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일본 >

[러일전쟁의 영웅, 군신, 동양의 넬슨]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Tōgō Heihachirō]

Bawoo 2016. 4. 23. 22:20

도고 헤이하치로
Tōgō Heihachirō.jpg

 

 


도고 헤이하치로(일본어: 東郷平八郎 (とうごう へいはちろう), 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한 군인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일본인은 그를 '군신'으로 여기며, 별명으로 '동양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이 있다.

생애

성장 과정

Birthplace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의 현재 가고시마 현인 당시 사쓰마 번의 작은 마을인 '가노야'에 있는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남자의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 헤아하치로도 무예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도고 헤아하치로는 이후 자신의 능력을 더는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발휘하려고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시마즈 다다요시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그 남자는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 일본을 수호하려면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Officers of Kasuga, in August 1869. Third-class officer Tōgō is dressed in white, top right.

영국 유학

메이지 시대 해군 장교로 1871년에서 1878년까지 영국포츠머스관비 유학한다. 도고는 당초 철도 기술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영국 관비 유학때 처음에는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유학을 시켜주세요"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했다. 나중에 도고는 오쿠보가 자신에 대해 "헤이하치는 수다쟁이라서 안된다"라는 감상을 타인에게 전해 듣고 과묵하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침묵의 제독"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오쿠보 다음에 사이고 다카모리에 간절히 부탁해 영국 유학을 결정했다.

당초 다트머스 왕립 해군 사관학교에 유학을 희망했지만 영국측의 사정으로 허용되지 않고 Gosport에 있는 해군 학원 버니 아카데미에서 배운 후 상선 학교 우스터 협회에서 배우게된다. 유학에서는 'To go, China (중국으로 가라)"라고 조롱하는 등 고생이 많아 수다쟁이였던 성격은 완전히 과묵해져 버렸다. 그러나 미야코만(宮古湾)해전에 ​​참전했다고 말하자 일약 영웅으로 취급되었다.

유학중에 국제법을 배워 청일 전쟁 때 방호 순양함 "나니와"의 함장으로서 정선 경고에 불응하는 영국 상선 "고쇼우호"을 격침해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은 판단을 하였다. 이러한 침착한 판단력이 훗날 연합 함대 사령 장관 인선되는 요소가 되었다. 

 

귀국도중 사이고 다카모리서남전쟁을 일으켜 자해한 것을 안 도고는 "만약 내가 일본에 남아 있다면 사이고씨 밑에서 전사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사이고의 죽음을 애도했다 라고 한다. 실제로 도고의 친형인 오구라 소쿠로는 사쓰마군 3대대 9소대장으로 서남 전쟁에 종군해 성산공방전에서 자결하였다.

하와이에서 쿠데타

메이지 26년 (1893년) 하와이 왕국릴리우오칼라니 여왕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반발한 미국인 농장주들이 해병대 160 명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타도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이때 일본은 일본인 보호를 이유로 도고 이끄는 순양함 "나니와" 외 2척을 하와이에 파견해 호놀룰루 군항에 정박시켜 쿠데타 세력을 위협했다. 여왕을 지지하는 원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한다. 또한 하와이 주재일본인도 여왕지지파에 공감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하와이 병합은 메이지 31년 (1898년)에 이루어졌다.

청일 전쟁

도고 헤이하치로(1877년)

메이지 27년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는 "나니와"함장을 맡아 호토오키 해전 (고쇼우호 사건) 황해 해전, 아카이에이 해전에서 활약한다. 아카이에이 해전후 소장으로 진급하는 동시에 상비함대 사령관이 되지만, 전시 구성을 때문에 실제로는 연합함대 제1유격대 사령관으로 호우코쇼섬 공략 전에 참가한다.

러일 전쟁

두 번째로 참가한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는 발트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고 일본조차도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 이유는 국가 대부분이 '大艦巨砲主義 (대함거포주의)' 즉, '거대한 대포를 탑재한 몸집이 큰 전함으로 해상에 있는 표적을 일소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일만여 톤의 거대한 몸체 전함들과 전함보다는 작지만 속도가 빠른 순양함을 건조하던 시대였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는 달리 생각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여러 제국이 포탄 개량에서 포탄이 적 전함의 장갑 관통에 중점을 두었던 사정과 다르게 일본은 포탄의 폭발력과 화재를 일으키는 능력을 역점으로 하여 화약 '시모세'를 개발하였고 이 포탄은 두께는 작지만 화약을 속에 많이 넣었으므로 폭발력이 강하여 러시아 군함에 쓰던 부식 방지용 페인트는 '시모세' 한 대 맞고 쉽게 화염에 휩싸일 정도로 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더구나 해로를 너무 길게 잡아서 병력이 지치게 한 러시아 해군의 실수도 패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출처:한국어 위키백과-도고 헤이하치로]

==========================================================================

 

일본의 군신,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이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는 포문을 연 인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1848년 1월 27일 사쓰마 번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무술을 좋아하는 사고뭉치로 동네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사이고 기치지로에게서 사서오경과 한문을 배우고, 무사 집안의 자제로서 검약과 절제, 절의, 무사의 행동거지에 대해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도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에 진출한 많은 번사, 무사와 달리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하게 군인으로만 지내다 일생을 마쳤으며, '과묵한 군인'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이런 성정은 어린 시절 기치지로에게서 받은 교육 덕분으로 여겨진다.

 

도고가 태어났을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 항 등의 몇몇 항구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쇄국 정책을 택하고 있었다. 도고가 다섯 살 무렵인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 만에 흑선 4척을 이끌고 나타나면서 일본은 급속도로 시대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작은 번의 사무라이에 불과했던 그에게 일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사건은 15세 때 영국 함대의 막강함을 목격한 것이다. 에도 막부 시대 사무라이는 검의 휴대와 사용이 승인되었던 특권 계층이었는데, 에도 말기에 들어서면 검술 연습이라거나 무례하다는 이유로 선량한 시민들을 검으로 베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시민이 사무라이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1862년, 사쓰마 번에서 한 사무라이가 영주가 지나가는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상인 하나를 칼로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공관은 사쓰마에 사무라이의 처벌을 요청했으나 영주는 그동안의 논리로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연안으로 들어왔고, 도고는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과 함께 항구 방어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6시간 만에 사쓰마 군은 완전히 패배하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당시 외국 함대의 위력을 맛본 다른 젊은 사무라이들이 그랬듯 도고 역시 "앞으로 있을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라고 깨달았다.

 

18세 무렵 도고는 사쓰마 함대에 입대하고, 1871년에는 일본제국해군의 사관생도가 되었다. 여기에는 사쓰마 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영향이 있었다. 처음 도쿄에 상경했을 때 도고는 철도에 대해 공부하려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찾아가 사절단의 일원에 합류시켜 달라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얼마 후 도고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해군에 대해 공부할 것을 권유받았다. 사관생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영국 해군에 배치되었고, 워체스터 호에 승선하여 7년간 복무했다.

페리 함대

1853년 페리 제독이 에도 만 우라가 항에 나타나면서 일본은 급속도로 개항을 했다.

이 목판화는 1854년에 제작된 것으로 함선의 모습과 에도 만의 지형을 함께 볼 수 있다.

 

1878년 도고는 영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그가 목도한 것은 '부유한 나라, 강력한 군대'라는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일본이 산업, 군사, 정치 전 분야에서 급속도로 근대화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해군 중위로 귀국한 그는 이후 일본제국해군에서 근무하며 해군 장교들을 교육하고, 영국에서 배워 온 조선술을 토대로 일본이 자체적으로 군선을 건조하는 일에 참여했다.

 

1894년,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도고는 나니와 고속순양함의 지휘관이 되어 청일 전쟁에 파견되었다. 그는 제물포항 근처에서 청나라 군인을 호송하는 영국 수송선을 포격해 청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선박 규모에서는 청나라에 밀리지만 잘 훈련된 군대와 신식 무기를 보유한 일본 해군은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고, 도고는 포모사(오늘날의 대만)을 점령하면서 청일 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대만과 팽호 제도, 요동 반도 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끼어들어 일본에게 여순 항을 포함한 요동 반도를 내놓을 것을 강요했고, 일본은 이에 굴복한다. 그 후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중국을 위협하여 여순 항을 25년간 조차하고, 만주 일부 지역과 요동 반도를 차지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여순 항을 차지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뻗치는 상황에 위협을 느꼈고, 양국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출병시킨 군대의 철수를 미적대자 일본은 이를 거세게 비난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이 여순 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포격하면서 러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일본 함대의 총책임자는 도고였다. 당시에는 전쟁을 시작할 때 선전포고하던 것이 관례였던 탓에 러시아 함대는 포격 소리를 듣고도 위기를 감지하기 못한 채 군사 훈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쓰시마 전투

러일 전쟁 최후의 전투인 1905년 쓰시마 전투 당시 미카사 호 갑판에 서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러시아는 110만 명의 육해군을 보유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었다. 일본의 6배에 달하는 군사 규모, 무적의 발틱 함대, 어뢰정과 잠수함 개발 및 보유 등 러시아는 일본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다. 러시아 귀족들은 자신감을 갖고 이 기회에 만주의 목재 채벌권까지 점유하고자 일본의 도발에 응했다. 그러나 꾸준한 군비 증강을 통해 군대를 근대화시키고 신식 무기를 개발한 일본군의 기술은 러시아의 생각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첫 교전에서 도고의 함대는 40분 만에 러시아 전함 4척을 파괴시키고, 여순 항을 봉쇄하여 러시아 해군의 발을 묶었다. 그리고 이듬해 6월과 8월 황해 교전에서 도고 함대는 러시아의 극동함대 대부분을 수장시키고 잔여 함대를 여순 항으로 쫓아내 러시아의 한반도 간섭을 저지했다. 한반도와 만주 대륙에 일본군이, 여순 항에 러시아 군이 속속 증원되면서 전화는 확대되었다. 1905년 초, 도고는 수차례의 격전 끝에 여순 항을 탈환했다. 그해 봄 일본 육군은 만주의 러시아 진지를 돌파했다. 양측의 피해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1905년 5월 27일, 러일 전쟁의 최종 격전인 쓰시마 전투가 발발했다.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 모습을 드러냈고, 도고는 4척의 전함을 이끌고 출항했다. 러시아의 무적함대는 일본의 2배에 달했으나 도고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6척의 전함을 수장시켰다. 다음 날 아침 러시아 함대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 군은 4,830명이 전사하고, 5,907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사망자 117명, 부상자 583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함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해전 사상 이렇듯 일방적인 전투는 전무후무하다고 평가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이 러시아에게 거둔 승리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 여순 항, 요동 반도, 사할린 섬 남쪽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쓰시마 해전으로 도고는 일본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 1913년 해군원수에 임명되고, 1921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해군원수 이사회 이사로서 해군 군비증강안과 작전 등에 지속적으로 조언했다.

 

1934년 5월 30일, 도고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On his death in 1934, at the age of 86, he was accorded a state funeral. The navies of Great Britain, United States, Netherlands, France, Italy and China all sent ships to a naval parade in his honour in Tokyo Bay. 쓰시마 해전 이후 '세계의 영예', '무사도의 화신' 등으로 일컬어지며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던 도고는 '호국의 신'으로 추존되어 전국 각지에서 도고 신사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30일제를 기해 해군성의 주도 아래 본격적으로 신사 건립이 진행되었다. 1940년 오늘날의 도쿄 하라주쿠 지역에 도고 신사 건립이 완공되었고, 5월 28일 신령을 불러들이는 신도 의식인 진좌제가 거행되었다.

The Tōgō Shrine, in Harajuku, Tokyo, Japan.

 

[뒷얘기]

Tōgō's son and grandson also served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His grandson died in combat during the Pacific War on the heavy cruiser Maya at the Battle of Leyte.

In 1958, Fleet Admiral Chester Nimitz, an admirer of Gensui The Marquis Tōgō, helped to finance

the restoration of the Mikasa, Admiral Tōgō's flagship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In exchange, Japanese craftsmen assembled a Japanese "Garden of Peace," a replica of Marshal-Admiral Tōgō's garden, at the National Museum of the Pacific War (formerly known as The Nimitz Museum) in

Fredericksburg, Texas.[6]

 

· 1878년 : 7년간의 영국 해군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다.
· 1905년 : 쓰시마 전투에서 러시아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다.
· 1913년 : 일본 해군원수에 임명되다.

도고 헤이하치로 동상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에 위치한 미카사 공원에 세워진 동상

 

Family

Admiral Tōgō with his wife Tetsu, in 1913

 

Tōgō's wife was Kaeda Tetsu (1861–1934). The couple had two sons; the elder son, Takeshi (1885–1969), succeeded his father as the second Marquess Togo in 1934 and held the title until the kazoku was abolished in 1947. The younger, Rear-Admiral Tōgō Minoru (1890–1962) followed his father into the navy, rising to the rank of rear-admiral and ending his career in 1943 as commander of the naval district in Fukuoka. His elder son Ryoichi, who became a naval lieutenant, was killed in acti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Takeshi married Ohara Haruko (1899–1985); the couple had one son, Kazuo (1919–1991) and two daughters, Ryoko (1917–1972) and Momoko (1925-). Kazuo married Amano Tamiko and had three daughters, Kikuko (1948-), Shoko (1952-) and Muneko (1956-). As Kazuo and his wife never had sons, to perpetuate the Tōgō name they adopted their son-in-law, Maruyama Yoshio (1942-), the husband of Kikuko. Kikuko and Yoshio have two sons; the elder, Yoshihisa (1971–), married Niimi Miyuki and has two sons, Ryuuta (1991–) and Masahei (1993–). [7]

 

[출처: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영문자료- 영어위키Tōgō Heihachir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