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사춘기 (完)>

사춘기 ~ 지난 날 속으로(6)

Bawoo 2016. 2. 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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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면서 교실은 신축 건물로 배정되었다. 교내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의 2층에. 처음으로 번듯한 건물 안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건물은 겉모습만 번드르르했을 뿐 안은 엉망이었다. 누가 보아도 날림이다 싶을 정도로 건물에 돈을 안 들인 표시가 역력했다. 교실과 복도 바닥은  큰크리트로만 마감을 해논 상태였다. 통상 대리석으로 마감을 해서 바닥이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나는 그런 건물을 상상한 내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모습.  교실이나 복도나 먼지가 있는 그대로 풀풀 났다.  교실이라기보다는 돼지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뿌려야 먼지를 잠재울 수 있었지만 물을 뿌릴 당번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매일 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도마저도 건물 안에는 없었다. 차라리 1,2학년 때 교실이 훨씬 나았다.  낡기는 했지만 바닥이 마루라서 그런지 먼지는 나지 않았었다. 모든 것이 다 엉망이었다.

 

친했던 아이들 중에는 태주, 광수, 택수만 같은 반이 되었다. 길수를 비롯 경오 등 다른 아이들과는 다 반이 갈린 것이다. 반을 전자과와 통신과로 나누면서 희망하는 과가 서로 달라서였다.  길수, 경오, 동수, 종두까지 모두 통신과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전자과를 선택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통신을 하기는 싫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 통신을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기 싫었다. 돈쓰돈돈하며 모르스 부호를 때리고 듣는 작업 자체가 싫었다.  통신 기계도 싫었다. 일종의 기계 기피증이었는데 그것을 할 시간에 그림 도구를 갖고 놀라고 하면 신이 나서 그리 했을 것이다. 딱 밥 빌어 먹기 좋은 성격.

기술은 배워두면 돈을 벌 기회가 있을 터였지만 그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럴 일도 없는 분야인데 좋아하며 동경하고 있었다. 

전자과는 일단 필수 기계는 없어도 되었다.  적성에 맞는 아이들은 라디오나  앰프를 만든다고 일부러 청계천까지 나가 진공관이니 트랜지스터를 사고 그랬지만 나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로지 명문 대학을 가는 것만이 나의 지상목표였다.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에서는 아니었다. 남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우선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만 했다. 그러려면 방법은 명문 대학을 가는 것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독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했다.

 

*

누구를 새로 사귈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새로운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가는 아이가 두 명 있었지만 관심을 약간 표시하는 선 이상으로 진전이 될 수가 없었다. 그렇기는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호와 찬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두 아이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듯한 눈길을 주었지만 입장은 나하고 똑 같았다. 나하고 덩치가 비슷한 성호는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고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않아 있는 찬곤이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호는 서울 토박이였지만 찬곤이는 가난한 시골 출신이어서 대학 갈 엄두는 못 내는 형편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 아이들을 세 부류로 나뉘었다.  나처럼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 얌전한 모범생들, 대학을 갈 수는 없으나 나름대로 성실한 아이들 그리고 아주 불량스러운 아이들로. 반원 60여명 중 50여명 정도는 나름대로 성실한 아이들이었다. 이는 다른 반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개중에는 나처럼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들도 있고 재면이 처럼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 플레이보이 짓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불량스러운 축에 속하는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패거리를 만들어 다녔다. 1, 2학년 때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는 그저 불량스러워보이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뜨이는 정도였었다. 이런 아이들이 만든 불량써클은 2개 정도가 있었다.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교내에 소문이 난 유명써클은 이 정도였다. 기차 통학을 하는 패거리와  승오가 다녔던 학교가 있는 마을 근처에 사는 패거리들.  기차를 타는 역과 사는 동네 이름을 따서 무슨무슨 패라고 불렸다. 여기에 속한 아이들은 하고 다니는 복장, 하는 행동 모두 얌전한 아이들이 보면 영낙없는 불량배였다. 실제로도 그랬을 터이고.

신기한 것은 교내에서는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급생을 때리거나 금품 갈취하는 그런 사건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들이 만약에 그런 짓을 했다면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나나 태주같은 체구 적고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그런 아이들이었을텐데 우리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밖에서 좀 불량스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여학생들 관련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일이 어느 날 일어났다. 수업을 자습으로 대체한 시간에.

 

* 불량아들의 한 모습

그날은 담임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보다. 반장을 통해 자기 수업 시간에 자습을 하라는 전달을 해왔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나대로 다른 뜻에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다구나, 적어도 한 시간은 온전히 입시공부 할 시간을 벌었구나" 라는 생각에 옆 자리에 있는  태주와 뒷자리에 있는 광수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면서. 그러나 이런 나의 바램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몇 몇 아이들이 오락을 하는 분위기로 바람을 잡은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량써클 패거리 중 한 아이가 교단 앞으로 나섰다. 

아이는 패거리 중 제일 덩치가 작은 애였다. 아마 나나 태주 정도 키였을 것이다. 그래도 앉는 자리는 자기 패거리들이 모여 있는  복도 쪽 맨 뒷자리였다. 같은 반이지만 말 한 마디 나눠 볼 기회도, 생각도 없이 "저 깡패새끼 앞으로 뭐가 될까"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경멸하고 있던 아이였다. 늘 모자는 삐닥하게 쓰고, 카라는 열어 제치고, 책가방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 좋게 책도 별로 안 넣고 다녔다. 바지는 다리 목이 보일 정도로 최대한 짧게 만들어 입고 다녔고.

이 아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교단으로 나서는가 궁금했다. 혹 반 아이들 전체 앞에서 무슨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그러는 것 아닌가 싶어 자연스럽게 행동을 주목하게 되었다. 책상 위에는 수학 참고서가 모처럼 당당하게 모습을 들어내놓고 놓여 있었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저 깡패새끼가 반 전체 아이들 앞에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아이는 덜렁거리는 모습으로 나온 것과는 달리 반 아이들을 압도하겠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좀 수줍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반 아이들 전부가 자기를 주시하는 것에 지레 주눅이 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평소에 불량스럽게 행동을 하며 다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 시선이 자기한테 쏠리는 경험은 처음이라서 압도를 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슬슬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놀랍게도 자기들 패거리들이 다같이 저지른 여성 편력담이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미션계 남녀공학 학교가 하나 있었다. 멀지 않다고는 하지만 버스 종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야되는 곳에 있는 학교여서 이 학교 여학생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저 학교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버스를 이용하여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만큼은 버스 안에서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 학교 평판은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 만큼이나 형편이 없었다. 나중에 고적대라는 뺀드 때문에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학생 수준을 기준으로 할 때 하위로 분류되는 그런 학교였다. 당연스레 불량스러운 여학생들이 많다고 학교 안에 소문이 나 있었다. 이 평판이라는 것은 그 불량스러운 여학생들과 어울려 논 우리학교 불량스러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그 학교 학생들을 늘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학교 주변 주민들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기도 했을 테고.  그러나 나처럼 학교와 자취방 그리고 학원이나 오가는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먼 다른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이 학교 여학생들을 볼 기회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 학교 여학생 하나를 이 패거리 아이들이 속된 말로 꼬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대일 관계가 아닌 자기들 패거리 댓명 정도가 다 같이. 그 다음 이야기는 입에 담기 곤란하지만 그 여학생의 자취방을 패거리들이 다 같이 갔다고 했다. 여학생을 위협을 한 강제성을 띈 것이라는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저 패거리들 전부가 같이 갔다는 뜻으로만 이야기를 했다.  이어지는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여학생은 불량스러운 모습으로 패거리를 지어 다니는 이 아이들에게 지레 겁을 먹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진 얘기는 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런 내용.

이 패거리들이 사는 동네는 승오가 얼마 전까지 다니던 학교가 있는 바로 그 동네였다. 등하교시 꼭 산길을 넘어 다녀야 되는 곳. 정기적으로 다니는 버스가 없어서 이 마을을 가려면 산길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 으슥한 산길은 아니고 차들이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어서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아이 패거리들이 온갖 불량스러운 모습으로 길을 가고 있는 앞 맞은 쪽에서 젊은 애기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등에 애기를 업은 모습을 하고서. 여인은 지레 겁을 먹었다고 했다.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하면서 숲 속으로 먼저 들어가더라나 어쩌나. 그 말을 어찌나 자랑스럽게 하던지 쌍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가 저런 개자식들하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니".

 

아무리 사촌 형 때문에 잘못 선택한 학교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정이 떨어졌다. 나는 저 멀리 앞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내 쪽으로 오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홍조를 띄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성격이었다. 첫 눈에 반해버린 여학생한테도 말 한 마디 못 건네보고 제풀에 지쳐 마음을 접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내 마음은 상대 여학생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를 따져볼 생각도 못 해보고 생겨나 있는 것이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대로, 내 마음이 보이는대로만 본 것이다. 상대 여학생이 불량스러운 아이일수도 있는데도 그런 면을 볼만한 분별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동경하는 이성인 것으로만 보는 어리석음. 이런 성격인 나에게, 이 아이는,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었다.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너희들은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절대 할 수 없을거다. 병신같은 놈들아!" 라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하고서.

이 아이의 이 날 행동은 결과적으로 "내 졸업하면 이 학교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으리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터였다. 이런 내 마음에, 불 붙는 곳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짓을 이 아이는 한 것이었다.

 

* 이 패거리들이 교내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딱 한 건 있었다. 열차 통학을 하는 또 다른 패거리들하고 패싸움이 붙어 한 명이 칼에 넙적다리를 찔린 사건이었다. 찌른 아이는 학생 대대장 역을 맡고 있던 내 중학교 동창이었다. 형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  찔린 아이는 다른 패거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아이였다.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경식이였던가 경석이였던가. 다만 무척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어서 얼굴만 봐도 절로 불량스러워 보이던 아이였다.  일부러 피해 다니고 싶을 정도의 느낌이 들었던 아이.

 둘 사이에 싸움이 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기네 불량배들 특유의 라이벌 의식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만 형석이가 좀 특이한 동창이었던 기억이 있긴 했다. 형석이는 중학교 3년간을 모두 같이 다닌 동창은 아니었다.  2학년 말 쯤 전학을 와서 3학년 1년만을  같이 다니고 동창이 된 사이였다.

형석이가 전학을 온 것은 아버지가 미군부대 군속인 탓이었다. 하는 일이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가 근무부대를 옮기게 되면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학을 다닌 것 같았다. 당연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들 국민학교 때부터 같이 다녔거나 3년 내내 같이 다닌 사이들이었는데 형석이는 그런 사이가 아닌 탓에 어딘가 낯설은 아이에 속했다. 앉는 자리도 서로 달랐다.  나는 맨 앞자리였고 형석이는 거의 뒤쪽 자리였다. 자리가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거리감이 있었던 그런 동창이었다.  졸업한 뒤 소식도 몰랐다. 

 

이 학교도 처음부터 들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학생수가 500여명 씩이나 된다고 해도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 말이다. 형석이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건 2학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보이길래  가까이 가서 보니 형석이었다. 뜻밖이다 싶었지만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서로 씨익 웃은 게 전부였다. 중학교 때 느꼈던 거리감이 고등학교에서 만났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가까워 질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형석이가 나를 보는 시선도 같았을 것이다. 동창이기는 하지만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창이라는 생각. 고작 1년을 같이 다닌 정도인데다가 자리도 떨어져 있어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이 없는 그런 사이였으니까. 자기가 생활하는 방식하고는 전혀 다른 얌전하고 자그마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불량스러운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끼리만 충돌이 있게 마련인가보다. 마치 조폭들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듯이. 그래도 학교 안에서는 없었다. 형석이가 상대를칼로 찌른 사건도 교내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열차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다. 사건은 크게 벌어지지 않고 수습이 되었다고 했다. 형석이는 구속을 당하기는 커녕 퇴학도 안 당했다. 잠시동안 교내에 모습을 안 들어냈을 뿐이다. 구속이야 피해 당사자 가족들과 합의를 보고 어린 나이인 것이 참작이 되어 그리 됐겠지만 퇴학을 안 당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그 이유는 형석이가 국비생인 덕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만약에 형석이가 퇴학을 당하게 되면  정부로부터 학교로 들어간 형석이 등록금을 토해내야만 된다는 점이었다. 졸업 후 일정 기간 군에 의무복무하는 조건으로 주는 장학금이니 졸업을 못 하게 되면 반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학교측에서 적극적으로 수습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 사건 외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큰 사건은 없었다. 뭐 선생들에게만 알려진 사건들은 많았을 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한은 그랬다. 다만 내가 당한 사건이 두 건 있었는데 사건이라고 부를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다. 두 건 다 1학년 때 겪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시비를 거는 아이한테 반항했다가 배의 급소를 한 대 맞고 자지러질 뻔 했던 사건하고, 같은 반 아이 하나가 내 겨울용 외투를 한번 입어보자고 해서 빌려줬더니 돌려 줄 생각을 안 하기에 화를 내며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 받은 일이 전부였다.

 

배를 한 대 얻어맞은 경위는 이랬다.

아마 가을 무렵이었을 거다. 사촌형의 자취방을 들어가기는 아직 이른, 통학을 하고 있을 때. 역 앞 빈터에는 지게에 배를 싣고 팔러나온 아저씨가 있었다. 배를 수확할 수 있었던 계절. 자기 과수원에서 따 온 것이라고 했다.  한 개 사서 경오, 광수, 동수와 나눠 먹고도 기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우리는 가게 앞에 있는 긴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느닷없이 '야! 일어서'그러는 아이가 있었다. 깜짝 놀라 누군가 보니 평소 불량기가 있어 보이던 안면이 있는 아이였다.  송경석이라는 아이. 학교에도 잘 안 나오고 어쩌다 나와도 늘 혼자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 아이. 언제나 그랬기도 했다. 한번도 편안한 표정을 한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같이 다니는 아이도 없던 그런 아이였다. 외톨이. 그런 이 아이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하고서 나보고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앉았는데 왜 그래"라고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배로 주먹이 날아왔다. 급소를 맞은 것인지 한동안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숨을 고르고 난 뒤 옆의 경오, 광수, 동수의  얼굴을 보니 하얗게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당한 일이었지만 내 편을 들어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은 있었지만 이해했다. 내가 그들 입장이어도 그랬을테니까. 그리고는 나를 때린 아이를 쳐다봤다. "뭐 이런 개쌍놈의 새끼가 있어"라고말을 하는 표정을  하고서. 아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기가 한 짓이 결코 옳은 짓은 아니라는 걸 자기도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좀 더 질이 나쁜 아이였다면 또 다시 주먹세례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그 이유가 자기가 한 짓이 나쁜 짓이어서 더 이상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아무리 얌전한 아이들이라도 한번 더 그러면 가만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오를 비롯 나와 친한 아이들이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긴 했어도 내가 맞을 때 거들어주지 못한 데 대한 자책감과 함께 은연중에 가만 있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줬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이 아이는 2학년이 되었을 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니기 싫은 학교였지만 없어서 좋은 아이들은 하나라도 더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만 했다.

 

 *

코트 사건은 이랬다. 겨울이 되자  어머니는 문산읍 내에 있는 시장에 가서 까만 색 코트를 하나 사가지고 오셨다. 학생용이 아닌 성인용을, 그것도 내 몸보다 커서 남의 옷 입은 것 같은 큰 것으로. 키가 더 자랄 수 있다는 계산을 하신 것일테지만 나는 엄청 싫었다. 학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그래도 좀 나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짜증만 약간 냈다.  그렇다고 안 입을 수는 없었다. 없는 형편에 큰 마음을 먹고 사신 것일테니. 근데 이 옷을 마음에 들어 한 아이가 있었다. 안양에서 통학하는 이정우라는 아이. 교실 중간 쯤에 앉아 있는 아이였는데 같이 어울리고 싶지는 않은 인상이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불량기가 좀 있어 보이는 쪽이었다. 학교도 심심하면 결석을 했다. 이 아이가 어느 날 한번 입어보자고 그랬다. 잘 됐다 싶었다. 자취를 하고 있는 때였으니 어머니가 볼 일도 없을 터이고 자취방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여서 외투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집에 가서 불거겼다. 토요일이면 의례히 집에를 갔는데 이날 따라 이 아이가 결석을 한 것이다. 별 수 없이 집에 그냥 갔고 어머니한테 치도곤을 맞았다. 월요일에 등교를  하자마자 이 아이한테 화풀이를  했다. 남의 옷을 가져가 일주일씩이나 입고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녀석은 머쓱해했다. 옷이 탐은 났지만 뺏을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을테고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학교에서 무슨 벌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무서워 입 다물고 참아야 할 정도로 막돼먹은 아이들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겪은 한은.

 

그게 다였다.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았다. 아주 불량스러운 아이들은 3학년까지 올라오지도 않았다. 스스로 그만 뒀거나 제적을 당했거나 그럴 것이었다. 내가 아는 위 두 아이가 다 그랬으니 다른 반에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 무단 결석을 하다.

대학을 가려고 준비하는 아이들은 제법 있었다. 내가 속한 반만 해도 태주, 광수, 성오를 비롯 10여명은 충분히 되었다. 6개반을 모두 합치면 얼추 1개반을 만들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숫자였다. 학교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표시하지 않았다. 대학을 가려고 준비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을텐데도. 입시반을 편성해달라는 요구를 할 생각들은 아무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으면서 요령껏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학교를 안 나가는 것이었다. 담임의 묵인하에 결석을 하거나 무단으로 빠지거나 둘 중의 한 방법을 택해서. 2주 정도 학교를 안 나가봤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몸이 아플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빠져 본 적이 없는 학교를. 그만큼 절박했다. 수학 문제 한 문제,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풀고 외워야 될 시간에 입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듣고 있어야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이었다. 2주가 지난 뒤 마음이 불안하여 어머니와 함께 담임선생 집을 찾아갔다.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를 사들고서. 그게 인사용으로 너무 약하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그런 일을 해 본적이 없어서였다. 어머니나 나나. 우리집 형편에 이유없는 돈을 쓰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담임선생은 내가 자취하고 있는 동네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마을 농가의 방 두 칸을 얻어  살고 있었다. 하나는 살림방, 다른 하나는 서재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의 월급이 얼마 안 되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여유는 없어 보였다. 어머니와 내가 안내된 방은 서재였다. 방 안에는 꽤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전자기학이란, 나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과목을 가르치는 담임은 책들을 보니 꽤 실력이 있는 것 같아보였다. 성격도 과묵한 편이었다. 얼핏 보면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지만 이는 선생들의 공통된 모습이기도 했다. 학생들 앞에서는 근엄하게 보여야 된다는 강박감 같은 것.

담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찾아간 이유를 알고 있었을테니까. 그 다음에 또 결석을 했다가 등교를 했을 때 담임은 엉덩이에 몽둥이 세례를 했다. 때리는 강도가 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결석을 하는 이유가 불량스러운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봐주는 느낌이 들었다. 담임은 이유없이 학생들을 때리는 그런 부류의 선생은 아니었다. 나중에 혁명이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찬곤이는 적극적으로 뒷받침을 해주고도 있었다.

 

* 체벌의 추억

미친개라고 불리는 선생이 한 명 있었다.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애들을 불러 빳다를 때린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담담 과목은 통신이었다. 모르스 부호를 때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통신사 자격증은 있는지 몰라도 교사 자격증은 없었을 것이다. 담당 과목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1학년때 담임도 통신을 가르쳤지만 몽둥이를 아무 때나 휘두르지는 않았으니까. 이 미친개한테 맞을 일은 나에게는 없었다. 적어도 책 잡힐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 학생 전체로 보자면 가장 모범적인 학생으로 분류가 될 터였으니까. 그래도 직접 마주치는 일은 될 수 있는대로 없이하려고 했다. 선생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시도 때도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야말로 미친 개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재수없게 딱 마주쳤다. 태주하고 둘이서 교무실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당황한 모습으로 경례를 하는 우리를 보고 미친개는 그냥 지나치는 듯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옆을 지났다 싶어 안도의 한 숨을 내쉬려는 순간 "너희 둘 교무실로 따라와"라고 명령을 했다. 걸렸다 싶었다. 피할 수는 없었다. 때리는 것에 반항할 생각도 못 했다. "뭐 이런 미친 개새끼가 다 있지.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학생을 잡아서 빳다를 때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아린 엉덩이를 매만지는게 고작이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고3이 된 이때까지 선생한테 매 맞은 것을 생각하면  맞을 짓을 한 것은 이 3학년 때 무단결석을 한 것 외에는 없었다. 1학년 때 종례시간에 떠들었다고 담임한테 딱 한 번 맞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게 몽둥이 찜질을 당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담임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떠든 것이니 선생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시절에 잘못을 한 것이기는 할께다. 백번을 양보해서 본다면 말이다.

 

2학년 때는 담임한테  책상 위에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넙적다리 윗부분을 단체로  맞은 적이 있었다. 점심 시간이 끝난 뒤인  5교시여서 아이들 모두가 아무 의욕이 없이 무기력해 보이는 상태가 최고조일 때였다. 담임은 수업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너무 짜증이 났었나보다. 평소 점잖기만 하던 양반이 "전원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 꿇고 앉아"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반항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한테 반항하는 행동 자체가 용납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그야말로 절대자였다. 더구나 명령을 내린 선생은 담임이었다. 다른 과목 선생들보다 말에 더 권위가 서는 위치에 있은 것이다. 담임이 아니었다면 참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5교시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의 나른함과 의무적으로 치뤄내야 하는 지긋지긋한 수업에 진저리가 나서.  그런데도 다른 선생들은 단체 기압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선생들도 아이들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을테니 대충대충 넘어 간 것일테고.

담임이 매를 든 이유는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담당 과목이 국어인데다가 매우 점잖은 성격인 탓에 아이들이 덜 어려워하는 면이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도 매를 들고 다니며 휘두르는 선생들을 더 무서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점잖은 선생은 덜 어려워 했고. 선생이라는 자리에서 생기는 학생에 대한 권위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받아 들인 것은 아니었다.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니 그 권위를 덜 행사하는 선생은 나쁜 말로 하면 좀 만만하게 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선생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들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담임은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우리들의 행동이 도를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날 날을 잡아 매를 든 것으로 보였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매를 들지 않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로 가버렸다. 제법 괜찮은 학교로 알려진 여자고등학교로. 나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과목인데다가 선생의 인품까지도 좋아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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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는 단 한 대도 맞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한 영어선생은 늘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겁은 줬지만 머리를 살짝 건드린 듯 때리는 외에는 절대로 매를 들지 않았다. 다른 선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시골 학교라 아이들이 순박해서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건 선생한테 매를 맞는 일은 3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이 졸업을 했다.

오히려 같은 학생 신분인 선배한테 두어번 정도 맞은 적은 있었다. 대대장 학생이 후배들의 규율이 엉망이어서 질서를 잡는다는 명분으로였다.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불러내 일장 훈시를 하더니  여학생들은 무릎은 꿇게 하고 남학생들은 엉덩이를 한대씩 때렸다. 아마 선생들의 묵인이 있었거나 지시가 있어서 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학생 중 최고 직책을 가진 상급생이라도 자기 혼자만의 결정으로 후배들 전체를 불러다가 기압을 주고 때리는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청 억울한 일이었지만 반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 건은 졸업을 앞둔 1년 선배가 변소에 갔다 오는 나하고 근석이를 불러세워 변소 뒤에서 빳다를 때린 일이었다. 덩치도 나나 근석이 만큼 작은 3명이었는데 졸업을 한답시고 객기 비슷한 것을 후배한테 부려보려는 것에 우리 둘이 재수없게 걸린 것이었다. 우리 둘 다 후배 중에 꼬맹이에 속했으니 만만하게 보고 그랬을 것이 틀림없었다.

 

국민학교 시절에 맞은 두 번의 기억은 정말이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지금도 때린 선생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며 중오하고 있을 정도로 충격이 컸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조회 시간에 3학년 때 같은 반 아이였던 옆 반 여자애하고 마주보며 웃고 있다가 느닷없이 뺨을 맞은 일, 6학년 때 복도에서 뛴다고 뺨을, 한 대도 아니고 정신없이 수차례 맞은 일.  이 선생들은 지금 우연이라도 만난다면 아마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내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응어리로 남아 있는 인물들이다. 둘 다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많겠지만.

 

 

** 내 사춘기의 마지막 - 플라토닉 사랑 ( 종애 이야기)

학교 생활은 이렇게 허무하게 아까운 시간만 축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입시를 치를 수있는 졸업장을 받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 수업이 3시 정도면 끝이 나 학원을 다닐 시간이 있다는 점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4시 정도면 학원을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5시에 시작하는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이 4시가 내게 또 다른 인연을 맺게 해주는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바로 옆집 양순이 누나네 건넌방에 세들어 살고 있는 새댁의 여동생인 종애와 맺어지게 되는 인연.

 

학원을 가기 위하여 승오네 집인 내가 자취하고 있는 집의 대문을 나서면 늘 기분이 상쾌했다. 대문 밖 마을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노라면 멀리 시내와 학교가 있는 곳을 오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곳까지는 논과 밭만이 있는 시야가 확 트인 곳이라서 였다. 보기만 해도 절도 가슴이 상쾌해지는 곳. 앞날을 준비하며 학원을 가는 길이어서도 그랬다. 기어코 명문대학을  가고야 말겠다는 생각. 남들은 부모의 닥달에 의해서거나 자신의 의지에서거나 일찌감치 시작한 앞날의 설계를 나는 난생 처음으로 시도하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떠맡고 있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많고 어머니는 시앗을 보고 산 탓인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인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아버지가 만들어 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월남으로 기술취업을 못 가셨더라면 이게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이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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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1967년은 월남전에 깊숙이 말려들어가 있는 미국의 요쳥에 의해  우리나라 군인들도 이미 참전을 하고 있는 때였다. 본격적인 전투부대가 국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참전한 지가 벌써 1년을 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뛰어든 이 전쟁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사건을 조작한 것을 배워서 써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침략을 해야 할 나라는 있는데 명분이 없을 때는 조작이라도 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침략 전술이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조작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누군가에 의해 폭로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참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보호막 아래 있는 나라 입장에서 파병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테니까.  나라 경제 발전에 목을 매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게 패해 거의 무너지다 싶이 된 일본경제가 우리나라 6.25전쟁 특수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인 박 대통령이 일본사에 정통했을 것임은 얼마든지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최대한 실리를 챙기는 조건으로 참전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생각.  참전 군인들의  일부 희생이 있을 것임을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군사쿠테타의 명분을 삼고 있었다.  5천년을 이어온 이 나라의  가난을 없애겠다는 것이 박대통령의 지상목표였다.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로 내모는 일이었다.  내 귀한 자식이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나가 싸운다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나라 통치방침에 따라 결정된 일이지만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제스추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비롯 동원 가능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파월장병을 대대적으로 환송해주는 행사를 벌인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수업까지 빼먹고 여의도로 파월장병 환송을 나간 적이 있었다.  나라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시 하나로  학생들이 동원되던 서슬푸른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수업을 안 하는 것이 좋기는 했다. 대학입시와 관계없는 과목을 책상 속에 숨겨 놓고 몰래몰래 훔쳐보며 문제를 풀어야 되는 생활이 아니라도 수업 시간을 합법적으로 빼먹을 수 있다는 것은 늘 신이 나는 일이었으니까.

여의도는 멀었다. 그래도 그런 생각보다는 처음 보는 곳이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한편, 수많은 인파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여의도 드넓은 백사장을 꽉 메운 인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라는 존재는 거기에서 바닷가에 널려있는 한 알 모래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독재자의 뜻에 따라 강제로 동원되어 나온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중의 별 볼일 없는, 아직 어른도 아닌 미성년 학생. 허망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정도뿐이 안 되는 것이구나, 이 모래알 같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섞여 있는 일개 모래알 같은 존재뿐이 안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그렇다고 벗어 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려면 뭔가 인정받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명문대학을 가야 된다는 것뿐이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굳이 독재권력이 아니라도 공권력이란 이름 아래서는 힘없는 일개인의 삶은 그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태어난 삶이기에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그런 정도뿐이 안 되는 삶인 것을.  자기 주변에 그 공권력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그 누군가가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친가든 외가든 가까운 일가 친척 중에 군대를 안가게 만들어 줄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   

내 주변에는 그런 친척이 없었다. 있기는 커녕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는 친척 조차도. 다들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삶을 사는 사람들 뿐이었다. 나 스스로 노력해서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삶. 그러지 않으면 한 알 모래알과 같은 대접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낙오된 삶을  살아 갈수 밖에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인파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역할을 해내고  돌아오는  내내 이런 생각만 했다.

"그래도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주어진 삶이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그 자리가  어디가 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때였다. 우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만 알고 있었다. 평생  꼬리처럼 붙어 다닐 별 볼일 없는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어내는 것. 그러려면 기필코 명문대학을 들어가야 되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일테고, 실제로도 그리 되었지만, 꼭 통과해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