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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딜리아니

Bawoo 2014. 1. 3. 22:4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7.12 ~ 1920.1.24

 

 

 

저주받은 천재화가? 세기말적 허무주의자?


시와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진지하면서도 솔직한 성품, 기품을 잃지 않는 자세, 게다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 뺨칠 만한 미남 청년. 1906년,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는 곧 주위의 여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모딜리아니 역시 피카소처럼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그림 실력을 가진 천재 소년이었다. 고전 화법에 능통한 그는 파리에서의 성공을 자신했다. 하지만 그가 둥지를 튼 몽마르트르의 분위기는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술과 담배. 마약에 찌들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주정뱅이들 무리들에게 고전의 거장들은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저주받은 이탈리아의 눈은 파리의 햇빛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을 마구 찢어버린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슴에 묻어둔 고전 양식은 그만의 독특한 회화 영역을 구축하는 자양분이 된다. 몽마르트르 거리를 온통 휘저어 놓은 회화 운동에 휩쓸리지 않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어딘지 모르게 고전의 냄새가 뿜어 나오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세상사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던 파리의 자유인들에게도 전쟁의 그림자는 검게 드리운다. 그는 군 입대 불합격 판정을 받고 파리에 남아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때 만난 여인이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 그들은 정렬적인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인 베아트리스는 모딜리아니와 다툼이 잦았다. 두 사람 모두 돈을 흥청망청 쓰기 좋아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애초부터 두 사람의 결합은 무리였다. 


베아트리스와 헤어진 모딜리아니는 점점 더 술에 기댄다. 이때 그 앞에 구세주가 나타난다.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 그는 모딜리아니의 예술 세계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다. 그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내주고는 친형제 이상의 뒷바라지를 한다. 이 ‘저주받은 천재’에게 그는 절대적인 보호자이자 유일한 고객이었다. 술집에 쓰러져 있는 그를 작업실로 데려오는 것도, 비평가와 수집가들에게 소개시켜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비난과 악평에서 그를 보호하는 것도, 모델을 세워주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미술 공부를 하던 어린 소녀를 만난다. 열아홉 살의 어린 소녀 잔 에뷔테른. 가톨릭 가문인 그녀의 집안에서 유대인 가문의 그와의 결합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으로 집을 얻어 살림을 차린다. 잔을 만난 뒤 모딜리아니는 꺼져가는 생을 다 바쳐 작품에 매달린다. 그림은 하루가 다르게 풍요로워진다. 색채는 더욱 더 밝아지고 투명해진다. 잔 에뷔테른은 오직 모딜리아니만을 위해 태어난 여인이었던가...


이듬해 그들은 첫 딸을 얻는다. 딸의 이름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과 같이 잔이라고 짓는다. 이 아이는 훗날 미술 사학자가 되어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모딜리아니 :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쓴다. 


모딜리아니는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비평가들의 평가도 좋아진다.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애호가들도 나타난다. 물론, 즈보로브스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금전적인 안정과 예술적 성숙에도 불구하고 병마는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다.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림과 술이 반복될 뿐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즈음, 화실을 찾아온 친구들은 서글픈 장면을 본다. 모딜리아니가 피를 토하며 침대에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임신 9개월의 잔이 부른 배를 움켜쥐고 앉아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는 빈 술병들과 먹다 남은 통조림 깡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이튿날 아침, ‘오직 그만을 위해 살아온’ 어린 아내 잔은 부모가 사는 6층 건물에서 몸을 던진다. 저세상에서도 모딜리아니의 모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들의 아이와 함께...

 

 

 

잔 에뷔테른

 

 

 

 

 

 

 

 

  

 

 

 

 

두상 

 

모딜리아니는 원래 조각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던 그는 당시에는 치료할 수 없었던 폐병 환자의 몸이었다. 그런 그에게 돌덩이를 쪼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날리는 돌가루에 그의 폐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싼 재료비를 대기도 어려운데다가 작품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돈과 병 때문에 좋아하는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그를 괴롭혔고, 술과 약물에 의지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자화상

 

일찍부터 결핵을 앓고 있던 모딜리아니는 그 짧은 생애를 항상 짙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초상화 모델이 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계속 거부한 그가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자화상은 그가 그린 어떤 초상화와도 다르고,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갖는 일종의 신비적인 조용함을 띠고 있다. 자화상은 사진에서 자주 보는 전형적인 미남 타입의 모딜리아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직후 리쁘시츠가 뜬 데스마스크와는 놀랄 만큼 비슷하다고 한다.(서경식 <청춘의 사신>에서)

 

 

 

 

 

 

유대계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 다닌 뒤

1906년 이후는 파리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 전에 출품하였고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간결한 조형 양식의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안 아파본 병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해 1913년부터는 회화에만 전념을 하는데

늘 조각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초기 회화에서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주로 초상화만 그렸고 지인들을 모델로 그렸다

1910년 6점의 유화를 앙데팡당 전에 출품하였으며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에콜 드 파리의 작가로서

1차 세계대전 중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풍경화도 몇 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부터는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보티첼리와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개성을 보여준다

운명의 여인 잔 에뷔테른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다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1월 24일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다

 

  

프랑스어로 maudit(모디)는 '자주받은'이란 뜻인데, 사람들은 모딜리아니에서 '모디'를 연상, 곧잘 그를 '모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공교로운 일일까요? 또 한 명의 유명한 '저주받은' 사람이 있죠.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 많은 면에서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합니다.


 

 

 

 

 

출처 : 라라와복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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