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전멸을 주제로 그림
기존 전쟁화 패러다임을 바꿔
日 정부에 무조건적 협력보다
참혹한 전쟁 사실 전달에 주력
애투 섬의 옥쇄, 1943, 유화, 193.5x259.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라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방인 화가들의 모임이 바로 에콜 드 파리였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스타 화가들이 바로 에콜 드 파리의 주요 멤버였죠. 이 개성 넘치는 화가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습니다. 화동(畵童)을 연상케 하는 버섯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콧수염을 기른 동양인. 파리가 주목한 천재 화가, 그의 이름은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1886~1968)입니다.
후지타는 20세기 초반 활동한 일본의 스타 작가이면서 동시에 일본의 편에서 태평양전쟁을 그린 종군화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로선 역사와 국민정서상 그의 작품을 마냥 편하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 정부의 주문으로 제작된 다른 많은 전쟁 선전화와는 달리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한 번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카소·모딜리아니와 같은 파리 화단 일원
후지타는 1910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당시만 해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화가였습니다. 그의 스승은 당시 일본 미술계를 쥐락펴락했던 거장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1866~1924)였죠. 하지만 후지타는 구로다에게 핀잔만 듣던 제자였다고 합니다. 문무성이 주관하는 미술전람회에서 3년 내리 낙선하며 좀처럼 인정받지 못한 후지타는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던 파리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피카소 등 스타 작가들과 친분을 맺고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에콜 드 파리의 일원이 되기도 하죠.
서양화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인정을 받은 후지타는 1919년 살롱도톤(Salon d‘Automne)에 출품한 6점 모두 입선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미술 시장이 얼어붙자 후지타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지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본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일본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 후지타는 남미를 여행하면서 멕시코 벽화운동을 주도한 호세 클레멘트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이 영향으로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벽화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자화상, 1931 출처: 위키아트 |
태평양전쟁에 종군…전쟁화 분야의 스타로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 종군하게 됩니다. 당시 후지타의 전쟁화는 ‘시대의 심벌’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유명했습니다. 당시 그가 그린 전쟁화 대부분은 도교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됐죠. 전쟁화 분야의 스타로 떠오른 후지타는 당시 “전쟁화를 통해 내용상 반서양적 미술을 지향하고 애국심을 확인하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목표를 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후지타가 다른 종군화가처럼 전쟁의 선전에만 목적을 두고 결과물도 그 정도에만 그쳤다면 우리가 다시 그의 그림을 볼 필요가 없겠죠. 후지타의 전쟁화는 선전보다는 기록에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의도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죠.
지옥도를 보는 듯한 참혹한 전쟁의 모습
오늘 소개할 후지타의 1943년 작품 ‘애투 섬의 옥쇄’는 기존 전쟁화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3년 5월 알래스카 남서부 애투 섬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전멸당합니다. 후지타는 이 사건을 꼭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작품 속 시신들은 서로 뒤엉켜 피아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적군도 아군도 없는 처절한 백병전을 그려냈죠. 지옥도를 보는 것처럼 참혹한 전쟁의 현장은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전쟁으로 인해 무엇을 얻든지 간에 이 끔찍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종군화가였던 후지타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전장을 지옥처럼 그려냈을까요?
‘애투 섬의 옥쇄’가 전시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사한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정부에서 의뢰한 전쟁화의 주제가 일본군의 전멸이라는 점이요. 제목이야 그럴싸하게 ‘옥쇄(玉碎)’라고 지었지만 어떤 면에서도 아군의 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인데 말이죠. 어쩌면 이건 큰 도전이었을 겁니다. 후지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일본에 무조건적인 협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화를 예술의 일환으로 생각
1945년 8월 15일 후지타는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됩니다. 포츠담 선언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는 일왕 히로히토의 연설이 라디오로 방송되는 사이 일본 전역에서는 전쟁에 관련된 서류와 군수품의 폐기가 진행됐죠. 후지타도 그가 가지고 있던 스케치, 자료, 사진 등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과 달리 후지타는 전쟁화를 예술의 일환으로 생각했다고 자신의 전기에 적었습니다. 일본 육군 소속 미술협회장으로 활동했던 그가 패전 이후 미군이 전쟁화 수집업무를 부탁했을 때 수락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지 모릅니다. 순수하게 존폐위기에 놓인 작품들을 구하는 일로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전범으로 지목된 후지타는 전쟁화 수집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립니다. 자신이 전범으로 몰린 탓도 있지만 아마 전쟁에 협조적이었던 다른 작가들의 과거를 밝히는 작업이 부담스럽기도 했으리라 추측됩니다.
레오나르 후지타, 프랑스로 귀화해
1949년 4월 후지타는 전쟁 후 미국 입국을 허가받은 최초의 일본인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젊은 시절을 보낸 프랑스로 귀화했죠. 이름도 레오나르 후지타(L‘eonard Fujita)로 바꿉니다. 이름마저 바꿀 만큼 후지타에게 전쟁이 남긴 여파는 강렬했습니다. 전쟁은 고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후지타가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지만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죠. 후지타가 일본 정부에 협력해 선전에만 열을 올린 것이 아니라 전쟁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재평가받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출처: 정보-책 / 수집- 국방일보,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참고: 애튜섬 옥쇄 관련 자료 보기 -cafe.daum.net/korjaphistory/TsFP/19 韓中日近現代史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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