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왕후 어 씨는 1730년(영조 6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조와 선의왕후는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다. 영조는 집권 내내 이복형 경종의 독살설에 시달렸다. 선의왕후는 영조의 즉위를 반대했고, ‘영조 암살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데 제삿날은 지극히 감성적이다. 왜일까? 영조의 ‘보여주기 쇼’일 가능성이 있다.
육선(肉饍), 육찬은 고기반찬, 좋은 반찬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가뭄 홍수 장마 추위 등 자연재해나 왕실의 초상, 제사가 있을 경우 좋은 반찬인 육선을 피했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국왕의 부덕 탓”이다. 왕실의 어른이 돌아가셔도 ‘잘 모시지 못한 죄인’이다. 영조가 죽은 형수를 그리워하며(?) ‘고기반찬을 뱉은 것’은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위한 ‘쇼’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성종 즉위년(1469년) 12월 28일에는 할머니 대왕대비(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 씨)의 육선을 두고 소동이 일어난다. 예종이 죽은 지 한 달 되는 날. 신숙주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이 대왕대비의 육선을 권한다. 대비 윤 씨의 대답은 “불가”였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성종도 부추긴다. 서너 번 이야기가 오가다가 마침내 대비 윤 씨가 ‘폭탄선언’을 한다.
“육선 강요를 그치지 않는다면 나는 짧은 머리털마저 깎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물러가겠다.”(‘성종실록’) 정업원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 사후 살던 곳이다. 왕실 여인들은 이곳을 사찰처럼 여겼다. 유학자들에게 ‘대비의 사찰행’은 끔찍한 일이다. 더하여 정희왕후는 단종을 죽인 세조의 비다.
세종의 고기반찬 금지, 감선(減膳)은 차라리 신선하다. 세종 4년(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6개월 후인 11월 1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의 감선을 두고 긴 대화가 오간다. 기록을 보면 실제 세종의 건강 상태는 심각했다. 오랫동안 감선을 하니 ‘허손병(虛損病)’이 왔다고 한다. 허손병은 ‘허로’라고도 하는데 ‘기가 허하다’는 뜻이다. 폐결핵으로 보는 이도 있다. 영양실조 상태의 세종이 감선을 고집하자 신하들이 결정타를 날린다. 태종의 유언이다. “주상(세종)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권도’란 ‘적당히’ ‘알아서’ ‘유연성 있게’라는 뜻이다. ‘효자 세종’은 고기반찬 올리는 일을 허락한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