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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中自慶 (한중자경) - 沖止(충지 1226~1292)

Bawoo 2016. 5. 7. 01:05

 

 

閑中自慶 (한중자경)

                 沖止(충지 1226~1292)

 

             日日看山看不足 (일일간산간부족)

             時時聽水聽無厭 (시시청수청무염)

             自然耳目皆淸快 (자연이목개청쾌)

             聲色中間好養恬 (성색중간호양념)

 

[한가한 내게 축하한다]

 

 날마다 산을 보건마는
아무리 봐도 늘 부족하고
언제나 물소리를 듣건마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자연으로 향하면
귀와 눈은 다 맑고도 상쾌해
그 소리와 그 빛 사이에서
평온한 마음 가꾸어야지.


충지는 고려 후기의 고승(高僧)으로 속명은 위원개(魏元凱)이다. 19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난 뒤 출가하였는데 시와 문장을 잘 지어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많은 작품이 실려 있다. 산에 사는 승려이니 눈에 보는 것이 산이고, 귀로 듣는 것이 물소리다. 보통 사람이라면 물리고 질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싫어 산을 떠나고 들과 물을 떠나 도회지로 가서 다른 사람들 틈에 섞이려 한다. 하지만 충지는 그들과 정반대의 방향을 택했다. 몸을 자연 쪽을 향해 돌려놓으면 눈도 귀도 맑아지고 상쾌해진다고 하였다. 허구한 날 바라보고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자기고백은 산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가슴을 친다. 산과 물을 향해 눈과 귀를 조금이라도 더 돌려놓아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나게 만든다.

[출처: 정보-책새벽 한시 50~51쪽]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성사(修禪社) 제6세(世). 성은 위(魏)씨. 속명은 원개 (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 라남도 장흥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 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 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 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1266년(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 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 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조국사(普 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 (禪)보다는 교(敎)에 치중하였다.

 

1283년 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 장경을 도중에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 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 로 옮겨 선정을 닦고 있던 중 1286년 2월에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 (社主)로 추천하는 장문(狀聞)을 왕에게 올리고 입적하였다. 장문을 받은 충 렬왕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을 시켜 그로 하여금 6월 16일에 개당(開堂)하게 함에 따라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 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도를 닦음에 있어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오 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인가받은 파강이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부 끄러워하였지만,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선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 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조류를 보였고, 상제상 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 풍(宗風)을 계승하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 (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 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裳有一枝 且喜途中脚不倦)."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