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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여학생 종애는 야간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종로 5가 서울대 문리대가 있는 근처에 있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여상이었다. 여상은 주간이나 야간이나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는 S여상을 최고로 알아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충청도 어느 곳이 본가라고 춘애한테 들었는데 왜 서울에 와서 야간, 그것도 여상을 다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대문을 살짝 열고 언니와 함께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서 엄청 예쁘다는 생각을 한 것이 전부였다. 인연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첫 눈에 반해버린 소녀 계숙을 매일 보면서도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가슴앓이만 하다가 마음을 접는 단계에 들어서 있는 나였다. 그러니 설사 이 여학생을 마음에 들어했더라도 구체적인 행동을 할 용기는 없었을 테다. 예쁘기는 했지만 내 첫사랑 소녀 계숙 만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일분일초가 아쉬운 때였다. 여자친구가 있어도 만나지 말거나 헤어져야 할 정도로 입시공부에 매진해야 할 때. 그런 내가 종애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순전히 종애의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나의 온갖 힘을 다 낸 용기가 가세를 했고.
만약에 내 첫사랑 계숙이란 소녀가 종애의 100의 1만큼만이라도 내게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줬더라면 가슴 아픈 추억만으로만 남아있게 되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 적극적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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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소녀 계숙에게 딱 한 번 용기를 내어 접근을 시도해 본적이 있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이 소녀가 역 안에 미리 들어와 있었다. 나처럼 역 안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것이 아니라면 개찰을 하기도 전에 역안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혼자서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게 웬 기회인가 싶어서 용기를 한번 내어 말을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멈칫멈칫 하면서. 소녀는 내가 곁으로 다가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았다. 내가 다가가기 전에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소녀는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쳐다봐 주면 말을 걸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애만 태웠다. 반응을 안 보이는 것에 대해. 지극히 얌전한 여학생들은 다 그리 행동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어떤 명분에서건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어야 되는 것인데 나는 그러지를 못 했다. 그렇게 애태우는 시간만 보냈다. 언제 다시 또 올지 알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나는 행동으로 나서지 못했고 소녀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어떤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윽고 웬수같은 기차가 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들어왔다. 이런 때는 늦게 들어와도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었지만 기차는 이런 내 마음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기차에 타서는 또 다시 용기를 내어 소녀가 앉은 앞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그래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말 한마디 못 건네보고 말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해 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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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애가 학교에 가는 시간을 알지 못했다. 알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학원에 가는 시간에 맞춰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학원을 가려고 대문을 나서면 그때를 맞춰 내 앞을 지나가거나 내 눈에 보이는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뒷 모습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하는 날씬하고 갸날픈 모습을 하고서. 난감했다.
시내버스 종점으로 가는 길은 하나 뿐이 없었다. 승건이 형이 자취하던 집이 있는 곳쯤에서부터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가는 다른 길이 있었지만 승건이 형네 집 앞까지는 외길이었다. 반대 쪽은 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어서 버스종점으로 가려면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종애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 되었다. 종애를 피해 골목길로 들어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싫어할 이유보다 좋아할 이유가 더 많은 이웃에 사는 여학생을 피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설사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닐지라도 상대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버스도 같이 타게 되었다. 일부러 다른 버스를 타야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건 "난 너한테 관심이 전혀 없어"라는 거부의사 표시와도 같은 것인데 그래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쪽이었다. 이렇게 여러날이 지속되었다. 앞으로도 쭈욱 계속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어떤 식이로든 행동을 취해야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뭐 이런 병신같은 놈이 있느냐"는 말이 전해져 들릴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 뇌리를 감쌌다. 첫사랑 소녀 계숙이한테 한 바보같은 짓을 또 하면 정말이지 불알을 떼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스스로에게 들기도 했다. 명색이 사내라는 놈이 적어도 싫지 않은 표시를 하는 여학생에게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첫사랑 소녀 계숙이와는 달리 적극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에도 용기가 났다. 2학년 때 학원에서 매일 만나던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 때하고는 상황이 또 달랐다. 그 여학생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못 생긴 얼굴이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때부터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이런 사내답지 못한 성격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것이냐,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채칙질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른다. 종애가 내리는 종로 5가 버스 정류장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따라 내렸다. 그리고 불러 세웠다.
"저기요"
종애가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 좀 만나요"
"어디서요?"
"집 대문 밖에서 일요일 5시쯤에요"
종애는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학교를 향해 갔고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 만나는 장소를 잘못 말한 것인 줄도 몰랐다. 동네 그것도 집 앞이라니. 나는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갈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중국집이라든가 빵집이라든가 하는 그런 곳. 당연히 들어가 본 일도 없었다. 행동 반경이 집, 자취방, 학교, 학원이 다였다. 극장은 세번 정도 가본 적이 있었다. 길수, 태주하고 한 번 그리고 동네 형인 준태 형하고 두 번. 이때는 곁에 내 힘이 되어주는 친구나 형이 있어서 걱정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엉겹결에 버스에서 따라내려 만나자는 말을 했지만 그 다음은 자신있게 행동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 자신도 감당 못하는 처지에 여학생을 만나 무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래도 약속한 날, 시간이 기다려졌다. 나온다면 동네 뒤쪽 논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종애는 나오지 않았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난 이성을 만나 리드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원 가는 시간에 집 앞 길에서 만나는 일만 피하면 얼굴 마주칠 일도 없었다. 종애의 반응은 뜻밖에도 춘애를 통해 전해져 왔다.
"오빠! 종애언니 만나기로 했었다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집 앞이라 남의 눈이 신경쓰여 못 나왔대"
그 날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온 정성을 다해서 가느다란 붓으로 창호지에다가. 글씨는 잘 쓸 자신이 있었다. 글씨를 잘 쓰고 싶어 펜글씨본을 보고 연습하는 것을 즐겨해서 공부하는 틈틈이 글씨 연습을 했기 때문에. 춘애한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답장이 왔다.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고. 춘애가 계속 메신저 역할을 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속되었다. 서너 달 정도. 거의 하루 걸러 편지를 주고 받으며. 처음으로 현실적인 사랑을 한 것이다. 서로 만남은 없었지만 그래도 교감을 주고 받기는 한 것이니. 첫사랑 소녀 계숙이와는 결과적으로 내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실질적인 사랑은 종애가 처음인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도 편지나 주고 받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촌 형이나 재명이, 불량써클 아이들이 하는 행동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만나자는 내용 자체를 편지에 담지 못했다. 만날 자신이 없어서였다.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사진만 서로 주고 받았다. 내가 그리 하자고 해서. 지갑 속에 소중하게 담아두고 시간나는 대로 꺼내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자취방 문을 열고 내다보면 바로 바라다 보이는 이웃집 방에서 살고 있는데 만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사촌 형이 여자친구와 자취방에서 대낮에 동침을 하고 재면이가 여학생들을 바꿔가며 자취방에 끌어들이는 것과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불량써클 패거리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범죄일 수도 있는 짓을 저지른 걸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도 나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종애의 실제 마음이 어떤 것일지도 헤아려 보지도 않았다. 그럴만한 능력, 판단력도 없었다. 그저 이성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프라토닉으로 해야 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가뜩이나 모자라는 입시공부 시간을 연애편지 쓰느라고 너무 낭비하고 있음을 깨달아서였다. 편지에 "우선 입시공부에 전념해야 되니 편지 왕래를 그만하자"고 써서 보냈다. 사진까지 되돌려 주면서. 종애는 그것을 절교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 마음은 그런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종애의 마음 상태가 어떨까 궁금해서 대문 밖에서 학교 가는 걸 기다렸다가 아는 척을 하니 정색을 하며 "이중성격"이라고 쏘아 붙이고는 횡하니 가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모습으로. 종애의 그런 모습은 내 마음을 엄청 아프게 했다. 마음 고생을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으로는 갑자기 식욕을 확 잃어버린 일과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일로 나타났다. 밥을 먹으려고 해도 먹히지가 않았고 잠을 자려고 해도 오지가 않았다. 결코 싫어서가 아닌 입시공부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시적으로 헤어지자고 보낸 편지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표현한 한 여학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결국 잘못했다는 사과의 편지를 춘애 편에 보내고 종애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관계를 이전으로 되돌렸다. 입시가 끝날 때까지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낸지 한 달이 채 안 된 때였다.
결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실적인 사랑을 했던 여학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나는 병을 얻는 빌미만 만들어 가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고.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기간 동안의 마음 고생이 국,중학교 때부터 실컷 먹었던 먼지로 인해 잠재되어 있던 결핵균을 움직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건 종애 언니가 서대문 밖 문화촌으로 이사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종애하고 헤어진 뒤의 일이었다. 아마 7월 초쯤 이었을 것이다.
종애 언니네가 이사를 가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겨우 반 년 정도를 산 것인데 이사를 간 것이었으니. 종애 형부가 유명 신문사 기자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 동네에서 오래 살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신문사 기자가 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일꺼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설사 세를 살더라도 당연히 보다 더 좋은 동네, 집에서 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를테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신흥주택가 같은 곳.
종애 언니네의 이사는 종애와 나의 자연스러운 이별로 이어졌다. 편지나 주고 받는 연애같지도 않은 연애를 한 지 불과 3~4개월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 기간이 내게는 3~40년도 더 되는 기간처럼 길게 생각되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마음을 쏟은 탓이었을 것이다. 사촌 형이나 동급생 재면이처럼, 아니면 불량써클 아이들처럼 이성을 쉽게 생각하고 만나는 성격이었다면 절대 안 겪어도 될 일을 그 짧은 기간에 다 겪은 것이다.
종애가 이사 가는 날 나는 배웅을 하지 못했다. 마음은 하고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그냥 자취방에 벌러덩 드러누워 종애가 어제까지 잠을 잤을 방 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은 신은 채였다. 두 발은 자취방 문 밖으로 내놓고 두 팔은 머리 뒤로 깍지를 껴 모아 방안에 둔 채로. 언제든지 배웅을 하러 나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듯 그런 자세로. 이런 나를 보고 승오 어머니가 한 소리를 했다.
"종애 이사가는데 배웅 안 하니?"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그냥 그대로 있었다. 승오 어머니의 말이 "사내자식이 돼가지고 어째 행동이 그러냐"는 질책성인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 했다. 이것이 영영 이별이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따지고 보면 종애와 나 사이에는 편지를 주고 받은 일 외에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같이 놀러 가 본 적도, 밥을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기간도 짧았다. 그러면서도 온갖 마음 고생은 다 했다. 순전히 내 못난 성격 탓이었다. 소심하고 용기없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격. 나는 종애를 리드할 자신이 없었다. 여자를 만나면 남자가 해야하는 당연한 역할을. 그렇다고 종애가 거기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자기에게 말을 거는 용기를 내게까지는 했지만 더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라는 입장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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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애가 이사간 뒤 몸 상태가 급격하게 이상헤지기 시작했다. 기침과 가래가 계속 나오고 기운이 자꾸 떨어졌다. 식욕도 계속 없고 식은 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종애 문제로 마음 고생을 하면서 제대로 못 먹고 못 잔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용 부담을 무릅쓰고 동네 의원에 갔다. 내 증세를 들은 의사는 X-Ray를 찍었다. 일주일 뒤 사진을 보더니 폐침윤이라고 했다. 6개월 정도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다. 폐침윤은 폐결핵의 초기라는 뜻이었다. 근데 나는 그걸 몰랐다. 무지의 소치였다. 결핵이라는 말이 안 들어간 걸 보고 내 마음대로 괜찮은 것이라고 판단을 해버린 것이다. 의사가 폐결핵 초기라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말만 해줬어도 치료를 했을 것인데.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듯 기계적으로 말했고 나는 약을 안 먹어도 되는 것으로 멋대로 판단을 해버린 것이다. 의학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두툼한 의학백과사전이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여기에는 방치하면 큰 병으로 진행 될 수 있다는 말은 없었다.
몸은 서서히 나빠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결핵이라는 말이 안 들어간 것만 믿고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약국에 가서 가래가 많이 나온다고 하면 내준 약은 전부 항생제였다. 몸을 낫게 하기는 커녕 부작용만 커지게 하는 약들. 약사가 마음대로 약을 처방해 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약사 그 누구도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을 받아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가족들의 서울로 이사.
종애가 이사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방학 중에 나의 일상에도 큰 변화가 왔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시골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이다. 비록 초가집일 망정 우리집이던 곳에서 살다가 물도 사먹어야 되는 달동네 남의 집 방 한 칸을 세로 얻어서. 이사를 주도한 것은 삼촌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서울에 살 때 본 뒤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월남으로 취업을 간 것을 알고 연락을 한 것이리라 나름대로 생각을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였을 것이라고. 월남에 취업을 가고 싶어서였건, 돈 좀 빌려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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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동안 한 달에 한 번 꼴로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를 마음 편하게 받아보지는 못했다. 아버지 덕에 먹고 입고 공부하고 있었지만 부자간의 정은 거의 없는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편지 때마다 식구들이 합치라고 그러셨다. 생활비를 줄이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머니는 나하고 상의 같은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신이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만 가고 있는 것이었는데 삼촌이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게 되는 일을 삼촌이.
이사를 간 곳도 학교에서는 아주 먼 곳이었다. 서대문 밖 무악재 고개를 넘어 홍은동이라는 곳. 나름대로 이사할 명분은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사촌인 당숙 한 분이 그곳에 살고 있어 고향에서 서울로 처음 이사오던 국민학교 3학년 때도 이곳에 살았었다.
그렇지만 내 나빠지고 있는 건강에는 커다란 악재로 작용했다. 어머니나 삼촌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굳이 그곳이 아니고 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와야 되었다. 아니면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이사를 미루었던가. 운명이었다.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살아가다 보면 수도 없이 겪게 되는 그런 영역에 속하는 일. 만약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가족들이 시골집에 그냥 있었더라면 나의 투병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된 2년이란 긴 기간 동안의 투병생활을 공기도 안 좋은 서울의 남의 집 단칸방에 살면서 하게 될 일은 없었을 터였다.
이사를 하고 난 뒤에 몸이 나빠지고 있다는 조짐은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대표적인게 가래의 양이 많아지고 누런 색깔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었다. 사는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서울역까지 30여 분 정도 만원버스를 타고 나가 한번 더 갈아타야 되었는데 이게 점점 힘에 겨워지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가래를 뱉어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는 바람에 손수건은 늘 가지고 다녀야 되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볼 생각은 하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나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 처럼, 밥 해 먹여주고 빨래해 입혀 주는게 자식에 대해 할 수 있는 전부라고만 생각하고 그리 지냈다. 결국 모두 다 나 혼자 판단하고 해결해야 되었는데 일단 입학시험 때까지 버텨보자는게 내 생각이었다. 건강이라는 것이 한번 나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자취를 하던 승오네 집에는 개학하자마자 한번 들렀다. 승오네 집이 버스 타러 가는 쪽에 있는 탓에 들르는 일이 큰 부담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워낙 정이 많이 든 터라 일부러라도 들를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종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리란 기대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 승오엄마는 "학교 가까운 곳을 두고 왜 그 먼 곳으로 이사를 갔느냐"고 물었지만 "친척집이 그곳에 있어서 그리했나 봐요"라는 대답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실제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친척이었지만 곁에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사를 학교 가까운 곳으로 다시 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 집을 사서 이사한 것도 아니고 남의 집 단칸 셋방에 사는 것인데 어디서 살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조차도 없었다.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참 어리석고 한심한 성격이었다. 하고 있는 생각은 명문대학에 가고야 말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머지 다른 일들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춘애는 내게 종애 언니가 방학 중에 한번 다녀갔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틀림없이 내가 궁금해 들렀을 것이다. 종애의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능력도, 해 볼 생각도 안 해봤지만 먼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것으로 봐서는 미련이 남아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무리 사내답지 못한 남자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은 사이 아니던가. 구체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이나 편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종애 소식을 들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다시 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못 들었으니까. 나도 이사간 것을 알고는 포기를 한 것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데이트 한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상한 남자 아이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성격으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겠지만. 아무리 나보다 철이 많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종애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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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종점으로 종애를 마중 나간 적이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지친 몸을 쉴 겸해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종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과 얼추 맞는 것 같아서 였다. 종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늘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아 종점으로 마중을 가면 어떻겠냐는 의사 표시를 편지에다 했었다.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여자 혼자 밤길을 다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사실 종애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된 뒤로는 담 너머로 보이는 종애 방에 늘 신경이 쓰였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되어 정확히 불이 켜져야만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데이트가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종애는 반대했다. 동네 사람들 눈이 신경쓰이니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러고 싶었다. 어쩌다 한번인데 어쩌랴 싶은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몰래 지켜보다가 같이 오면 되지 않겠나 싶은 마음으로 버스 종점으로 갔다. 밖에서 종애를 보는 것은 버스에서 따라 내린 뒤로는 처음이라 마음이 마구 설레기도 했다. 종애는 바로 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일찍 나간 탓인지 버스 몇 대가 종점에 들어올 때까지 종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몹시 초조해졌다. 이제나 저네나 종애의 모습이 보이나 싶어서.
종애의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정확히 다섯 대째 들어오는 버스에서였다. 나는 너무 반가워 뛰어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종애 바로 뒤를 따라 내린 남학생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리고는 종애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 남학생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멋있게 잘 생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괜찮게 생겼으나 키, 얼굴이 다 작은 편에 속한 나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큰 키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작은 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나를 압도하는 큰 키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종애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보다 잘 생긴 남학생인데도 외면을 하는 것이 나를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정 고마웠다. 그 남학생의 잘 생긴 모습을 봐서는 얼마든지 마음이 흔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종애 이름을 부르며 모습을 들어내자 그 남학생은 민망했는지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종애는 내 모습을 보고도 썩 반가워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면서 기대했던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상황에 속이 상해 있었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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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날이 가까워짐에 비례하여 건강은 날로 나빠져갔다. 지금 실력으로는 시험을 봐봤자 낙방이 뻔한 것임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단 시험 볼때까지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병원을 가보자고. 이런 내 몸 상태와 관계없이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적인게 학교 맞은 편 산자락에 들어서고 있는 건물들이었다. 건물들은 이제 눈에 뜨이게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새학기에 신입생을 모집하려고 한다고 했다. 학교 이름은 중,고등학교처럼 이사장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다. 00공과대학. 국민학교만 빼고는 중, 고, 대학교가 모두 이사장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사장 얼굴을 한두 번 본적이 있었다. 자가용은 눈 씻고 볼래야 볼 수 없던 시절에 감정색 세단차 안에 타고 있는 모습을 .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오만스럽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루하루를 먹고사는데 온 힘을 다 기울여야 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런 모습. 부럽기도 하면서 싫기도 한 모습이었다. 이 이사장이 내 부모였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내 부모가 아니니 그랬다. 구역질 나고, 싫고. 이사장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건물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이름이 걸린 학교는 남아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 건물들을 보면서 증오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공짜로 다니라고 해도 이 재단에 속한 학교는 절대 안 온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경위가 어찌 되었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학교이니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와서 다니고 있는 학교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리 싫었다.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내가 평가되고 있는 것이 죽을만큼 싫었던 것이다. 지금 짓고 있는 이 대학을 간다면 그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는 몰랐을 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지금은 절대 그럴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이 대학은 학생들을 모집할 것이고 지원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달로 출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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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는 이따금 싸웠다. 싸운 이유는 아무런 비전도 안 보여주는 어머니의 생활 방식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좀 더 깊은 생각을 하셔야 했다. 그리고 대처해야 했다. 당신의 처지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언제까지나 송금이 되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내 눈에는 이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의 집 단간방에서 벗어 나려는 노력, 송금을 아끼고 모아 집을 사려는 노력 같은 것이. 이제는 어머니의 품이 그리운 때를 벗어나 있는 나는 어머니에게 뭐라고 그랬다. 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러고 있느냐고. 어머니는 노발대발했다. 내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았다. 자식이 머리가 좀 컸다고 에미한테 대든다는 것만 가지고 따졌다.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결국 내가 포기하고 말았다. 싸움을 해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였다. 나 스스로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설사 그런 때가 되더라도 혈연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신 마음을 닫았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니 인연을 끊을 수는 없으나 다시는 아무 말도 안 하겠다고. 그저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무나 하는 정도로 살 것이라고. 사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의 생활방식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눈에 보였지만 대안을 만들 능력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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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된 건강은 급기야 입시장에 가는 날 버스 안에서 쓰러지는 것으로 결과가 나타났다. 다행이 옆에 중학교 3학년 때 짝꿍이던 주영이와 주영이 어머니가 있은 덕분에 근처 의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입시장에를 갔다. 의사는 영양실조라고만 했다. 사실 그 무렵에는 식욕이 전혀 없어 식사를 거의 못하고 있었다. 밤에는 내의 한 벌을 다 땀으로 적셔 내었다. 가래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머니는 아무런 대책이 없이 그냥 지켜만 보았다. 남편한테 버림받은 삶을 사는 것이 그리 무력하게 만든 것인지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피해는 자식인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모든 일을 오로지 나 혼자 해결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아직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될 때였는데도.
시험은 예상한대로 모르는 문제가 더 많았다. 지원을 아무 대학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내 실력은 명문대학을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시험문제를 받아든 내내 이 생각만 들었다.
시험이 끝나는 즉시 서대문에 있는 큰 병원에 갔다. 결과는 폐결핵 중등증. 싑게 말하면 2기였다. 의사는 요양원행을 권했다. 인천에 결핵 전문 요양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돈은 편하게 받아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얼마인지도 몰랐다. 이즈음엔 집을 먼저 사라고 하신 걸 보면 꽤 되는 것 같았으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해줬다. 아무튼 그 피같은 돈을 가지고 요양원을 갈 수는 없었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것으로 투병생활을 하기로 했다. 공기 좋은 곳에 방 하나를 얻던가 하는 방식으로. 거기에는 주영이가 동참을 할 것이었다. 이북 면허뿐이 없어서 무면허 의사인 아버지의 숙원인 치과대학을 가기 위한 재수를 하기 위해서.
의사는 "입시 공부를 해야 되느냐"는 나의 물음에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책 단 한 글자라라도 보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2년이 지난 뒤에나 풀릴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은 암울하기만 한 투병생활이 내 눈앞에 떡 버티고 서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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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 사춘기는 끝이 났다.
짝사랑으로 끝난 첫사랑, 플라토닉으로 끝난 두번째 사랑,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학교를 다니는 데 대한 열등감과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를 갖게 한 몇 년의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마지막으로는 2년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을 요하는 큰 병을 안게 된 채로.
그 뒤로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또 생겨날 것이겠지만 투병생활을 벗어나 그토록 소원하던 명문 Y대를 들어가게 되기 까지는 3년이란 긴 시간이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최소한 남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갖추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대학을 들어간 뒤에도 보다 더 큰 시련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이는 명문대학을 다녔다는 전제하에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사춘기 시절,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져야 했던 열등감은 다 날려보낸 상황에서 당당하게 헤쳐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3.나가기
** 다시 지금 - 뒷이야기
1. 나에게 결손 가정 출신이라는 굴레를 씌워준 부친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뜨셨다. 파란만장, 자유분방한 삶을 사신 분치고는 꽤 장수를 한 80 후반에. 세상을 뜨신 것은 나중에 알았다. 아내와 여행 중에 꿈자리가 하도 안 좋아 이복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서였다. 두 이복 여동생은 부친의 사람을 받고 자란 탓에 거리낌없이 지방의 부친이 사시는 곳에 드나들었다. 이때 이미 제 3의 여인이 있었는데도. 부친은 이 여인에게 나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내가 40대에 접어들면서 나름대로 효도를 한답시고 1년에 한 번 휴가 때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들렀는데 이때마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몰래 만나려고 하는 것에 만정이 떨어져 저절로 발을 끊게 되었다. 많은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부친 덕에 대학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만정이 다 떨어져 버린 것이다. 세상을 너무나 당신 편한대로만 사신 데 대해서, 장자인 나를 숨기면서까지 살아가야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싶어서. 그리 사신다고 큰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세민 주택에 세를 들어 사는 정도로 사신 양반이.
2. 올해로 91세가 되신 모친은 2년 전부터 노환으로 와병 중이시다.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대소변, 식사를 다 챙겨드려야 하는 상태로. 간병은 우리 3남매가 같이 하고 있다. 그동안 모친과 같이 살아온 큰 여동생이 주로 하고 막내 여동생이 이틀, 내가 하루 이렇게. 요양원에도 잠시 계시게 해봤지만 두 여동생이 요양원 간병을 불신하는 탓에 그리하고 있다. 지금 상태로는 얼마를 더 사실지 가늠이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말짱하시다. 다들 60이 넘은 우리 3남매도 한 두가지 약은 다 먹으며 지내고 있는데 자식들보다 먼저 가셔야 될텐데 은근히 걱정이다. 특히 모친을 주로 보살피고 있는 큰 여동생의 건강이.
3.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사촌 형은 일찍 세상을 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이른 나이인
60을 겨우 넘기고서. 폐암이라고 했다. 연락을 못 받은 나는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다. 퇴직금 관리에 실패해 있던 한참 힘든 때여서 외부 특히 친척들과 연락이 안 되도록 만든 내 탓이었다. 사촌 형의 이른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은 아마 담배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피웠던 담배를 월남전까지 참전했다가 제대를 한 뒤에도 못 끊고서 손가락이 니코친으로 샛노랗게 물이 들 정도로 골초였던 것이 수명을 단축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일테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 복합적일 것이다. 변변한 사회생활도 못하고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40여마지기 전답을 처분해서 생활을 하는데 따른 스트레스.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쓰는 마음이 좋았을 리는 없었을테니 이런 것이 수명을 단축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긴 해도 화장을 한 탓에 형 사후에도 찾아보지 못한 미안함이 마음 속에 늘 남아있다.
4. 동네 친구 호은이는 두 번 만났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고 입학식만 기다리고 있던 때하고 군에서 첫휴가 나왔을 때. 모두 주영이네 집에 들르면서였다. 같이 입시공부하던 중학교 3학년 시절 짝궁 주영이네가 문산으로 이사를 가 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찾아가게 된 것인데 첫 번 째는 명문대학에 들어 간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호은에게 자랑할 생각보다는 "나 원래 이 정도는 능력은 되는 존재였어"라는 뜻이 나를 아는 모든 애들 특히 오성이와 영국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라서였다. 둘 다 이미 은행에 들어가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신이와 오성이 아버지 얘기도 이때 전해 들었다. 성신이는 S대 옆에 있는 E동의 어느 양장점에 일 배우는 보조로 취직했다는 이야기하고 오성이 아버지가 월남에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 군에서 휴가 나와서는 별 이야기도 못하고 바로 헤어졌다. 주영이 말고도 찬구가 같이 있어서였다. 그것이 호은이를 본 마지막이었다. 보고 싶은 생각은 늘 있으면서도 찿아가보지 않은 탓에.
5. 자취하던 집 아들 승오는 내가 졸업한 다음 해에 연탄개스를 마시고 세상을 떴다. 내가 엄마처럼 생각하며 좋아했던 자기 엄마 가슴에 피멍울이 맺히게 하고서. 승오가 연탄개스를 마시게 된 이유는 내 큰 아버지와 관련이 있었다. 내가 가족들과 합류를 하면서 비게 된 방을 승오가 쓰려고 했으나 큰 아버지가 방을 안 비워준 모양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여동생 춘애하고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싫은 탓에 학교 친구 자취방에 가서 잤는데 이때 연탄개스를 마신 것이라고 했다. 같이 잔 친구는 살아났는데 승오만 세상을 떴다고 했다. 투병생활을 하는 중에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간 나에게 승오 엄마가 들려 준 이야기였다.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큰 아버지가 방만 비워줬으면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났을 것이라는 원망 섞인 말을 하면서. 그 뒤로 대학을 들어가고 군대까지 갔다 온 뒤에 몇 번만 간 뒤로는 발길을 끊게 되었다. 가족같이 생각하려는 나의 마음과 관계없이 나만 보면 죽은 승오 생각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 하는 승오엄마를 보는 것이 나도 힘이 들어서였다.
6. 나에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성애를 느끼게 해줬던 길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동창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은행생활 한창 하고 있던 30대 후반 쯤 길수와 같이 해병대에 입대했던 동창들을 수소문해서였다. 기가 막힌 것은 그 힘들다는 해병대 생활을 7년 복무까지 다 마치고 나와서 그랬다는 것이다.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스스로를 비관하는 유별난 성격을 그 훈련이 지독하다고 소문난 해병대에 가서도 못 고친 것 아닌가 싶었다. 천성을 고치기 어렵다는 건 나 자신을 돌아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니 길수의 스스로 삶을 등지는 모습이 고등학교 시절에 얼핏얼핏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7. 2, 3학년 2년동안 짝꿍으로 지낸 태주는 내가 투병생활을 끝내고 1년간 재수종합 학원을 다녀 명문 Y대를 들어간 71년 초에 딱 한번 만난 뒤로는 소식을 알 수 없이 세월이 흘렀다. 종로에 있는 영화관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나서였는데 헤어질 때 See you again하며 손을 흔들고 가버린게 마지막이었다. 별로 머리가 좋지 않았던 태주는 1년 재수를 하고서도 그 시절 별 볼일 없는 대학이었던 고등학교 길 건너에 세워진 같은 재단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이사장의 마지막 꿈이었을지도 모를 학원재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준 대학. 원서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 대학이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적성에도 안 맞지만 그냥 오래도 절대 안 갔을 대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연락을 끊을 일까지는 없었는데 내가 명문 대학을 다니는 것 때문에 위화감을 느낀 것인지, 아무튼 내성적인 놈들이란 속을 알기가 어렵다. 이 글에서 언급은 못했지만 재선이라는 친하게 지낸 한 친구도 마찬가지다. 동창들 중에 연락처를 아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을 정도이니 같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연락처는 알려져 있는 나에 비하면 나보다 더 심한 친구들이다.
8. 광수는 1년 재수를 해서 인천에 있는 공대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들어갔다. 졸업후 국립 연구소를 들어갔는데 40초반 불어닥친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지를 못했다. 입사할 때 연구소와 거래하던 방산업체를 경영하던 이모부 덕을 본 것이 악재로 작용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보다는 대인 관계에 서툰 내성적인 성격이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같은 대학을 나와, 같은 해에 입사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부소장까지 지내고 정년 퇴직을 했다. 이 친구는 술을 엄청 잘 하는 것으로 보아 대인 관계가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광수는 술을 전혀 못한다. 성격도 내성적이고 건강도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악재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퇴직 당시가 고학력자들의 취업난이 시작된 시기와 맞물려 있어서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생을 많이 했다. 대신 대학시절 열차통학을 할 때 만나 결혼까지 한 교대 출신 부인이 생활을 꾸려 나갔다. 결혼과 동시에 그만 뒀던 교사 생활을 시간제 교사로 다시 하다가 나중에는 받았던 퇴직금 다 토해내고 복직을 해서. 부인도 이제 정년퇴임했을테니 아마 부인의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9. 경오는 졸업하고 작은 전기 업체에 잠깐 다니다가 5급 공무원 시험을 봐서 체신 공무원이 되었다. 주특기인 통신을 살려서. 요즘은 대학을 나오고서도 경쟁이 심해 하늘의 별따기로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그 시절에는 대학 갈 형편이 못 되는 고졸 우수자들이 택하는 길이었다. 봉급은 적지만 어쩔 수없이 울며겨자 먹기로. 이후 통신 부문이 체신부에서 떨어져 나와 공사로 전환되면서 국영기업체 직원이 되어 생활을 했으나 부장시험에 합격을 못해서 과장으로 정년퇴직 했다. 몇 번이나 불어닥친 강제 구조조정에도 버티고 버텨서 얻어낸 정년 퇴직인데 요즈음 건강이 안 좋다. 담배는 피지도 않는데 폐암에 갈려 수술을 받았다. 전업주부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딸 한 명씩을 두었는데 아들은 우리는 시험도 못 봐본 국립 S대 공대를 나왔다. 이에 만족하지 못 하고 치과대학원을 다시 들어가 지금은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아들이 자랑스럽기는 할테지만 그 뒷바라지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처럼 어려운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탓에 현실에 보이는 자기들 불만만 보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공통적인 현상을 경오 아들도 가지고 있은 셈이니. 딸도 유명 자동차 회사에 디자이너로 다니고 있는데 결혼을 안하려고 해서 애를 먹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자식 농사는 잘 지은 셈이다.
10. 무선통신사로 근 30년간이나 배를 타면서 가족 뒷바라지를 한 동수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생활을 하고 지낸다. 큰 아들이 재가 다닌 명문 Y대 상대를 나와 신의 직장이라는 관연금 관리공단에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주무른다나 뭐라나. 며느리도 음대 출신이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본인도 먹고 지내기에 아무 걱정도 없는데 놀면 뭐하냐고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 지낸다. 경오도 병이 나기 전까지는 경비원 생활을 했다고 하니 생활력이 대단들 한 것이다. 나는 때려 죽여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다닌 직장 또래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아파트 경비원 생활을 한다는 얘기는 못들었는데 말이다.
11. 택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투병생활을 하던 첫 해까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후 연락이 끊겼다. 연락을 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알게 된 이유를 그때 이미 알고 있어서였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몇 백년 전 조선 초기의 일이지만 단양 우씨와 봉화 정씨와는 혼인도 안 하고 지내게 되는 단초를 만든 삼봉 정도전에 의해 박살이 난 단양 우씨 집안의 일. 내가 투병생활 하던 시절에 남산 자락에 있는 자그마한 출판사에 다니고 있는 것을 가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택수는 이후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40초반에 전화가 한번 왔었다. 느낌에는 대출이 필요한 것 같아서인 것 같았는데 이야기도 제대로 안 하고, 만나자고 해도 만날 생각을 안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때 전화를 한 것을 보면 내 소식은 계속 알고 있으면서 연락을 안 한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나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가 되어서 였을 수도 있고 원한 관계인 양 성씨가 부담이 되어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게는 둘 다 별게 아닌 일이었는데 말이다. 성씨와 관련된 일은 몇 백년 전 일이고 다니던 직장이야 남들 특히 공고 출신들에게는 대단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다니고 있는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어 마지 못해 다니고 있는 처지였었는데 말이다.
13. 종두는 동수처럼 배를 탔다. 무선통신사 자격으로 20여년 정도. 88올림픽을 개최하던 해인 우리 모두 30후반이던 시절에 대출 좀 받을 수 없느냐고 찾아왔었다. 집을 사겠다고. 차장에게 물어보니 자금 여유가 있다고 한 덕에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내게는 보신탕 한 그릇 사고 지점 운영자금으로 쓰이는 커미션을 2부를 내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관행처럼 커미션을 내야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아마 가장 적은 코미션에 속했을 것이다.
내가 과장 승진을 앞 두고 있던 고참 대리 시절이어서 작은 아버지가 중앙은행의 총재라던 동갑내기 차장이 나를 배려해서건, 지점장이 그래도 청렴한 편에 속한 사람이어서건, 종두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한 일이었다. 88올림픽이 우리나라 경제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 동력이 된 행운과 종두 개인적인 행운이 맞물려서.
종두는 요즘도 잘 지내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같은 재단에 속한 학교를 나온데다가 선후배 인맥 관리를 잘 한 탓에 전자 분야에서 제법 성공한 후배가 알선해 준 휴대폰 부품 하청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경기 부침은 심하다고 하지만 내 덕분에 산 집을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할 정도로 돈도 벌고서 여유롭게 잘 살고 있다.
14 내 첫사랑 소녀 계숙과 만났다가 헤어졌다고 한 영식이는 내가 수소문해서 한번 만났다. 아마 차장이 되기 전 고참대리이던 30후반 쯤이었을 것이다. 종두가 대출을 받은 점포에 근무하기 바로 전 점포에 근무하던 때.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 결혼하기 전, 홀로일 때여서 많이 외로움을 많이 타던시절이었다. 집에 가봐야 점점 늙어가는 모친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던 때였으니까. 이즈음에는 두 여동생도 다 결혼을 해서 자기 삶을 찾아 떠나 있었다. 그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동창들을 한번 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는 동창들을 통해 수소문해보니 해병대를 의무 복무한 뒤 제대해서 모 정보기관에 통신직으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일식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길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아마 영식이를 통해서 였을 것이다. 같이 해병대에 입대를 했으니까 틀림없이 서로 연락들 하고 지냈을 것으로 짐작이 되어 내가 먼저 물어서였다.
그 뒤로 운영하고 있다는 일식집에도 한번 갔었으나 그게 다였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첫사랑 소녀 계숙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해 본 것이었으니까. 영식이 쪽에서도 나에 대한 마음이 뭐 특별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나하고 말이라도 하게 된 이유가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이 때문이었으니까,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더구나 우리 둘 다 내성적인 성격인데 영식이는 그 지독하다고 소문난 해병대 복무를 하고도 전혀 고쳐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대인 관게를 좋아하기 보다는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즐기는 성격.
14. 나와 종애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한 춘애하고는 군에서 제대하기 전까지 편지로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휴가 나와서는 만나기도 하고. 이성으로서의 마음은 아니었다. 공부를 못해서 야간 전수학교에 다닌 춘애는 국립 S대에 사동으로 취직을 하더니 일하는 틈틈이 난, 여유있는 시간에 문학작품 읽는데 취미를 붙여 나를 만났을 때는 글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할 정도까지 수준이 올라 있었다. 내가 국문과에 다니는 것을 의식한 발언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독서량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대후 복학해서 한번 더 만났는데 그때 쯤에는 육사생하고 연애도 하고 있다고 그랬다. 얼굴이 예쁜 편도 아니고 공부도 못 하는 편이었지만 많은 독서량이 갖추게 해 준 지적인 면이 부각되었던 것일까. 아무튼 승오의 죽음으로 인연이 끊어진 탓에 그 뒤 소식은 모른다. 승오네 기족 전체 소식을 다.
15. 3학년 때, 친해지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그럴 기회를 만들지 못한 성호, 찬곤이는 동창들 중 줄 가장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 현재까지도 그리 살고 있고.
성호는 요식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백억대가 넘는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동창들 사이에 나게 하면서 지금도 활발하게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K대 국문과 출신 아들에게 출판사까지 차려 주고서.
찬곤이는 고등학교 졸업후 5급(요즘의 9급) 기술직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는 주경야독 생활을 하여 그 어렵다는 기술고시를 패스해 고위 관료 자리까지 올랐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차관까지 지냈는데 학벌이 변변치 않은 그가 차관 자리에 오른 것으로 참여정부의 인사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갖게 해주었다. 국립 S대 졸업장이 없으면 좀처럼 높은 지위에 오르기 어려운 이 나라 풍토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였다. 유감스럽게도 매스컴에서는 내가 생각한 그런 식의 보도는 전혀 없었지만.
14. 내게 이성에 대해 눈을 뜨게해 준 세 소녀-성신, 계숙, 종애-의 소식은 전혀 모른다. 사춘기 그 시절에 본 것이 다이니 알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짐작도 안 간다. 다만 셋 다 한 미모하는 인물들이었으니 남자들한테 인기가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성신이는 양장 기술을 잘 배워 그 분야 전문가가 됐을까, 아니면 자기 미모를 보고 다가오는 남자애들 중에 자신을 안락하게 살게 해 줄만한 아이를 잘 골라 한 평생 잘 살아왔을까, 아니면 영철이 같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의 아이까지 마다않고 받아들이다가 유흥업소 쪽으로 빠지는 삶을 산 것은 아닐까.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은 고등학교까지는 다녔을 것이다. 통학열차 안에서 계속 남자애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 중의 누구를 받아들여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며. 사촌 형 여자친구처럼 문란한 이성관계를 갖는 생활을 했을 지 아니면 한 남자와 결혼까지 가는 사랑을 했을 지는 감이 안 잡힌다. 다만, 세상을 살아보니 외모가 빼어난 여자들은 남자들이 계속 눈독을 들이는 탓에 설사 가정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를 잘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를 많이 봐 온 탓에 이 소녀가 정숙한 삶을 살았을까에 대한 확신은 없다.
내 플라토닉 사랑의 주인공인 종애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가 지켜보는 것이 아닌데도 나보다 백배는 잘 생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학생의 프로포즈까지 거절할 정도였으니 문란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뒤의 삶을 알 길이 없으니, 성격은 변하기도 하는 것이니.
분명한 것은 세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건 이제는 모두 60 중반을 바라보는 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젊은 시절 아무리 꽃다운 미모를 가졌어도 이제는 시든 모습일 수밖에 없는 나이. 우연이라도 길에서 만나면 알아 볼 수는 있을까? 아마 알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50여 년 전 앳된 소녀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으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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