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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장군 관련 자료]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수군장수하면 의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海戰史)를 모두 뒤져보아도 다시 찾아 볼수없는 명장이자, 효자였다.
고로 그에 대한 연구와 고증은 많이 이루어져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다가 약관(弱冠)을 갓 넘긴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해안을 침입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하던 왜구들과 싸우다 순국한 충렬공에 대하여서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분의 고향이 바로 내가 살고있는 이곳이고,
그분의 절명시가 적힌 속적삼이 묻히 묘소도 바로 수Km내에 있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생
이대원 장군은 1566년 병인년 3월 7일 (조선 명종 21년) 현지명 경기도 포승면 희곡리 194번지에서 부친 이춘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함평(咸平)이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너무나도 체구가 크고 괴상하게도 두상이 네모 났으며 눈은 부엉이의 눈과 같고 무섭게 생겼으며 체구또한 거구이어서 그의 부모님은 괴변아를 낳은줄 알고 퍽 걱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유년기
그러나 점차 자라며 병도 없고 효성또한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여쭙는 것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1571년 장군의 나이 6살때의 추운 겨울날 부모님께서 갑지기 중병으로 누우시자 어린몸으로 10여리가 넘는 초행길을 걸어 장터로 나가 산약을 구해 부모님을 간호하고, 나무를 해다가 방을 덥게 불을 때 드리는 등 그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니,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성년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1570년(5세) 부터 1576년(10세)까지 한문공부는 물론 양성현 승양동 대덕산하 (지금의 대곡리 일대) 산골짝에서 매일같이 무술을 연마하고, 활쏘기 말타기 칼쓰는 법, 병법공부등을 하였다.
등용
1583년 (조선 선조 16년) 4월 이율곡 선생께서 일본의 침입을 막기위해 10만 양병설을 말씀하시었을 무렵,
장군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본래 문신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등과(登科) 하였고, 3년후 21세 되던 해에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전라도 고흥 반도지방의 녹도만호(鹿島萬戶 : 從四品)가 되었다.
손죽도 해전
1차 출전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1587년 (선조20년 -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전) 2월에 호남지방에 왜구가 수시로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자 이를 무찌르고자 임금께 출병(出兵)을 상소하여 선조의 승락이 떨어지자,2월 10일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 침공한 왜구 20여척을 무찌르고자 출병하여 이를 대파(大破). 왜구의 목을 무수히 베어 1차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개선하였다.
상관 심암(沈岩)의 질투
그때 그의 직속상관으로 있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조선시대 각 도의 水軍을 총지휘하던 正三品의 외직무관) 심암(沈岩)은 그의 전공을 빼앗으려다 이장군이 듣지 않아 창피만 당하게 되어 원한을 품게 되었다.그 후 며칠 뒤인 2월 17일경에 또다시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으로 쳐들어 오자 심암은 이장군에게 무조건 출전명령을 내리었다. 이에 장군은 청하기를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명일에 진격하자"하였으나 심암은 피로한 병졸 백여명을 이장군에게 주며 끝내 독촉하여 적과 싸우게 하니 이장군은 할 수 없이 명령에 의하여 출전 할 수 밖에 없었다.
2차 출전
2월 17일 병사 일백여명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에 출전한 장군은 용전분투 적과 맹렬히 싸웠으나, 병력숫자로도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싸울 수가 없어 본영(本營)에 구원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만 클뿐 당할 도리가 없어 대세를 각오한 이장군은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써서 집안 종에게 부탁하여 고향 본가로 전하게 한 것이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일모원문도래해 | 해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
장렬한 순국(殉國)
이 시를 부하에게 전하고도 최후까지 싸우다가 불행히도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적을 꾸짖었다. 항복을 못받은 적군은 저희 배 돛대에다 매어달아 참혹하게 칼로 찔러 절명케 했는데 끝까지 적을 나무라는 그의 호령소리는 바다위를 날카롭게 울렸다고 한다.생존자
그 후 선조실록 22권에는 그때의 좌수영 진부 김계동과 이연세 두사람이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고로 탈출해 왔다고 적혀 있고, 은봉야사별록(隱峰夜事別綠)에는 그 싸움에서 오직 녹도영(鹿島營) 병졸의 한사람인 손대남이 살아 돌아왔다고 했으니, 이대원 장군의 절명시를 가지고 와 전해준 사람이 곧 손대남이라고도 전해진다.1980년 6월 2일 경기도지정 기념물 56호로 지정된 이대원 장군묘. 중앙이 장군의 절명시를 적었던 속적삼이 묻힌 무덤이고, 사진 왼쪽이 정부인 동래정씨, 오른쪽이 정부인 용인이씨의 무덤이다. |
속적삼을 고향땅에 장사지내다.
장군의 절명시 28자가 적힌 속적삼은 1587년 2월 20일 장군의 말이 양성현(지금의 평택시 포승면)의 장군집에 물고와서 눈물을 흘리며 가족에게 전하고 죽었다고 한다.
혈서의 속적삼과 말을 끌고 온 사람이 집에 다 와서 말에 속적삼을 물려 보내고 본인은 집에 나타나지 않은것이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알고 속적삼을 고향 대덕산 밑에 묻어 장사를 지냈으니, 그곳이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에 위치한 장군의 무덤인 것이다.
그후로 후손들은 장군의 말이 절명시를 적은 속적삼을 물고온 음력 2월 20일 을 제일(祭日)로 정하여 매년 제를 올리고 있으며 제사날 자정이 되면 말굽소리와 말울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장군의 수사 제수와 심암의 사형
장군이 1차 손죽도 해전에서 승리한 사실을 전라도 관찰사가 선조에게 상소하여 조정에서는 심암의 수사(水使)직을 거두고 이장군을 수사직으로 제수(除授: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바로 벼슬을 시킴)하였으나, 교지(敎旨: 조선 시대에 임금이 4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는 사령, 관고, 관교, 왕지)가 전달되기 전에 장군은 이미 순국하셨던 것이다.
조정은 이장군을 시기하여 억지로 출전시켜 죽게한 심암을 곧 묶어 올려 이대원장군이 순국한지 44일 만인 4월 4일 한양 당고개에서 처형하여 심암에대한 벌은 속히 진행되었으나, 이장군에 대한 표창은 더디어 80여년이 지난 현종9년 (1668년)에야 병조참판 (兵曹參判 : 從三品, 병조의 으뜸벼슬인 판서(判書) 다음 벼슬로 현재 국방부 차관쯤...) 으로 추증하고 그의 고향에 신도비를 세워 그 충절을 기리게 하였으니, 현종의 교지(敎旨)내용은 다음과 같다.
- 敎旨 折衝將軍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李大源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煮 康熙 7年 初 2日 丁亥倭亂力戰 凶進 事承
교지 절충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대원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자 강희 7년 초 2일 정해왜란력전 흉진 사승 (註, 강희7년 : 현종9년-1668년)
이장군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
장군의 비장한 죽음을 듣고 고흥 해안에 살던 백성들 다음과 같은 슬픈노래를 지어 불렀다.
"어허 슬픈지고 녹도만호 이대원은 오록지 나라위해 충신이 되었도다. 배가 바다로 들어갈제 왜적들은 달려들고, 수사는 물러가니 백만명 진중에 빈 주먹만 휘둘렀도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마을에 퍼지고 고을에 퍼지고 호남해안 여러 고을에까지 퍼졌다. 여자와 어린이들까지도 부르더니, 다시 그대로 곡조에 올려 기생들까지 불렀다.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도 눈물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우상 정언신의 아들이며 이조참판을 지낸 한천 정협(鄭協)은 다음과 같이 조사를 지었으니,
忠臣死國 충신이라 나라위하여 죽었고
烈士喪元 열사라 머리를 잃었으니
夫我何悲 네 무엇이 슬피리오
子所安兮 그대는 만족하리라!
장군을 잃은 백성들은 마음이 진정 얼마나 슬펐는지 알수 있다.
장군의 사당
장군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은 전국에 걸쳐 4군데가 있으니,
평택 확충사
인근 해군 평택전대 장병들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확충사 참배후 환경미화 작업을 하고있다. '01.6.5. |
이장군의 출생지로서 의절시가 적힌 속적삼과 2부인이 묻힌 무덤과 1699년 세워진 신도비(神道碑 :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 가 있다.
이장군의 사망후 사당을 지어 추모해 오다가 1597년 이곳을 침입한 왜적이 사당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불이 꺼졌기에 나라에서 소나기 확자를 써서 확충사라고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서원등에 이름을 지어 줌) 하였다.
제일(祭日) : 매년 4월 6일 (음력 2월 20일이었으나, 1980년 부터 4월 6일로 祭日 변경)
고흥 쌍충사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 2197충렬공 이대원 (1566-1587)장군을 주벽으로 충장공 정운(1943-1592)장군과 함께 배향한 사우(祠宇)이다.
이대원장군이 왜구와 싸우다 순국하자 선조께서는 고흥 녹동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한편, 함께 배향되어 있는 충장공 정운 역시 수군 장수로서 1591년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이대원장군 다음의 녹도만호로 부임하였던 인물인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등에서 선봉장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 (당시 나이 54세) 하였다.
이에 그의 상관이던 이순신장군은
"이대원과 정운이 서로 전후하여 녹도만호를 지내었고 이대원 사당이 아직 이 포구에 있으니 정운을 이대원사당에 같이 모시기를 청하나이다."라는 장계를 선조께 올려, 1592년 두분이 합향되게 되었다.
1597년 정유년 이땅을 다시 침략한 왜구에 의해 두분의 사당은 불타게 되자, 이듬해 녹동의 수군병졸들이 자신들의 힘을 모아 초가 두어칸을 얽어매고 제사지내기를 80여년 해오다가, 1682년 숙종8년 임척, 서봉영등 호남 유림들이 청액소를 올려 이듬해인 1683년 쌍충사(雙忠司)라는 액호가 하사되고, 조정에서 제관이 파견되어 제를 올리게 되었다.
그후 근대에 이르러 1942년 일인에 의해 빈터가 되었다가, 1947년 해방후 이장군 순국 6주갑이 되는 기념해에 '녹도쌍충사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1957년 현 신실과 강당을 다시 개축하였다.
제일(祭日) : 매년 5월 1일
손죽도 충열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천면 삼산면 손죽도손죽도는 장군의 전사 이후 손대도라고도 불리운다. 이장군이 손죽도 해상에서 순국하자 손죽도 마을 주민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남쪽 뚝박골 목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동민들은 초가로 얽어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 지내며 두세번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면면히 이어오다가 1983년, 또 다시 사우가 퇴락하자 마을주민의 정성으로 이를 중수하고 여천군으로 부터 충열사라는 사액을 받아 현판하였다.
도민들은 장군의 제일이 돌아오면 1주일 전에 인줄 (부정을 막기 위해 길이나 문에 건너질러 매는 금줄)을 띠고 강아지고, 사람이고 일절 통행을 금지시키고, 매년 집집마다 쌀1되씩 공납시켜 엄숙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일(祭日) : 매년 음력 3월 3일
여수 영당(影堂)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돌산 어항센타 (전남 지방문화재 제6호)여수시 남산동 (현 돌산대교 서쪽 입구)에 영당이 있었는데 여수지방의 해신당(海神堂)으로 어민들의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는 고려조 충신 최영장군을 배향하여 왔으나 임진왜란 후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이대원장군, 정운장군등 3위를 추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장군을 추후 초혼하여 배향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세 장군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던 영장이라, 이 지방 유림에 의해 추배되었던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출어하는 어선들은 반드시 고사미 2말씩을 공납하고 무사안전 항해를 기원한 후 출어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5월 3일에서 10일까지 제사를 지내며 삼장군(이대원,이순신,정운)에게도 풍어제를 지낸다.
- [출처: 한시산책이란 책에서 시를 접하고 자료는 cafe.daum.net/psk21/62Vv/20 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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