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하건대, 아이들 이야기라고 무심코 지나치면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의 빛나는 성취를 놓치는 셈이다.
단짝이 다른 아이와 더 친할 때 등
시나리오 대신 상황 주고 즉흥연기
체코 청소년영화제서 대상·주연상
16일 개봉한 ‘우리들’ 얘기다. 34살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초등학생들의 세계를 그린 작은 영화지만, 개봉 전부터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수작이다. 지난 2월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최우수 장편 데뷔작 부문 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최근 체코에서 열린 제56회 즐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는 국제경쟁부문 대상, 주인공 ‘선’ 역을 맡은 최수인이 최우수 주연배우상을 거머쥐었다. 최수인은 상하이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영화는 외톨이 초등학생 ‘선’이 방학식날 전학온 ‘지아’(설혜인)를 만나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세계를 담았지만 ‘우리들’이 포착한 순간들은 마냥 맑고 밝지만은 않다. 사실상 인생의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짝 친구가 다른 아이와 더 친하게 지낼 때 느끼는 질투와 배신감 등 ‘우리’라는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인생 최초의 당혹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윤 감독은 “어린아이의 삶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름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영화는 윤 감독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직접 겪었던 일에서 시작됐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이가 뒤틀린 가슴 아픈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날것처럼 생생히 남아 있다. 한데 나이 들면서 보니 내가 어떤 측면에서는 계속 그와 비슷한 인간관계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시나리오를 2년 넘게 고쳤다.”
수백 가지 표정을 쉴 새 없이 연출하는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는 ‘우리들’의 강점이다. 특별한 기교 없이, 아이들의 표정과 언어로만 94분을 꽉 채운 연출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엄마 심부름을 가는 여자 아이가 겪는 일을 생기발랄하게 그린 단편 ‘콩나물’(2013)부터 엿보였던 감독의 재능이다.
최수인·설혜인 등 촬영 당시 11, 12세였던 ‘우리들’의 세 주인공은 모두 첫 영화 연기였다. 윤 감독은 아이들에게 시나리오를 주는 대신 장면마다 상황을 설명하고, 직접 대사와 행동을 만들어 연기하게 했다. 즉흥연기를 유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촬영 전 두세 달 동안 배우들과 즉흥극 리허설을 꼼꼼히 했다.
“영화 내용 자체가 그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서 실제로 겪을 법한 일들을 그리는 거라, 배우들과 이야기하면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될 때까지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찍었다”고 감독은 말했다. “같은 장면을 십 수 번씩 핸드헬드로 촬영하느라 촬영감독님들이 제일 고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한 살 소녀들의 미세한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얼굴을 가까이 찍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