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립(金炳淵)과 여성
金明姬 (江南大學校 國文學科 敎授)
1. 들어가는 말
김립은 조선조 봉건체재가 무너져 가는 19세기를 살다간 시인으로 조선조 마지막 한시 작가로 평가 받는다. 그는 조선조 사회에 안주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빈한한 백성의 대변자가 되기도 하고 조선 사회의 양반과 승려를 풍자하기도 하며 민요조로 혹은 한시를 내용과 형식의 파괴로 국문시가와 구전문학과 민속학을 이어 준 국민 문학의 사실적 전통을 확인시켜 주었다.1)고 한다.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립에 대한 논문은 생각보다 많았고 시집도 잘 정리되어 있다.
김립에 대한 자료는 《해동시선, 大東詩選1917, 大東奇聞1926, 緣此集1932, 해장집》 등에 산재해 있으며 북한 문학자 이응수2)는 구전되어 내려온 시들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 정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역적의 후예라는 남다른 생애를 살았던 김삿갓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부터 크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고 한다.3) 김립 시집을 펴낸 이응수의 공로가 그 첫 번째요, 이응수의 채록 수집 정리를 바탕으로 1930년대 문사들이 너도 나도 단편적으로 발표한 바4) 있고 그 후 일화와 노래 등을 거쳐 일반인에게 알려 지면서 민심을 위로한 기간이 2기5)라 보고 3기는 김립에 대한 재평가 기간이라 하겠다. 70년대 이후는 본격적으로 김삿갓 전기와 시화가 활발하게 다루어진 시기6)라 하겠다.
학계에서도 윤은근7), 정응수8), 박혜숙9)의 석사논문이 나오고 정대구의 박사학위 논문10)이 나오면서 김립에 대한 평가는 제 위치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리처드 럿트11),임형택12) 등의 논문과 북한(김일성대학편저 조선문학사)과 연변(박충록, 조선문학간사)에서도 김립에 대한 연구는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위의 논의는 대부분 김립의 생애와 전기, 방랑과 풍자, 해학과 유머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 조명을 하고 있다.
김립은 스스로 작품집을 남긴 바 없는 유랑문인이다. 따라서 그의 시들이 전국에 흩어지고 민요처럼 불리다 보니 위작도 많고 진위여부가 뚜렷하지 않은 점도 인지를 해야 한다.
김삿갓 방랑지도가 만들어질 정도로 표박한 시인이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실로 조선의 문학 지도를 만들어낸 시인이라 하겠다. 김립의 엮은 시집 가운데 텍스트와 번역은 이응수의 시집으로 하고 기타의 시집은 보조 자료로 이용하고자 한다. 한시의 번역은 펴낸 사람의 번역을 그대로 援用하였다.
대부분 민중생활시를 써온 김립이 여성을 제재로 한 시가 다수 있어 이 여성시를 통해 김립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평민 여성들의 생활상과 조선 시대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1) 김태준, 「김삿갓 김병연론」, 『조선후기 한시 작가론』, 이회, 1998, 590면
2) 李應洙는 김삿갓을 세계 시단의 3대 혁명아로 평한바 있다. 이응수는 1939년 2월 하순에 초판을 냄.
3) 정대구, 「김삿갓론」, 『한국문학작가론』, 현대문학사, 1991, 871면
4) 김재철, 김태준, 김동인, 김명식, 박재청, 성일, 차상찬 등이 신문 잡지에 단편적으로 기고함.
5) 6.25, 4.19, 5.16 등을 거치는 시기에 해당함.
6) 김용섭, 김용철, 김용재, 김인걸 등이 전기를 썼고, 박오양, 김일호, 박용구 등이 시집 간행. 80년대에는 신경림, 황헌식, 정공채, 정비석 등에 의해 출간.
7) 윤은근, 「金笠 硏究」,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9.
8) 정응수, 「김삿갓 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9) 박혜숙, 「김삿갓 시 연구 - 金笠 詩集(1941)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10) 정대구, 「김삿갓 시 연구」, 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11) 리처드 럿트, 「Kim sakkat, the Popular Humorist」, 『Humour in Korean Literature』, 국제문화재단, 1970.
12) 임형택, 「이조말 지식인의 분화와 문학의 희작화 경향」,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 비평사, 1985.
2. 金笠 시에 나타난 여성의 정체성 : 부정적 여성관
김립은 인간 군상에 대해 날카롭게 간파하고 그 인간상에 대해 시를 써서 풍자하므로써 그 당시 사회상을 대변했다고 본다. 김립의 시집에는 그래서 인간들에 대한 시가 많다. 조선조 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訓長, 조선조 사회의 특별한 부류였던 기생, 소외되고 가난한 과부, 힘없는 노인 등이 주 대상인물이다.
또한, 김립의 시에는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비쳐지는 여성들이 꽤 있다. 이 논고에서는 그중에서도 김립이 유랑하며 서민들 가까이에서 본 여성의 모습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조선시대는 처첩의 시대였다. 양반들은 물론이고 서민들 까지도 첩을 두고자 했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여성들 몫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묘사한 시가 있다. 남편을 사이에 두고 처첩이 함께 누워 자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가련한 삶(不熱不寒二月天 一妻一妾最甚憐)이라 일갈했고 다음이 게으른 부녀자의 모습과 색정을 드러내는 과부, 기생에 이르기까지 그가 읊은 여성 인물은 실로 다양하다. 이런 제재의 선택은 보수 성격이 짙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일말의 파격이다.
우선, <妻妾>에서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월 달에
아내와 소실이 견디는 꼴이 가련하다
원앙금침엔 머리 셋이 나란히 있고
비취 이불 속에는 여섯 팔이 나란하구나
함께 웃을 때 어우러진 입의 모습은 마치 품(品)자와 같고
몸 뒤집어 누운 옆모습은 천(川)자와 같구나
동쪽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서쪽으로 돌아눕고
또 다시 동쪽을 향해 옥 같은 손목을 쓰다듬네
不熱不寒二月天
一妻一妾最堪憐
鴛鴦枕上三頭竝
翡翠衾中六臂連
開口笑時渾似品
翻身臥處燮成川
東邊未了西邊事
更向東邊打玉拳
-처와 첩-
아내와 첩이 가운데 남편을 두고 함께 누워 자며 성애를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13)
조선시대 첩을 얻는 제도는 보편화된 관행이었다. 조선조 남성들은 나이가 들면 으레 첩을 얻으려 했거나, 남성들의 잦은 거주 이동(유배, 관직 이동, 수학 등)의 이유를 들어 첩을 얻기도 했으며, 부인의 병이 있어 집안일을 하지 못할 때에는 첩으로 부인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였다.
마지막 이유로는 자식을 얻기 위해, 또는 여색을 탐하여 첩을 얻으니 양반, 서민 가릴 것 없이 모두 처첩 제도 하에서 살았다고 본다. 위에 시는 서민의 생활 모습 같은데 셋이 함께 자면서 어우러져 웃는 모습을 한자어 ‘品’자로 세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남편이 가운데서 몸을 뒤집는 형상은 한자 ‘川’자로써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나오는 처와 첩은 모두 여성으로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 같지 않은 군상에 들어가는 부정적 여성이다. 오죽하면 처와 첩이 나란히 자야 할 형편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웃는 ‘品’자를 썼다는 것은 처와 첩이 일상생활처럼 한 방에 기거하였다는 증좌도 된다.
13) 정비석 소설 『김삿갓 2권』 1991 21판 고려원 254-255. 정비석의 소설에서는 이항복이 임진왜란 때의 일로 奇自獻 대감을 찾아가 큰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를 한 방에 데리고 자는 것을 보고 〈妻妾同房〉이라는 제목으로 썼다고 한다.
다음에 시도 같은 군상인데 나태한 아낙의 표상이다.
병 없고 근심 없는 게으른 아낙네가 세수 목욕하는 일 없고
십년을 하루같이 시집올 때 옷을 입으며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고 낮잠을 자며
이를 잡노라 해 비치는 처마 밑만 찾아 간다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부엌 그릇을 깨고
벽의 베틀을 보고 머리만 긁다가
이웃집에서 제사 지낸다는 소문만 들으면
문 대문 다 열어 던지고 달려가기가 날아가는 것 같다.
無病無憂洗浴稀
十年猶着嫁時衣
乳連褓兒謀年睡
手拾裙虱愛簷暉
動身便碎廚中器
搔首愁看壁上機
忽聞隣家神養慰
柴門半掩走如飛
- 懶婦 其一 -
게으른 아낙네가 밤에 풀잎을 뜯어다가
죽 한 그릇을 쒀가지고
부엌에서 가만히 먹는 소리가
천연 산새 날아가는 후루룩 소리다.
懶婦夜摘葉
纔成粥一器
廚間暗食聲
山鳥善形客
- 懶婦 其二 -
일은 쌓여 산더미 같은데 마음은 늘 풀어져 있어
규중에 일월이 흘러 지나도 도무지 무관심하다
새벽에 늦게 일어나면서도 겨울밤이 짧다고 투덜대며
옷은 엷게 입고서 여름 바람이 차다고 한다
베를 짜라면 저녁때가 다 되어도 한 자를 미처 못 채우고
식사를 마치고도 밥상은 이윽해서야 치운다.
그러다 때때로 남편이 꾸지람이라도 하면
공연히 우는 아이나 더 때리며 종알댄다.
事積如山意自寬
閨中日月過無關
曉困常云多夜短
衣薄還道夏風寒
織將至暮難盈尺
食每過朝始洗盤
時時逢被家君怒
漫打啼兒語萬端14)
- 惰婦-
김립은 게으른 아낙네를 제재로 한 시가 유독 많다. 위의 시들은 전형적인 게으른 아낙의 행태다. 정비석의 소설에서는 이 여인의 행태를 ‘옥수수 알을 통째로 지은 밥을 먹이는 아낙으로, 그릇을 와장창 깨는 여인으로, 굿을 하는 일이 생기면 굿 구경 하느라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낙’으로 표상되었다.15)
위의 시 <나부>, <타부>에서 아낙의 게으른 행태는 목욕 안하고, 옷 안 갈아입고, 낮잠만 자고, 속옷에서 이만 잡고, 옷감도 짤 줄 모르고, 남의 집 제사 음식 얻어먹으러 다니고, 나물 죽 한 그릇만 몰래 쒀서 밤중에 몰래 먹고, 밥상도 안치우고, 참다 못한 남편이 그런 행태에 대해 지적하면 아이를 때려 울리는 못된 여성이며 아내며 어미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조 여성의 생활은 실로 고달팠다. 아이 기르기, 길쌈하기, 봉제사, 손님접대, 시부모 봉양, 남편 봉양, 농사일, 바느질 등 엄청난 노동을 해야만 대가족을 먹고 입힐 수 있었다.16)
고단한 시집살이요가 대부분인 민요에서 보듯 우선 국가적으로는 길쌈 장려를 하고, 절구 방아 같은 노동을 해야만 식솔이 먹고 살 수 있었던 시대에 <懶婦> <타부>라는 시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또한, ‘시집살이가 당초 꽃보다 매워 행주치마 눈물 젖어 하루하루 보내며 얼굴에 노랑꽃이 피어 시집살이 정 무섭네.’17)와는 전혀 다른 생활, 마치 기녀들의 삶처럼 너무 한가하다 못해 눈썹이나 그리고 낮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시와 같은 게으른 여인의 모습이어서 자못 의외다. 아래 두 기녀 시와 흡사한 ‘遲日’의 이미지도 있다.
14) 신경림, 앞의 책, 42면
15) 정비석 「김삿갓」고려원, 1991, 21판 발행, 237-8면
약속해놓고 왜 늦는가
뜰에 매화 지려는데
갑자기 가지 위 까치소리 듣고
거울 보며 헛되이 눈썹 그리네
有約朗何晩
庭梅欲謝時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 옥봉 閨情 -
복사꽃 핀 지붕에서 닭이 울고
말은 버드나무 문 앞에서 우네
나에게 봄 술 권하는 이 없어
봄에 책 던지고 낮잠 자네
鷄唱桃花屋上
馬嘶楊柳門前
無人勸我春酒
遲日抛書午眠
- 운초 午眠 -
그러나 김립에 시는 아무 병이 없는 건강한 아낙이 십년을 하루같이 목욕도 안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다는 다소 ‘과장된 언술’이다. 그래도 아이 젖은 물리고 더러운 옷에서 이를 집고 풀죽을 쑤어 먹으며 연명을 하다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다고 하면 날아가듯 달려가 얻어먹는 젊은 아낙의 비행을 매우 익살스럽게 표출했다.
여성들의 손재주가 대가족을 이끌었던 시절에 부엌 그릇을 깨고, 베틀을 보고 머리를 긁기만 하며 베를 짜지 못하는 살림 못하는 전형적인 아낙을 김립은 사람 같지 않은 매우 부정적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장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절에 건강한 젊은 아낙이 기녀 옥봉과 운초의 삶처럼 무료하게 일상을 보내는 나태한 모습이다. 이처럼 김립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심하게 평민들의 삶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남성들의 여성관이 부지런하고, 깨끗한 용모에, 음식 솜씨 좋고, 아이 잘 기르는 아낙인데 반해 위의 시에 나타난 여성은 전혀 다른 여성관 곧, 게으르고 더럽고 재주 없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이나마 ‘햇살비치는 처마 밑만 찾아 간다/ 머리만 긁다가/ 달려가기가 날아가는 것 같다/ 죽 먹는 소리가 산새 날아가는 후루룩 소리다/라고 한 표현은 직유, 은유를 써가며 매우 유쾌하면서도 익살스럽게 표현
하여 적나라하기는 하나 비속하지 않다.
16) 김명희 외, 『문학으로 읽는 옛 여성들의 삶』, 이회, 2005, 224-226면.
17) 임동권, 『한국민요전집』, 집문당, 1974, 목포, 달성, 울릉도 지방의 민요.
그런가하면 잠꾸러기 여인〈多睡婦>에서도 여인은 매우 부정적인 여인상이다.
이웃에 사는 어리석은 아낙 바야흐로 잠에 녹아 있다.
누에치는 일도 잊고 있으니 하물며 농사일이야
四隣愚婦睡方濃
不識蠶工況也農
베틀은 한가로와 베 한자를 사흘 걸러 짜고
절굿공이도 게을러 반나절에 양식 한 되 찧는다
機閑尺布三朝織
杵倦升粮半日舂
아우의 옷도 가을이 다하매 입으로만 다듬질한다 핑계대고
시어머니 버선도 겨울이 다 지나 매양 말로만 깁고 있다.
弟衣秋盡獨稱搗
姑襪冬過每語縫
헝클어진 머리에 땟국낀 얼굴은 귀신같은 꼴이로다
한평생 함께 살 식구들 한을 만난 것뿐일세
蓬髮垢面形如鬼
偕老家中却恨逢18)
게으른 여인에 대한 김립에 시선은 매우 곱지 않다. 조선조 여인들의 생활은 ‘나는 없고 시댁식구들에 대한 봉양과 식구들의 일상을 책임져야 하는 임무만 있다’고 하는데 이 여인은 잠에 빠져 누에도 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베도 짜지 않고 절구도 찧지 않는 여인이다. 뿐 아니라, 버선도 깁지 않고 있으니 시댁 식구들의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태산이다.
게으른 며느리로 인해 시댁 식구들은 의식주 해결을 할 수 없는 것이 시댁식구들에게는 바로 ‘恨에 봉착’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표출이다. 조선조 아낙들의 삶의 무게가 이렇듯 무거울 때 그 가운데서도 게으른 여인들이 가끔 있어 서민들의 생활고는 한층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 본 방랑객 김립은 간과하지 않고 따끔하게 여성들의 의무와 책임감에 대해 일침을 놓은 것이라고 본다.
18) 정공채, 〈떠돌이 사랑 3〉, 157-158면.
그런가하면 <老翁>에서도 아낙의 자신의 아기 보는 책임마저도 회피한다는 모성부재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누가 오래 사는 게 오복에 든다 말하였나
오래 살면 욕스럽다 말한 요제가 귀신 같이 알았다
옛날 친구는 다 돌아 못 올 손이 되어가고
젊은 사람은 끝없이 새로 생겨나는데
근력은 소모해 항상 앓는 소리요
위장은 허핍하여 미식만 생각하니
젊은 아낙들은 어린애 보는 것을 괴로운 줄 모르고
일없이 논다고 자주 애기를 데리고 온다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筋力衰耗聲似痛
胃膓虛乏味思珍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 老翁 -
아이를 돌보는 늙은이의 입을 통해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고 욕이며 옛날 친구들 모두 떠나고 없을 뿐더러 근력은 나날이 쇠약해지고 위장은 허한데도 젊은 아낙(며느리들)이 늙은이 곧 시아버지에게 (아이 보는 것이 힘든 나이) 자주 아이를 맡기고 있다는 언술을 통해 젊은 아낙들이 자신의 육아 임무마저도 회피한 채 힘없는 늙은이에게 떠맡기고 있어 늙은이 대접을 하지 세태를 풍자하고 있어 이 <노옹> 에서도 김립은 젊은 아낙을 매우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老軀>라는 시에서는 여성성을 상실한 노인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연지랑 분이랑 사시오
동백기름 향유도 있습니다.
늙은 노파는 백발을 빗으며
한 마디 대답은커녕 내다도 안 본다.
臙脂粉等買耶否
冬柏香油亦在斯
老軀當窓梳白髮
更無一語出門遲
- 老軀 -
한 여성 노파를 통해 세월의 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젊은 아낙의 시절에는 화장품 소리만 들어도 솔깃하던 때가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지금은 내다보지도 않는다는 ‘여성성의 상실감’에 대해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풍류객 김립은 세심하게 혹은 날카롭게 여인들의 일상을 파헤치고 있다.
위의 시에서 김립은 게으른 부녀자, 처와 첩이 함께 살아가는 시골 주변의 이야기에 연지분 사라는 행상에 무관심한 노파,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老軀 등의 인물을 통해 밑바닥의 삶을 익살스럽게 표현하였지만 자기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채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성상으로 묘사되고 있어 매우 부정적인 여성상이다. 김립에게 있어 눈에 드는 여인상은 소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김립의 연정시에 나타난 여성 : 욕망의 대상
정공채는 그의 김삿갓 시와 인생19) ‘떠돌이 사랑’ 편에서 김삿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김삿갓은 운명론자이다. 그가 만일 운명론자가 아니었다면 이것이 도리어 역설이 되고 만다. 그만큼 그는 미리 운명이 점 찍힌 숙명의 별 아래 태어났고 끝내는 이 숙명을 받아들고 떠돌이가 되어 一杖 집고 一笠 쓰고 조선 땅을 밟아 나갔다고 했다.20)"
그에게 여자는 스쳐가는 여인일 수도 있고 정을 주고픈 여인도 있었으나 떠돌이 김립에게는 정착된 사랑을 평생 가지지 못한다. 김립의 연정시에 나타난 여성을 통해 그의 애정관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엿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淮陽過次〉에서
산중에 처자 크기가 어른 같은데
분홍빛 짧은 치마 헐렁하게 입었네
맨살 허벅 낭창해라 길손 부끄러워
솔 울타리 깊은 집엔 꽃내음도 물씬하리
山中處子大如孃
緩着粉紅短布裳
赤脚踉蹌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21)
떠도는 길손에게 비쳐진 여인의 속살이 색정을 일으킨다. 한창 젊은 나이 김립이 지나가는 길에 본 여인의 모습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그리운 여인의 냄새인가. 소녀티가 물씬 나는 여인, 짧은 분홍치마, 헐렁하게 치마 속으로 드러난 허벅지 속살, 이 모든 상황에서 떠돌이 김립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 돌리며 꽃내음 물씬 풍기는 회양 땅의 봄을 탓하는 수밖에는 없다. 김립은 이렇듯 팔도를 다니며 여인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립은 노골적인 애정시도 다루고 있다. 김립이 주로 시의 제재로 삼은 여성은 주막집 과부, 기생(매화. 가련) 농촌 부녀자 등 소외계층이거나 서민들이다. 여성의 대상도 주로 서민 여성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인물은 거의 서민이기 때문에 서민들의 정서와 한을 대변했다고 하여 민중 시인이라 일컫는 유랑 지식인이다. 때문에 사대부 문학에 비해 덜 세련되고 품격이 떨어지고 부도덕하다는 평가도 함께 받는 시인이다.
19) 정공채 저, 『오늘은 어찌하랴』, 학원사, 1985, 93-175면.
20) 위의 책, 93면
21) 위의 책, 94-95면
<과부에게 주는 시>에서 연정을 품고 다가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그네 베개가 소조하여 꿈자리가 사납더니
이 밤 시퍼런 칼날이 내 사랑을 비치다.
소나무 대나무는 천고에 푸르르나
삼월달 紅桃야 한 때가 아니런가
옛날 왕소군도 북쪽 땅에 묻히고
천하미인 양귀비도 마외역에서 죽었나니
사람이 본래 목석이 아니어든
오늘 밤 그대여 정을 아끼지 말라
客枕蕭條夢不仁
滿天霜月照吾憐
綠竹靑松千古節
紅桃白李片時春
昭君玉骨胡地土
貴妃花容馬嵬塵
人性本非無情物
莫惜今宵解汝裙
- 과부에게 주는 시 -
김립이 어느 과부의 집에 유숙하다가 밤에 여자 방에 들어갔던바 그녀가 시퍼런 칼을 빼어 들고 거절함에 대한 응답시의 일종이다. 중국의 천하미인 왕소군과 양귀비의 허망한 죽음을 비유로 삼월 아름다운 홍도도 한 때이니 내 청을 거절 말고 함께 운우의 정을 나누자는 권유의 시다.
과부의 정조 지킴이가 엄청났던 시대에 지나가는 과객이 봄밤 춘흥을 이기지 못하고 벌어진 사건이다. 김립은 이 시를 통해 여성이나 남성이나 목석(無情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본능에 충실하지는 권유를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밤중 정사의 성공여부를 떠나 남성 김립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고 김립이 여성에 관한 성적 충동도 남성과 같을 것이니 본능에 충실했으면 하는 권유라 색정의 노출이 드러나기는 하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다.
또한, 김립은 평양 근방의 어느 농촌을 지나다가 한 농촌여자가 논에서 김을 매면서 《시전》22) 한 질을 죽죽 내려 읽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농촌 여성과 酬答을 한다.
시전 한 질을 똑똑히 읽는데
길 가던 나그네 황홀해 섰노라.
밤이 깊어 야삼경 반달이 넘어갈 제
사람이 안 보이는 빈집에 와 못 주실까
葩經一帙誦分明
客駐程驂忽有情
半輪殘月已三更
虛閣夜深人不識
이에 농촌여성은 응답시로 거절의 의사 표시를 한다.
열 눈이 시퍼런 길가에서 만나니
정 있어도 말이 없어 정 없는 것 같으오.
담을 넘고 벽을 뚫어 못 오실 것 없사오나
일찍이 농부에게 시집온 몸이외다.
難掩長程十目明
有情無語似無情
踰墻穿壁非難事
曾與農夫誓不更
농촌 여성은 과객 김립에게 실로 대담하게 벽을 뚫고 못 오실 것은 없으나 그래도 아낙의 도리를 해야 하는 처지임을 일깨워 준다. 본인도 마음은 있으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정분을 나눌 수 없다는 애석함이다. 조선조 여성들은 양반 서민 가릴 것 없이 열녀의식에 사로잡혀 지냈다. 이에 김립은 농촌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다시 보낸다.
앞은 푸르고 뒤는 흰데 그대는 옆으로 게걸음치며
왼손의 봄빛을 오른손에 옮기네
치마는 이 나비와 저 나비와 봄바람에 춤추며
손은 알 까듯이 물위를 점쳐 가다
前靑後白蟹步地
左手春色右手移
裙同蛺蝶隨風舞
手與蜻蜒點水遲
농촌 여성의 모심는 광경을 게걸음에 비유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연정을 표현한 수법이 뛰어나다.
김립은 치마의 팔락거림도 ‘이 나비 저 나비가 앉는 듯’이라는 선정적인 표현법을 썼다. 여성도 자신의 애정을 다른 남자에게 품을 수 있다는 은유여서 시가 야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모두 노출시키는 수법 또한 일품이다. 김립은 이처럼 남성의 욕망적 표출을 시로써 속속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랑의 삶이었지만 性的으로는 결코 고독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결국 이 소문이 농촌여성의 남편 귀에 들어가고 여성은 다음 시를 주고는 자살했다는 悲戀시로 끝을 맺는다.
위엄은 서리 같고 신의는 산 같은데
가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깊디깊은 대동강 물속에 몸을 던져
괴로운 이 신세를 어복에 장합니다.
威如霜雪信如山
去亦有難退亦難
深見大同江水底
是身投處是身閑
조선시대 성 표현은 한 마디로 淫辭라 하여 폄하되었다. 어두운 말이며 음탕한 말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래서 부부애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보편화 된 시대에 은밀히 숨겨온 성애의 시가 기녀가 아닌 평범한 농촌 여성을 상대로 벌어졌다는 것에서 김립시의 평가가 부도덕한 시라고 폄하되었을 것이다. 이런 외설적인 내용을 김립은 스스럼없이 표출하고 있음이 다른 사대부 시들의 근엄함과 차별화가 되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평민 여성 가운데도《시전》을 읊는 해박하고 똑똑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과 비록 병중에 있는 남편이라도 不敬二夫를 해야 한다는 유교 이념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어, 결국은 유교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여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해야 하는 사회풍토를 확인할 수 있다. 김립의 이 <수작> 시는 삼십 이전의 에피소드라고 하는데 결국 김립의 희롱시에 한 농촌 여성만 희생당한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여성들이 정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과부의 수절이 여성의 의무인양 생각하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마당과부 처녀과부까지도 수절해야 하는23) 마당에 병중에 있더라도 남편이 있는 여인은 정절을 지켜야 했던 비인간적인 사회풍토를 노래했다고 본다. 심지어 첩들까지도 수절을 했다니 정부인들이야 수절과 정절 지키기는 목숨과 바꿔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2) 정공채는 〈街上初見〉 시라 하며 시경의 민요, 七月 七篇을 분명하게 낭송하여 길손 놀라 말 매고 머물었던 시라 했다.
23) 박주, 『조선시대의 여성과 유교문화』, 국학자료원, 2008, 26면.
김립의 풍류시에 여인이 빠질 수 없다.
특히 시문을 잘하는 그 당시 기녀들과는 좋은 벗으로 어울렸을 것이다. 기생에게 주는 시〈贈妓>가 단적인 예다.
잡는 손도 뿌리치고 어울리기 힘들더니
되돌아 한자리에 친해졌구려
이 주선 저자거리에 숨은 여인과 사귀니
이 여인 글 잘하는 문인이군 그래
우리 서로 옷고름 풀기 가까웠을 때
그대 모습 달빛에 술잔에 새롭게 어리누나
이제 서로 껴안고 동녘 성곽 달빛 아래서
술 취해 쓰러지듯 봄날 가듯이 통정하누나
却把難同調
還爲一席親
酒仙交市隱
女俠是文人
太半衿期合
成三意態新
相携東郭月
醉倒落梅春24)
김립은 이처럼 떠돌이 사랑이나마 여인들과의 ‘애정행각’을 매우 즐기며 자신의 풍류생활에 점점 耽溺해갔다. 〈설중한매〉25)라는 시에서는 여인들을 매화, 버들 밤꽃 석류로 분류한 시도 있다.
눈 속에 차게 핀 매화 술에 상한 기생 같고
바람 앞에 마른 버들 경을 외는 중 같다.
밤꽃이 져 버리면 삽살개 꼬리 같고
석류꽃 처음 필 땐 쥐 귀 같이 뾰족하다.
雪中寒梅酒傷妓
風前枯柳誦經僧
栗花已落尨尾短
榴花初生鼠耳凸
매화는 술에 상한 기생 초췌한 모습 같고 버들 꽃은 경을 외는 중처럼 건들거리고, 밤꽃은 지고나면 삼살개 꼬리처럼 축 쳐지고, 석류꽃은 가시가 있어 쥐의 귀처럼 뾰족하다, 라는 것이다.
기생의 속성에 대해 기생과의 정사 후의 여인들의 모습이었을까, 매우 적나라한 표현이다. 그런가하면 직접 기생을 찾아 나서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 김립은 자신을 꽃내음 파고드는 미친 나비로 묘사한다.
향기 탐하는 미친 나비 한 밤중에 갔더니
온갖 꽃 짙게 피어도 모두 무정터라
홍련을 캐고자 남포로 가니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만 놀란다.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26)
김립은 한밤중에 기생 홍련을 찾아 나선다. 마치 미친 나비가 되어 온갖 꽃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단지 홍련을 캐러 남포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 보니 동정호의 가을 물결이 놀란다는 것은 홍련과의 로맨스이며 성희를 즐기고 있는 김립의 모습이다. 이처럼 야한 성의 노래를 은유로 깊숙이 감추고 있어 음란하지 않으면서 묘한 뉘앙스를 풍겨주는 풍자로 읊고 있다. 이렇듯, 김립은 무수히 염문을 뿌리며 유랑의 생활을 한 것이다.
점점 유랑의 생활은 그를 익숙하게 만들어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는 무심한 지아비며 아비인 것이다.
24) 정공채, <떠돌이 사랑2>, 130-132면.
25) 위의 책, 133-134면.
26) 위의 책, 134-135면.
이렇듯 떠돌면서 기녀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다 정말로 사랑했으나 헤어졌던 한 여인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 애석해 하며 지은 시가 있다.
이별한 뒤 잊기 어려워 옛사랑을 찾아오니
그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되고 내 머리 또한 희어 백발이 되다.
그대 쓰던 거울은 봄이언만 차디차고
내 불던 피리도 달밤인데 소리 그쳤다
일찍이 부른 사랑의 노래 귀제곡과 채조장은
지금 생각하매 다 한때 꿈이어니.
그래 내 추억의 땅에 와 고운 얼굴 못 보고
수레를 멈춘 뒤에 들꽃을 사랑하노라.
一從別後豈堪忘
汝骨爲粉我首霜
鸞鏡影寒春寂寂
鳳簫音斷月茫茫
早吟衛北歸薺曲
虛負周南采藻章
舊路無痕難再訪
停車左愛野花芳
- 가을바람에 미인을 찾아왔다 만나지 못하다(秋風訪美人不見) -
사랑하는 여인을 다시 찾았다가 그 여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쓸쓸한 나머지 시를 읊은 것이다. 김립은 사방을 다니며 이러한 로맨스를 알게 모르게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안변에 사는 여인과는 꽤 사랑했던 사이인데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여인을 떠난 방랑의 시간이 꽤나 길었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찾은 옛 애인의 정을 추억하며 ‘한 낱 꿈같은 세월 속에서 이젠 들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매우 애상적이다.
조선조 남성이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은 흔하지 않다. 같은 맥락의 시다.
궂은비 소소하게 설루(雪樓)에 들 제
옛 기약을 찾아오니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용 서린 거울은 먼지 속에 좀먹고
학 두루미 향로에 안개(수증기)는 걷혔다.
초협(楚峽)에 구름은 사라져 사랑의 꿈 이루기 어렵고
한궁(漢宮)의 비단 부채는 가을바람을 일으키기 쉬워.
쓸쓸한 강에 날이 저물 때
달 실은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노라.
瓊雨蕭蕭入雪樓
歸尋舊約影無留
盤龍寶鏡輕塵蝕
睡鶴香爐瑞霧收
楚峽行雲難作夢
漢宮紈扇易生秋
寥寥寂寂江天暮
帶月中宵下小舟
- 안변에 미인을 찾아왔다 만나지 못하다(鶴城訪美人不見) -
<추풍방미인불견>의 연작시 같다. 다만 이 시에서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 다를 뿐이다.
중국의 고사 ‘초협행운’은 중국 초나라 양왕이 무산에 올라갔을 때 꿈에 선녀들이 나타나 초양왕과 사랑을 속삭이다가 우리들은 무산의 구름과 비라 만약에 우리를 보려면 무산의 구름과 비를 보라며 떠났다는 고사여서 두 사람의 사랑이 현실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고 무산에서나 이어 갈 수 있다는 쓸쓸한 所懷다.
또한 중국 한나라 성제의 총애를 받던 반첩여가 조비연에게 사랑을 뺏기고 동궁에 머물면서 수심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고사를 인용해 자신의 처지가 사랑 없이 수심으로 가득한 채로 살아가는 반첩여 같다는 표현이다.
조선조 남성이 조비연, 반첩여의 고사를 들먹이며 상처 입은 사랑을 노래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조선조 선비는 근엄하여 애정의 노출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이승의 남성이 저승의 여성을 그리워하며 ‘쓸쓸한 강물에 날이 저물면 달 실은 배를 타고 하염없이 류로 떠나야 하는 것’이 자신의 신세라는 自白이며 獨白이다.
이러한 김립의 애정 행각은 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이응수의 시집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다른 시집27)에 들어 있는 <雲雨의 정>이다.
해도 해도 싫지 않아 다시 하고 또 하고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다시 하고 또 하고
미친 나비 꽃을 탐내 한밤에 찾아드니
깊은 방에 숨은 꽃은 대답이 없네
붉은 연꽃 따러 남포에 갔더니
동정호 가을 물결에 조각배 나부끼네
爲爲不厭更爲爲
不爲不爲更爲爲
深花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欲探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걸 보니
필시 다른 사람이 지나갔나 보구나
毛深內闊
必過他人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터진 다오
溪邊楊柳不雨長
後園黃栗不蜂圻
- 운우의 정 -
위의 〈운우의 정〉은 분위기가 전혀 다른 비속적인 언어로 김립의 성적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眞僞 여부를 떠나 방랑시인이 격을 늘 갖추고 살 수 는 없고 정철28), 임제의 시조가 이미 사설시조처럼 비속한 시어로 기녀 시인을 유혹했던 시조 자료가 있고 보면 근엄한 사대부들도 낮에는 도덕군자나 밤에는 욕망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을 보면 꽃을 나비가 따르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적 발로여서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조선조 500년간 지속되어 온 이념이어서 김립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온 조선 남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시가 오히려 김립 시 답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하게된다.
<雲雨之情>29)은 남녀 간의 애정행각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아무리 해도 싫지 않다는 서설적인 시로 시작한다. 김립이 잠깐 만난 처녀와 헤어진 후 갑자기 치솟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그녀의 방을 찾아가 유혹을 하는 장면, 그 장면에 이어서 김립의 욕망의 표출이 끝나고 처녀의 목숨 같은 순결을 너무 쉽게 자신에게 바쳤고 부끄러움이 없는 처녀가 아니냐고 오히려 야유하는 시를 읊자 처녀는 억울하다는 듯 자신은 김립에게 첫 정을 바친 처녀임을 시로써 화답하고 있으니 김립도 비겁함이 엿보이는 남성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조선조 사회에서 불문율에 부쳐진 여성들의 정조 관념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남성들의 빠져나가기 수법이 김립의 시에서도 발견된다. 이미 여러 남성이 거쳐 갔으니 내 실수가 아니며 내 책임이 아니라는 회피성 발언, 그래서 오히려 나약한 남성으로 비쳐지는 조선조 남성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27) 김병연 지음, 신영준 해설, 『시선 김삿갓의 한시』, 투영, 2002, 37-39면
28) 玉은 玉이커늘 燔玉만 너겨니/이제야 보아하니 旨玉일시 졀실다 내게 송곳 잇던이 러볼가 노라
김명희, 『옛 문학의 비평적 시각』, 태학사, 1997, 176면.
29) <운우지정>은 <암야방홍련>의 4구가 그대로 들어 있어 진위여부의 문제를 지닌 시다.
역시 이응수 편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신영준 해설 시집에 있는 기생 가련과의 로맨스30) 시가 있다. 가련은 김삿갓이 시를 잘 하기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던 중 함흥 땅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기다렸다31)가 김삿갓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김립은 가련에 뜻에 따라 객관을 버리고 비어있는 초가를 빌려 살림을 차렸다. 한 1년 명기 가련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김립은 늘 떠날 준비를 하였다. 가련은 자신도 함께 떠나겠다고 그리고, 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했으나 김립은 본인은 ‘흐르는 물’이라 했다.32)
가련은 그런 김립을 流水어른으로 불렀고 붙들 수 없는 사람임을 확인한다. <가련>시에서 ‘이름도 가련이요, 얼굴도 가련이요, 가련은 마음조차 가련하구나’ 라는 가련의 외모를 노래했다.
가련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이의 문 앞에서 가련을 찾는다,
가련할 사 가련에게 이 뜻을 전하니,
가련이는 나의 가련한 마음을 알리라,
可憐行色可憐身
可憐門前訪可憐
可憐此意傳可憐
可憐能知可憐心
- 可憐妓詩 -
위에 시처럼 가련한 몸은 김립이요 그런 가련한 사내를 맞는 가련 또한 가련한 여성이다.
그 여성은 기생이라는 가련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적인 가련함이 도사리고 있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가련과 1년을 살다가 오두막을 뒤로하고 <이별>33)하면서 지은 시에 기녀 가련과의 헤어짐을 이름자를 써서 노래한다.
가련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가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몸 떠남을 슬퍼하지 마라
가련을 잊지 않았다가 가련에게 다시 오리
可憐門前別可憐
可憐行客尤可憐
可憐莫惜可憐去
可憐不忘歸可憐
- 이별 -
‘꽃이 피면 비바람 많듯 인생에는 이별도 많다’라는 시를 주고 떠나야 하는 가련과 김립.
그 둘의 이별은 예정34)되어 있었으나 기녀라도 정분을 나눈 사이여서 애틋함이 묻어난다. 비록 이름을 반복하며 어휘를 유머스럽게 표현은 했어도 울며 매달리는 가련과의 헤어짐이 쉽지는 않았음을 알게 한다. 이렇듯 청상과부, 주막집 과부, 처녀, 기녀인 가련, 매화 등과 연정을 나누며 방랑하던 김립에게 아내의 죽음이 다가온다.
30) 김립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통천을 거쳐 안변에 이르렀을 때 가련을 알게 되었다고 함.
31) 김병연 지음, 신영준 해설, 앞의 책, 33면.
32) 이청, 「김삿갓 소설」경덕출판사, 2007, 211면.
33) 김병연 지음, 앞의 책 52면. 이청, 위의 책, 212-213면.
34) 김의숙 편저, 『김삿갓 구전설화』, 영월 문화원, 2000, 재인용. 김립과 1년 간 살았고, 가련은 김립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함.
김립에 시에 나타난 <아내를 잃고>라는 시는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어서 오히려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여성에 관한 시로 總結詩같은 느낌이다.
서로 만난 것도 늦었거든 이별은 또 왜 그리 빨라
채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슬픔만 이리 긴가.
그대 제삿술은 잔칫날 남은 것을 썼고
그대 장사 옷도 신행 옷을 입혔나니
창 앞의 옛 나무에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발 바깥 새둥지에 제비가 쌍쌍으로 즐길 때
죽은 아내의 성품을 장모에게 물었더니
내 딸은 덕과 재주를 다 겸했다 말하더라.
遇何晩也別何催
未卜其欣只卜哀
祭酒惟餘醮日釀
襲衣仍用嫁時裁
窓前舊種妖挑發
簫外新巢雙燕來
賢否郎從妻母問
其言吾女德兼才35)
- 아내를 잃고 스스로 슬퍼하노라(喪配自輓) -
김립은 조선 순조 7년 1807년에 권세가문인 壯洞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1801년에 시작된 신유교란과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 난으로 조선왕조가 어수선하면서 내리막길을 달리던 혼란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조부 金益淳의 服誅와 폐족으로까지 인해 손자 김립은 가문의 몰락과 함께 방랑의 길로 내몰렸다.
그의 나이 21세에 장수 황씨와의 사이에 큰아들 학균을 낳은 뒤 신분을 숨기고 상경하여 권문자제들과 교우하며 출세의 길을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자 2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 후 둘째 아들 익균을 낳은 뒤 2차 가출을 하였는데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리고 그 후 57(56)세에 전라도 동북 땅에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집에 돌아온 일이 없다고 한다.36)
아내와 5년 정도 함께 생활한 김립은 과연 ‘아내와 몇 번이나 동침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내와의 사이가 돈독하다고 할 수 없다. 김립의 아내는 김립이 조롱하던 부정적인 여성상이 아닌 긍정적인 여성상으로 가문을 지키고, 아이를 양육하고, 봉제사에 손님 접대를 하면서 시집살이를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김립은 아내의 인물됨에 아는 바도 없다.
죽은 연후에 장모에게 물어보니 ‘내 딸은 덕과 재주를 겸비한 현처’라고 말해주어 비로서 아내의 사람됨을 알았다는 이 시를 김응수는 가벼운 유머를 느끼게 해 준다고 했는데 오히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씁쓸한 감을 지울 수 없다. 김립과 그 아내와의 관계를 과연 ‘부부’라 지칭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아무튼, 김립은 ‘늦게 만났는데 헤어짐은 일찍’ 이라는 것으로 보아 아내와의 사별이 아쉽고 슬픈 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나 애틋함이 묻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담담하게 받아들인 아내와의 이별
시다. 반면 김립의 아내는 현숙하고 재주 있는 조선조 여성의 한 행렬에 있었음을 장모의 언술로 감지할 수 있다. 김립은 자신에 대한 시도 많이 썼는데 그 중 〈자화상〉1.2 에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 또한 굴이 있어 집이 있거늘
내 평생 돌아 보건대 정처 없어 홀로 슬퍼할 뿐이다
죽장망혜로 수 천리 길 떠돌았고
물같이 구름처럼 온갖 곳 내 집이었구나.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집 없이 떠도는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고 〈自嘆〉4 에서는
고향 길 꿈에 놀라 깨어 앉으니
삼경에 두견새 울음 남쪽 가지에서 나누나.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에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꿈에서는 늘 고향을 찾는 평범한 남성이다. 고향에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일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을 꿈에서만 찾을 뿐 현실에서는 찾아 나서지 않는 김립이었다. 김립은 평범한 인생으로 살기 어려웠고, 평범한 지아비로 살기 어려웠고, 자애로운 아버지로 살지 못했다. 스스로 탄식도 하지만 방랑이 몸에 밴 그의 생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천부적인 감수성으로 속박 없이 유랑 시인이 되어 표일하며 살았던 시인37)이었다.
따라서 김립은 방랑과 풍류생활이 몸에 익숙해 진 그래서 더 편안하게 인생을 즐겼던 표박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의 명성도 유랑묵객으로 점점 높아져 시인묵객으로 대접받고 훈장을 업으로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은 빨래하고 밥하고 아이 잘 키우는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여성에 가치를 두었고, 또는 성적 대상자 곧, 성적 욕망의 돌파구로서의 여성만을 원했기에 그의 있어서 여성은 기생 아니면 평범한 서민층(과부)의 여성 곧, 소외계층의 여성이었다.
35) 이 시는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상처한 남편의 마음을 읊은 시로써 김삿갓의 시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신경림, 앞의 책, 41면
36) 정대구, 「김삿갓의 생애와 그의 태생지를 찾아서」,《양주향토자료총서》제 3집, 양주문화원, 2000, 137면.
37) 하정승 〈김삿갓 시에 나타난 비개와 표일의 정신〉 제 11회 난고 김삿갓 학술 심포지엄 2008, 9, 27일 영
월향토사 연구회, 22면
4. 나가는 말
전통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여하는 여성성이 어머니, 아내, 애인으로서의 용모, 성격, 태도라면 남성상은 부양자, 가장으로서의 성격, 용모, 태도 등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보면 김립이 대상으로 삼은 여성은 고귀한 품격 있는 양반 여성이 아니었다.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않는 게으른 부녀자, 애인의 용모가 떨어지는 늙은 기생과 여성성을 상실한 노파 등 소외된 시골의 주변적 인물이며 평민여성이다. 길손의 처지에서 바라봐도 매우 가소롭거나 가련한 여성이다. 이 여성들은 이타성, 자상함, 순종적, 수동적, 감성적, 관계 중심적이라는 가부장제 문화가 구성하는 이미지와도 딴 판이다. 그런가하면 가부장제 남성은 능동적, 결단력, 추진력, 합리적, 이성적, 성취 지향적으로 이미지화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김립은 과연 가부장제 남성 이미지와 부합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김립 또한 유랑지식
인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허허롭게 산 남성으로 사람 같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김립의 시가 생명력이 있다고 느껴진다. 김립은 실제로 살아가는 평민여성들을 보며 느끼며 시를 지었고 그 시는 내용이나 장르를 벗어난 형태로 성 탐욕을 노래하고 있어 리얼하다.
조선조 사회 풍속사인 처첩의 모습을 그려 가련한 여성의 삶을 파헤치고 게으른 여성을 훈계는 하되 도덕적이지 않은 비유로 나무라는 가하면 과부, 주모, 처녀, 기생을 통해 肉慾에 대한 탐욕을 감추지 않고 있어 보수적인 한시의 내용과 형식의 파격이 매우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기녀들과의 정분을 나눈 시는 방랑의 길손이지만 사랑과 이별을 겪는 평범한 남성임을 일깨우기도 한다. 이런 면이 그의 시를 서민들이 사랑하게 되고 회자된 이유이다. 사대부 시와는 다르게 칭송의 대상인 여성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인 여성을 찾아 나서 그 여성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소외 계층의 여성들과의 사랑을 파격적인 한시체로 흔들어 한시체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비난도 받으나 한시를 언문 風律로 바꾸어준 공도 인정할 수 있다.
이번 논고에서 시의 진위 여부를 가리지 못하고 기존에 나와 있는 시집에만 의존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기녀 가련은 기녀 시조에 나타나지 않지만 매화는 시조가 다수 있어 같은 이름의 매화인가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다.
* 참고문헌
김명희 외, 『문학으로 읽는 옛 여성들의 삶』, 이회, 2005
, 『조선시대 여성문학과 사상』, 이회, 2003
김명희, 『옛 문학의 비평적 시각』, 태학사, 1997
, 「고전시가에 나타난 성의식 고찰」,『 시조학 논총 제 18집』, 2002
김병연 지음, 『시선 김삿갓의 한시』, 신영준 해설, 투영 미디어, 2002,
김병연 지음, 『김삿갓 풍자시 전집』, 이응수 정리, 실천문학, 2000.
신경림 편역,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시인사, 1980.
김일호 편, 『김립시집』, 진문사,
정공채 저, 『김삿갓 시와 인생 오늘은 어찌하랴』, 학원사, 1985.
정비석, 『소설 김삿갓』, 고려원, 1991, 21판.
김용철, 『김삿갓』, 홍신문화사, 1977.
이 청,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소설 김삿갓』, 경덕출판사, 2007.
김의숙 편저, 『김삿갓 구전설화』, 영월 문화원, 2000.
박 주, 『조선시대 여성과 유교문화』, 국학자료원, 2008.
김태준, 「김삿갓 金炳淵론」,『조선후기한시 작가론』, 이회문화사, 1998,
박혜숙, 「김삿갓 시 연구 - 金笠 詩集(1941)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4.
윤은근, 「金笠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9.
임꺽정 김병연 태생지 고증 학술 보고서, 「임꺽정 김삿갓 양주에서 태어났는가?」,《양주향토자료 총서》제 3집, 양주군 양주문화원, 2000.
임동권, 『한국민요전집』, 집문당, 1974
임형택, 「이조말 지식인의 분화와 문학의 희작화 경향」,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창작과 비평사, 1985.
정대구, 「김삿갓 시 연구」, 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정대구, 「김삿갓 연구」문학아카데미, 1990.
정대구, 「김삿갓론」, 『한국문학작가론』, 현대문학사, 1991
정응수, 「김삿갓 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리처드 럿트, 「Kim sakkat, the Popular Humorist」, 『Humour in Korean Literature』, 국제문화재단, 1970.
'♣ 한시(漢詩) 마당 ♣ > - 우리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秋日行途中/가을날 길을 가다가[김윤식(金允植] (0) | 2016.10.29 |
---|---|
[스크랩] 조선의 시인 이옥봉...사랑에 꺾인 애달픈 시심 (0) | 2016.10.29 |
[스크랩] 김립(金炳淵)과 여성 (0) | 2016.09.02 |
[이대원 장군 - 절명시] (0) | 2016.06.16 |
송붕(松棚) -권필(權韠) (0) | 201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