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사춘기 (完)>

사춘기 - 지난 날 속으로(4)

Bawoo 2016. 2. 23. 19:17

 

** 2학년 시절

 

2학년이 되면서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하고는 반이 갈라졌다. 경오, 광수, 동수 그리고 종두까지 모두. 일부러 만나려고 하기 전에는 만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지낼 선택권이 학생들한테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지금껏 그래 왔던 일. 늘 속상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세상과 부딛치며 살아가야 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비례하여 더 많아지게 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들 중의 첫시작일 뿐인 일.

 

대신 새로운 동무가 생겼다. 태주와 길수 그리고 택수.

태주는 내 짝이고 길수는 바로 옆 자리였다. 교실의 맨 앞줄. 태주에 대한 인상을 별로였다. 얼굴이 잘 생긴 편도 아니고 가슴도 좀 이상하게 생겼다. 새가슴이라는 말을 듣는 가슴 가운데가 톡 튀어나온 일종의 기형이었다. 아직은  외모를 한창 중요시 하는 나이일 때였다. 가슴이 넓직하고 우람한 근육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부러운 때. 그런 아이들이 흔하지는 않았지만 반대 체형을 갖고 있는 아이가 짝이라는게 그리 좋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어쩌는 수 없었다. 짝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참고 지낼 수밖에. 그러다보면 정이 들고 친하게 지내게 되는 법이었다. 사랑하는 감정없이 중매로 만난 남녀가 한 이불 덮고 자면서 자식 낳아 기르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일 것이다. 특별히 싫을 이유가 없으면, 자꾸 보며 지내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라는. 태주는 그런 경우였다. 매일 한 책상에 같이  앉아 지내다보니 친하게 된 것이다. 1학년 때 짝은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아주 싫었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길수는 이와 반대였다. 첫 눈에 내가 반해버린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성을 보고 반했던 추억을 내게 만들어줬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라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뿌리가 된. 만약에 길수도 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면, 그 마음이 나와 같은 것이었다면, 우리 사이도 동성연애하는 사이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길수에게 반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있는 첫사랑 소녀 계숙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어서였다. 처음 봤을 때 소녀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성별이 남자라는 것과 턱이 조금 튀어 나온 것 외에는 거의 똑같이 생긴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길수에게 노골적으로 다가갔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서. 길수도 이런 나의 마음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태주하고도 친하게 된 것을 보면 처음부터 나나 태주에게 싫은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길수네 집은  나나 태주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다. 길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기고 안 계시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 꽤 유명했던 출판사를 경영한 분이었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형네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지만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길수가 살아온 그런 좋은 환경에서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그런 길수가 왜 실업계 고등학교를 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형의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원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겨울 방학 동안에 편지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 3학년 올라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답장은 놀랍게도 강원도에서 왔다.  형하고 같이 사냥하러 와 있다고 하면서. 그런 걸 보면 경제적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사냥을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니. 아버지가 하던 출판사가 문을 닫은 것이 경영상의 문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면 길수의 성격이 문제였을 것이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비관적인 면만 보는 좀 어리석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비관만 하면서 자신의 장래 생각은 안 하고 지내는 성격.

길수는 "너 왜 비관만 하고 그래? "라고 물으면 혈액형 탓을 하곤 했다. 나하고 같은 혈액형이었다. 남자다운 성격을 갖기를 희망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싫어하기 마련인 혈액형. 그렇다고 나는 현실을 비관하지는 않았다.  유별난 가정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망치는 쪽으로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여름 방학 때 잠시 그랬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성장기 시절 누구나가 다 한 번은 겪는 성장통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내 크면  자식에게 아픔을 주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꺼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꼭 행복하게 살꺼야" 뭐 이런 생각들을 수도 없이 다짐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늦게 생겨 적성에도 안 맞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내 마음은 늘 그런 쪽이었다. 스스로를 다잡아 내 삶은 보다 나은 조건으로 살아가고 자식들에게도 그리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쪽. 그 첫 출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명문대학을 가는 것으로 계획을 잡고 있있었고.

그러니 길수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는 해도 든든한 형이 있는데 왜 그러는가 싶었다. 길수의 형은 고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내 기준에서 보면 든든한 보호자가 있는 것이었다. 길수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온 것임을 생각할 때 길수의 방황은 사치인 듯이 보인 것이다.

그러던 길수는 기어코 사고를 쳤다. 3학년 올라가기 전쯤이었는데 국비로 등록금을 지원해주는 해병대 장학생을 지원해버린 것이다. 보호자인 형하고는 상의 한 마디도 없이. 국비 장학생이라는게 학교를 무상으로 다니지만 대신 군에가서 7년 장기 복무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일반 입대자들 보다 4년을 더 복무하는 조건인 것이다. 자비로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집안 형편이라면 절대로 지원할 일이 없는 조건. 길수는 이걸 지원해버린 것이었다.

 

택수는 특이한 경우였다. 택수가 먼저 나에게 접근을 한 것이다. 키가 커서 뒷쪽에 앉아 있었고 학생회 간부 직책도 맡고 있었는데 나의 어디가 좋았는지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해왔다.  충청도 시골이 고향인 택수는 누나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서울역 근처 만리동이라는 곳이어서 기차 통학을 했는데 내가 통학을 하는 동안은 늘 붙어 다녔다. 1학년 때 단짝이었던 경오가 다른 반에 배정되면서 그 자리를 택수가 차지한게 되어버린 것이다.

택수는 나를 특정 종교에 가입시키고 싶어했다. 원불교라는 조금은 생소한 종교였는데 용산 근처에 있는 교당까지 나를 두어번 데리고 갔다. 신입 회원 인사 자리에 나를 불러내려고 했으나 내가 워낙 용기가 없어 망설이며 나가지 못 하는 걸 보고는 관심이 없는 걸로 착각하고 더 이상은 가자는 말을 안 했다. 여학생들도 꽤 많이 눈에 뜨여 호기심이 많이 갔었는데. 그렇다고 택수에게 왜 나를 안 데리고 가느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학생들에게 관심이 있어 그런다는 내 속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택수는 자기 생활 전부를 다 나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 한 것이다. 3학년 말 쯤에는 매형 눈치가 너무 보여 누나네 집에서 나와 교당에서 만난 여학생하고 동거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 학교 생활

학교생활은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닮은 길수와 친하게 지내게 된 것 외에는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교실 환경은 1학년 때와 똑 같았다. 개인 집으로 비하면 낡은 집을 수리 안하고 지내는 그런 느낌. 등록금 받아서 도대체 어디에다가 쓰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앞 길 건너 맞은편 산에 짓고 있는 건물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걸 보면서 혹 여기에다가 돈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도 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사장이 군 장성 출신이라고 하니 군인들이 힘을 쓰는 세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안 , 산 위쪽으로 깨끗해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유일한 신축 건물. 이 건물은 3학년만 쓰고 있었다. 교무실도 거기 있는 것 같았는데 단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다. 3학년들이 쓰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산 위쪽으로 일부러 올라가야 되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다. 일부러 올라가 봐야 할 만큼 학교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 까닭도 있었다.

 

수업 시간은 점점 더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1학년 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거의 없고 싫어하는 기술 과목으로만 시간표가 채워져 있었다.  국어, 영어는 일주일에 한 시간이 고작이었고 역사 과목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미술은 1학년 때도 없었지만  그나마 1시간 있던 음악시간도 없어져 버렸다. 있어봤자 흥미를 느낄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음악시간을  별로 좋아한 편은 아니었다. 노래 부르는데 자신도 없었고 악보 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도 고전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니 베토벤이니 하는 음악가들의 곡은 과연 어떤 것일까가 궁금은 했다. 대표적인게 베토벤의 월광곡과 운명 교향곡이었다.  어느 책인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산책을 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실린 사진을 국민학교 때 인상깊게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운명 교향곡이 따다단하며 나온다는 정도도 알고 있었다.

 

이런 나의 호기심을 채울 기회가 1학년 때 딱 한 번 있었다. 채우기는 커녕 실망만 하고 마는 해프닝으로 끝나버려 학교나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정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만 만들어 주고 말았지만. 

음악선생은 성악과 출신이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고 가고 싶어하는 명문 Y대학의. 키도 180은 넘어보일 정도로 훤칠하게 큰데다가 얼굴도 아주 잘 생긴 호남이었다. 큰 키 덕에 덤을 받는 착시현상이 보태졌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꼭 여자들이 아니어도 절로 잘 생겼다는 느낌을 누구나 갖게 만들 정도의 외모였다. 이 선생이 한번은 반 아이들 전체를 시청각실로 데리고 갔다. 이 학교에 이런 것이 다 있었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던 시설. 3학년들이 쓰는 현대식 건물 옥상에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학교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했던 영화도 볼 수 있고 음악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진 시설. 실제로는 거의 활용을 하지 않고 있어서 이런 시설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음악선생은 우리반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무슨 곡인가를 틀어줬다. 아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하게 알려진 곡이어서 '따다단'하고 나온다는 정도는 거의 다 알고 있을 곡. "아! 이게 바로 그 운명 교향곡이구나.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엄청 궁금하다"라고 생각하며 듣고 있으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시끄러워져 도저히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몇몇 나처럼 듣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분명 있을 터이지만, 들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들으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보다 안 듣겠다고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때문이었다. 그때 들려주던 음악을 중간에 중단해 버리고 나오던 음악선생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실망한 표정.  경멸감을 담은 표정이었다. 속으로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절로 들어나 보이는 표정. 나는 그때 나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 아닙니다. 저는 꼭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같이 음악책에 나오는 음악가들의 곡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으로만 했다. 음악선생을 따로 찾아가 "좀 듣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해 볼 생각은 전혀 안 했다. 그랬다면 들어 볼 기회가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었을텐데 못 한 것이다. 성격 탓이었다. 용기없고 소극적인 성격 탓. 이런 성격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고두고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터였다. 당장,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첫사랑 소녀 계숙에게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상황으로 지속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나름대로 내 삶의 방식을 정해서 살게 되는 것이니 큰 문제는 안 되었다. 군 복무 중에 많이 고치기도 했고. 문제는 이 성장기 시절이었다. 한창 배울 것 많고 알아야 할 것 많은 시절. 필요하다면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배워야겠다는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시도할 엄두조차 못 낸 것이다. 

 

* 선생들에 대한 추억

이런 소극적인 성격은  3학년이 되었을 때 교장실이나 교무실에 가서 "대학 진학을 하려는 아이들도 꽤 있는데 왜 대학입시 준비반은 안 만드냐"고  물어 볼 생각조차 안 하고 그냥 혼자 힘들어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만들었다. 따져라도 봤으면 내가 이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치를 떨며 싫어하는 감정을 덜 갖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일텐데. 뭐 선생들은 나름대로 해볼려고 했는데 이사장이 반대해서 못 했다는 대답을 들었을 경우에 한한 이야기이다. 

선생들도 대입 준비생들을 가르치려면  따로 공부해야 하는 부담이 싫어 안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큰 쪽이었을 것이다. "실업계 학교에 와서 입시부담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랴" 싶어서. "그래봤자 크게 공치사 받을 일도 없을 터인데" 뭐 이런 생각들 아니었을까?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해주기 보다는 "내가 뭐가 좋아서 굳이 힘들게 그럴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더 컸을 것이 틀림없었을테니까.

내가 겪은 그 어느 선생도 열의를 가지고 수업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자기 직업이니까 기계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선생들이 그러는게  전적으로 선생 책임만으로 돌릴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만약에  열의를 가지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많았다면 선생들도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만족하기 보다는 그 반대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열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주 소수의 아이들만이 자신의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도 나름대로 자기가 살아가야 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는 있었을테고.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현실을 대충대충 자기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면서 지내도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한 제 몫의 삶을 살아가게는 될 터였지만.

 

인문계 과목 선생들의 가르치는 수준이 그냥 그런 수준이라고 쳐도 기술 과목 선생들은 실력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르치는 내용으로 봐서는 기술 과목을 워낙 싫어한 내게 더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과목을 좋아하게 만들 정도로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비록 연탄가스를 마신 일 때문에 머리가 많이 나빠져있다고 해도 재미있어 할 과목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화학을 가르치던 선생이 대표적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자 마자 다른 학교로 가버려 안타까운 마음으로 통탄을 하게 한 추억을 만들어 준 실력을 갖춘 선생. 잘 가르치는 선생한테 들으면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구나라고 감탄을 하게 만들었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거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말로만 듣던 실력이 있는 선생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선생들이 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었다.

선생은 국립 S공대 출신이라고 했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학을 나왔다고 알려진 선생은 몇 명 더 있었고 후임 선생도 그렇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실력이 있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들었다. 뭐,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대학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실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수업시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만든 선생은 아무도 없었다. 위에서 말한 화학선생 외에는. 영어 참고서에 예문으로 나와 있는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To know is onething, to teach is another]"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해준 좋은 경우였던 것이다. 그나마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제일 나았지만 담임을 겸하고 있던 이 선생도 한 학기가 끝나고는 다른 학교로 가버렸다. 수업하러 들어 온 어느 시간엔가  체벌의 추억을 남겨 주고서.

  

* 몸 고장 신호가 나타나다.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려서 부터 앓아온 귀는 이미 잘 낫지 않는 상태로까지 발전된 것 같았다. 만성 중이염이라고 했다. 귀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름이 흘러 내리는 경우가 많아 손수건을 꼭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통증은 없었다. 그냥 고름만 흘러내리는 상태였다.  병원에 이따금씩 다녔지만 잘 낫지 않았다. 없는 집 형편에 언제까지 다닐 수는 없는 일이어서 다니다 말다 한게 병을 더 키웠을 가능성은 있었다. 의사의 무성의한 진료도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 귓병은 나를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내모는데도 한 몫을 했다. 대표적인게 사람들이 많은  버스 같은데서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아내야 하는 경우였다. 나를 호감의 눈길로 바라보는 여학생이나 몇 년 이내의 연상으로 보이는 아가씨들을 질색을 하게 만들어 버린 일.

 

통학을 다시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  입시 준비를 한답시고 시내에 있는 단과반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때. 학원 수업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만원이었다. 서로 몸과 몸이 거의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 운이 좋아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나 직장인으로 보이는 몇 살 이내 정도 연상으로 짐작되는 아가씨가 옆에라도 서 있게 되면 무언중에 호감의 눈빛이 오가는 날이 많았다. 그것이 현실적인 인연으로 이어지는 일과는 별개의 문제였고. 

열차통학을 하게 되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내 첫사랑 소녀 계숙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앓이나 하고 있는 주제였다. 그런데 만원버스 안에서 우연히 옆에 서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인연을 만든다는 것은 내 성격으로는 꿈에서 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나의 추한 꼴을 보여주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귀에서 나오는 고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흘러 내렸다. 솜으로 막고 있으면 좀 나았겠지만 귓병을 앓고 있다고 내놓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귀 밖으로 흘러 내리려고 하면 그때 닦아내는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문제는 이놈의 고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 밖으로 흘러 내릴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귓볼을 타고 흘러내릴 때에야 비로서 알아 챌 수 있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에 대한 호감, 비호감 여부를 떠나, 보는 이가 누구이든 질색을 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나에게 호감의 눈길을 보내는 여학생이거나 아가씨였다.  정말이지 낯을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민망한 일이었다. 몸을 피할 곳도 없으니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종점까지 가야되니 상대가 제발 빨리 내려주기만을 바랬다. 한번은 내가 중간에서 내려 뒤에 오는 버스를 탄 적도 있었다. 워낙 민망하고 창피해서였다. 버스비를 또 내는 것이 아까웠지만 어쩌는 수 없었다. 버스비가 문제가 아닐 정도로 상황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혹 이것 때문에 머리가 나빠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가 국민학교 시절과 같은 맑은 상태가 아닌 그래서 뭐든 쏙쏙 들어오는 상태가 아닌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인 탓인 것이. 연탄가스 중독과 같은 차원의 생각이었다. 중이염을 방치하면 염증이 뼈로 침투해 들어가고 급기야는  뇌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염증이 뼈까지 침투해 들어가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서.

 

귓병보다  더 심각한 조짐이 몸 전체에서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심만 먹고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춘곤증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깐만 졸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둣 깨끗이 없어져버리는 그런 상태.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점심 시간 끝나고 첫시간인 5교시 과목 담당 선생의 눈치를 봐가며 마구 졸고 난 뒤에도 몸이 썩 개운치가 않았다. 이거 폐병의 초기 증세 아닐가 하는 의구심이 얼핏 들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다닐 때 등하교 길에 미군 트럭들이 뿜어대는 먼지를 먹으면서 "이렇게 먼지를 먹다가는 페병 걸리는 거 아냐"라며 투덜거리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걱정이 되어 웬만한 집에는 한 권씩 다 있다는, 그래서 우리 집에도 있는 두툼한  부피를 자랑하는 건강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폐결핵에 관한 설명을 찾아보았다.  오후에는 나른해지면서 기운이 없어진다는 내용이 있었다. 지금의 내 증세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 다시 첫사랑 소녀를 보게 되다.

새 학년이 되어서 신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기는 했다. 다시 기차통학을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밤보다 낮이 길어지면, 그래서 5시에 집에서 나올 때 어렴풋하나마 날이 밝아오고 있는 상태가 되면 다시 기차통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호은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소녀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기쁨이 더 컸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나에게는 첫사랑인 소녀. 겨울 동안 못봤던 소녀 계숙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학교 생활의 지긋지긋함을 없이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는 어떤 노력을 할 용기도 없으면서 그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사촌 형은 다시 통학을 하겠다는 나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으례히 그럴 것으로 알았다는 듯. 해가 짧아지는 초겨울 무렵이면 다시 들어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다시 보게 된 호은이의 반응도 역시 그랬다. 원래 과묵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습관적으로 나하고 같이 다니는 것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호은이는 나하고 떨어져 지내던 겨울 동안 친구 하나를 사귀어 놓고  있었다. 자기 학교 같은 학년인 아이. 서울과 문산의 중간 쯤인 일산에 살고 있는 아이였다. 정확히 어디에 사는 지는 알 수 없었고 알 생각도 없었지만 일산역에서 타니 그런가보다 생각을 했다. 이 아이와는 말도 별로 하지도 않았다. 호은이 때문에 안면만 생긴 사이였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였다.  그 아이도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은근히 우월감 비슷한 것을 내비치기도 했다. 체구나 학교나 나한테 뒤질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절로 느낌이 올 정도였다.

''짜식 저도 3류 학교 다니는 주제에 나를 깔봐. 어디 두고보자"라는 오기가 절로 치솟게 만드는 묘한 친구였다. 호은이와 그 친구는  체구로 봐서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어보였다. 질투가 날 정도로. 질투같은 건 여간해서 안 하는 성격인데도 이때는 약간 질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워낙 호은이를 좋아해서 그랬을 것이다. 호은이도 이 친구한테 마음이 많이 가 있는 것 같았다.

 

*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몇 달만에 보는 것인데 거의 그 모습 그대로. 실제로는 조금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일테지만 내가 성숙해진 것이 별로 없는 상태인지라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상은 반복되었다. 새벽 4시반에 일어나 먹히지 않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숱가락을 내려 놓고 5시에는 역으로 출발,  5시 45분에 떠나는 통학열차를 타고 학교를 가고, 집에는 밤 8시나 되어서야 들어오는 생활.

학교 생활은 모든 것이 다  짜증이 났지만 그곳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불만 속에 다람귀 쳇바퀴 돌 듯 그런 나날이 지속되었다. 학교와 통학 열차 안에서 지내는 것이 다인 생활. 유일한 낙이라면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면 소녀를 닮은 길수와 같이 지낼 수 있는 일이었고.  길수와는 매일 대화를 하며 지냈지만 소녀는 바로 눈 앞에 두고서도 마음으로만 그리워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절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암시라도 하듯. 한 줌의 용기만 있어도 될 일을 말 한마디도 건네보지 못하고 끝나 버리고 말 것임을.

 

*

이즈음 통학열차를 타러 가는데 편리한 일이 생겼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한 대 장만하신 것이다. S리에 있는 작은 집에 오갈 때 타고 다닐 용도로. 작은 집에 갔다가 새벽에 출근하려면 힘이 드신 때문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자전거를 타고 문산역까지 갈 수가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작은 집에 안 가는 날 뿐이어서 하루 걸러서였지만 그래도 많이 편해졌다. 새벽에 30여분을 걸어나가는 힘겨움을 하루 걸러 면하게 된 것이다. 자전거는 호은이네 집에 맡겼다. 호은이네가 역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자전거를 맡길 데가 없으면 설령 있다고 해도 타고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S리와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자전거포에서 국민학교 여자동창을 본 것도 이 자전거 덕분이었다. 비포장 도로인 탓인지 펑크가 심심치 않게 났는데 펑크를 때우러 들어간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 여자 동창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였었다.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게 생긴 것이 귀티가 나서 부잣집 막내딸로 알았지만 실제로는 중학교도 못 갈 정도로 집이 가난했던 아이였었다.  좀 머쓱해하며 아는 체를 하니 언니네 집이라서 놀러온 것이라고 했다.  언니가 자전거포나 하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온 것이었다. 서로 비슷한 환경의 남자를 만나서.

 

*

평일 생활은 이랬지만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멍한 상태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문산역 쪽을 보며 첫사랑 소녀 계숙 생각을 한 것이 거의 전부인 듯 싶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열차 안에서 매일 볼 수 있는 모습인데도 그저 먼 발치에서 몰래 바라보듯 그리 보고만 있는 바보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놀이 동무이던 규선이, 성은, 근호의 소식은 안지도 오래 되었다. 만날 이유, 시간이 없어진 탓이었다. 놀이를 안 하게 되니 같이 어울릴 일이 없어진 것이다.  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크게 진척이 되는 것도 없었다. 집은 공부할 여건이 안 되었다. 내 방이 따로 있어야 할 것인데 옆 방은 계속 세를 주고 있었다.

이즈음에는 남자가 미군부대 청소 일을 하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그 중 큰 애가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떡봉이란 별명을 가진 계집애였는데 그래서인지 엄마는 떡봉이 엄마로 불리웠다. 이 여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았다. 여늬 집과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생기기도 여걸답게 생기기는 했지만 남편에게 대놓고 뭐라고 그랬다. 보는  사람들이 민망할 정도로, 그러나 그걸 자랑스러워 하는 태도로.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무슨 약점을 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남자가 무척 순하게 생겼는데 뭔가 겁을 먹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외모로 봐서는 완력에서도 밀릴 듯 싶어보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남자 마음이 여린 것 같았다. 심약한 성격. 여자에게 휘둘릴 정도로.

 

*

아버지는 가끔 곱지않은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무런 의욕도 안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나의 모습에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셨다.  아버지 당신은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마 첫사랑 소녀 계숙 생각에 빠져 있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으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아버지에게는 그리 보였을 가능성이 많았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나도 내가 싫었다. 좋아하는 소녀를 매일 보면서도 말 한 마디 건넬 용기조차 없는 내 모습이. 아버지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하셨을 것인지. 당장 학교 때려치우라고 그러시지는 않았을까?

 그렇지만 나의 이런 모습은 아버지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  어쩌면 가장 큰 책임. 소녀 계숙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될 터였지만 아버지 당신이 만들어 논 우리 집안 환경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이젠 아버지 당신도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니 애써 외면하시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집 옆 텃밭 쪽에 있는 돼지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과 아버지 퇴근 시간에 맞춰 부대 앞으로 가서  꿀꿀이 죽을 지고 나오는 아버지의 지게를 대신 지고 나오는 것이 나와 아버지가 소통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버지 당신 덕분에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고 먹고 살고 있어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다.

 

* 여름방학 때의 해프닝.

"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 있다가 오거라"

여름 방학이 되자 어머니는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나를 보냈다. 태어나 8살까지 살아 마음 속에 가장 깊이 살아 있는 곳. 간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곳. 그러나 이제는 사촌 형네인 큰 아버지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곳. 가는 것에 대하여 싫다, 좋다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좋은 쪽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할아버지나 큰 집 식구들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철이 들어 있지는 않은 때였다.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지만 이제는 우리집이 아닌 큰 아버지네 집인데도 내 집 같이 착각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 일부러 최소화해서 지내고 있는 지금 마음과는 달리 나이에 비해 철이 없는 때이기도 했다.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인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다 쳐도 나를 보는 사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릴 줄 몰랐다.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말을 하고 그러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을 잘 몰랐다. 남들과 말도 잘 안 하지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잘할 줄 몰랐던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그럴 줄 알아야 하고 거기에 맞춰 처신을 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때에도 제대로 못한 성격이었으니 아직 어린 사춘기 그 시절에는 오죽했으랴.

 

할아버지 댁에 머물고 있는 방학기간 내내 첫사랑 소녀 계숙 생각만 했다. 공부를 할 여건은 역시 안 되었다. 안방, 건넌방, 사랑채가 전부인 할아버지 댁 그 어느 곳에도 차분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설사 공부할 여건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녀 계숙 생각에 빠져있어 제대로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랑채에서 사촌들과 같이 지내는게 전부였다.

사촌들은 한창 뜨거운 오후 3시 쯤 되면 광에 있는 식은 꽁보리밥을 오이지와 고추장으로

비벼 먹고 꼴을 베러 나갔다. 소에게 먹일 여물을 만들기 위해. 그런 일을 안 해도 되는 나를 부러워 하는 표정을 하고서.

사촌들은 그때의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을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까지는 못 되었을테니. 그때 나의 마음은 세상이 싫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려보기도 한 정도였다. 구체적인 행동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까지. 면도칼로 팔목을 긋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

사촌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사촌들을 따라 꼴을 베러 같이 가보기도 했다. 결과는 손가락만 크게 베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음이 심란하여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낫질조차 서투른 게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도 포기하고 그냥 빈둥거리고 있는 것을 본 할아버지는 "소를 데리고 나가 풀 좀 먹이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사촌들 풀 베러 나가는데 집에 멀뚱멀뚱 있는게 미안했는데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삐를 잘 잡고 농작물을 못 뜯어먹게 조심하면서 풀 있는 곳만 찾아다니면 되었으니까. 이런 나를 본 한 친척 할머니는 할아버지 댁에 다니러 왔는데 왜 일을 시키느냐고 나를 생각해주는 말을 했지만 별로 고맙게 들리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 큰 집 식구들 모두 논 밭으로 나가 일하고 있는데 집에서 빈둥거리며 밥만 축내고 있는게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촌 형과 다툼이 있은 것은 그리 지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같이 자취를 하고 지낼 때도 가끔은 티격태격했지만 이번처럼 큰 다툼은 없었다. 그동안 있었던 자그마한 다툼의 원인 제공은 내가 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촌 형은 형이기에 동생인 나에게 말 할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따지기를 좋아한다는 게 주된 이유였는데 아마 사촌 형의 단점 보이는 것을 입 밖으로 들어내 말을 하는 것이 편치 않게 들린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직설적인 표현을 하는 내 성격상 아픈 곳을 찔렀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게 "따지기 좋아한다든가, 깐죽거린다"는 표현으로 되돌아 왔고 나는 이해를 못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따지는 것은 뭐며, 깐족거리는 것은  또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대로 잘 지낸 편이었는데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사촌 형이 뭐라고 그런 이유를 따져 볼 생각도 나지를 않았다. 사촌형을 비롯하여 누나 한 명, 동갑내기 한 명, 동생뻘인 3명까지 무려  6명이나  되는 사촌 중 누이 한 명을 빼고는 다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힘든 농사일을 안 해도 된다는 그 자체 하나만을 보고서.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가는 알 생각들은 하지는 않은, 그저 자기들 기준으로만 나를 보고서.

 

사촌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사촌들 다 일하는데 혼자 빈둥거리고 있다는 뜻이었을 것 같은데 나는 즉시 반발했다. 마침 가지고 있던 재크나이프를 꺼내 들고서.

"형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생각도 안 하고 그리 서운한 말을 하고 그래. 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

형을 찌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욱하는 성격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 우발적으로라도 그럴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이기는 했다. 그래서 칼을 빼들었을 것이고. 칼은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것을 호신용 삼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잭크 나이프리고 불리우는, 칼날 가까운 쪽 손잡이 어딘가를 누르면 칼날이 척 펴지는 그런 칼. 아주 멋있어 보이는 그 칼을 가지고 다니면  왠지 힘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뭔가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이 멋 있어 보이는 시절이었다. 운동을 잘 하거나 덩치가 커서 저절로 위압감을 주는 아이들이 부럽던 때. 주먹 한 방으로 상대를 날려버리는 상상을 하고 실제로 그리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멋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때였다.  호은이가 "자기 주먹이 상상외로 세더라고, 불량배 비슷한 놈이 시비를 걸길래 한방 날렸는데 그냥 벌러덩 나자빠지더라"고 자랑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엄청 부러워하며 내 작은 주먹을 쳐다보며 실망을 하기도 했던 때였다. 외모는 어른들을 닮아가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머리는 한참 덜 성숙한 때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제일 좋아 보이던, 세상을 알기에는 아직은 한창 부족한 사춘기 소년 시절. 세상을 한참 살아내고 난 뒤,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이 참 힘든 것이구나, 사춘기 시절은 참 철 모르는 어렸던 시절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지만 그걸 전혀 몰랐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나의 진짜 부모는 따로 있을꺼야"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내 앞에 존재하는 모든게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진짜인 것 같이 믿어지기까지 했다.

"원래 내 어머니는 좀 더 많이 배우고 교양있는 분일꺼야. 집도 엄청 부자고. 그런데 전쟁통에 잃어버린 걸꺼야. 그걸 지금의 내 엄마가 줏어다 기른 걸꺼야"라는 등의 ...

 

사촌 형은 움찔했다. 내가 그리 심하게 반발하리란 생각은 전혀 못 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내 화도 풀어졌다. 순간적인 반발심에 칼을 빼들기는 했지만 칼로 어쩌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으니까.

" 형은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요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단 말야."


그랬다. 이즈음에는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세상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살아봤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이 마음은 나라 돌아가는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긴 것이기도 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리라는 보장보다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암울한 일들만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실제로는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인 것 같아 보이면서도 내가 살고 있고, 살아가는 과정에 다 영향을 끼칠 일들이었지만 당장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망해도 개개인은 그 망한 나라, 자기가 살고 있던 곳에서 국적만 바뀌어서 그대로 살게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멀리는 고구려, 백제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고 가까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리 살았을 것이다.  그 틀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걱정, 고민해야 되는 평범한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제 몫을 하기까지는 아직 멀기만 한 시간이 남아있는 사춘기 시절이었다.

 

난  좋아하는 소녀에게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나의 용기없는 성격이 싫었고  즐거움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집안 환경도 싫었다. 남들이 볼 때 변변치 않은 학교라는 인식이 절로 들게하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도 싫었다. 오후의 나른함은 많이 없어졌으나 낫지 않고 있는 귓병을 확실하게 치료할 만큼 집안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앞날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이 없는 나날이 기약없이 지속되리란 생각이 들어 이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귀찮아 보일 만큼.

 

사촌 형은 내 고민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 볼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네 걱정까지 해 줄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내 코라는 것이 나보다 나은 조건인 것 같은데 그리 생각 안 하는 것이 더 문제이긴 했다. 사촌형은 대학을 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 하는 머리를 타고 났다면 혹 모를 일이지만 그쪽으로는 애시당초 나만큼도 알려진 게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도 한 집안의 장손이었다. 할아버지가 끔찍히 생각하는 자리. 사촌 형은  할아버지의 집과 전답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다는 아니고 큰 아버지가 먼저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려받을 재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나는 물려받을 아무 것도 없는데. 사촌형은 그것까지는 생각은 안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당장은 자기것이 아니니까 별 도움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사촌 형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법 많은 시간을 한 방을 쓰며 지내고 있는데도 그랬다. 워낙 말이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하고 있는 행동에서 앞날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이 전혀 안 보이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문제도 생각 안 하는 사람이 남의 생각까지 들여다 볼 리가 절대 없을테니 말이다. 설사 있었더라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보다는 나를 경원하는 마음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사촌 형을 비롯한 사촌들에게는 거리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공부 좀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공부라는게, 실력이라는게, 천차만별인 것을 모르는 수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나보다 시원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는 별로 아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 일이었다. 진짜 실력이 좋은 아이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셈이었을테니까.  그런 그들의 눈에 나는 얌전하게 공부만 열심히 하는 학생으로 보였을테니까. 겉으로 봐서는 말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고 책하고 씨름을 하든  펜글씨, 붓글씨 연습을 하든 어쨌던 책상 머리에 늘 붙어 앉아 있었으니까.

 

* 짝사랑 소녀를 포기하기로 하다.

첫사랑 소녀 계숙에 대한 마음을 이제 그만 접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날 있었던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개학할 때가 다 되어 가면서 할아버지 댁에서 집으로 돌아 오던 날 문산역에서 내렸을 때 겪은 일. 그날도 나는 기차를 타고 있는 내내 소녀를 생각하면서 운이 좋아 소녀를 보는 기적같은 것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학 때라 소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는 지금 생각해봐도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깊다보니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 생각.

 

기차는 아무 때나 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 통근열차만 빼고는 단 한 대가 서울역과 문산역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아마 두 시간에 한 번씩 출발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다가  아직 개학도 안 한 때인데 소녀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거의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소녀 생각을 너무 하다보니 내 멋대로 상상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소녀를 너무 생각하는 마음에,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러면서도 열차에서 내려, 방금 내가 내린 열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혹 소녀가 있지않나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눈길을 주었다. 그리곤 곧바로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소녀가, 단 하루도 잊지 않고 그리워하던 바로 그 소녀 계숙이, 내가 내린 칸 바로 다음 칸 쯤에 거짓말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역 대합실이 있는 쪽이어서 일부러 뒤를 안 돌아봐도 되는 쪽에. 새하얀 웃도리에 곤색 교복 치마를 입은 모습을 하고 손에는 책가방을 들고서. 

오후 두 시쯤이었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당황했다. 내가 방학기간 내내 소녀만을 생각했으며 방금 전까지도 소녀가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걸 들킨 것 같아서였다. 소녀가 나를 보지 못하기를 바랬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소녀가 바로 눈 앞에 그것도 거의 한 달만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도 그 생각만 했다. 소녀에게 다가가 아는 체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 했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소녀의 모습을 뒤로 하고 출찰구 쪽으로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몰래 가면서 이런 생각만 했다.

" 넌 참 지지리도 못난 몸이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소녀를 바로 눈 앞에서 보고서도 오히려 도망치듯 피해 나오다니. 차라리 죽어버려라 이 등신 같은 놈아."

난 내가 싫어졌다. 말 한 마디 건넬 용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도 있는 상대인데 그걸 못해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는 바보 같은 내가. 사촌 형도 그렇지만 열차 안에서 보면 내가 보기에 변변치 않아 보이는 아이들도 여학생들에게 수작을 부리는 모습을 꽤 많이 봤다. 그런데 나는 그리 못하고 있다니, 내가 나를 생각해도 참 못 나고 한심한 놈이었다.

 

*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혁명이란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잘 한 편은 아니어서 우리 5인방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친하게 지낸 아이. 친해진 이유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인 아이들 중에 거부감이 없는 그런 아이인 때문이었다. 아주 불량스러운 아이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예 상종도 안 했을 터였다. 그런 아이들은 체질적으로 맞지를 않았다. 저 아이들은 어떻게 저리 불량스러울 수 있지 궁금해하며 나도 과연 저럴 수 있을까 하고 한번 시도해보고 싶기는 했다. 그래서 3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에 잠시지만 시도해보기도 했던, 그러고서는 "나는 체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불량스럽게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던 일이 있기는 했다.

 

이 혁명이가 여학생 뒤를 졸졸 따라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열차 통학을 하고 있던 1학년 이른 가을 쯤. 내가 첫사랑 소녀 계숙에게 마음을 뺏겨 한창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혁명이는 왕십리역에서 열차통학을 하고 있었다. 학교가 있는 역과 왕십리 역 사이에는 청량리 역이 있는데 이 역에서 내려 가야 되는 여학교가 하나 있었다. 연두색 교복에 베레모까지 쓰는 교복이 아주 예쁜 학교였다. 기차를 이용해 이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애들과 매일같이 보게 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혁명이와 같은 역에서 타는 여학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 계숙을 같은 역에서 타게되어 매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이도 역시 매일 보게 되는 여학생들이.

 

그날은 혁명이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갔다. 경오, 광수도 같이 있었고. 그런데 열차에서 내린 혁명이가 웬 여학생들 뒤를 쫄레쫄레 따라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한 명이 아닌 세 명 쯤 되어 보이는 뒤를. 여학생들은 그런 혁명이를 의식하고 있는 듯 싫지 않아 보이는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혁명이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뭔가 자신있어 보이는 그런  표정으로. 그런 혁명이의 모습을 보며 난 엄청 부러워했다. 혁명이가 여학생 뒤를 따라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기 때문이었다.

단언컨데 혁명이는 절대 잘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오처럼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나보다 약간 크거나 아니면 비슷하거나 그런 정도였다. 얼굴에는 죽은깨가 잔뜩 있었고 입은 좀 들어 간 편이었다. 희극배우 합죽이 아저씨를 연상하면 딱 들어 맞을 모습. 그런 아이가 여학생 뒤를 따라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학교 격을 따지자면 한참 밀리는 형편이었는데.

이 여학교는 제법 알려진 후기 대학교 부설 학교였다. K, E여고처럼 일류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들여보내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문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다니고 있는 실업계 학교와는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런데 이런 여학교 학생 꽁무니를 자신있게 따라가다니. 그것도 인물도 변변하지도 않은 주제에. 난 그런 혁명이가 부러웠다.  그리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가. 난 전혀 못하고 있는 행동을 자신있게 하고 있는 그가. 아주 한없이.

 

* 첫사랑 소녀 변한 모습이 되다. 

내 첫사랑 소녀 계숙의 신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을 것을 알게 된 것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뒤의 일이었다. 아직은 해가 길어 사촌형이 자취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이어서 통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소녀를 처음 본지도 어언 1년반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 기간 동안 내 생활에 찾아 온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있을 리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소녀에게도 마음 표시를 못 하는 성격인 나에게 그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 그저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 했다. 학원을 다닐 때는 이곳이 추가 되었고. 대부분의 성실한 학생들이 지내는 것과 똑같은 일상이었다. 변화는, 내 성격이 변하기 전에는 절대 일어 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성에 관한 일은.

 

대표적인게 학원에서 매일 보던 한 여학생 관련 일이었다. 대학을 가야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행동화하기 시작한 학년 초였다.  종로 1가에 있는 단과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기초가 부족한 영어와 수학 위주였다. 이때  영어 단과반에서 매일 보게되는 여학생이 있었다. 교복이 자주색이고 머리에 베레모 모양 모자를 쓰고 다니는 학교 여학생이었다. 특색이 없는 다른 학교 교복보다 개성미가 있어서 그 교복을 입은 자체만으로도 외모가 돋보이는 역할을 했던 학교의. 명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영어 기초를 가르치는 단과반에 다닐 리도 없었을 것이다. 둘이서 다녔는데 이 중 한 여학생이 내가 마음에 든다는 표시를 거의 노골적으로 보냈다. 여학생 입장에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일이었다. "연필 좀 빌려 달라"며 일부러 말을 붙이기도 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오기도 하는 등.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나 너 좋아하니 사귀자는 말을 했다" 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여학생 입장에서 거기까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부러 말까지 걸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는 나를 보고 "뭐 이런 바보같은 애가 있나"라고 생각했던가 아니면 "내가 그리 마음에 안 드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여학생이 불량소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원을 다닐 리는 없었을테니. 만약 그랬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남학생인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첫사랑 소녀 계숙에게 아무런 일이 안 일어났을 리가 없었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그것도 다른 여학생들에 비해 훨씬더 많이 있을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없었다. 소녀는 내  마음 속에만  담겨있는 것일 뿐이어서 현실 속의 소녀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입증시켜주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아주 엉뚱하게 알게 된 사건.

 

동급생 영식

 기차가 서울로 들어서면 첫 번째 역은 수색역이었다. 역사가 들어서 있는 쪽으로 보면 산꼭대기까지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동네에 있는 역. 열차통학을 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이 판자집에 살고 있으리란 짐작도 충분히 가능했다. 역 주변이라고 특별한 풍경은 없었다. 산자락 판자집보다 좀 나은 집들이 조금 있는 것 외에는 보이는 것이라곤 역 건너 편의 들판이 다였으니까. 

이 역에서 동급생 서너 명이 탔다.  그 중에는 1학년 때 같은 반 아이도 있었지만 특별히 친한 아이는 없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아이는 다른 아이였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공부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고 인상도 좋았던 아이. 이름이 영식이였다. 심영식. 나는 이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참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참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아이가 종종 있었는데 영식이도 그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본 서너 번째 아이. 오성이가 처음이고 길수가 두 번째였다. 그 뒤로 재면이란 아이가 있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플레이 보이.


영식이와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안면이나 있는 정도. 같은 반이 아니어서 기회가 없어서였다. 설사 같은 반이었더라도 길수처럼 일부러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영식이는 국비 장학생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등록금을 나라에서 내주고 대신에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해 일정기간 의무복무를 하도록 하게 하는 제도. 육군과 해병대가 있었다. 영식이는 해병대 장학생이었다. 육군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육군이나 해병대나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원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어서 성적이 우수해야만 가능했다.  결원이 생기면 그때는 재학생 중에서 받아들이기는 했다. 길수가 그래서 지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식이가 어느 날  나에게 쭈볏쭈볏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언제인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서서히 사촌 형 자취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때였으니까 늦은 가을 무렵 쯤 되었을 것 같다. 소녀에 대한 마음을 그만 접으려고 한참 애쓰고 있는 때. 

얘가 웬일로 말을 다 거는가  싶었다.  우리는 그동안 단 한 마디도 말을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안면만 있는 정도로 지낸 사이였다. 호감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말을 할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을 걸어 온 것이다. 게다가 말을 건 이유가 놀랍게도 내가 짝사랑하고 있는 소녀 계숙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믿을 수 없는 일이.

 

"문산역에서 같이 타는 여학생 잘 알지?  D여중에 다니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눈은 영식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네가 그 여학생 얘기를 왜 물어봐" 그러는 표정을 하고서. 문산역에서 탈 때 서로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있던 소녀 계숙은 통로를 꽉 채우고 서 있는 사람들한테 가로막혀 안 보이는 상태였다. 열차 안은 일산역에서부터 이미 앉을 자리가 없이 꽉 찼다.  소녀와 나 사이에 있는 통로를 가로막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매일매일 반복해서. 

 

"어제 덕수궁에서 헤어졌다. 그만 만나자고 그래서"

 나는 영식이의 이 말을 아무런 표정없이 듣고 있었다. 속으로는 엄청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물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 만났느냐, 왜 헤어졌느냐"는 등 궁금한게 많았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소녀와 나는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소녀를 마음에 담아두고 줄곧 가슴앓이를 해오고 있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그랬다. 그저 마음 속에 담아두고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사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러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용기없는 내 성격 탓이었고.  

 

영식이가 왜 나한테  소녀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녀가 내 이야기를 하면서 헤어지자고 그랬다는 뜻인 것인지 헤아릴 수도,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물어본다고 달라질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소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만 틀킬 것 같아서였다.  그저 "난 마음 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는데 넌 내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소녀랑 만났었구나. 참으로 부럽다"라는 생각만 했다.  난 앞으로도 소녀에게 절대 접근을  못할 터였고 그렇게 끝나버릴 것임을 알기에. 그만큼 못난 성격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고칠 수 없을 것도 잘 알고 있기에.

 

* 성신이에게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똑 같은 일을 바로 얼마 전에도 겪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소녀 성신이에 대한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들은 것이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소녀인 성신이의 이야기를. 그런데  아주 엉뚱한 아이에게서 들었다.  내 안중에도 없었던 그런 아이에게서. 영식이와는 너무도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아이에게서.

성신이에 대한 내 마음은 내가 짝사랑하고 있는 소녀 계숙에 대한 마음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호감도 면에서는 거의 똑같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낸 상대방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성신이에게 너무 실망해서 일요일 어느 때이던가 집에를 왔을 때 거의 외면하다 싶이해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는 참 옹졸한 짓을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리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실망감이 컸었다.

영식이에게서 내가 짝사랑하고 있는 소녀 계숙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아이는 아니었다. 그만큼 내 눈 밖에 나 있는 아이였는데 이런 아이한테서 성신이 얘기를 들은 것이다. 어머니가 며느리 삼고 싶다고도 하고 나도 태어난 뒤 처음으로 본 예쁘게 생긴 아이여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던 성신이 이야기를. 

 

 - 불량 학생 영칠이

성신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칠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김영칠. 나하고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다. 타는 역도 같았다. 이 아이는 누가 보아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모습을 하고 다녔다. 모자는 일부러 찢어 다시 꼬매고, 카라는 열어 제치고, 책가방은 옆구리에 끼기 좋게 책도 거의 안 넣고 그리 다녔다. .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불량한건지는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자체로 싫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이들 부류에 속해 있었으니까. 때문에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고 같은 역에서 타지만 단 한 번도 말을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영식이 같은 경우는 말을 나눠 볼 기회가 없어서였지 싫어서는 아니었다. 기회가 됐다면 서로 친하게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게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모르는 체 할 수는 없어서 눈으로만 아는 체 하는 정도가 다인 그런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한테서 성신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듣는 그 순간 "네가 어떻게 그 아이를 알아" 하고 깜작 놀라며 반문을 하게 만들었던.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이와 성신이와의 조합은 전혀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영식이와는 너무 달랐다. 품행이 불량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렇다쳐도 얼굴, 체격 다 형편없게 생긴 아이였다. 뭐 하나 좋게 봐 줄게 없는 아이. 그런 아이한테서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예쁜 소녀로 기억하고 있는 성신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난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라서.

 

그러고 보니 성신이의 행동에 짚히는 게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영칠이가 사는 마을인  S리를 가려면 우리 집 바로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이 지름길이었다. 아버지가 다니고 있는 미군부대로 통하는 큰 길로 해서 갈 수도 있지만 이는 동네를 벗어나  돌아가는 길이어서 좀 멀었다.  결국은 마을 뒤에 있는 작은 개울 있는 곳 쯤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마을 입구 쪽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한  굳이 큰 길로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신이처럼 마을 한 가운데 쯤에 살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구나. 그래서 성신이가 우리집 뒷길로 가는 것을 두어번 보게 된 것이다.

 

" 저 아이가 도대체 어디를 가길래 이리로 지나가지?" 궁금해하며 지켜보려니까  S리로 가는  산길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면서 "S리에 무슨 볼일이 있나? 여자아이가 위험하게 산을 넘어가야 되는 길을 왜 가지?"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이 영칠이란 내 안중에도 없는 아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나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성신이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만날 아이가 그렇게 없나. 어떻게 이런 아이를 만날 생각을 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이 만나는 과정에서 성신이가 먼저 내 얘기를 꺼낸 것인지 영칠이란 놈이 먼저 꺼낸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둘이 얼마나 오래, 깊게 사귀었는지도 모르고. 다만 영칠이란 놈이 평소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지내는 사이인 나에게 와서 성신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성신이가 내 이야기를 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이 헤어지려고 핑계를 대기 위해서 내 이름을 댄 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고.  영칠이란 내 안중에도 없는 아이 입에서 둘이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 이후로 성신이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러고 보니 내가 사춘기에 접어 든 고등학교 시절에 성신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내가 성신이네 집에서 떨어진 마을 끝쪽으로 이사를 온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성신이를 볼 기회는 없었다. 집이 멀어져서 그런지 집으로 음식을 먹으러 오지를 않은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 그랬다. 열차통학을 할 때는 새벽에 나가 한 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자취를 하는 늦은 가을, 겨울철에도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이 집에를 오긴 했지만 성신이를 따로 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태어나 처음 본 예쁘게 생긴 여자애라는 생각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도 딱히 기억이 없다. 가장 친한 호은이는 매일 만났지만 이는 열차 통학을 할 동안 그것도 학교를 가는 아침 시간 때가 다였다. 집에 가는 저녁 열차에서도 호은이를 만나기는 했다.  서울역에서 내려 문산행 기차를 역 안에서 기다렸다가 갈아타는 나는 늘 자리를 잡고 앉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호은이와 약속을 해 놓고 있었다. 타는 칸을 정해놓고 호은이 자리를 미리 잡아 놓는 것으로. 그렇다고 무한정 자리를 잡아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호은이가 늦게라도 나오면 미리 타고 있는 사람들 눈치가 너무 보여서였다. 호은이와도 이럴 정도이니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시간은 없었다. 규선이, 성운이 등. 그럴 생각이 없기도 했다.  서로 마찬가지였다. 이젠 같이 어울려 놀기보다는 무언가 자기 일을 할 생각을 하는 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로 공부일 터이지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어도 같이 만나 놀 일은 없게 된 나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슬치기, 말타기 놀이, 시계부랄 놀이 같은 것들은 이제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놀이가 되어버려서였다.

 

성신이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든 것도 이런 일상과 관계가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본 예쁘게 생긴 소녀로 늘 생각은  하고 있었고 어떤 계기가 있다면 인연이 될수도 있는 사이였지만 현실적으로 이어질 끈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소녀에게조차 아무런 의사 표시를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고 있는 못난 성격인 나였다. 그런 내가 연정까지는 아닌 상태인 성신이와 현실적인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행동을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이리 지내고 있는 사이 성신이는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 테다. 그걸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뒷집 대순이처럼 소식을 바로 알 수 있는 거리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고.

 

내가 이 마을에 처음 이사왔던 중학교 2학년 가을 그 무렵에 성신이는 집에서 그냥 놀고 있었다. 집이 가난한 탓에 중학교는 못 가고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어디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였다. 그로부터 2년반이란 시간이 지나있는 때였는데 성신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동안 혹 대순이처럼 무슨 기술 같은 걸 배우려고 다닌 것일까?  그러는 가운데 영칠이란놈을 만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성신이 엄마와 계속 왕래가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냥 태어나 처음 본 예쁜 소녀라는 기억만 머리 속에 넣고있는 상태로 서로 자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성신이에 대하여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미 짝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 계숙이 내 마음 속에 꽉 차 있는 탓에.

 

이성을 사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성신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성신이나 나나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든 때가 아니었든가. 성신이는 더 일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외모가 예쁘니 남자애들 시선을 일찍부터 받았을테고 여자들은  사춘기가 더 빠르다고도 하니. 

이성을 사귀는 문제에서 여자들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자기를 좋다고 접근하는 사내애들 중에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만 결정하면 되니까.

나처럼 용기없는 바보, 멍청이 같은 성격이 아니라면 성신이 정도 외모를 보면 사내애들은 줄을 설 것이다. 그 남자애들이 어떤 부류의 아이들인지가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런데 주변에 있는 괜찮은 남자 아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이 멀리 비켜서 있기만 한 현실이고 마음은 이성을 사귀고는 싶고 그런 상태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성신이는 혹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

"내가 국민학교뿐이 안 나온 것을 아는 나나 호은이, 오성이 같은 아이들은 절대로 자기한테 접근 안 할 것이야"라는.

그러나 이건 절대로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은. 호은이는 애초에 여자애들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 했고 오성이는 "그 정도 아이들은 서울에는 얼마든지 있어"라며 성신이의 예쁘게 생긴 모습을  평가절하하긴 했다. 나야 서울에서 산 적이라곤 국민학교 3,4학년때가 전부였으니 오성이의 이 말을 긴가민가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래도 성신이 쪽이었다.

아무튼 성신이에게도 찾아와 있을 이성에 대한 관심을 영칠이란 놈이 풀어줬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여자이건 남자이건 이성에 관심이 있으면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접근을 해야 성공이 되든 실패가 되는 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영칠이같이 불량스러운 아이들은 유리한 점이 있었다. 나같이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용기없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들은 설사 누구를 마음에 담아두고 좋아해봤자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100% 없는 법이니까. 성신이는  어디를 가든 눈에 뜨일 정도로 예쁘게 생긴 모습이니 또래 사내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 중에 영칠이라는 불량스러운 아이가 용기든 객기든 부려서 접근을 시도했을 것이고.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든 간에 성신이는 이를 받아들인 것일 테고.

 

*

언제인가 호은이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아주 기가 막히게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가 험상궂게 생긴 사내와 같이 여관에를 왔더라"고.  호은이는 집이 여관을 하는 바람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관을 드나드는 남녀들을 볼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식구들이 많은 탓에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곳은 방이 모자라 여관방 하나를 자기 방으로 쓰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많았다. 이런 와중에 눈이 번쩍뜨일 정도로 에쁜 여자아이를 본 것이어서 내게 이야기 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오로지 한 소녀에게만 마음을 다 주고 있고 그 기준이 미모인 것을 보고 정신 좀 차리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시절에는 하지 못했다. 예쁘게 생긴 아이들일수록 생활이 문란할 가능성이 많다는 경고를 한 것인지를.

 

호은이의 기가 막히게 예쁘다는 표현에 속하는 아이는 내 경우에는 성신이나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 계숙이 정도가 해당되었다. 이리 예쁘게 생긴 소녀가  험상궂은 모습을 한 사내와 같이 여관에를 왔다?  그 험상궂은  사내를 나나 호은이로 대치시켰을 때 그 모습은 상상이 안 되었다. 그것은 착실하게 집과 학교만 오가는 그런 아이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그런 일이었으니까.

영칠이란 놈이 성신이를 시쳇말로 꼬신 것이라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성신이는 성신이대로 "좀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은 나에게 접근할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나에게 접근하는 아이면 된다. 나도 사내애가 필요한데 접근을 해줘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것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받아 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협박을 한 것일까? 불량스러운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도 있는 일이었다. 3학년이 되어서 교내 꽤 알려져 있는 불량써클에 속하는 한 아이가 공개적으로 자랑하듯이 이야기한 걸 들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때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다. 그저, 영칠이라는 놈한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성신이에게 화가 치밀었다. "뭐 어디 사내애가 없어서 이런 별 볼 일 없는 놈을 만나고 다니는가 싶어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칠이란 놈이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다 안 받아 주니 애가 타서 나한테 얘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서 생각해도 이런 불량스러운 아이 입에서 성신이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

나는 이즈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성을 사귀게 되면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그러니까 아무 여학생이나 좋아하면 안 되고 첫 눈에 반한 여학생과 사귀면서 결혼까지 해야 된다는 생각. 첫사랑과 결혼을 해서 아들 딸 낳으면서 평생을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라면서 소꿉동무로 지내다가  같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되는 그런 모습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 여자 아이나 좋아하면 안 되고 마음에 드는 한 여자애만 바라보고 사귀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내 생각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세상을 제법 살아 낸 30중반에 이르러서야.

내가 이런 생각을 안 갖고 있었다면 성신이에게도 마음을 주고 첫사랑 소녀에게도 마음을 주는 일이 가능했을 터인데, 둘 다 사귀는 식으로 행동을 할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영칠이한테 성신이 이야기를 들은 얼마 뒤 집으로 성신이가 왔었다. 우리 집이 마을 입구 쪽으로 이사 온 뒤로는 처음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다녀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도 성신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를 않았으니까. 그때는 이미 계숙이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마음을 홀라당 빼앗겨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성신이는 못 본 사이 몰라보게 성숙한 소녀 티가 나 있었다. 하긴 나도 사춘기에 접어들어 있던 때였으니 성징이 남자보다 빠르다는 여자인 성신이도 그러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던 내가 정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성신이 모습을 본 순간 반가움보다는 화가 치밀었다. "너 어떻게 그런 별 볼 일 없는 아이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게 처신을 하고 다녀?"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듯한 화난 태도로 쳐다 보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너 영칠이란 애 알아?"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성신이는 화들짝 놀라며 "어머, 걔 나쁜 애야"라고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자기를 냉대하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영칠이한테서 나한테 자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듣고 내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온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성신이는 내 입을 통해서 호은이나  동네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 이야기가 소문날까 두려워 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게 다였다. 그것이 성신이를 본 마지막이었다. 대문 밖을 나서서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쳐다보며 골목길을 벗어 난 그때가. 나는 그때 옆방 떡봉이의 동생인 갓난 아기를 안은 상태로 그런 성신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성신이 소식을 마지막으로 듣게 된 것은 그 뒤로 몇 년이 흐른 뒤 어렵사리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71년 초. 이때 1년 동안 한 방에서 같이 입시공부를 했던 중학교 동창 주영이네 집에 놀러간 김에 호은이한테도 들렀었다.

주영이네는 그동안 살았던 P읍에서 문산으로 이사를 와 있었다. 아마 주영이가 아니었으면 호은이네 집에 안가게 됐을지도 모른다. 명문 대학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고는 싶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산까지 가서 호은이를 보는 것은 내 성격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영이 덕분에 호은이도 보게 된 것이니 잘 된 일이었다. 

"나 원래 이 정도는 되는 놈이었어. 그러니 영국이, 오상이 그리고 동네 아이들 만나면 이야기 좀 해줘"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호은이를 만났다. 실상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3년 동안 투병생활 하랴, 입시공부 하랴 엄청 고생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때 성신이에 대해 물어봤었다.

"서울의 한 양장점에 보조로 취직했다더라. S대 문리대 있는 곳 E동 어디래"라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찾아가 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영칠이라는 놈 때문에 생겨있던 나쁜 이미지와는 관계가 없이 생겨 있던 마음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