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화가를 떠나 그녀 전체의 이야기를 꼭 한 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신산스러운 그녀의 삶과 이번 출장길에 파리에 들렀을 때 보았던 몽마르트르의 분홍색 그녀의 집을 어떻게든 연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자화상 Self-portrait, oil on canvas, 1927
발라동은 1865년 9월, 베시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이었습니다. 재봉사였던 그녀의 어머니 이름은 마들린 발라동이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것이지요. 훗날 발라동은 자신의 출생이 1867년 7월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주장을 증명할 자료는 없었습니다. 출생부터 평탄하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은 그 후로도 계속됩니다. 문득 인생도 대물림되는 것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발라동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옮겨 옵니다.
르누아르, <쉬잔 발라동> Pierre Auguste Renoir, Suzanne Valadon, oil on canvas, c.1885
르누아르가 그린 쉬잔 발라동의 모습입니다. 수녀원에 속한 학교에 입학해서 몇 년간 공부를 한 발라동은 열한 살이 되던 해 여성 모자를 만드는 가게의 점원이 됩니다. 열한 살,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 필요한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이지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야채를 팔기도 하고 웨이트리스 일도 했고 장례식 때 사용되는 조화(弔花)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그 나이에 무엇 하나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르누아르, <머리를 땋은 소녀> Pierre Auguste Renoir, Girl Braiding Hair, oil on canvas, 1885
르누아르의 작품 <머리를 땋은 소녀>의 모델도 쉬잔 발라동이었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젊은 화가들을 알게 된 발라동은 그들의 소개로 열다섯에 몰리에 서커스단의 곡예사로 일하게 됩니다. 곡예사로 활동하던 그녀를 인상파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조(http://cafe.daum.net/music7694/9L8P/563)가 작품에 담은 적도 있었지요. 1880년 3월, 발라동은 그네 위에서 곡예 연습을 하다가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허리를 다친 그녀는 몇 주 후에 회복되었지만 그 후 다시 곡예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였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 때문에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르누아르, <부지발에서의 댄스> Pierre Auguste Renoir, Dance at Bougival, oil on canvas
르누아르의 <부지발에서의 댄스> 속 여인도 쉬잔 발라동입니다. 허리 부상에서 회복한 발라동을 눈여겨본 화가가 있었습니다. 피에르 샤반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모델로 세웠고 그 후 7년 동안 그의 여러 작품 속에 발라동이 등장하게 됩니다. 곡예사에서 화가들의 모델로 다시 한 번 그녀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지요. 항간에는 샤반이 발라동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델을 고용한 사람들은 그녀들의 육체를 가져도 되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때문에 그 시절 모델이라는 직업은 어느 정도 수치스러운 직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모델로 보지 않고 여인으로 보는 것을 남자들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로트레크, <쉬잔 발라동의 초상화> Toulouse Lautrec, Portrait de Suzanne Valadon, 1885
로트레크의 <쉬잔 발라동의 초상화>입니다. 이후 발라동은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는데, 르누아르와 로트레크가 대표적이었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발라동은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하는 젊은 화가들 집단의 멤버가 됩니다. 한편으로 발라동은 카바레 라팽아질(Lapin-Agile)의 정식 무용수로도 활약합니다. 마스크만 쓴 채로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그녀의 묘기를 보고 사람들은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소녀라고 그녀를 칭했습니다. 자신에게 이목이 쏟아지는 것을 즐기는 것은 타고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쩌면 발라동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세계로 들어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로트레크, <쉬잔 발라동의 초상> Toulouse Lautrec, Portrait de Suzanne Valadon, c.1888
로트레크의 또 다른 <쉬잔 발라동의 초상화>입니다. 1881년, 열여섯의 발라동은 스페인 화가 미구엘 위트릴로를 만나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전제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발라동의 성관계는 너무 이른 나이에 시작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1883년 12월 26일, 발라동은 사내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샤반과 르누아르 그리고 부아시도 아버지 후보 명단에 들어갔지만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긴 발라동은 다시 모델 일을 시작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8년 뒤, 미구엘은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인정하면서 그녀의 아들은 위트릴로라는 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그의 아들이었는지는 신만 아실 겁니다. 저는 ‘발라동도 모른다’에 손을 번쩍 들고 싶습니다.
목욕이 끝난 후 After the Bath, pastel, 1908
모델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화가들의 기법을 보았던 발라동은 직접 그림을 그려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를 그린 ‘할머니’라는 제목의 드로잉과 ‘자화상’이라는 파스텔화가 1883년에 처음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880년대 중반 이후 발라동은 많은 드로잉 작업을 하고 파스텔로 거리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녀의 미술 재능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로트레크였습니다. 발라동은 로트레크를 위해 자주 모델을 섰는데 오랜 기간 그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시절이 그랬던 모양입니다.
버려진 인형 The Abandoned Doll, 129.5x81.3cm, oil on canvas, 1921
인형을 버리고 거울에 시선을 돌린 소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1890년 발라동은 드가와 친구가 됩니다. 그녀의 작품을 본 드가는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하는 한편 그녀의 작품 몇 점을 구입해줍니다. 화가로서 첫발을 디딜 수 있게 해준 것이지요. 갑자기 드가가 좋아졌습니다. 그도 그녀의 육체를 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드가의 격려 속에 1894년 발라동은 살롱 나시오날에 여성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합니다. 모델에서 화가로 다시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초상화 Portrait of composer Erik Satie 2, 41x22cm, oil on canvas, 1893
발라동의 초기 작품들은 연필이나 파스텔화 그리고 드로잉이었는데 1893년부터 유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유화 첫 작품은 작곡가 에릭 사티의 초상화였습니다. 6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티는 발라동과 동거를 합니다. 사티의 고향은 인상파 화가들이 자주 찾았던 옹플뢰르였지요. 사티는 발라동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후 사티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그녀의 인생 전체를 보면 이 순간은 그녀에게 가장 아까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책을 쓴 작가는 ‘햇빛처럼 이 순간이 그녀를 지나쳤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의합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상처들을 서로 핥고 사는 것이 사랑 아닌가요?
긴 커튼과 함께 있는 누드 여인 Nude woman with drapery, 1919
사티와 헤어진 발라동은 주식 거래인이었던 폴 무시와 1896년에 결혼합니다. 그녀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인 안정이 찾아오자 그녀는 모델 일을 그만두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결혼 후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를 한 그녀는 전형적인 주부와 일하는 화가로서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그녀는 사물을 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습니다. 굵고 무거운 붓 터치는 오히려 작품에 깊이를 주었고 대상에 대해 감정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누드와 초상화가 대표적이었는데 누드는 정직했고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아홉 살의 나의 위트릴로 My Utrillo at age of nine, 1892
발라동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아들 위트릴로였습니다. 시골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그는 파리 근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몽마르트르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지만 이른 나이에 술과 만행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발라동은 화가로서의 활동을 잠시 접고 아들의 치료에 매달립니다. 정서가 불안한 아들에게 치료 방법으로 미술을 권유했는데 위트릴로는 미술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는 치료되지 않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됩니다. 퇴원 후에도 발라동은 계속해서 아들에게 그림을 지도합니다. 발라동도 세상 모든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1906년 마흔한 살이 되던 해 발라동은 아들의 친구이자 화가인 앙드레 우터를 만나게 됩니다. 아들의 친구는 그녀의 호기심을 끌었고 3년 뒤 두 사람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녀가 마흔넷, 우터가 스물셋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서가 안 맞는 탓도 있지만 가치관이 다른 탓도 있을 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뭔가 어색합니다. 저는 역시 보수적입니다. 우터로부터 자극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작품세계로 다시 돌아왔고 <아담과 이브>라는 작품을 제작합니다. 모델은 우터와 발라동 자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남녀 누드를 한 작품에 그린 최초의 여류 화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브르타뉴 주네에 있는 집에서 바라본 풍경 View from my window in Genets (Brittany), 1922
발라동은 우터와의 관계를 남편에게 숨겼지만 결국 남편이 알게 되었고 처음부터 문제가 있던 이 결혼은 1910년에 공식적으로 이혼 절차를 밟아 끝이 납니다. 이후 발라동은 아들과 우터와 함께 몽마르트르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됩니다. 당연히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겠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누드를 그리고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터는 징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게 되는데 공식적으로 우터와 결혼한 발라동은 군인의 아내에게 지급되는 수당도 받게 됩니다. 아들 위트릴로도 징집되었지만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돌아오게 되고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남편은 전쟁터에, 아들은 정신병원에...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쉽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푸른 방 The Blue Room, 1923
1915년 비록 작품이 팔리지 않았지만 발라동은 여류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우터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합니다. 그를 위해 근처로 자리를 옮겼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모인 세 사람은 작품 활동을 개시합니다. 우터는 세 사람의 작품을 판매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화가로서 정점에 오른 발라동의 작품은 나름 사람들의 관심 속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생을 위해서라도 작품은 계속 팔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시회도 꾸준히 열어야 했습니다.
기대고 있는 누드 Reclining Nude, 1928
1924년 베르넹 죈느 갤러리와 계약을 맺은 후 다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자 발라동은 시골에 집을 사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아들과 우터 그리고 발라동 사이의 긴장은 계속 되었고 1920년대 말 우터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여성에 대한 편력도 뒤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그녀의 작품 회고전이 몇 차례 열렸습니다. 1930년에 접어들면서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에는 당뇨와 신장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해 아들 위트릴로가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남편인 우터도 집을 나갑니다. 빈자리를 동료 화가들과 방문객들이 채워주었지만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았을지 짐작이 됩니다.
발라동과 위트릴로가 살았던 몽마르트르의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는 카페가 되었습니다. 1938년 4월 7일,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심장발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그녀는 세상을 떠납니다. 일흔둘의 나이였습니다. 파란만장했다고밖에 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생이 마침내 멈춘 것이지요. 총 475점의 유화와 275점의 드로잉 그리고 31점의 에칭을 남긴 발라동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그녀의 공헌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녀의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탓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발라동에게 10점 만점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화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받아야 할 평가는 그 폭이 너무 넓습니다. 다만 그녀의 삶이 치열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