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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에도)막부의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

Bawoo 2016. 3. 28. 23:41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7 Osaka Yoshinobu Tokugawa.jpg

Tokugawa Yoshinobu as Shogun of Japan, c. 1867

세 잎 족두리풀 가몬
세 잎 족두리풀 가몬

 

도쿠가와 요시노부(일본어: 徳川慶喜 (とくがわよしのぶ), 1837년 10월 28일 - 1913년 11월 22일)는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 초대 당주.

반막부세력과의 대립 끝에 1866년 패배하여 더 이상의 정권 유지는 불가능해졌음을 깨닫고, 1867년 국가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통해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의 막을 스스로 내린다.

이로써 일본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근대화를 추진하는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져 새 시대를 맞게 된다.

가족

아버지는 도쿠가와 나리아키, 어머니는 아리스가와 친왕가의 요시코(그녀의 언니는 12대 쇼군의 정실부인)이다.

안세이 2년(1855년) 이치조 미카코와 결혼하여 태어난 딸은 출생한 지 며칠만에 사망했다. 이후 탄생한 10남 11녀는 모두 측실 2명이 낳은 아이들이다. 이들 중 요시노부를 이어 공작이 된 7남 요시히사, 가쓰 가이슈의 데릴사위가 된 10남 가쓰 구와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비가 된 9녀 히로야스 왕비 쓰네코, 옛 이나바 돗토리 번 이케다 가문의 당주 이케다 데루토모의 양자가 된 5남 이케다 나가히로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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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도쿠가와 게이키.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비교적 평화적인 정권교체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의 달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미토 한[水戶藩]의 영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쿠가와 가문의 한 파였던 히토쓰바시가[一橋家]는 미토 가문과 같이 쇼군의 직을 승계할 수 있었으나 후계자가 없었다. 이에 나리아키의 일곱번째 아들로서 히토쓰바시가에 양자로 들어간 그가 쇼군이 될 가능성이 컸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가 1858년 후계자 없이 죽게 되자 나리아키는 자신의 개혁정책을 수행할 방편으로 아들인 게이키가 쇼군이 되도록 힘썼다. 그러나 보수파가 세력을 잡아 기이 한[紀伊藩]의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쇼군이 되었고, 게이키와 나리아키는 다른 개혁파와 함께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러나 서양과의 교역을 허용한다는 정부의 정책은 곧 커다란 반발을 샀으며, 쇼군이 자신의 권한 중 일부를 덴노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재론되었다.

 

1862년 바쿠후는 결국 나이 어린 게이키를 새 쇼군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는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즉각 조정과 바쿠후의 긴밀한 화합을 꾀하고 대영주들이 정책 결정과정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도록 하는 개혁조치를 시행했다. 그런데 강경파를 배경으로 한 조정의 압력을 받고 1863년 6월 25일부터 일본에서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으나 실제로 아무런 조치 없이 약속한 날짜를 넘기게 되자 바쿠후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Tokugawa Yoshinobu organizing defenses at the Imperial Palace

 in 1864,  together with Matsudaira Katamori, during the Kinmon Incident

 

1864년에는 조슈[長州]의 강경파 세력들이 중앙정부를 공공연하게 거역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게이키는 군대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했다. 그러나 1865년 바쿠후의 군대가 철수하자 강경파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듬해 보낸 원정군은 이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대영주들이 자신들을 희생시켜 권위를 재천명하고자 한 게이키를 멀리하여 도와주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쇼군 이에모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게이키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체면을 살릴 수 있게 되었지만 바쿠후 군대의 열세는 명백한 것이었다.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이름으로 쇼군이 된 그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러나 압력이 거세지자 새로운 권력구조에서 대등한 몇 사람들 중 제1인자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1867년 마침내 권력을 내놓는 데 동의했다.

 

 

The French military mission to Japan, invited by Tokugawa Yoshinobu for the modernization of his forces, in 1867

 

그러나 사쓰마[薩摩]와 조슈의 지도자들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1868년 1월 3일 강경파 사무라이들이 교토[京都]의 조정을 장악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요시노부는 이 쿠데타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고문들이 거부함으로써 짧은 기간 내란이 뒤따랐다.

고군[皇軍]이 바쿠후의 수도인 에도[江戶]로 쳐들어오자 그는 그의 군대로 하여금 항복하게 했으며 자신은 미토로 물러났다. 뒤에 사면되었으며 1902년 공작작위를 받았다.

Tokugawa Yoshinobu with rifle

 

 

Tokugawa Yoshinobu in later life

 

 

 

Later life

Living a life in quiet retirement, Yoshinobu indulged in many hobbies, including oil-painting, archery, hunting, photography, and cycling.[32] Some of Yoshinobu's photographs have been published in recent years by his great-grandson, Yoshitomo.[33]

 

In 1902, the Meiji Emperor allowed him to reestablish his own house as a Tokugawa branch (bekke) with the highest rank in the peerage, that of prince (kōshaku), for his loyal service to Japan.[34] He took a seat in the House of Peers, resigning in 1910. Tokugawa Yoshinobu died on November 21, 1913 at 4:10 pm and he is buried in Yanaka Cemetery, Tokyo.

 

On 9 January 1896 his ninth daughter Tokugawa Tsuneko (1882–1939) married Prince Fushimi Hiroyasu, a second cousin to both Emperor Shōwa and Empress Kōjun and nephew of Prince Kan'in Kotohito.

On 26 December 1911 his granddaughter Tokugawa Kikuko, later Princess Takamatsu was born, who married Prince Takamatsu, the brother of Emperor Shōwa

 

[출처: 정보- 책조용한 혁명/ 우리말 자료 - 위키, 다음백과/사진 및 영문자료- 영어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