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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일본군 지휘관]구리바야시 다다미치

Bawoo 2016. 4. 24. 22:40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 忠道,くりばやし ただみち:1891년 7월 7일~1945년 3월 26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한 일본의 육군 지휘관이다. 나가노 현 출신이다.

경력

1911년 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기병으로 전속되었다. 1923년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수료하였고, 1928년 미국의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미국의 국력을 체험하여 "미국과 벌이는 전쟁은 절망적이다. 큰 오산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1931년에는 [캐나다]에 파견되었고, 이후 일본에 돌아와 육군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다. 1940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는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몇 개의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쿠리바야시는 23군의 참모장으로 영국령이었던 홍콩, 싱가폴 공략전에 참전, 승리하였다.

1943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예비사단이었던 제2근위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1944년 5월 제109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이오지마의 수비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이듬해 2월부터 시작된 이오지마 전투에서 21,000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만 명이 넘는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지연전 끝에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스스로 검을 들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 전사하였다. 그의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사 후 대장에 추서되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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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이 이끈 일본군의 90%가 넘는 2만여명이 죽었다. 미군은 5천여명이 죽고 2만2천여명이 부상당했다. 기겁을 한 미국은 본토상륙을 포기하고 원자탄을 투하하게 된다.

이오토 또는 이오지마(硫黃島)는 도쿄 도(東京都) 오가사와라 촌(小笠原村) 에 속한다. 도쿄에서부터 약 1,050km 남쪽에 있다. 섬의 길이는 동서 9km, 남북 4km이고 면적은 21 km² 이다. 사이판과 일본 본토 중간에 있는데 일본군 비행장이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섬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은 스리바치 산(摺鉢山)이고 169m이다.

스리바치를 점령하고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이 태평양전쟁 승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정부는 사진속의 생존자 세명을 불러 전국을 돌며 전쟁구호기금 마련에 나섰지만 세 명은 전쟁터에 전우들이 남아 있는 한 자신들의 영혼도 이오지마를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버드대 출신 쿠리바야시 장군을 열연한 와타나베 켄의 연기가 압권이다. "참 이상하지.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다짐했건만 가족을 생각하면 다짐이 흔들리니 말이야." 그런 그도 애국으로 포장된 국수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부상당한 후 미국에서 선물로 받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빵집을 하다 징병되어 온 나약한 주인공은 살아남아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증언한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올 초에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 "아버지의 깃발"이란 영화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이오지마란 곳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몰랐으며, 그 유명한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세우는 6명의 병사들의 사진 역시 실제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영화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처절했던 이오지마 전투에 관심을 갖게했습니다.

 

"아버지의 깃발" 이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의 이야기라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패전국인 일본군 시각으로 본 이오지마 전투 이야기 입니다. 이 두 작품이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기에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개봉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과연 일본군이 겪은 이오지마 전투는 어떤 전투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과연 이 영화가 개봉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내용면에서 걸리는게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신문을 보니,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는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한채 바로 DVD로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울먹였습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 그 전쟁을 통해서 얻은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가 "이오지마" 전투였습니다. 아직도 미국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투로 꼽히는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 병사들은 처음부터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정부는 어떠한 원조도 해주지 않았다. 병사들은 적들과의 싸움보다는 극심한 물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장비 부족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이끈 사람은 쿠리바야시 입니다. 그는 미군들에게 큰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으며, 미군을 가장 심하게 괴롭힌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들을 보면 일본 군국주의 세력들이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의 참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였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리바야시는 처음부터 미국과의 싸움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 유학 경험을 가진 그는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섬세하고 낭만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미국과의 싸움을 원치 않았고, 친미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죽음의 섬 이오지마에 보내졌다는 말이 있는 쿠리바야시는 천황폐하 만세만을 부르짖는 다른 지휘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걸 마음 아파한 지휘관이었으면, 부엌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 걸 걱정할 만큼 가정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던 남편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승산이 없었던 싸움에서 쿠리바야시는 하루만이라도 미국을 더 잡아두어 본토가 침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싸움에 임합니다. 미군은 일본군의 예상치 못한 전투방식에 많은 혼란을 겪었고,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

 

이오지마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군들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었다기 보다는 본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쿠리바야시를 비롯한 많은 병사들은 이오지마가 점령당하면 가족들이 사는 곳이 초토화 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목숨을 버렸습니다. 쿠리바야시 역시 마지막 출동 명령을 내린 후 할복자살을 하던 기존의 지휘관들과는 달린 옷에 달린 계급장을 떼어내고 병사들과 함께 적진 속으로 돌진한 후 최후를 맞았습니다.


미군은 남달랐던 지휘관 쿠리바야시의 시신을 거두어주고 싶어서 그의 시신을 찾았지만, 계급장을 뗀 상태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섬 전체 걷는 자리마다 수많은 유골이 있는 이오지마 섬.. 우리에게 일본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나라이며, 자신들이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망언을 일삼아 용서할래야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책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본 병사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가지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출처:blog.daum.net/sonsang4/13744752   백운의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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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Stars and Stripes on Mount Suribachi (Iwo Jima).jpg


날짜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장소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이오 섬 (지금의 일본 일본국 도쿄 도 오가사와라 촌 이오 섬)

결과
미국의 승리, 미 공군의 일본 본토 공습기지 확보.
 

교전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홀랜드 스미스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체스터 니미츠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니시 다케이치†

병력

110,000명 21,000명
이오 섬 전투
또는 이오지마 전투(영어: Battle of Iwo Jima, 일본어: 硫黄島 (いおうじま) (たたか)い,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이오 섬에서 벌어진 미군일본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개요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일본 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단,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합계). 다만 피해율은 약 40%이다.

배경

이오 섬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가잔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이오지마'(硫黄島 이오지마[*], 유황 섬, ‘지마’는 섬이라는 말)으로 불렸다.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식수나 용수는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같은해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으며 일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오지마에서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기 때문에, B-29 폭격기들과는 달리 먼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는 호위 전투기들이 곧바로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호위 전투기들을 잃은 B-29 폭격기들이 일본군의 요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일본군은 이오 섬을 근거지로 하여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내려가 미군의 비행장을 자주 공격했다. 이 결과, 일본군은 12월에만 11기의 B-29를 파괴했다. 따라서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부는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했다.[출처:한국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