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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조준(趙浚)

Bawoo 2016. 3. 27. 20:06

 

조준(趙浚, 1346년1405년)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사헌장령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82년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인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징벌했다.

 

이듬해 밀직제학을 지낸 뒤 도검찰사(都檢察使)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쳐 그 공으로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경사(經史)를 익히고, 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우왕의 폐위를 도모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려 한 그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성을 얻고 그해 7월 최초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했으며 아울러 관제·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曺敏修)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공양왕 2)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 일파의 탄핵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해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그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책봉·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자연히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로 있으면서 한때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의 재편을 통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녹과전(祿科田)·구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公廨田) 등의 제전(諸田)을 분급하여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토지개혁론). 또한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했다.

 

그는 요순 이래의 하·은·주 3대를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즉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또한 〈주례 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즉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다만 적합한 재상을 얻어 그와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또 주자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학교교육, 사회윤리의 보급에 주력했다. 우선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고 국가의 치난(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관련되는 곳이므로 근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을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학교교육에 힘쓰도록 했다. 이때 교수관의 임무는 고려 초기 이래의 사장(詞章)이 아닌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경서를 읽도록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품 이하의 관원을 모아 시험을 보게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제교(製敎)를 관장하게 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좌천시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또한 〈주자가례 朱子家禮〉의 보급을 통한 유교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지내도록 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를 뽑아 조세를 감면하고 정표(旌表)를 세워 사회 교화를 이루도록 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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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 : 정도전과 대립하고 이방원을 후원하다]

 

"정도전, 죽여야겠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이 창백한 얼굴로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른바 '킬방원'의 각성! 왕자의 난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스승 정도전과 세자 방석, 그리고 함께 조선을 세운 옛 동지들이 그의 칼에 쓰러졌다.

또 임금이 된 다음에는 아내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황천길로 보내버린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죄가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어찌 보면 시대가 그들을 죽음으로 떠민 것이다. '킬방원'은 바로 그 시대의 화신이었다.

이방원이 악역을 자처한 것은 개인적인 권력욕때문만이 아니었다. 왕조 창업 초기에 권력이 누군가에게 쏠리거나 사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나라를 흔드는 일이었다.

이방원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권력지도를 바로잡았고 끝내 새 나라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문제는 그이의 손에 묻은 피였다. 이 피가 정당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끌고가기가 어렵다. '킬방원'의 업보를 풀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일을 해준 인물이 조준이었다.

조준은 조선의 건국에 크게 기여한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근래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그의 공이 묻혀 있었는데 알고 보면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조준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잡자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단숨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권문세족이 토지를 사사로이 겸병(兼幷 : 중복해서 빼앗는 것)하는 폐단을 지적하고 나라의 땅을 백성과 관헌에게 골고루 배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전(私田)이 주(州)와 군(郡)을 삼키고, 산과 내를 경계로 삼는 지경입니다.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되고, 1년에 조세를 받는 회수가 팔구 차에 이릅니다.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또 (국고가 비어) 왜놈들이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조준의 개혁안은 난맥상의 핵심을 찌르면서 역성혁명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교감하며 새 나라의 틀을 짰다면, 조준은 민심을 모으는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조선 건국과 함께 일등공신 반열에 올라섰다. '평양백'의 봉작을 받고 정승이 되었다.

그러나 '봉화백' 정도전이 전권을 틀어쥐자 조준은 입장을 달리 했다. 방석의 세자책봉에 반대하고 이방원을 편들고 나섰다.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비판하며 정도전의 대척점에 섰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조준은 대소신료들을 이끌고 거사가 불가피했다는 공론을 모아냈다. 사실 당시 조정에는 정도전의 독주를 마뜩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이러한 정서를 파고들며 공감을 얻어내고 정변을 수습했다.

왕자의 난이 조기에 기정사실화되자 이성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준의 노력은 자칫 패륜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이방원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킬방원'의 업보를 풀고 새 나라를 궤도에 올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이방원은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1400년 정종이 재위할 때 조준이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다. 그가 이거이를 찾아가 사병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유했다는 혐의다. 마침 이방원이 사병혁파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을 무렵이라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무고라고 일축하고 기꺼이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둘째딸 경정공주를 조준의 아들 대림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조준은 임금이 된 이방원을 받들며 영의정을 지내다가 1405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후 부마 조대림이 목인해의 역모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태종은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에도 불구하고 조준의 아들에게 살 길을 열어줬다.

역모의 기미만 보여도 일단 죽이고 봤던 그이의 성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조치였다. 태종은 '킬방원'의 굴레를 벗겨준,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에게 사후에도 의리를 지켰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