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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마 소잔의 저서]성건록[省諐錄]

Bawoo 2016. 3. 23. 22:35

성건록[省諐錄]

 

막부 시대 말기의 병법학자 사쿠마 쇼잔(1811~1864)이 옥중에서 저술한 순 한문체 수필이다. 제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막부 시대 말기의 지사)의 밀항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을 때 쓴 일종의 ‘반성록’이다. 그렇지만 그 일을 부끄러워하는 내용보다는 전편에 걸쳐 경세우국(警世憂國)의 열정을 토로한 내용이 더 많다.

 

목차

  1. 1.구태의연한 손자병법을 버려라
    1. 2.서양의 언어를 배워라
      1. 3.해양 방위의 핵심은 대포이다
        1. 4.해양 방어론
          1. 5.부록 - 병요(兵要)

          본문은 장문과 단문이 혼합된 5·7조 한문체로 쓰였다. 전반부는 막부 시대 말기의 소란스러운 세상을 바라보며 선각자로서의 우려와 걱정 그리고 고민 등을 토로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후반부는 국방, 특히 해양 방비에 대한 내용이 많다. 쇼잔의 본래 의도가 후반부에 있으므로 그 내용의 일부를 다음에 소개한다.

          구태의연한 손자병법을 버려라

          상증술(詳証術, 기하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다. 서양에서는 이 기술을 병법 분야에도 적용해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오늘날 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논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손쉬운 것부터 배워 차츰 심원한 학문까지 통달한다는 이른바 하학상달(下學上達)을 이룬 것이다.

          (···) 그런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손자병법』에만 치우쳐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암송하고 강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병법은 구태의연한 것으로, 도저히 서양의 병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을 익히는 하학의 공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국방을 잘 정비해 대비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 학과를 진흥시켜야만 한다.

          서양의 언어를 배워라

          이속(夷俗, 외국인)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이정(夷情, 서양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하며, 그러려면 먼저 이어(夷語,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알기 위한 실마리가 될 뿐만 아니라 장차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급선무이다.

          최근 여러 나라가 이런저런 구실을 빙자해 사가미(相模)와 아호(安房) 부근에 정박하는 일이 잦다. 내가 조심스레 우려하는 점은 그 진의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황국동문감(皇國同文鑑)』 몇 권을 편집해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이해하고자 한다. 네덜란드는 오랫동안 우리와 무역을 해 왔기 때문에 많은 일본 사람들이 그 나라 책을 읽을 수 있으므로 우선 네덜란드 편을 간행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 막부에서는 그러한 책을 간행하려면 반드시 관부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1849년 겨울, 에도에 와서 원고를 제출하고 검열을 기다렸으나 해를 넘겨도 끝내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때 에도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청나라의 위원(魏源)이 지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었다. 그 책에서 그 역시 국내에 학교를 세워 서양의 서적과 역사서를 번역해 적의 정세를 잘 파악하는 것으로 그들을 통제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내 의견과 꼭 일치하는 것이다. 다만 그 나라에서 오늘날 그의 의견을 채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해양 방위의 핵심은 대포이다

          해안 방위의 요점은 대포와 함선에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대포가 중요하다. 위원의 『해국도지』에는 총포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조잡하고 근거도 확실치 않아 거의 아이들 장난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누구도 그 요령을 깨칠 수 없다. 위원과 같이 재주와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포술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그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후학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위원을 위해서도 나는 이 점을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

          해양 방어론

          에도 앞바다 해안에 반드시 포대(砲台)가 필요하다는 점은 나 역시 예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다. 원래 해안 방어에는 포대가 유리하다. 그러나 지형적 결함이 있는 곳에는 별도의 포함을 배치해 임기응변의 대책을 세워 두어야 한다. 군사적으로 요긴한 곳을 잘 살펴 해구(海口)의 중심부 또는 해안을 따라 한두 군데만 설치해 두어도 충분하다. 여기저기에 많이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네덜란드나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쌓여 있는 포대는 빈틈없이 서로 이어져 있는데, 이것은 육군이 보루를 쌓아 외적을 격퇴하는 방법일 뿐, 해안에 거점을 두고 양구(洋寇, 서양의 외적)에 대처하는 방법은 아니다.

          생각건대 육지에서의 전투는 공격 속에 방어가 있고 방어 속에 공격이 있을 때 비로소 방어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 그리고 보루를 나와 적진을 공격할 때 그 방어와 공격은 모두 보루 속에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수가 많으면 당연히 보루의 수도 늘려야 한다. 보루의 수가 많아도 서로 방해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싸움은 다르다. 포대를 맡은 병사는 포함을 움직일 수 없고, 포함을 맡은 병사는 포대에 있을 수가 없다. 때문에 포대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함은 아무리 많아도 좋다. 포대 수가 많으면 병사가 분산되지 않을 수 없으며, 병사가 분산되면 더 많은 수의 병사가 필요해진다. 그럼에도 왼쪽의 병사가 오른쪽의 병사를 도울 수 없고, 오른쪽의 병사 역시 왼쪽의 병사를 도울 수 없다. 게다가 적함이 한가운데를 공격해 온다면, 좌우의 포대는 서로 방해가 되어 포를 사용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포대의 이점을 살릴 수 있을까? 더욱이 포대가 많으면 포함이 부족해 먼저 나아가 적을 쳐부술 수도 없다. 만일 적의 함대가 사가미와 아호 사이에 줄지어 서 일본의 해상 수송을 끊는 술책을 쓴다면 그때는 내항에 100개의 포대가 있다 해도 쓸 수 없으므로 결국 싸움에 지고 만다.

          이에 반해 만일 포함을 많이 갖추고 시간을 두어 훈련을 쌓는다면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대응할 수 있으니 외적에게 겁을 주어 제압하고 그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그 고생을 해 가며 바닷가에 그 많은 포대를 쌓는 것일까? 나라에는 할 일도 많은데 거기에 쏟아붓는 경비 또한 막대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현의 현령을 지내고 있는 모씨는 어려서부터 재간은 있었으나 본디 소양이 없었다. 서양의 육전 포대 그림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견강부회하며 해안 방비책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방책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그저 얄팍한 지식에 근거해 무조건 상책이라 고집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잘못됨을 깊이 깨닫고 자주 그 일을 궁내청의 가와미치(川路) 대신에게 상신(上申)했다. 궁내청 대신도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차츰 신뢰했으나 끝내 해안 방비책을 시정하지는 못했다. 이 역시 개탄스러운 일이다.

          부록 - 병요(兵要)

          중국의 병법에 관한 서적으로 『손자(孫子)』만 한 것이 없지만 사실무근인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그 책의 내용대로 병법을 익혀서는 전쟁에 대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손자』의 「형편(刑篇)」에 “싸움을 잘하는 자는 우선 불패의 태세를 갖추고 적을 이길 조건이 갖추어질 때를 기다린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불패의 태세는 어떻게 갖추는가? 또 “방어를 잘하는 자는 땅속에 몸을 감추고, 공격을 잘하는 자는 하늘 위에서 움직인다”(땅속에 숨은 듯이 몸을 감추고 하늘 위를 나는 것처럼 경쾌하게 움직인다는 의미)고 했는데, 과연 어떻게 땅속에 숨고 하늘 위를 움직일 수 있는가? “싸움을 잘하는 자는 우선 불패의 땅에 서서 적이 패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불패의 땅에 몸을 둘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일들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 글에 현혹되어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의 여부도 따져 보지 않고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병법이라고 칭송하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 점이 참으로 이상하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활약한 조(趙)나라의 무장 조괄(趙括)은 명장이었던 아버지 조사(趙奢)가 쓴 병서를 어려서부터 많이 읽고 병법을 자유자재로 논해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했으나 결국은 패해 조나라의 대군을 잃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보면 오나라에 『손자』의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실되었으니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병법의 성격은 변하는 것으로, 이치를 분명히 하여 사물을 살피고 때에 따라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흡사 천도에 의해 책력이 바뀌는 것과 같다. 만일 책력을 고쳐서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 책력은 사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병법 역시 올바르게 고치지 않으면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화포(火砲)를 발명해 많은 병력을 대신했고, 정벌과 병합에 힘쓰면서 군사 제도도 크게 개혁했다. 만일 『손자』의 그림 9권이 지금까지 전해졌다 해도 그저 옛 법이 그러했다는 것에 불과할 뿐, 어찌 요즘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요즘 세상에 도움이 될 병법으로는 서양의 병법이 제일이다. 서양의 병법은 5과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장수의 지략, 둘째는 진법, 셋째는 병기학, 넷째는 국방, 다섯째는 군용이다. 장수의 지략이란 대체로 『손자』, 『병법』, 『사마법』에서 말하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진법이란 보병 · 기병 · 포병의 구별과 함께 그것을 합쳐 하나로 사용하는 것으로 거기에 전술이 있다. 병기학은 조종 훈련이 그 주이며 각종 화기의 사용과 각각의 득실 등을 자세히 살펴 대비를 갖추는 것이다. 국방이란 성과 보루를 쌓거나 해자를 파서 나라의 백성을 보호하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군용이란 식량과 포탄, 갑옷, 무기 등의 종류를 말한다.

          병법은 실전에 필요한 것으로, 이에 따르는 조종과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용감한 자가 혼자 앞서지 않고, 겁 많은 자가 혼자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조종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형태가 불어나는 물을 흩뿌리는 것과 같고, 그 기세가 둥근 돌이 굴러가듯하기 위해서는 조종 훈련이 필수이다. 그 진영의 머리를 쏘면 꼬리가 대응해 쏘고, 그 꼬리를 쏘면 머리가 대응해 쏘며, 한가운데를 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대응해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상산(常山)의 뱀에 비유, 『손자』 「구지편(九地篇)」] 조종 훈련을 해야 한다.

          따라서 잘 통제된 병사들과 재능 없는 장수는 패하지 않으나, 통제되지 않은 병사들과 재능 있는 장수는 승리를 얻지 못한다. 뛰어난 장수는 조종 훈련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생각해 보면 조종 훈련에 전심전력하지 않고서 쉽사리 병법을 논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끈 예는 일찍이 없었다.

          사쿠마 쇼잔

          사쿠마 쇼잔의 이름은 게이(啓)이며, 일명 다이세(大星)라고 불렸다. 자는 시메이(子明)이고, 통칭은 게이노스케(啓之助)이다. 나중에는 슈리(修理)라고 했으며, 쇼잔 또는 소로(滄浪)라는 호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신슈(信州) 마쓰시로(松城) 지방의 번에 속하는 무사였다. 제목에 사용된 ‘건’ 자는 ‘건(愆)’의 옛 글자로 ‘과실’이라는 뜻이다. 1854년 쇼잔이 44세 때 제자인 요시다 쇼인의 밀항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들어가 옥중에서 느낀 바를 석방된 뒤 고향에 돌아와 회상하면서 집필한 것이 이 한문체 수필 어록이다.

          원문은 본편의 5·7조 이외에 잡문 · 와카(和歌) 등이 상하 2편으로 나뉘어 있다. 본편의 논(論)은 학문과 수양, 병학, 수학, 해양 방위, 시사 등 다방면에 걸친 주체를 다루고 있다. 특히 국방 문제를 다룬 해양 방위와 시사의 내용에서는 국방 정책의 졸렬함과 인재 부족을 강하게 지적했다. 막부 시대 후반의 근왕가(勤王家)각주[1] 선각자였던 사쿠마 쇼잔은 1864년 7월 11일 양이파(攘夷派)각주[2] 자객의 칼에 맞아 교토 산조(三條) 기야초(木屋町)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해양 방어책과 총포에 의한 서양식 군비론 등은 훗날 군함 사령관이 된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계승했다.

          [출처:절대지식 일본고전-성건록 (사쿠마 쇼잔) [省諐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