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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Bawoo 2013. 12. 28. 23:27

 

 

 

 

20세기 전반의 격동기를 뜨겁게 살다 간 독일의 여류 화가이자,
판화의 세계를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판화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선구자, 미술의 역할을 사회 속으로 제고시킨 케테 콜비츠.....
20세기 현대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세계적인 판화가였던
케테 콜비츠는 진정 민중을 위한 예술가였다.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서 미의 관점에 대해서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케테 콜비츠가 개척한 ‘현실참여예술’ 양식은 중국에서는 신흥목판화운동, 
1980년대 한국에서는 민중판화운동을 불러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살아 생전에 예술과 삶이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 케테 콜비츠는
감동적이면서도 탁월하고 아름다운 판화를 남겼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소녀”, 1892년,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

동판화, 퀼른 케테 콜비츠 미술관, 독일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묻혀 절실하게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이는 독일의 여류 판화가이자 조각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으로,

그녀 특유의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극대화된 드라마티즘은 깊은 감동을 더해준다.

동판화 특유의 날카롭고 섬세한 선을 조화롭게 사용함으로써

간절한 기도의 표현이 훌륭하게 전달되고,

뺨과 손등 위로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게 비추는 빛은

소녀의 기도에 희망의 따스함을 주고 있다.

 

 

 

 

 

 

 

팔을 고인 자화상(1920년경)

 

Kathe Kollwitz (1867~1945):

미술의 기능과 역활을 사회 속에 제고시킨 작가로

20세기 현대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독일 출신의 판화가& 화가

 

 콜비츠는 흰색과 검은색의 작가였음에도 그녀의 판화 대부분은 딱딱한 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광선에 의한 명암의 대비만으로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하므로써 어떤 색채 그림보다

 훨씬 다채롭고 감각적이고 회화적이다. 그래서 잠재적 색채화가라고도 불리운다.

 

 

  

 

 

프롤레탈리아 미술의 선구자 혹은 어머니로 불리우는 케테 콜비츠는 주로
노동자와 농민등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진실을 과장없이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했지만 1백점이 넘는 자화상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내면풍경을
형상화한 자화상 또한 시대의 고통을 증거하는  현실 참여 작품이라고..

 

"자기 자신을 묘사하려는 이런 충동을 일종의 자기연민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은 오히려 어떤 인생 그리고 또한 어떤 시대에 대한 답변이자 증언이며,

검증이요, 시금석에 더 가깝다."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유주의적 기질을 가진 중산층 집안(법관이었던 아버지는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사회주의자외할아버지의 삶에 감동 받아 목수로 전직했다)출신이지만,

베를린의 한 달동네에 자선병원을 차리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한 의사 카를 콜비츠와의

결혼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진실에 눈 뜨게 되면서 현실 참여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Julius Rupp)는 1846년 복음주의 신앙의 뿌리가 깊은 쾨니스베르크에

최초의 자유신앙  교구를 일으켰던, 이로인해 국가와 교회의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조를

끝내 굽히지 않았던 고귀한 품성을 지닌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1898

 

 케테 콜비츠의 작품의 전형이면서 당시 시대미감을 응축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
초기 산업화 시대의 자본가와 수공업자들 간의 갈등을 기본 축으로, 석판과 부식동판기법을 사용해
4년(1893~1897)에 걸쳐 제작된 '직조공 봉기'(궁핍, 죽음,모의,행렬, 돌격, 종말의 6편으로 구성된 연작)
가1898년 베를린 미술대전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지만, 황제 빌헬름 2세가 콜비츠의 미술은
시궁창 미술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레스덴에서 독일 최고의 미술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진가를 재확인했다고..

 

당시의 독일은  '노동자들도 인간이다' 라는 선언만으로도 혁명고무죄로 몰리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