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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1949년 국민당 ‘대륙 엑소더스’ 비극의 역사 -타이핑룬(太平輪)호 침몰 사건

Bawoo 2016. 3. 26. 22:30

900여명 탑승 여객선 침몰로 38명만 구조돼… 군인들, 배표 없는 피란민 바다에 빠뜨리기도▼ 


1949년 국민당 ‘대륙 엑소더스’ 비극의 역사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군대가 공산당과 홍군에 패주하면서 정부와 당, 군인 및 가족 등의 ‘대륙 엑소더스’가 이뤄지고 ‘대만 피란’이 홍수처럼 이뤄졌다. 1956년 호구조사에 따르면 1946∼48년 15만9841명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동했으나 1949년에는 한 해에만 30만3707명이 본토를 탈출했다. 

국민당 정부가 행정원을 대만으로 이전한 뒤인 1950∼52년 10만4663명이 추가로 대만으로 건너왔다. 1953년 현재 일반인과 군인을 합쳐 외부에서 온 외성인(外省人)은 약120만 명으로 전체 인구 800만 명의 15%가량을 차지했다. 이 비중은 지금까지도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만 학자들은 장제스가 ‘대륙 수복’을 기약하며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 △대륙에서 공산당 세력이 확산되고 있으나 대만에는 공산당의 침투가 거의 없었고 △물자가 풍부해 경제적인 독립에 유리하며 △대만해협이 가로막아 해군 공군이 없는 공산군대를 방어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는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등 측근들은 미국 영국이 해양 국가로 대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어 태평양 건너의 미국 영국과 친구 관계를 맺으면 외교적으로 유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의 원동(遠東) 방어선과 닿아 있는 것도 미국의 지원을 얻는 조건이 됐다.

하지만 민족의 대이주에는 희생과 대가가 따랐다. 900명 이상이 탑승했다가 침몰해 대부분이 숨진 비극적인 타이핑룬(太平輪)호 침몰 사건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1949년 1월 27일 타이핑룬호에는 피란민과 상인 군인 및 가족 등이 배를 가득 채우고 상하이 항구를 출발했다. 

밤 11시 반경 저우산 군도 부근에 왔을 때 지룽에서 상하이로 오던 석탄 및 목재 운반선 젠위안룬(建元輪)과 충돌했다. 처음에는 소형 선박인 젠위안룬만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30여 명은 구조됐지만 70여 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핑룬호 선체에도 구멍이 뚫려 배에 물이 들어오고 과적으로 배가 기울고 있는 사실이 발견됐다. 타이핑룬호가 침몰한 것은 처음 충돌 후 1시간가량 지난 뒤였다. 선박이 부서진 것을 뒤늦게 알아 구조 요청이 늦어지는 바람에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탑승자는 표를 구입한 승객 508명, 선원 124명,표 없이 탄 사람 약 300명 등 900여 명이었는데 인근을 지나던 호주 군함에 구출된 사람은 38명에 불과했다. 이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대만 지룽 항 ‘동 16호 부두’에는 ‘타이핑룬 위난 여객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사고 이후 1949년 5월 중순 상하이가 공산군에 점령된 후에는 피란이 절정을 이뤘다. 부두에서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무단으로 배에 오르다 상하이 황푸 강에 빠져 숨지기도 하는 등 생지옥이 연출됐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다. 심지어 군인이 배에 오르려는 사람을 구타해 바다에 빠뜨리기도 했다.

1949년 상하이의 물가는 전황이 모호하던 2년 전에 비해 천정부지로 치솟아 뱃삯은 상하이∼지룽의 경우 1946년 7월 8400프랑에서 1949년 1월에는 32만 프랑으로 38배가 올랐다. 상하이에는 온 가족이 피란을 떠나 빈집이 즐비하고, 자동차와 집기 고서화 등이 버려져 길에 가득 쌓여 있기도 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참고자료]

201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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