린 격이었다. 여기에 소작농의 70퍼센트는 1년짜리였다. 해가 바뀌면 지주가 멋대로 소작권을 넘길 수 있었다. 농민들은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뿐더러 앞으로의 생활도 아슬아슬했으니 들고 일어날 수밖에.[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

 

[관련 인물] 

 

서태석徐邰晳(1885~1943):농민운동가.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암태면(巖泰面) 기동리(基洞里) 출생. 10살 때 《사서삼경》과 《동의보감》 등 의학서적을 섭렵, 16살때 일대에서 명의(名醫)로 이름이 높았다. 1907년(순종 1) 암태면장이 되어 15년 사직할때까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힘썼다. 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대한독립 1주년 경고문>과 태극기를 목포(木浦) 등지에 뿌리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22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한인독립투사들을 만나 당시 새로운 이념으로 제시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23년 고향으로 돌아와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였다. 23년 여름부터 24년까지 계속된 암태농민운동은 암태농민들의 제 2 차 목포원정 때 아사동맹(단식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으며, 20년대 농민운동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26년 소작회를 <농민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어 독립운동을 펼쳤고, 27년 공산당계열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태석 선생의 며느리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 후쿠다에게 댕기머리를 붙잡혀 곤욕을 치른 광주여고보 3학년생 박기옥이 바로 서태석 선생의 며느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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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 - 나무위키

2021.01.20.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서태석 徐邰晳 이명 서태석(徐台晳) 본관 이천 서씨 출생 1884년 6월 17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 (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1] 사망 1943년 6월 2일 전라남도...

namu.wiki/w/서태석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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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철(文在喆, 1883년 ~ 1955년 7월 20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다.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 암태도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제조하는 염전업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문재철 일가는 선상무역으로 부를 쌓아갔고, 1897년 목포 개항과 함께 문재철이 목포로 이주하여 대지주가로 성장시켰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체결된 뒤 식민 통치 자문을 위해 중앙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설치되고, 각 도에는 참여관과 참사관, 각 군에는 참사라는 직책이 신설되었다. 문재철은 지도군 참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에는 전남도회 의원 및 도평의원 등을 역임하며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 사업도 계속 확대되어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19년 목포창고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고, 1923년 남일운수주식회사 취체역 사장을 지내며 물류업을 겸해, 1920년대 후반 문재철의 지주 경영지는 약 300만 평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 문재철 일가의 본거지였던 암태도를 시작으로 도초도, 자은도, 지도 등에서 계속 대규모 소작쟁의가 일어났는데, 문재철은 농장식 경영으로 이에 적절히 대처하고 1935년 선일척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1930년대 후반 활발하던 간척지 개간사업을 주도했다. 1940년 당시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약 500만 평으로 집계된다. 이와 같은 경영방식은 한국 자본주의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다.

 

문재철은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의 감소분을 충당하기 위해 소작료를 증수하려 하였고, 암태도에서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이는 타 지역의 소작료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하여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문재철은 이윤상의 문제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암태소작회는 문재철의 부친의 공로비를 무단으로 훼손하고,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법적인 공방끝에 법원은 문재철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문재철은 소작료를 소작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소작료를 4할로 조정해주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20년대 대표적인 소작쟁의로 전국적인, 특히, 서해안 여러 섬의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또한, 근현대사 최초의 성공적인 노사분규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1941년 윤치호가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한 흥아보국단의 전라남도 도위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도 역임했다. 1941년 목포에 문태학원을 설립해 문태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교육 사업을 벌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문재철은 서태석을 통해상해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 하기도 하였다.

사후

문재철 사후 문태학원 이사장직은 아들 문영호와 며느리, 손자 문익수가 물려받았다. 문영호는 한국 최초의 권투 국제심판이었고, 문익수는 스포츠 심리학자로 고려대학교 교수이다. 한편 학교를 제외한 재산은 대한민국 행정자치부의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으로 문영호의 배다른 형제들이 전남 지역에서 땅 15만 평을 찾아간 적이 있다.[1]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으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분야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2009년 말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자본가로서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과 같은 공로를 세운 것을 인정받아 친일명단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농민운동의 관점에서 다룬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에는 문재철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오디오 소설]

  암태도 - 송기숙(1)
AOD 듣기

 

일제 덮친 암태도 소작쟁의 거대한 해일
1920년대 전국 휩쓴 반봉건·반일투쟁 생생…민중애환 서린 너른들 그날 함성 들리는듯

“바다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재재발기며 팽팽하게 힘이 꼬이고 있었다. 하늘도 째지게 여물어 탕탕 마른 장구 소리가 날 듯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로는 뭉게구름이 한 무더기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포 서쪽 다도해상에 있는 암태도 앞바다는 송기숙(61)씨의 소설에서 묘사된 바와 여일했다. 비록 소설이 쓰여진 때로부터 16년여, 소설 속 상황으로부터는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지나갔지만 그곳의 햇살과 물살과 하늘과 구름을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다만, 실장어잡이 무동력 바지선들만이 여일한 풍경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을 뿐.

겨울의 오전 7시30분. 목포항의 희붐한 여명을 뚫고 길을 나선 고속 훼리호는 1시간30분의 항해 끝에 암태도 남강 부두에 닻을 내린다. 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암태운수 소속 지프형 택시에 타고 순식간에 집 대문 앞까지 당도한 동네 아주머니는 “아따, 빠르요, 잉. 폴쎄 와부렀소야”라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대여섯 시간씩 걸리기 일쑤였던 것에 비하면 과연 빨라진 것이다. 그토록 길고도 험한 뱃길을 수백명의 섬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오고 갔던 70여년 전 그때,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소작회 사무실 그대로 남아

1919년 3·1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조선민족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문화정치의 표면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화국면이 뚫어놓은 공간이 억눌린 겨레에게는 최소한의 숨쉴 구멍으로 기능한 것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거치면서 성장한 민중들의 정치의식은 1920∼1930년대 한반도를 각종 농민운동과 노동자투쟁의 마당으로 만들어 놓았다. 암태도로 대표되는 20년대 소작쟁의 바람은 조선 민중과 일제 통치당국 사이의 그같은 힘관계를 배경으로 하고서 일어난 것이다.

암태도의 소작 농민들이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쟁의에 나선 것은 1923년 8월 추수를 앞두고서였다. 서태석 회장이 이끄는 소작회 회원들은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던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쟁의에 돌입했다. 그로부터 장장 1년여에 걸치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20년대 중·후반에 가히 전성기를 구가한 소작쟁의의 물결 속에서도 암태도 소작쟁의가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일본 관헌과 일제 당국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점과 함께 그 싸움의 양상이 전례없이 치열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한 배수진을 친 것과도 같은 소작인들의 요구에 대해 문 지주쪽은 관과 경찰의 힘을 믿고 마냥 뻗세게만 나왔다. 농민들과 그들의 진짜 적인 일제 당국 사이의 대결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문 지주 부친 송덕비의 파괴를 둘러싸고 문씨 일족 청년들과 농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이를 빌미 삼아 경찰이 소작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1924년 6월 1천여명의 암태도 농민들은 면민대회를 열어서 경찰서와 문재철의 집이 있는 목포로 나가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암태도 소작쟁의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원정투쟁이 시작된다. 두차례에 걸쳐 열흘 남짓, 남녀노소가 망라된 6백여 농민들이 목포 경찰서와 법원 마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농성은 당시 신문에 이렇게 그려졌다.

“대지를 요를 삼고 창공을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은 두 뺨을 인정없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 되는 초 9일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보아도 기특할 정도로 분명히 소작인들의 편에 섰던 〈동아일보〉 등 신문의 연속된 보도는 이 사건을 암태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 차원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문 지주와 그를 비호하던 경찰 및 사법부의 입지를 크게 줄여 마침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아사동맹을 결성하고 혼연일체가 돼 싸움에 나섰던 암태도 농민들의 각오가 무엇보다 커다란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송기숙씨가 1979∼1980년 잡지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 〈암태도〉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대체로 충실히 좇고 있다. 그는 “사건 자체가 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으며, 반봉건적·반일적인 순수 민중운동이 암태도라는 작은 섬에서 불타올라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것이 무엇보다 통쾌했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 별다른 첨삭을 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서태석씨 묘엔 추모비 건립

그러나 작가란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존재이어서인지, 〈암태도〉에는 서태석씨와 청년회장 박복영씨, 부인회장 고백화씨, 문재철 지주 등 실존인물들말고도 몇명의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소작농들인 춘보와 만석이다. 동학에 가담했다가 관의 눈을 피해 암태섬으로 흘러든 춘보는 1920년대 소작쟁의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작가의 역사인식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남사당패 소리꾼으로 따라다니다가 부자집 막내딸과 눈이 맞아 역시 암태섬으로 밤도망을 놓은 만석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일제 당국의 화해 제스처를 받아들이려는 박복영을 향해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려면 이제 당신도 더 나서지 마시오. 당신은 배가 안 고파본 사람이라 소작인들 속을 몰라요”라며 대드는 장면은 서태석과 박복영 등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은 지식인의 손에 있었던 싸움의 지휘권이 민중 자신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암태섬에는 소작농들의 애환이 넘실거렸던 너른 들이 여전하고 문 지주 부친이 살았던 남강 부두의 집, 그리고 당시 소작회 사무실이 있던 집도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1943년 이웃 압해섬에서 숨을 거두었다가 지난 79년 암태도로 옮겨온 서태석씨의 묘 옆에는 ‘의사 서태석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송기숙의 `암태도 / 글 최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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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라남도 <암태도>라는 섬을 배경으로
1920년 소작농의 민중 운동을 넉 픽션으로 구성하여
1980년도 창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발단부터 밀도있는 전개 과정이 긴장감있게 진행되고
민중의 깨달음과 의지를 관철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전개 되어있다.

문학은 어떤 의미이건, 인간을 일깨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잠재우는 기능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작가의 인식이
강하게 베어있고 분투 항거하는 아름다움과
어울려 살아감을 리얼리티하게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인 서태석이란 사람은 아직도 암태도와
신안군 여러 사람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있고,
자본지주인 강퍅한 문재철,박복영이란 사람은 이후에
민족적 각성으로 여러 사회적 운동을 실천하고
목포 문태고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소리없는 참여적 기능에 대한 환상과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내포함은
물론, 지성인의 사회적 인식과 그 순기능을 역설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모습들이 작가의 사회적 모럴과 더불어
그들에게 암시하는 시대의 잠재된 책무인듯 하다.

[cafe.daum.net/kmhkme/6X4a/353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