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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장비결의 저자] 이지함(李之菡)선생

Bawoo 2016. 7. 9. 21:01



이지함 ( 李之菡 )  (1517년~1578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사헌부 감찰, 우봉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다.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1]

동인북인의 당수인 아계 이산해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는 이지함의 종증조부가 된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인들은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 책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토정비결》은 그 시절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이지함의 토정가장결

이지함이 그의 후손을 위해 가장(家欌)으로 전해준 비결(秘訣)을 쓴 〈토정가장결〉, 규장각 소장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에 대하여 민중들은 격암 남사고나 북창 정렴 등과 같은 예언가로 인식했고, 야사에 전하는 그와 관련된 기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화담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 받았고, 당대에 이이, 성혼, 정철 등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던 정통 유학자였다.


중종 대 조광조로부터 비롯된 사림의 정계진출이 기묘사화를 거쳐 명종 대 을사사화로 이어지면서 급격히 정체되자 많은 선비들이 은거하면서 자신의 학문적인 이상을 실천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화담학파의 적자였던 이지함 역시 부패한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출사를 포기했지만 나름대로 피폐한 민생을 일으킬 해법 찾기에 골몰했다.


말년에 조정의 천거로 지방수령으로 나아갔을 때 그는 백성들을 위해 상업과 수공업, 해양자원의 개발, 국제무역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권장했고, 일찍이 자신이 구상했던 시무책을 건의했다. 당시 그는 조정신료들의 무관심으로 뜻이 가로막히자 벼슬을 집어던지고 낙향했지만, 그의 민생 지향적이면서 실용적인 학풍은 유형원, 박제가 등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명가의 후손, 산림처사의 길을 걷다

이지함(李之菡)은 1517년(인종 1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이다. 일찍이 그는 용산의 마포 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아래에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를 짓고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했다. 그는 체격이 당당했고 키가 커서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지만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가 웅장했다.


그는 고려 말의 명현이었던 목은 이색의 7세손이었다. 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치(李穉), 어머니 광주 김씨는 집현전 학사 김맹권의 딸이다. 14세, 16세 때 연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형 이지번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글을 멀리했는데 형의 권유로 학문을 익히면서 금세 각종 경전에 통달하고 온갖 사서와 제자백가의 책까지 섭렵했다.


이지함은 당시 뭇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하려 했는데 이웃사람이 갑자기 벼슬을 얻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보고 비천하게 여겨 과거를 포기했다. 23세 때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 등 각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그의 성품은 매우 호방하고 따뜻했다. 종실이었던 모산수 이정랑의 딸과 혼인했을 때 그는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저고리 차림으로 돌아왔다. 집안 사람들이 두루마기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묻자 홍제교를 지나다가 얼어 죽게 된 거지 아이 세 명을 만났는데 그 모습이 하도 가련하여 두루마기를 세 폭으로 나누어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고 대답했다.


그 후 풍습에 따라 충주의 처가에 살던 이지함은 1549년 어느 날 갑자기 가솔들을 이끌고 고향 보령으로 이사했다. 그때 연유를 묻는 형에게 처가에 길운이 없어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대답했다. 과연 이튿날 장인 모산수가 충주에서 역모를 일으킨 이홍남의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충주의 양반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충청도라는 명칭이 청홍도로 바뀌었다. 이지함이 만일 충주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듯 이지함은 일찍부터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지함은 한때 승정원 사관 안명세와 매우 절친했다. 그런데 안명세가 을사사화에 대한 내용을 사초에 정확하게 기록했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실망한 그는 출사의 뜻을 깨끗이 접고 천하를 떠돌았다. 조카 이산해는 〈숙부묘갈명〉에서 당시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했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효성과 우애로 세상을 감동시키다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해변에 장사지냈는데, 장차 바닷물이 무덤을 덮칠 것이라 예측하고 돌로 제방을 쌓으려 했다. 이 계획은 포구가 넓고 깊어 끝내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늘에 달렸으나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해 재난을 막는 계획은 게을리 할 수 없다.”

  

그의 형 이지번은 백의정승이라 칭송받았을 만큼 청렴한 인물이었는데, 중종 때 권신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섬에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죽은 뒤 석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의 아들 이산해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유명해서 당대의 실세였던 윤원형이 사위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이지번은 벼슬을 버리고 단양으로 피신하여 구담(龜潭)에서 은거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때 이지함은 형과 함께 내려가 조카 이산해와 이산보를 가르쳤다. 나중에 서울에 살던 이지번이 병석에 눕자 이지함은 보령에서 도보로 상경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마침내 1575년(선조 8년) 12월 1일 형이 죽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실상 나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은 형님을 위한 복(服)이 아니고 스승을 위해 입는 복이다.’

큰조카 이산해는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고 북인의 영수로서 벼슬도 영의정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상대적으로 작은조카 이산보는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산보에 대하여 “대인은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인데, 오직 산보만이 그에 가깝다.”고 하면서 “옛날에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고 큰 절의를 세움에 임하여 뜻을 빼앗기지 않을 만한 자라는 말이 있는데, 산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 세 명의 적자가 있었는데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아내가 50이 넘어 섬에서 낳은 산룡은 12세 때 역질로 죽었다. 서자인 이산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을 나누다

이지함은 일찌감치 벼슬에 뜻을 접었지만 학문과 인간에 대한 애정은 드높았다. 모처에 도학이 높은 명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종종 기이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호방한 성품과 높은 학문에 매료되어 사귀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벗을 사귈 때 특정 당파나 학파를 가리지 않았는데, 실용적인 학풍을 지향하던 남명 조식을 찾아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과도 매우 가까웠다.


제자 교육에도 충실하여 당대에 이산보의 효우충신(孝友忠信)과 박춘무의 염정자수(恬靜自守)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또 천민 출신이었던 서기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학문에 진력하지 못하자 사재를 털어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덕분에 서기는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고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는 율곡 이이와 가장 친해서 학문은 물론 사사로운 일도 격의없이 상의했다. 그래서 조정에 붕당이 격화되어 대사간 벼슬에 있던 이이가 동인들의 모함을 받고 사임하려 하자 적극 만류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이가 그에게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자신은 욕심이 많아서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이가 대체 당신 같은 사람에게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인욕인데, 나는 스스로 방심하기를 좋아하고 승묵(繩墨)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욕심이 아니겠는가?”

  

이이는 1578년(선조 11년) 7월에 쓴 〈경연 일기〉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산 현감 이지함은 어려서부터 욕심이 적어서 외계의 사물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서 춥고 더운 것은 물론 배고픈 것도 능히 견딜 수 있었다. 겨울에 벌거숭이로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앉아 견딜 수 있었으며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워서 형제간에 있거나 없거나 자기 소유를 따지 않았다. 재물을 가볍게 여겨서 남에게 주기를 잘했다. 세상의 화려함이나 음악,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질이 배 타기를 좋아하여 바다에 떠서 위태로운 파도를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또 그의 제자였던 조헌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이지함, 성혼, 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지는 자세, 그리고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은데,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학의 근본을 설파하다

이지함은 양반의 상업 활동을 주장했을 만큼 뚜렷한 경제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양반 중에 도덕을 갖춘 군자가 상업 활동을 해야만 그 이윤을 백성에게 골고루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방치되고 있는 나라 안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민생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지함은 평소 “내가 1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하며,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삼을 수 있다.”라고 자부했다.

그는 민생안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겼다. 조선팔도를 떠돌며 백성들에게 장사와 기술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자급자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우야담》에는 그가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재배한 다음 바가지를 만들어 판 돈으로 곡식을 사들여 빈민을 구제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가 살았던 마포나루는 선박을 통해 조선팔도의 물산이 유통되는 장소였다. 이는 그가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상무역을 통한 국부 실현과 민생안정의 계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후일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 외편 〈통강남절강상박의〉에서 선박을 통해 중국을 비롯하여 해외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함으로써 국력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자고 주장하면서 이지함의 선견지명을 찬탄했다.

‘토정은 일찍이 다른 나라의 상선 몇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했으니, 그 뛰어난 소견은 진실로 미칠 수가 없다.’

기행 속에서도 예도를 지키다

이지함은 당대에 뛰어난 풍수가나 예언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기이한 행적과 예언은 야담에 무수히 전해질 뿐만 아니라 정통 사서에도 실려 있다. 이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남사고나 정렴의 그것이 나중에 혹세무민의 너울을 뒤집어쓴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는 그가 명가의 후예로서 정통 유학자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 오가는 소나 말이 부딪혀서 동서로 옮겨 다니다가 5, 6일 후에야 비로소 깼다. 허기가 있으면 솥을 벗어 시냇가에 걸어두고 밥을 지어 먹은 후 씻고 말려 다시 머리에 썼다.’ 《동패락송》

‘십여 일이나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한 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국조인물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에 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이지함은 평소 배를 타고 세상을 떠돌았는데 작은 배의 양쪽 모서리에 표주박을 달고 제주도를 세 차례나 오갔다고 한다. 언젠가 제주 목사가 그를 객관에 유숙하게 하고 어여쁜 기생으로 하여금 유혹하게 했지만 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그처럼 이지함은 기행 속에서도 올곧은 선비로서의 체통을 굳게 지켰다. 젊은 날 여러 수령과 군수들이 그를 숱하게 시험했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포천 현감이 되어 시무책을 건의하다

을사사화로 얼룩진 명종 대를 지나 선조가 등극한 뒤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573년(선조 6년) 탁행지사(卓行之士)를 추천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이지함을 비롯하여 조목·정인홍·최영경·김천일 등 다섯 명의 인사가 발탁되었다. 이들은 참봉이나 생원, 혹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학생 신분이었는데 그 중 조목을 제외한 네 명이 문과 급제자에 준하는 6품직을 제수 받았다.


당시 56세였던 이지함은 포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명망이나 나이에 걸맞지 않는 대접이었지만 자신의 포부를 실제로 펴보고 싶었던 그는 선선히 벼슬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현지에 부임해 보니 고을의 사정이 실로 비참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몸이 초췌하고 고혈이 다했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죽을 형국’이었다.


이지함은 관내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녹봉까지 털었고, 양반들에게는 재물도 글 못지않게 중요하다면서 경제활동을 재촉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유민들이 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큰 집을 지어 그들을 수용했고, 사농공상 중 하나를 생업으로 정하게 하여 직접 일을 가르쳤다. 그 중에 능력이 떨어지는 자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삼게 하고 친히 일을 감독하여 하루 10짝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했다.


그렇듯 사람들마다 각자의 자질에 따라 자립할 수 있는 일거리를 만들어주었지만 정치적인 단안 없이 한 사람의 지혜와 의욕만으로 도탄에 빠진 현실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조정에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라는 상소를 올려 현재 비어있는 전라도의 어촌과 황해도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현에서 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전라도 만경현에 버려져 있는 양초주와 황해도 초도정을 포천에 비지(飛地)로 소속시켜 주면, 고기 잡는 일과 소금 굽는 일을 일으켜 수년 내 수천 석 곡식을 얻어 백성 구제에 힘쓸 것입니다.’

‘덕은 본(本)이고 재물은 말(末)이지만, 본말이 상호 보완하고 견제해야 사람의 도리가 궁해지지 않습니다. 재물 생산에도 본말이 있으니, 농사가 본이고 염철은 말입니다. 포천의 실정은 본이 이미 부족하니 말을 취해 보충해야 합니다.’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에 지원자를 모집해 그 이익을 백성과 나누면, 국가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력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만 사람의 삶을 건질 수 있으며, 현은 백 년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팔도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던 그만이 꺼내 보일 수 있는 카드였다. 여기에는 일시적인 대안이 아니라 농업 외에 다양한 산업을 통해 생업의 다각화를 꾀함으로써 항구적인 민생의 안정을 꾀하자는 그의 경제관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건의를 묵살하자 그는 1574년(선조 7년) 8월 망설임 없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산 현감으로 민생을 돌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578년(선조 11년) 조정에서는 이지함을 얼마 전 병을 핑계로 사직한 아산 현감 윤춘수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한데 그해 5월 5일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이지함과 김천일을 외직에 임명한 이조의 처사가 잘못되었으니 시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임하(林下)의 어진 사람을 버려둔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부직(付職)시킬 뜻이 없다가 공의(公議)가 시끄럽자 그제야 비로소 제배했으니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학행으로 부름을 받은 신하를 즉시 외관에 보직했으므로 사림들이 실망하고 있으니 이조의 당상과 색낭청을 추고하소서. 아산 현감 이지함과 임실 현감 김천일을 체직하여 상당한 직에 제수하소서.”

이지함과 김천일 두 사람을 학문의 깊이나 명성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외직에 임명한 것은 부당하니 내직에 임명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인데 그게 아니라면 어디에 쓰겠느냐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현지에 부임한 이지함은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과 노약자 구호에 나서는 한편, 평소 구상했던 시무책을 담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렸다. 그 내용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알면서 군역에 넣는 그릇된 실태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에 선조는 그의 뜻이 옳다고 답했을 뿐 정사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578년(선조 11년) 7월 1일 이지함은 이질에 걸려 신음하다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아산의 백성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거리를 가로막고 울부짖으며 앞다투어 고기와 술로 제사를 올렸다.

임진왜란을 예견하다

《영조실록》 1754년(영조 30년) 11월 27일 기사에서 사간 이민곤은 이지함이 죽기 전에 임진왜란을 예견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이지함이 초상을 당한 조헌을 조문하기 위해 인천에 갔는데, 그날 밤 혜성이 하늘에 뻗치자 조헌이 조짐을 물었다. 그러자 이지함은 이렇게 대답했다.

“혜성은 길면서 더딘 것과 짧고도 빠른 것이 있는데, 이것은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 당해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더욱 옛 글을 읽어서 국가에 보답하라.”

《토정유고》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 ‘15년 뒤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함이 있을 것이다.’라 하여 장래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과연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그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며 놀라워했다.


《동패락송》에는 또 그가 조헌에게 ‘나는 아산에서 죽을 것이고 자네는 금산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자신은 아산 현감으로 재직 중 죽음을 맞이했고, 조헌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승장 영규와 함께 금산에서 적과 맞아 싸우다 순사했다. 그때 이지함의 서자인 이산겸이 의병장으로서 조헌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왜군과 맞서 싸웠고, 조카 이산보는 무군사 당상으로 1년여 동안 군량을 운송하고 기민을 진휼하다가 지친 나머지 병사했다.

《토정비결》로 세상에 기억되다

《토정비결》은 19세기 말부터 급격하게 유행의 물결을 탔던 비결서이다. 순조 대의 학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당시 정초에 한 해의 신수를 보는 방법은 《토정비결》이 아니라 윷가락 같은 나무조각을 사용하는 오행점(五行占)이었다. 그러므로 《토정비결》은 순조 이후부터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이 인기를 얻은 것은 이전에 점술서로 쓰인 《주역》보다 점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주역》은 개인의 사주에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모두 포함하지만 《토정비결》은 시(時)를 제외하고 연월일(年月日)을 괘에 맞추어 숫자로 분류한다.

총 144개로 이루어진 《토정비결》의 점괘는 ‘북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구설수가 있으니 입을 조심하라.’, ‘봄바람에 얼음이 녹으니 봄을 만난 나무로다.’처럼 개인의 길흉화복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점괘의 대부분이 길조를 담고 있고 나머지도 흉조이지만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독려한다.

최근 학자들은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 민간에서 전해져온 책자에 예전부터 친숙했던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세도정권의 전횡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던 당대에 궁핍한 삶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던 백성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던 토정 이지함이 희망을 주는 비결서의 저자로 낙점되었던 것이다.


참고

  • 《실용서로 읽는 조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이태복, 동녘출판사, 2011
  • 《조선평전》, 신병주, 글항아리, 2011
  •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18세기 조선 경제학자들의 부국론》, 한정주, 다산초당, 2010
  • 《이지함 평전》, 신병주, 글항아리, 2008

집필자

이상각 | 직업시인, 작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대한민국항공회 항공역사서 저자 겸 항공역사서 편찬 자문위원. 오랫동안 동서고금의 고전을 재해석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교양서 집필에 몰두해 왔다. 최근에는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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