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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시절 청렴한 목민관]유석증[兪昔曾 ]

Bawoo 2016. 3. 12. 22:12

유석증[兪昔曾]

 

1570(선조 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이성(而省), 호는 독송(獨松). 유관(兪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호(兪灝)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유대록(兪大錄)이며, 어머니는 김수원(金秀源)의 딸이며, 처부는 이반(李泮)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정랑·예조정랑·지평·형조참의를 거쳐 나주목사·전라감사 등을 지냈다.

유석증은 특히 나주목사로 2회에 걸쳐 부임했으며 선정관(善政官)으로 명성이 높았다. 첫 번째는 1610(광해군 2) 8월부터 10월까지 재직하였다(모친상을 당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함). 두 번째 나주목사는 1619년(광해군 11)에 부임했는데 유석증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관할 백성들이 국가에 곡식을 바치면서 나주목사 임기 연장을 거듭 요청하자 그 임기가 1622년(광해군 14)까지 연장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1623년(인조 1) 호남 관향사(館餉使)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사망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10년과 1619년. 그가 두 번씩이나 나주목사로 부임한 사연이 감동적이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백성들은 유석증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도 “다시 내려보내 달라”는 간절한 상소와 함께 십시일반 모은 쌀 300석을 바쳤다. 그만큼 선정을 베푸는 청렴한 목민관으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그가 두 번째로 부임하자 고을 사람들은 이번엔 유임을 위해 쌀 2000석을 모아 바쳤다. [동아일보에서 발췌]

 

목사 유석증 방 목사 유석증 방 사진

고려 성종 때부터 조선 말까지 부임한 나주옥사 가운데 두 번이나 목사를 지낸 인물로 유영한 유석증 목사를 기념하여 이름 하게 되었으며, 유석중 방은 큰방과 작은 방, 가운데 작은 거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유석증은 1610년(광해군 2) 8월 나주목사로 부임했으나 두 달 만인 10월에 이임되었습니다. 그 후 9년 뒤인 1619년(광해군 11) 6월 유석증은 다시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광해군일기 12년 5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나주백성이 쌀 삼백 석을 바쳐 유석증을 목사에 제수한 은혜에 사례하였습니다."
유석증이 전에 나주를 다스릴 때 유애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는 상소를 올려 목사로 삼아주도록 청하였고, 왕명으로 다시 부임해오자 고을 백성이 쌀을 바쳐 사례한 것입니다.
1621년과 1622년에는 나주사람 염공일, 진사 김종해 등이 쌀을 바치며 또다시 유석증의 유임을 청하였다고 하니 그를 향한 나주백성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moksanaea.naju.go.kr/index.php?cate=002001001&menu=2&sub=1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