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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지 벼슬까지 했으나 반란에 참여했다가 능지처참 당한 인물] 박필몽[朴弼夢]

Bawoo 2016. 3. 27. 21:55

 

박필몽[朴弼夢]

1668(현종 9)∼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양경. 아버지는 태진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이 승리하자 지평에서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왕세제(王世弟: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함으로써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소론이 재집권하자 다시 지평이 되었다. 그 뒤 헌납·부제학·승지·대사성·이조참의·참찬을 지냈다. 1724년(영조 즉위)도승지가 되었으나, 실록청에 사사로이 출입한다는 사헌부의 탄핵과 노론의 공격을 받아 갑산으로 귀양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유배지에서 빠져나와 반란파인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의 군대에 몰래 들어가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에 숨었다. 이어 검모포로 가서 잔여세력과 합세하여 다시 거병을 시도하려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능지처참당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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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 다른 시각]

 

박필몽 가슴에 작은 섬 하나
[정재철의 부안사람들]박필몽 우반동 김수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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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시대(1694~1776)는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각종 역모 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조 4년(1728년)의 무신란, 영조 6년(1730년)의 나홍언의 반역사건, 영조 9년(1733)의 남원 괘서사건, 영조 31년(1755)의 나주괘서사건 등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잇따랐다. 이것은 영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정치세력이 적지 않았음을 말한다.

영조와 그 시대

영조는 숙종의 차남이며 숙빈 최씨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재기가 뛰어나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6살에 연잉군에 책봉되고 아들이 없던 경종(장희빈의 아들)은 동생 영잉군을 후계자로 삼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이 때 왕세제 책봉은 노론 4대신(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이이명)이 추진했는데, 소론에서는 시기 상조론을 펴며 반대하였다. 경종이 몸이 좋지 않아 왕세제였던 영잉군(영조)에게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대리청정을 시켰다. 김일경 등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했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명을 처형하고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죄를 묻는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형 경종이 갑자기 죽자 영조는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영조는 어지러운 당쟁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정치를 안정시키고 조선후기의 중흥기를 열었다.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생 자신의 출신에 콤플렉스를 느꼈으나 조선의 국왕 중 가장 긴 기간을 왕위에 있었으며 역대 어느 임금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시의 상황을 더 들여다보면 영조가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조가 권력을 탈취하려고 이복형(경종)[정재철의 부안사람들]박필몽 우반동 김수종을 만나다을 독살했다는 주장으로 발전시켰으며, 영조의 생모가 시골 출신의 일개 무수리라는 사실을 은근히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시골 양반이 되기에도 적절치 못한 천박하고 사악한 인간이 일국의 옥좌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하였다. 

줄포만을 건너는 박필몽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상소로 이제는 김일경이 사형되었고 김일경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었던 박필몽, 이진유, 이명의, 정해, 윤성시, 서종하 등은 남도에 유배되었다.

뒤이어 영조 4년 (1728년)에는 소론 강경파를 중심하여 이인좌의 난(무신란)이 일어났다. 이인좌는 영조 4년 3월 15일에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패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정부에서는 무신란에 내응한 괴수가 10명이었고 협박에 의하여 따라붙은 자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괴수 10명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박필몽 (朴弼夢, 1668~1728)은 소론의 강경파로서 부제학 ·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줄포만 건너편 무장현에서 귀양살이하다가 이인좌의 난을 맞아 군사를 거느리고 유배지를 떠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당한 인물이다.

박필몽이 귀양살이 하던 전라도 무장현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부안과 맞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박필몽은 경종이 독살됐다는 점과 영조가 여기에 깊게 관여되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은 영조와 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노론 세력을 쫓아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눈앞이 캄캄하고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기만 했다.

박필몽은 육촌 동생 태인현감 박필현으로 부터 부안 사람들을 소개받았고 이들이 무력 투쟁이 일어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언질도 받은 상태였다. 부안에 건너가서 줄포만 근방에 살고 있다는 김수종이나 변산도적을 만나서 실상도 확인하고 구체적인 상의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 한달음이면 갈 수 있는 부안이지만 귀양살이에서 배소를 떠난다는 것은 임금의 뜻을 어기는 불충으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날 밤 목숨을 걸고 줄포만을 몰래 건너 우반동에 살고 있는 부안 사람 김수종과의 만남은 천군만마를 얻는 성과였다. 부안 사람들의 분위기와 변산도적들이 상당한 세력임을 파악하고 이들과 함께 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든든한 후원세력인 무장현감 김몽좌는 이노(吏奴) 23명을 내주어 각각 칼을 들게 하여 고마청의 말 14필을 준비하여 박필몽에게 보냈다.

박필몽은 주변 사람들에게 도승지로 임명되었다고 거짓 주장하면서 교자를 타고 배소인 무장을 당당하게 떠났다. 태인현감 박필현은 박필몽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서울로 가고자 약속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날자가 틀어지면서 기다리던 박필현은 전주로 떠난 뒤였다. 태인에 가까이 갔을 때 들리는 소식은 박필현이 전주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군사를 해산시켰다는 말이었다.
  
작은 섬 하나

 

 


 


박필몽은 태인에서 군사를 돌이켜 황토현을 지나는 고부 길을 따라 되짚어 오다가 흥덕현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배를 구해 줄포만으로 들어갔다. 줄포만에는 죽도라는 이름으로 내죽과 외죽의 두 섬이 있는데 박필몽이 택한 곳은 곰소 앞 바다의 내죽도였다. 곰소에서 돛배를 띄우면 한 대수면 닿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줄포만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위도를 비롯한 큰 섬과 고군산군도에는 몇 십 개의 섬이 이들의 몸을 숨기기에 충분한데도 죽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필몽이 관계하는 세력은 변산 뿐만 아니라 줄포만을 포함한 칠산바다 정도는 장악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이들의 계획이 무산될 것을 알아서인지 죽도에 숨은 박필몽을 위해서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펴지 않았다. 전세가 역전된 상황에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이 일에 누가 목숨 걸고 나서겠는가. 이 문제는 개인의 용맹함이나 의리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이 망하느냐 마느냐,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죽도는 왕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서해 바다의 작은 해방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서해 바다 어디에도 박필몽을 안전하게 지켜줄 해방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최후
  
  임금이 인정문에 나가서 박필몽을 친히 국문하였으나 박필몽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신문하라고 명하였는데, 박필몽은 더욱 발악하며 공초를 바치려 들지 않았다. 낙형을 행하라 명하였으나 역시 잠잠히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으니(영조 4년 4월 5일)

박필몽은 초기 조사에서 강력하게 반항한 이후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지도, 자신이 인정치 않는 임금 앞에서 구차한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한 지금의 자신만 탓할 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도 않았다. 참담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며 패장의 심정으로 적장이 주는 모욕을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다.

군기시 앞에서 백관이 차례로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죽여 고통을 배가시킨다는 능지처사로 사지가 잘리는 죽음을 맞을 뿐이었다. 그의 시신은 제대로 묻히지도 못했다. “목을 베어 엿새 동안 높은 곳에 매어 달고 수급(首級)을 소금에 담가 도순무영(都巡撫營)으로 보내어 진중(陣中)에 효시(梟示)하고 지체는 8도에 전하여 보이라.”하였다. 재산은 몰수되고 가족까지도 노비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무신란이 마무리된 후에도, 박필몽의 이름은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고위 관직에 몸담고 있다가 모반 사건에 군사까지 거느리고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정부로서도 크나큰 부담이었다. 왕조를 떠받들어 종묘와 사직을 지켜야 할 고위 관료가 군사까지 거느리고 무력으로 대항했다는 것은 왕조의 정통성에도 상처를 준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는 것이 국가의 녹을 먹는 관료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자세이다. 그러나 임금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왕조 사회의 현실이었다. 신하들의 다툼은 오로지 왕만이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쟁조차도 왕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임금이 죄가 있으면 물어야 한다는 박필몽의 이룰 수 없는 꿈은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유배지를 떠나 줄포만을 건널 때의 그의 목숨을 건 결단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줄포만의 작은 섬인 죽도에서 관군에 사로잡혀 가면서 원혼처럼 섬 주변을 떠돈다.

글 쓴이:정재철- 백산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출처: 정보- 책두 얼굴의 조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