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사촌 형의 자취방으로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 되면서 다시 사촌 형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첫사랑 소녀 계숙을 못보게 되는 아쉬운 마음도 해가 짧아져 통학하기가 어렵게 된 상황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소녀에 대한 마음도 접어야 된다는 생각 쪽으로 이미 굳어져 있는 터였다. 마음을 표현할 용기도 없이 혼자서 가슴앓이하는 바보 같은 짓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촌 형과의 사이에 여름방학 동안에 있었던 일은 언제였더냐 싶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촌 형이나 나나 둘 다. 사촌 형은 이번에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있었다. 시내버스 종점이 가까워 진 곳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나는 동네로. 사촌 형의 친구 승건이 형이 자취하고 있는 바로 그 동네로.
학교에서 버스종점으로 가는 길을 기준으로 보면 북쪽으로 조금 멀리 보이던 마을이었다. 사촌 형은 이 마을 한 집에 방을 얻어놓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이 있고 마당도 있는 초가집. 집 대문을 나서면 마을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나오고 멀리 학교에서 버스종점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 들판이 눈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시야가 확 트여있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풍경. 집은 고향 할아버지 집을 절로 생각나게 했다. 종전에 지냈던 두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아늑하고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사촌 형은 이 집의 사랑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 자취집 풍경
주인집에는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아버지 또래로 보이는 부부 그리고 아이들 넷이 살고 있었다. 모두 일곱식구. 안방은 할머니와 아이들이, 건넌방은 부부가 쓰고 사랑방은 사촌형에게 세를 주고서. 네 아이들 중 제일 큰 아이는 나하고 동갑이었다. 승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박승오. 생일이 늦은 탓인지 학년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다니는 학교는 다른 곳이었다. 산을 하나 넘어가야 되는 동네에 있는 예술 고등학교. 바로 내가 다녀야만 될 곳이었다. 우리 둘은 금방 친해졌다. 마치 친 형제처럼. 학년은 달랐지만 나이가 같아서였다. 성격도 서로 잘 맞았다. 내성적인 성격.
승오 바로 밑은 여자애였다. 춘애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생긴 것은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외모. 누구나 시선을 끌게하는 성신이나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이와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났다. 공부를 잘 한다는 이야기도 안 들렸다. 만약에 잘 했다면 틀림없이 들렸을 터인데. 오히려 못한다는 쪽의 이야기가 들렸다. 아주 돌이라는. 이를 입증하듯 졸업하고 정식 중학교는 못 가고 학력 인정만 해주는 학교를 갔다. 춘애는 나보고 학생, 학생 그러면서 까불거렸다. 사춘기는 아직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리 까불거리지는 않았을 터인데.
춘애 밑은 둘 다 남자애들이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는데 1, 3학년 쯤 되었을 것이다. 공부는 둘 다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는 머리를 타고 난 애들 같았다.
할머니는 시골에 계신 내 할머니를 연상하게 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모습.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의 일에 좀 무관심한 성격 탓이었다. 내성적인 성격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남의 일 보다는 내 내면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입 밖으로 말을 내어 하기보다는 생각만 많이 하는 소심한 성격인 것도 작용했을 터이고.
승오 아버지는 도축장에 다녔다. 승오가 다니는 학교가 있는 동네에 있다고 들은 곳이었다. 구체적으로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관리직은 아니었다. 새벽에 나가 점심 때가 되기 전에는 집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내외가 같이. 매일같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할게 많은지 도란도란 정답게 말하는 소리만 마당에 들렸다.
이 집에 살면서 비로소 평화로움을 느꼈다. 꼭 내 집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오네 집 환경이 우리집과 비슷한 환경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별로 배운 것이 없어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 또래 부부에 할머니까지. 집도 친근감이 들었다. 고향 할아버지 집과 우리집을 연상케하는 초가집인 것이. 그러면서 부러웠다. 승오 아버지, 어머니 금슬이 좋으니 집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아이들은 늘 밝은 표정이었고 뭔가 당당함이 있어 보였다. 나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것들. 행복한 가정은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고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생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가족들도 많은데 사랑방을 세를 줘야 할 정도이니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닐 터인데도 그랬다. 승오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상을 가지고 나올 때 차려 논 반찬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고기 반찬은 거의 보이지를 않았다. 대부분 그리들 사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그런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집도 아버지가 부대에서 닭고기를 가지고 나온 것을 먹는 외에는 고기를 사서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명절 때 떡국, 생일 때 미역국에 든 소고기가 전부였다.
- 마을 풍경
승오네 집이 속한 마을은 집들이 하천부지를 따라 형성이 되어 있었다. 집 뒤 쪽이 바로 개울이었다. 이 개울가에 생긴 땅을 따라 집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었다. 땅은 나라 소유라고 했다. 외부로 통하는 길은 승오네 집 앞으로 나 있는 길 하나 뿐이 없었다. 길은 학교 쪽으로는 조금은 넓은 농로를 통해 학교와 버스종점을 잇는 길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이사장이 세운 사립 국민학교도 이 길가에 있었다. 버스종점으로 가는 쪽은 하천부지가 아닌 곳에도 집들이 들어서 있으면서 남쪽에 마주 보이는 마을과 이어졌다. 승오네 집은 하천부지에 들어선 집들 중 학교 쪽 거의 끝자락 쯤에 있었다. 학교에 가는 시간은 그만큼 덜 걸렸다.
집 뒤 개천 너머는 들판이었다. 주로 논이었는데 끝이 거의 안 보였다. 끝자락 쯤에 커다란 공장 굴뚝이 하나 보였는데 워난 큰 탓에 굴뚝에 쓰인 글씨까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00간장이라는 글씨. 들판, 마을 가까운 곳에도 공장 모습을 한 건물이 한 채 보였다. 규모도 작고 딱 한 동 뿐이었는데 사방이 다 논인 곳에 있는 것이 하도 궁금해서 뭐 하는 곳인가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워낙 낯설은 모습인 탓에. 옷감에 무늬를 넣는 염색공장이었다. 몇 년 뒤 이 공장을 시작으로 이곳 논들 전부가 공장지대로 변하게 되리라는 건 짐작도 못했다. 학교 옆 그 맑던 개울물이 페수로 넘쳐나게 되리라는 것도. 시내에 있는 입시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버스종점 가는 길가에 있던 논밭들이 새로 지은 양옥집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걸 보면서도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무심하게 오가기만 했었다.
-승오네 이웃들
승오네 집 학교 쪽으로 있는 옆집은 승오네 친척집이었다. 어느 정도 가까운 친척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집 아저씨 모습이 승오 아버지와 많이 닮은 것을 우연히 본적은 있었다. 아마 4촌 쯤 되지 않았을까? 더 가까운 사이는 틀림없이 아니었다. 두 집은 왕래가 거의 없었다. 승오 말로는 아주머니가 좀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그랬다. 이 집 대문은 늘 닫혀 있었다. 승오네 집 대문을 비롯 다른 집 대문이 늘 열려 있었던 것에 비하면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 이유가 뭔지는 알지 못했다. 초겨울 무렵에 이 집 건넌방에 세를 들어 온 새댁의 여동생과 특별한 인연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 집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누가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농사를 짓는 아저씨 내외와 5명의 자식이 있었다. 3남 2녀. 위로 두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그 중 한 명은 여자였다. 양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누나 뻘이었다.
이 누나는 가발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공부를 잘 했다는데 집안 형편 탓에 중학교를 못 간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봐 온 내 국민학교 동창들, 동네 아이들과 똑같은 이유였다. 나라 가난한데다가 덩달아 집까지 가난한 탓. 나라가 잘살게 되면 저절로 숫자가 적어지게 될 가난한 집들 중 한 집이었다.
동네 안 버스 종점 가는 길목에, 길쪽으로는 높다란 벽과 작은 창문만 몇 개 보이는 시골마을 분위기와는 전혀 안 맞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옆으로 지나다니면서 시골 동네에 왜 이런 건물이 들어서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양순이 누나가 다니는 가발공장이었다.
나는 이 누나를 좋아한 편이었다.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누나가 없는 탓에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이런 내 마음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어서 그랬을 뿐이다.
승오에게 부탁을 했다. 수양 누나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한번 물어보라고. 승오는 망설였지만 전달은 해주었다. 결과는 노였다. 싫지는 않지만 남동생이 둘씩이나 있는데 또 동생을 두기는 좀 그렇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대신 누구 하나를 소개해주겠노라고 그랬단다. 그 누구가 누가 될지, 내 마음에 들 것인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약속만 지켰다. 아주 못 생긴 여자를 데리고 와서 실망만 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아가씨나 사촌 형 여자 친구가 우리 자취방으로 데리고 왔던 자기 친구와 동급. 차라리 소개할 생각을 말 것이지. 괜히 우리 둘 사이만 서먹서먹해졌다.
제일 위는 사촌형하고 얼추 동갑인 것 같았다. 사촌형이 이 형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이 집 뒷 곁에 만들어 논 역기로 같이 운동을 한 것을 보면. 이 형은 국민학교만 나와 집안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이름도 촌사람 표시가 물씬 나는 영돌이였다.
양순이 누나 바로 밑은 나하고 동갑내기였다.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이 아이도 국민학교만 나와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아이들 모습이 대개가 그렇듯이 아주 순박한 모습을 하고서. 같이 어울릴 기회는 없었다. 워낙 폐쇄적인 집이어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기회가 있더라도 학력 차이 때문에 스스로 피할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나는 괜찮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자격지심 때문에 먼저. 이런 일은 나에게도 해당되었다. 내가 자격지심이 들게하는 그런 조건을 가진 아이들을 볼 때는 나도 그러기 마련이었다.
바로 밑의 아이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 새로 생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영구라는 이름이었는데 나이 차이가 나는 탓에 별로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신세를 톡톡이 지는 일이 생기게 된다. 내 일방적인 부탁에 따른 것이었지만 내 편지를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이다. 초겨울 무렵부터 이 집 건넌방에 세들어 살게 된 한 새댁의 여동생을 3학년 초에 알게 되면서.
막내는 춘애하고 동갑내기 여자애였다. 양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국민학교 6학년 짜리. 촌티가 나기는 했지만 춘애보다는 예쁘게 생겼고 공부도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춘애가 엄청 공부를 못한다고 나 있었던 반면에. 이 아이도 나를 보면 학생, 학생하고 부르며 웃고 그랬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어린 것이 까불고 있네라고 생각한 정도. 나이로는 6년 정도뿐이 차이가 안 났지만 아직은 소녀가 아닌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몇 달 뒤 해가 바뀌면서 나는 고3이 되고 춘애하고 양분이는 중학교 1학년이 되지만 이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첫눈에 보고 반했던 당시의 계숙이란 소녀도 중학교 1학년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큼 내 첫사랑 소녀의 외모가 빼어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양분이도 남에게 빠지는 외모는 결코 아니었는데. 내 사춘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조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이미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 뒤 식어가고 있는 중이라서.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쪽이 맞을 것이다. 사랑의 열병은 상대만 바뀔 뿐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게 마련인 것을 살아가면서 경험을 하게 되니까.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해가 바뀌고 3학년이 된 봄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도 여러 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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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오네 집에서 버스종점 가는 쪽으로 있는 옆집에는 아주 특이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승오 할머니와 얼추 비슷한 나이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이 할머니도 혼자이기는 승오할머니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승오 아버지 또래의 아들이 안 보였다. 딸하고 외손주들만 보였다. 딸은 승오엄마보다 조금 젊어보였는데 딸만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내 또래, 다른 한 명은 중학생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대학교 다니는 아들도 한 명 있었다. 국립S대생.
승오 할머니는 이 할머니를 예수쟁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말했다. 약간의 멸시 비슷한 감정이 섞여 있었는데 종교가 다른 탓인 것 같았다. 승오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다.
이 할머니는 내가 보기에 승오 할머니가 멸시할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집 앞 길에서 우연히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늘 단정한 모습이었다.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모습.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게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났지만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 같은 느낌. 1학년 때 처음 자취하던 곳에서 만난 옆방 할머니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할머니처럼 거만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은 것이다. 승오할머니에게서는 고향에 살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연상되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 할머니는 뭔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들이 S대를 다니고 있는 것도 그렇고 손주일 두 여학생은 밖에서는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얌전했다. 우연히 몇 번 본 두 여학생의 얼굴은 그리 예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 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 그런데도 뭔가 품위가 느껴졌다. 가정 교육을 아주 엄하게 받고 있는 듯 싶은 느낌. 그래서 그런지 묘한 신비감이 들게 했다. 한번은 내 또래 여학생이 자기집에 물이 안 나오는지 승오네 집으로 물을 길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평소에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는 이 여학생의 물 긷는 모습을 묘한 호기심이 들어 내다봤을 정도였다. 방문을 살짝 열고서. 그런 내 모습을 승오엄마는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표정 반이 섞인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이 집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원의 대상'이었다. 살고 있는 환경은 승오네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데 사람들은 뭔가가 달랐다. 나나 승오처럼 시골 출신들이 갖고 있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들은 얘기로는 할머니는 청상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 이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무슨 일을 한 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할머니 분위기로 봐서는 지체높은 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할머니와 길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매우 당황스러웠다. 인사를 하면 될 터인데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버릇이 없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어려워한 편이었다. 인사를 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인지 판단이 서지도 않았다. 인사를 잘 받아 줄 것인지 아닌 지.
S대를 다니고 있다는 아들은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다. 철학과인지 심리학과인지를 다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주 잘 생긴 얼굴이었다. 전혀 말이 없어 보일 듯한 분위기가 뭔가 깊이도 있게 느껴졌다. 내 주위에 S대는 물론이거니와 대학이라는 곳 자체를 다니고 있는 지인이 한 명도 없는 때문에 더 그랬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2년 뒤 고향 종가집 할아버지의 손자인 재원이 형이 서울에 있는 S교대를, 당숙 뻘 되는 사촌 형과 동갑인 아저씨가 인천에 있는 교대를 간 것이 전부였다. 나에게 형뻘의 나이인 두 친척은 교대가 2년제이고 학비도 싸서 간 것이 틀림없었다. 4년제 대학을 가기에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교대는 교사의 월급이 얼마 되지를 않은 탓에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가는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종가집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인 재원이 형은 그렇다 쳐도 당숙 아저씨는 내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내게는 할머니뻘인 어머니가 보따리 행상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전쟁 때 이북으로 납치되어 간 할아버지 때문에 청상 아닌 청상이 되어 가지고.
나는 이 학생에게 과외를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행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개별과외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집안 형편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만 했고 현실로 돌아와 시내에 있는 단과학원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만도 다행인 일이었다. 1학기 때 잠시 다니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데 아버지가 월남으로 기술 취업을 가신 덕에 숨통이 좀 트인 것이다.
*
이 집 옆으로는 다시 초가집이 한 채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냥 지나다니는 길 옆에 보이는 집 중 한 채일 뿐이었다. 학원을 가든가 반찬을 사느라 거의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런 상황은 이 집에 아주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생기면서 달라졌다. 이 구멍가게가 생기기 전에는 사촌 형의 친구인 승건이 형이 자취를 하고 있는 집 근처에 있는 가게까지 반찬꺼리를 사러 다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반찬꺼리라야 어묵이나 두부, 감자 정도를 사는게 전부여서 굳이 먼 데까지 갈 필요가 없는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가게를 하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게 되었다. 갓난 아기가 있는 젊은 부부였는데 나이가 나보다 별로 많아 보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봐도 20초반일 듯 싶어 보일 정도로 어렸다. 그런데 아기까지 있었던 것이다. 가게를 주로 보고 있는 애기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는 좀 뜻밖이었다. 남편이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선배라는 것이었다. 이 집이 자기 친정집인데 남편이 세를 들어 자취를 하고 있는 중에 둘이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참 한심한 선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는 탓이 아니었다. 학교가 싫으니 당연스레 선배도 싫은 그런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취생과 주인집 딸이 서로 사랑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도 아니었다. 20초반의 젊은 나이에 물건도 별로 없는 구멍가게를 차려놓고 먹고 살 생각을 하고 지낸다는게 한심스러워서였다. 그렇게만 살고 말것은 아닐꺼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아직 생각이 짧은 어린 나이인 탓에. 그저 다니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선배가 졸업후에 한심하게 살고 있는 것만이 당장 눈앞에 보여서였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학교 다닌 사람이 뭐 별 수 있을라고." 뭐 그런 생각이었다. 한 두어 번 본 얼굴에서는 나보다 더 변변치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비록 고등학교는 잘못 왔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니고는 있지만 이대로 있지는 절대 않을꺼야"라는 다짐을 하며 지내고 있는 때여서였다. 그 선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뭔가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를 않았다. 그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꼴이 너무 한심해 보여서 경멸하는 마음만 들었을 뿐이다.
"한심한 인간 같으니. 살아갈 대책도 없이 사고를 쳐서 아이를 낳고 겨우 20초반 나이에 구멍가게나 차려 놓고 살고 있어?" 뭐 이런 생각이었다. 잘못된 생각. 남의 살아가는 모습을 자기 잣대로, 그것도 별로 성숙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 사촌 형의 친구 승건이 형
승건이 형은 멀리 교동도 출신이라고 했다. 강화도도 아닌 거기서 배를 타고 더 가야되는 곳. 이 섬에 대해서는 연산군이 유배를 가서 죽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섬에서 살고 있다니, 그 먼데서 어떻게 서울로, 그것도 동북쪽 끝에 있는 학교로 유학을 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서울의 교동도 가까운 쪽 이를테면 마포 쪽에도 공고는 있었다. 학교 수준도 비슷했고.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사촌 형한테 "승건이 형은 왜 이 먼데까지 와서 학교를 다닌대. 마포 쪽에도 학교가 있는데"라고 물으니 "낸들 아니. 말을 안 해주는데. 뭔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가 되돌아 온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형하고 사촌형하고는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사촌형이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 문제. 사촌형의 여자친구가 자취방에 놀러왔다가 돌아간 뒤에 어떻게 사귀게 된 사이냐고 물어봤었다. 사촌형은 그때 "처음에는 승건이 형하고 사귀었는데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싫다면서 헤어지고 난 뒤에 자기하고 사귀게 된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싶었는데 사촌형과 승건이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승오네 집에 자취방을 얻게 된 것도 승건이 형이 소개해 준 것이라고 했다. 승건이 형이 살고 있는 집 주인 아저씨와 승오 아버지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장 동료이면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이. 그래서 승오네 집에서 자취생을 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사촌형에게 알려 준 것이라고 했다.
승건이 형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은 승오네 집에서 버스종점이 있는 쪽으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승오네 집을 비롯해서 다른 집들이 다 개천 남쪽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집은 개천 건너편인 북쪽에 있다는 점이었다. 농경지들이 있는 쪽, 개천을 건너가야만 되는 쪽이었다. 개천 위로 다리가 놓여 있어야만 다닐 수 있게. 당연히 다리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한 여름 외에는 물이 많이 흐르는 개천이 아니어서 떠내려 갈 염려는 없다는 듯,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오가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는 다리였다.
놀라운 것은 이 집은 기와집이라는 점이었다. 이 동네의, 내가 주로 오가는 곳인 승오네 집에서 부터 시내버스 종점이 있는 사이에 있는 집들 중에 기와집은 딱 두 채뿐이 없었다. 그 중의 한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다른 한 집은 승오의 국민학교 동창인 정호네 집이었다. 운동 특기자로 시내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승오하고 별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이 아이가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행동을 하는 탓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우연히 몇 번 본적이 있는데 덩치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데다가 운동까지 하고 있으니 여학생들이 엄청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열등감 속에 지내고 있는 나를 더욱 초라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이게 화가 되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남들과 충돌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어버리는 대형사고가 나버린 것이다. 자기 부모 특히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게 한 사건. 자세한 내용까지는 잘 모르지만 군인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은 탓이라고 했다.
*
승건이 형이 세를 얻어 자취를 하고 있는 집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 본 집 중에서 제일 좋았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듯 싶게 깨끗하기도 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승오네 초가집이나 전에 살았던 이사장 딸네 집의 창고를 개조한 방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파주에 있는 우리집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웬만한 곳은 다 목재를 써서 지은 한옥이었다. 어쩔 수 없는 곳만 시멘트를 쓴 집. 안마당이라든가 부뚜막 같은 곳.
승건이 형이 세를 살고 있는 방은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 두고 있는 건넌방이었다. 건넌방 옆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혼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담배를 줄창 피워대는. 아마 승오할머니 연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왜 혼자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 역시 남에게 무관심한 성격 탓이었다. 남에게 관심을 많이 갖기보다는 내 문제만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 탓.
내가 이 집을 자주 드나든 것은 집이 깨끗해서였다. 그동안 이리 깨끗한 집에 살아 본적이 없어서. 앞으로도 살아볼 기회는 좀처럼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내 스스로 앞가림하는 삶을 살아가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살아볼 기회가 없을 것만 같은 집인 생각이 들어서. 승건이 형 방에 들어가면 그리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공부도 잘 되었다.
사촌 형이나 승건이 형이나 집 아니 방에는 거의 붙어있지를 않았다. 어디를 무엇을 하며 돌아다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둘이 함께 미아리패라고 불리우는 학교 내 불량스러운 패거리들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잠만큼은 꼭 자취방에 들어와 잤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승건이 형 방을 내 공부방으로 자주 이용할 수 있었다.
* 승건이 형 주인집
승건이 형이 자취하는 집주인 내외에게도 아이들이 넷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승오 엄마, 아버지 또래인데도 아이들이 좀 어리다는 점이었다. 정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제일 큰 애가 나나 승오 또래였어야 할터인데 그렇지를 않았다.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어서 3년 정도 아래였다. 이 아이 바로 밑으로는 춘애하고 같은 국민학교 6학년 짜리 여자애가 있었다. 이름이 영례였는데 춘애보다는 예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국민학생이어서 아직 소녀티가 안 날 때라 이성으로서의 관심 대상은 되지를 못했다. 춘애가 중학교를 들어간 다음 해에도 교복 입은 모습에서 젖가슴이 교복 밖으로 나온 것이 안 보인 것을 보면 소녀티가 나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될 것이었고 나는 그런 모습을 볼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3학년 1학기가 끝난 여름방학 때 파주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서울로 몽땅 이사를 오면서 합류를 하게 되기 때문에.
* * 아버지의 해외 취업
이즈음 집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물론 나에게도 커다란 행운이 된 사건.
아버지가 월남으로 기술취업을 가시게 된 것이다. 빈넬이라는 미국회사를 통해서였다. 아버지가 미군부대를 다니고 있던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의 상사로 있던 미군 선임하사가 제대를 하고 월남으로 취업을 가면서 아버지도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뭐 공짜는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옆집 한씨 아줌마와 양키물건 장사하는 젊은 부부한테 돈을 빌리러 다닌 것을 보면.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병력이 모자라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군도 베트남으로 빼간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리 되었고. 아버지가 다니고 있는 미군부대도 베트남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가 대순이 아버지와 막걸리를 나누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월남전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집안 내부적으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아버지가 해외취업을 가시게 된 것은 잘 된 일이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막연하게 공부를 하고는 있었지만 과연 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는데 적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된 것이다.
"국립 S공대를 갈께요"
아버지가 월남으로 가시기 전에 이리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의 반응은 영 미덥지 않다는 쪽이었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를 쳐다보시기만 했다.
"네가 감히 그 대학을 어떻게 가"라는 의미가 다분히 담긴 그런 표정을 하시고서. 그럴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오성이는 유명 상고를 갔는데 나는 무명 공고를 다니고 있으니 실력이 없다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나의 공부 잘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에 가깝다는 확인을 아버지가 직접 한 적도 있었고.
*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아버지는 나를 문산읍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시키려고 하셨다. 호은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 이유는 단 한 가지였을 것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니 매일 들어가는 교통비라도 아껴야 되겠다는 생각.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호은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갔고 실력 테스트를 위한 시험을 치렀다. 국어, 영어, 수학 세과목. 결과는 참담했다. 국어가 80점대, 영어가 70점대, 수학이 겨우 낙제만 면한 60점 초반. 그 학교 선생에게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잔뜩 자랑한 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셨다. "짜식이 공부를 잘한다더니 점수가 이게 뭐야"라는 화난 표정으로. 전학을 안 하게 된 것은 점수가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극구 말려서였다.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라서 전학시키기가 아깝다고 그랬다나 뭐라나. 사실이기도 했지만 학생 한 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에 과장까지 했을 가능성도 많았다. 경위야 어쨌든 이 말을 들은 아버지의 화는 많이 풀렸지만 나에 대한 신뢰는 많이 접으신 상태였다. 거기에 확인 도장을 찍은 것이 오성이가 간 유명 상고에 나는 원서 내 볼 생각조차 못 해보고 무명 공고를 간 것이고.
체면을 구긴 일은 전학을 하려고 했던 호은이네 학교에서 더 크게 일어났다. 호은이 말로는 나를 시험 보게 한 선생이 수업시간에 들어와 내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자기 학교 반에서 5등 이내라고 자랑한 아이가 시험을 봐보니 형편없더라는. 호은이가 이 말을 전해 줄 때 호은이 기분이 어땠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짜식 공부 잘 한다더니 별거 아니였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해 준건지 아닌지를 파악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창피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 뒤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욕심도 없이 3학년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냈고 그 결과가 무명 공고를 간 것으로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국립 S 공대를 가겠다고 그러니 아무리 배우지 못한 아버지일지라도 코웃음 칠만도 했다. 공부라는 것이 하루 이틀 사이에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실 리는 없지만 무명 공고생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신 듯 했다. 세상을 살아 온 경험을 통해서.
아버지가 월남에 가시는 날 여의도에 있는 공항에는 작은 집 식구들과 나만 전송을 나갔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참석을 못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집 식구가 다 갈 수는 없었으니까. 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기고 사는 두 여인이 얼굴을 서로 맞대는 일은 최악의 상황일 터여서였다. 당연히 큰 집인 우리 집 식구들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마음은 늘 작은 집에 있었으니까. 나는 그래도 장자라고 대표격을 참석을 한 것이었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서로 내 아버지라고 싸움을 하던 이복 남동생 곁에 다정한 포즈로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 머리 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생각들.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친동생들이 없는 자리에 나만 혼자서 작은 집 식구들과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모멸감 뭐 그런거 비슷한 것들이었다.
이 동네로 이사오기 전, 한동네에 살고 있던 당고모는 어머니와 내가 들으라는 듯 이야기를 하나 했다. 당고모부에게 여자가 생겨 첩 꼴 볼 뻔 한 것을 아이들까지 몽땅 데리고 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혼줄을 내서 쫒아낸 적이 있다는. 그 얘기가 꼭 "대근이, 너는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뜻으로 들려 마음이 편치를 않았었다. 난 그리 할만한 용기가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단 한 번만이라도 그래봐야 남자다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으면서. 이복동생들이 있고 없는 것과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야 남자다운 것 아닐까라는 생각만을 수도 없이 했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는 나를 못난 몸이라고 스스로 질책했을 뿐이었다.
* 사촌 형의 졸업
집에 큰 변화가 온 뒤를 잇달아 자취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제일 큰 변화는 사촌 형이 졸업을 했고,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향으로 내려 간 일이었다. 취직을 안 하고 고향으로 내려갈꺼면 뭐하러 자취까지 해가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을까 싶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여자 친구 문제에 대해서만 물었다.
"형 여자 친구하고는 어떻게 할꺼야. 나중에 결혼할꺼야?"야 라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 집에서 승낙을 해주겠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공고만 나온 시골 출신인 자기에게 딸을 주고 싶어하겠느냐고.
형의 여자 친구집은 시내버스 종점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다. 양순이 누나하고 영례가 다니는 가발공장 바로 맞은 편. 그냥 평법한 초가집이었는데 대문이 길쪽으로 나 있어서 오다가다 마주칠 가능성은 늘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 이 길을 통해서 시내에 있는 학원을 다녔기에 .
사촌 형과 여자친구는 겨울이 되기 전 늦은 가을 무렵 동네가 떠들썩해질 사건을 일으켰다. 둘이 자취방에 들어가 한동안 안 나온 것이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나도 황당해했지만 더 놀라운 표정을 지은 건 승오엄마였다. 황당해하고 있는 나와 실실 웃고 있는 승오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둘의 이런 행동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특히 사촌 형의 여자친구 행동이 그랬다. 사촌 형이야 남자고 졸업을 하고나면 이 동네에 계속 살거라는 보장도 없는 뜨내기여서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촌 형의 여자친구였다. 난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촌 형의 여자 친구는 이 동네의 토박이였다. 승오네를 비롯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소문이 온 동네에 쫙 퍼질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벌건 대낮에 동네 아는 집에서 남자친구와 동침이라니. 더군다나 아직 여고생 신분이었는데. 바로 옆집에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문밖 출입조차 안 하는 여학생이 살고 있는데.
사촌 형 여자친구의 마음 상태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촌 형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인건지 아니면 생활이 문란한 것인지. 어떻게 벌건 대낮에 그것도 아는 사람들이 태반인 동네에서 아직 학생 신분으로 그리 할 수 있는 것인지.
사촌 형이 여자친구를 얼마나 사랑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가 또 있는 것은 알지 못했으니 바람둥이는 아닌 것 같은데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사촌형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여자친구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보고 가슴앓이나 하는 나같이 한심한 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지고지순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나처럼 바보같은 짓은 안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명한 성격. 나는 그렇지를 못한 성격이기에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고 내가 갖고 있는 마음으로만 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참 답답하고 한심한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 플레이보이 동급생 재면이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가 있었다. 재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눈에 봐도 아주 잘 생긴 아이. 쉽게 표현하자면 영화배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면에서는 내가 좋아한 길수보다도 더 잘 생겼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길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거고 재면이는 아니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 다르기는 했지만. 아주 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하교 길에 교내 사진사 아저씨를 만난 김에 찍은 사진. 잘 생긴 녀석과 기념으로 찍어두자는 마음이 생겨서였다. 경오, 광수처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불량스러워 아예 외면해버린 그런 부류들의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이 재면이가 자취하고 있는 집에 한번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토요일 저녁 무렵, 공부하다가 지친 머리를 식힐 겸해서. 재면이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맞은 편 동네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시내로 가는 길 기준으로 보면 길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농가가 많은 동네에 있는 집.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이곳 쯤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집들과 서로 인접해 있었다. 동네 모습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예전부터 있던 초가로 된 농가와 지붕이 기와로 된 집들이 새로 들어서서 혼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다 논밭이었던 곳들이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근처에 있는 논밭들도 다 집들이 들어설 것이라는 암시라도 하듯 시내가 가까운 쪽에서 부터 야금야금 없어지면서 이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재면이가 살고 있는 집은 세를 줄 목적으로 지은 집 같아 보였다. 대문을 들어서니 제법 넓직한 마당을 한 가운데에 두고 양쪽이 다 방이었다. 그날 재면이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방 안에 누가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았다. 그저 혼자 공부를 하고 있거니 생각하며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내 예상은 빗나갔다. 놀랍게도 여학생이 한 명 있었던 것이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놀란 눈을 한 얼굴만 내놓고서. 머쓱해져서 방문을 닫고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씁쓸했다. 재면이가 부럽기도 했다. 난 좋아하는 여학생, 좋다고 하는 여학생한테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병신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재면이는 자취방에 여학생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 몰랐다. 사촌 형도 자기 여자친구를 자취방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나처럼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말 한 마디 못 붙여보고 가슴앓이나 하는 숙맥이 있는 반면에 사촌형이나 재면이 같이 사귀는 여학생하고 동침까지 하는 그런 학생들도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비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학생들도 당연히 남학생들을 사귀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같이 말 한 마디도 못 건네는 사내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어떤 여학생이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사내를 좋아할 것인가. 설사 이런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뭐 저런 바보같은 사내가 있담. 저래가지고 어떻게 여자를 사귄 담" 그러면서 제풀에 물러나 버리지 않겠는가. 짐작이기는 하지만 첫사랑 소녀 계숙이도 그랬을 가능성이 많았다. 분명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내가 아무런 행동도 안 보여주니까 영식이를 만난 것일 가능성. 계숙이도 내가 첫사랑일 가능성이 많으니 마음 한 쪽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첫사랑인 나와 같은 학교, 학년인 영식이를 만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헤어지자고 그런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영식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 남학생이 접근을 하니 그랬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리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 사촌 형의 여자 친구
하루는 재면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놀라운 야기를 들려줬다. 사촌 형의 여자친구하고 같이 잤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얀마. 그 여학생은 내 사촌 형하고 사귀는 사이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녀석은 나의 이 말에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대는 말을 했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말을. 나한테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가늠을 못 했다. 사촌 형의 여자친구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걔 문란한 애니 너무 빠지지 말라는 뜻인 건지. 사촌 형한테 바로 이야기를 했다. 알고는 있어야 어떤 대처를 할 것이 아닌가 싶어서. 사촌 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끝날 사이니 신경 안 쓰겠다는 뜻인 건지. 그렇게 유야뮤야되고 사촌 형은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 뒤 재면이의 말이 맞다는 증거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아주 우연히.
어느 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쉴 겸 해서 대문 밖에 나가 멀리 버스 종점으로 가는 길 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다가 산보 삼아 동네 뒷 쪽 논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못 가 흠칫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동네를 막 벗어나려는 즈음 사촌 형 여자친구의 모습을 본 것이다.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 자그마한 공터에서 웬 남자와 큰소리로 마구 다투고 있는 모습을. 남자는 학생도 아니고 일반인이었다. 당당한 체구의 잘 생긴 남자. 하도 큰 소리로 다투고 있어 아주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무슨 내용인지 다 들렸다.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중이었다. 사촌 형의 여자친구는 변명을 하고 있었고.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아니라고. 변명에 열중해서인지 내 쪽을 흘깃 봤는데도 못 알아본 것 같았다. 내 모습이 제대로 눈에 안 들어 올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니면 알아보고도 애써 외면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날, 재면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했다. 남자 관계가 몹시 문란하다는 걸. 사촌 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까지 갈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촌 형의 여자친구는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집을 갔다. 승오 엄마의 말로는 남자관계가 하도 문란하니까 집에서 부랴부랴 시집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좀 모자라는 남자를 하나 수소문해서 다니고 있던 학교도 중도에 그만 두게 하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학원 가는 길에 사촌 형의 여자 친구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자기 집 앞에 아기를 업은 모습으로 길가에 나와 있어서였다. 벌써 아기를 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간으로 보아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면 결혼 전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시집을 간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아는 체를 안 하고 그냥 지나쳤다.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을 경멸하는 뜻은 아니었다. 여자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건네는 내 소심한 성격 탓이었을 뿐이다. 사실 그동안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였다.
* 나의 불량연습
그해 겨울에는 나에게도 자그마한 해프닝이 있었다. 불량스러운 짓을 한번 해보려고 시도를 한 것이다. 여학생들을 꼬시는 일. 나 혼자가 아니라 승오하고 같이 한 짓이었다. 동네 형의 힘을 빌려서. 승오나 나나 자력으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어서였다. 재면이나 영칠이가 쉽사리 해내는 짓을 나는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싫어서였다.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나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을 척척 해대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보고도 싶었다. 승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교복 차림은 불량스러운 아이들하고 똑같이 하고 다녔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이었다. 모자 안에 신문지를 넣어 각을 만들어 쓰고 바지를 다리 목이 보이게 짧게 해서 입고 다녔지만 불량스러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괜이 겉멋이 들어 남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마저도 싫어 누가 보기에도 모범생으로 보일 정도로 단정한 옷차림으로 다녔고. 승오나 나나 순진하다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승오 국민학교 동창인 정호네 집 옆에는 겉으로 봐도 엄청 가난하게 보이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이 동네에 살면서 본 집 중에 가장 초라한 집. 울타리도 없어 집 안이 다 들여다 보이는 그야말로 오막살이집이었다. 이 집에 불량스럽다고 소문이 나 있는, 우리보다 서너살 위인 준태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 형이 살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운 탓인지 중학교만 겨우 나왔다고 알려져 있는 형이었다. 소년원에도 한번 갔다 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폭력이 아니고 좀도둑질 때문이라고 했다.
방학 중에 잠시였지만 이 형하고 같이 어울려 다닌 것이다. 승오와 함께. 내가 승오를 꼬드겨서였다. "저 형하고 같이 다니면 여학생들을 잘 꼬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형은 소문은 나쁘게 나 있었지만 우리들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우호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승오하고 같이 놀며 자라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승오나 나나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여학생을 꼬시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성격이었으니까.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승오엄마의 근심스러운 눈초리까지 받아가면서 벌인 짓이었는데 말이다. 준태 형은 동네에 소문난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여학생을 꼬시려는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청량리 쪽에 있는 영화관에를 없는 돈을 두 번씩이나 들여가며 갔지만 소득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형 여학생 좀 꼬셔봐"라고 부추겨봤지만 헛일이었다. 승오나 나나 이 형만 믿고 폼만 잡다 말았다. 껌 질겅질겅 씹으며 교복 바지 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질러넣은, 누가 보면 영낙없는 불량학생인 모습으로.
승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에이! 이 형 아무것도 아니잖아. 실속도 없이 왜 소문만 나쁘게 난거야. 괜시리 아까운 돈만 없앴네."라는 생각만 들었다. 잠시지만 불량스러운 짓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은 이리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는 원래 내 자리로 되돌아왔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모범생으로. 방 안에 틀어박혀 대학 입시용 참고서를 보다가 피곤하면 대문 밖에 나가 멀리 버스종점으로 가는 길 쪽을 바라보는 생활로.
승오엄마는 아마 속으로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네깐 것들이 무슨. 불량스러운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줄 알아"라고.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저것들 혹시 비뚤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 플라토닉 사랑의 시작- 종애의 출현
변화는 또 있었다. 양순이 누나네 집 건넌방에 누가 세를 들어 온 것이다. 내 자취방에서 보면 담 너머로 마당 쪽 방문이 보이는 방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세를 안 놓았었다. 식구 수를 볼 때 세를 논 것은 뜻밖이었다. 방이래야 안방, 건넌방 둘 뿐이 없는데 식구는 무려 7명이나 되었으니까. 더구나 나보다 어린 두 명을 빼고는 다 머리가 커 있었다. 성별이 달라 방이 최소한 두 개는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쓰고 있던 방까지 세를 놓다니.
양분이까지 중학교를 들어가게 되니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가 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적인 수입이라야 양분이 누나가 벌어오는 것이 다였을 테니. 영례네처럼 안방과 다락에서 7식구가 지내려고 그러는가 싶었다. 집안까지 들어가 본적은 없으니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양순이 누나네는 그래도 영례네보다는 형편이 나은 것 같았다. 양분이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한 것을 보면.
3학년이 되어서 안 일이지만 영례는 중학교를 못 갔다. 춘애, 양분이를 비롯 내가 알고 있는 동네 또래들 중 영례만. 집은 좋았지만 영례를 중학교에 보낼 형편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즈음에는 영례네 집에를 갈 수가 없어서 소식으로만 들었다. 사촌 형은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승건이 형은 그 집에 그냥 살고 있었다. 조그만 전자회사에 취직을 해서. 그렇지만 갈 명분이 없었다. 사촌 형이 없는 마당에 형 친구의 방을 내 방처럼 드나들 수는 없어서였다.
영례와는 학원 가는 길에 가끔 마주쳤다. 이때는 이미 양순이 누나가 다니는 가발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를 봐도 모른 척 했다. 영례는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집은 동네에서 제일 좋았지만 또래들 다 중학교를 갔는데 자기만 못 간 것 때문에. 그 뒤 점점 비뚤이지는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춘애로부터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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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이 누나네 집 건넌방에 세를 들어온 사람은 신혼부부라고 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원래 대문을 닫아놓고 지내는 집이어서 일부러 보려고 하기 전에는 볼 기회가 생기기 어려웠다. 많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또래 여학생도 아니고 이미 결혼한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젊은 여자들은 승오네 집과 양순이 누나네 집 사이에 있는 작은 골목 안에 있는 집에도 두 명이나 살고 있었다. 이따금 아기를 업고 길가로 나올 때가 있어 그럴 때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은 했고 이리 예쁘게 생긴 여인들이 왜 시골이나 다름없는 변두리 동네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결혼을 한 것일까 의문을 가져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결혼할 연령대가 된 여자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생활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일테니까. 그나마 얼굴이 남자들의 관심을 끌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을테니까.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그러니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다고 해서 크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새 학년이 될 무렵에 상황이 달라졌다. 새댁의 여동생이 본가에서 올라 온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것도 처음에는 몰랐다. 아마 춘애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알지 못했을 것이다. 춘애는 양분이하고 별로 친하지가 않았다. 이유는 공부 때문인 것 같았다. 양분이는 잘 하고 춘애는 못 하는 차이. 당연히 왕래가 별로 없었다. 이런 춘애가 이 집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바로 새댁의 동생 때문이었다.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죽이 맞았는지 하루도 걸르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러고는 나한테 무슨 대단한 정보라도 주듯 아주 예쁜 언니가 산다고 알려주었다. 종애언니, 종애언니 그러면서.
이 여학생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춘애의 수다로 원래 집은 충청도 당진이라는 곳이고 언니가 열차 안에서 신문기자를 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도가 다였다. 언니의 미모에 반한 기자가 먼자 프로포즈를 했다고 했다. 아주 적극적으로.
신혼부부가 사는 단칸방에 왜 동생을 데려다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출산이 임박해서인 것인지, 신랑이 집에 자주 있지를 못하는 상황이어서인지 아니면 종애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학생한테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물어볼 생각도 안 했다. 거기까지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서였다. 같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닌데다가 나하고 어떤 인연이라도 생길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게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절대로 자기 생각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것이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가 더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서.
춘애는 두 자매에게 내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좋은 쪽으로. 내 마음대로 생각해보자면 얼굴도 곱상하게 생기고 착실하게 공부만 하는 얌전한 학생이라고 그랬을 가능성이 많았다. 사실, 키가 좀 작고 사내다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 외에 흠이 잡혀 전해질 일은 없었다. 키도 보기 아주 민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168 정도는 되었으니까. 집이 가난하다는 것이 흠일 수는 있겠으나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끼리는 흠이 될 일도 아니었다. 잘 사는 사람들이 볼 때나 흠이 되는 법이었다. 그 잘 산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물을 쌓았느냐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바람을 쐴 겸 대문 밖에 나와 시내버스 종점으로 나있는 길 쪽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습관이었다. 기지개를 켜는 자세로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앞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이런 나를 눈여겨 보는 시선은 종전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시내 가는 쪽 옆집에 사는 여학생들은 학교 갔다오면 대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오는 얌전이들이었다. 그 외에는 춘애하고 같은 또래 아이들 몇 명이 살고 있는 것이 다였다.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가려는 꼬맹이들. 승오네와 양순이 누나네 집 사이 골목안에 있는 집에 세 사는 새댁들은 그저 어쩌다 보는 사이일 뿐이었다. 나나 새댁들이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명색이 사내이면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성격인 내가 더 심했겠지만. 이런 내 주변 환경에 급변화가 온 것이다.
두 자매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춘애가 내 이야기를 아무리 좋게 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호기심까지 자극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시내 쪽 이웃집 여학생들도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직접적인 접촉은 없을지라도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있고 내가 얌전한 학생이라는 정도는 알고는 있었을테니까. 성격 차이일까 아니면 본가에서 나와 자매만 따로 사는 탓에 마음이 자유로워진 탓일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자매가 나에게 관심을 표시했다는 일이었다.
그날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두 자매였다. 대낮에도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을 살짝 열고 머리만 내민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언니는 위에서 동생은 밑에서.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두 자매를 눈여겨 봤다. 언니는 춘애한테 들은대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남자들이라면 다들 한 눈에 반할 정도의 미모. 유명 언론사 기자라는 남편이 한 눈에 반해 프러포즈할 만했겠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동생도 역시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 계숙이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성신이에 못지 않다는 생각. 굳이 우열을 가리라고 한다면 셋 중 3등일테지만. 그러나 그뿐이었다. 첫 눈에 반해버린 여학생에게도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가슴앓이나 하는 내 성격에 이웃에 산다고는 하지만 대낮에도 대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집에 사는 여학생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을 생각은 없었다. 인연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그런데 인연으로 이어졌다. 내가 학원을 가는 시간과 이 여학생이 등교를 하는 시간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대인 것이 끈이 되어 줬다. 그래도 인연이 되려고 하니까 그리 된 것이지 버스를 타러 가는 시간이 같다고해서 다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닐 께다. 만약에 이 소녀가 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면 학교에 가는 시간을 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늦게 나가는 것은 지각을 할 수도 있으니 조금 일찍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소녀는 그러지를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학원에 가는 시간에 일부러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착각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여학생들이 외면할 정도의 외모는 아닌 것을, 오히려 호감을 갖는 쪽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알고는 있었으니까.
** 3학년 시절
그렇게 3학년이 되었다. 봄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뭔가 모르게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 아마 이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사귀고 싶다는 생각. 내 성격상 실현 가능성은 100%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그랬다. 자취방은 혼자서 쓰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만 쓸 수 있게 된 방이 생긴 것이다. 방 안에 있는 살림살이는 전부 사촌 형 것이었으나 사촌 형은 고향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자연스럽게 집에를 안 가게 되었다. 불과 반년 사이에 집이 별로 그립지 않은 나이가 된 탓도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의 품도 별로 그립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입시공부를 할 시간이 부족해서이기도 했다.
첫사랑 소녀 계숙은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자리 잡아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는 볼 기회도 전혀 없을 것이었다. 열차 통학을 할 일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말 한 마디 건넬 용기가 없어 아무런 인연도 만들어내지 못한 내 한심스러운 성격은 소녀와의 관계를 그리 끝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죽을 때가지 못 끝내고 살아 있을 것이면서. 현실에서는 맺어진 아무 것도 없지만 마음 속에서는 늘 살아서, 아름다우나 아쉬운 추억으로 남아서.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감과 비례하여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게 될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되는 남녀를 불문한 모든 이들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만 자리하게 되면서.
대학입시도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준비를 한답시고 2학년 1학기부터 단과 학원을 다니기는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 없는 실력이었다. 목표를 국립 S대를 잡고 있는 것은 뜬구름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 되면 차선책인 사립 Y대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사립 K대는 싫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람도 싫고 좋은 사람이 있듯이, 그런 감정이었다. Y대는 좋고 K대는 싫은. 두 학교간의 세평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차이가 없으니 내가 끌리는 학교를 택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
세 학교는 묘하게도 내 생활반경 내에 있었다. Y대는 통학을 할 때면 아침, 저녁으로 볼 수가 있었다. 등교시나 하교시나 늘 자리를 잡고 앉을 여유가 있었던 나는 꼭 Y대가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갔다. 기차 안에서 보이는 Y대는 멀리 보이는 건물들까지 일직선으로 된 길이 나 있었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길 위로 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많이 느겨졌다. 내가 이 학교를 가게 된다는 보장도 없던 때였는데 그 학생들 틈에 나도 끼어 걷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국립 S공대는 내가 다니는 학교를 가기 위해 내리는 역 다음 역 근처에 있었다. 덕분에 아침 등교길에는 청량리 역에서 제법 많은 학생들이 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곤색 교복에 공대를 표시하는, 원래 학교 뱃지와는 다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있는 모습을. 이들을 보면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닐 것 같아서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대학. 그것은 Y대, K대도 마찬가지였지만 도전을 해 볼수는 있는 일이었다. S대도 도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힘이 더 들 것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사립 K대는 학원을 가는 버스 안에서 늘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친근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버스에서 보면 길 바른 쪽에 학교가 있었는데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교문 외에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Y대는 학교 전경이 다 눈에 들어온 데 반해서. 뱃지에 호랑이가 새겨져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입을 떠억 벌리고 있는 모습이 안으로만 움츠러 들어있는 방어적인 내 성격하고는 정반대인 공격적으로 보여서 엄청 싫기는 했다. 이는 내가 호랑이띠임에도 남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는 성격인 것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가 나하고는 너무 안 맞는다는 느낌, 뭔가 내 성격하고는 안 맞는다는 생각. 사람도 첫인상부터 싫고 좋은 것이 있듯이 뭐 그런 것이었다. 이런 마음은 이 글을 쓰고 있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사람이고, 사물이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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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끔찍해졌다. 입시관련 과목 공부를 해야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실력, 시간 다 부족한 판에 학교는 입시와는 전혀 관계없는 과목들만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공부해야 되었는데 그 시간마저 학교는 빼앗고 있었다. 입시 관련 책들과 씨름해야 될 시간에 엉뚱한 과목 수업을 듣고 있어야 되는 생활.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그렇다고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인데 벗어날 생각조차 해보지를 않고 불만 속에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니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긴 했다. 현실에 불만이 있으면 이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생각은 안 해보고 그냥 지내는 어리석음.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과도.
* 승오의 전학
승오가 학교를 옮기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그럴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다. 학교를 옮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한 승오가. 승오 말을 듣고 학교를 옮겨주는 승오 엄마, 아버지가. 승오가 원래 다니던 학교는 예술고등학교였다. 동네에서 낮은 산을 하나 넘어야 되는 곳에 있는 학교. 그리 멀지는 않았다. 산자락을 뚫고 차가 다니는 길도 나 있어
3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버스는 아직 다니지 않아서 걸어다녀야만 되는 곳. 학교는 예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소문보다는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많다는 쪽으로 더 소문이 나 있었다. 승오가 이 학교를 간 것이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갈 실력조차도 안 되어서 그런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생각에는 그 학교나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나 남들이 보기에는 도낀개낀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난 승오가 부러웠다. 이 학교를 다니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승오는 학교를 옮긴 것이다. 내가 다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학교에서, 다니고는 있으나 결코 다니고 싶지않다고 생각하면서 다니고 있는 내가 다니는 학교로. 예고에서 공고로.
말도 안 되는 대 변신이었다. 승오는 예술 쪽이 적성이 아닌데 실력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그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학교로 전학을 오고 난 뒤에는 얼굴에 화색이 돈 것이 완연해 보였다. 그동안 보아온 얼굴과는 너무도 달랐다. 늘 침울하게, 마지못해 학교에 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게 180도 달라진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선지를 들고 다니던 손에 납땜 인두하고 진공관을 들고 다니며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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