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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족사 이야기 -'아버지 다산'이란 책

Bawoo 2014. 1. 6. 23:10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향년 75세)은 정조에게 총애를 받고 중용되다가 정조 사후(1800년) 신유사옥에 얽혀 선생 나이 40세이던 1801년 2월부터 1818년 9월까지 무려 18년간을 유배 생활-경북 장기에서 1년여,나머지 기간은 전남 강진에서-을 하신 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분이 후대에 와서  대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추앙을 받게 된 된 연유가 이 18년간의 유배 기간동안에 이루어 낸 많은 저술서와 관련이 있으니 유배 생활이 다산 선생 개인에겐 큰 불행이었겠으나 후대를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겐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분이거나 평범한 삶을 살다 간 분들이거나를 막론하고 그 분들의 삶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있게 마련이다.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버지,시아버지,작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이 책은 다산선생의 이런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가 이책을 읽어 보고자 한 이유는 현세에서 대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다산선생이 '한가정의 가장으로서는  어떤 삶을 살아냈을까'가 궁금해서였다.당연히 내가 다산선생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좀더 갚이 알고 싶어지게 마련이고 나도 예외는 아니니까.. 그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를 설명하라면 쉽지 않지만 내 경우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다. 그 대상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과거 역사속의 인물일 수도 있는데 다산 선생은 과거 역사속 인물중 내가 좋아하는 분중 한분인 것이다.

 

이 책은 유배기간동안에 다산 선생이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생존한 자녀에 대한 교육문제-아들들에게 총 26통의 편지를 유배지에서 보냈다고 함-,선생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자녀,며느리,조카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아픔들을 선생이 남겨 놓은 기록들-묘지명-을 근거 자료로 해서 정리해  놓은 책인데 책을 읽다보면 다산선생이 가정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절로 느낄 수 있어 그 아픔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다산선생은 15세에 결혼을 해 6남3녀를 낳았으나 이중 2남1녀-장남 학연,차남 학유 그리고 성명 미상 딸 한명-만 장성하고 4남2녀는 모두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을 하고 만다.자녀 모두 선생이 유배가기 이전에 출생을 했고 일찍 죽은 6자녀중 한명을 뺀 모두가 선생 유배가기 이전에 죽어 자식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게다가 그중 한명-여섯째 아들 농아-은 선생 유배기간 중에 죽어, 죽은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하니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차남 정학유의 아내인 둘째 며느리 청송 심씨가 29세에 자녀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만 아픔을 겪는다.둘째 며느리 심씨는 선생이 유배가기 1년전에 시집을 온 탓에 1816년 죽기전 까지 선생을  못본 것인데 혼자 계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부여서 그 아픔이 더 컸다고 한다.

 

선생은 또 두명의 조카를 먼저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한명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쓴 작은 형 정약전 선생의 아들인 정학초란 조카를 열일곱 나이에 잃고 마는데 선생은 이 조카를 선생 학문을 계승시키는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었다니 그 애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다른 조카는  '학수'란 이름을 가진 이복 큰형 정약현의 아들인데 선생은 이 조카를 해배되기 1년전인 1817년 9월에 조카 나이 20세일 때 잃었다고 한다.

 

선생이 두 조카를 잃은 아픔을 묘지명을 지어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두조카의 총명함이 선생의 학문을 이어 받을 만 하여 가문을 일으키는데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된 아픔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이외에도 서모 장성 김씨에 대한 이야기-선생은 어머니가 4분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부친인 정재원 선생이 연이어 상처를 하는 바람에 그리되었다고 함-가 나오는데 모친이 부친의 둘째 부인이었던 선생은 12세 되던 해에 네번째 어머니가 되는 이분을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는데 서모는 친자식과 다름없이 선생이

결혼하기 전까지  보살폈다고 하며 -3년 정도-선생이 한창 유배생활 중이던 1813년 7월에 향년 60세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이 분은 중인 출신이어서 정실이 되지도 못했고 3남1녀 자녀들이 모두 서출들과 결혼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선생은 묘지명에 적고 있다.

 

뒷얘기:다산선생은 정조 시절에 11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성품이 청렴하여 나라의 녹을 받으면서도 집안살림 자체가 곤궁했다고 한다. 책에 보면 하녀가 옆집 호박을 몰래 따다가 음식을 만들었다 부인 홍씨한테 치도곤을 맞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안 선생은 이웃집에 나중에 사과를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것으로 하녀의 행동을 묵인하며 선생은 책을 팔고 부인 홍씨는 투호를 팔아 생활비에 보탤  정도로 곤궁했다고 한다.그러니 유배 18년 동안의 집안살림이 어떠했을까는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데 두아들에게 서신으로 꾸준이 교육을 시켜 기본 생계는 유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작년 (2013년)  가을에 다산 선생 유적지를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이 사셨던 집을 보고 집의 규모로 보아 절대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그만한 규모의 집을 유지한것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어려운 살림살이에 만약 6자녀가 요절하지 않고 생존했다면 그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선생도 시류에 영합하여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지 않았을 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또 정조 사후 권력을 쥔 정순왕후 친정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그대로 유지했을 경우 지금처럼 역사에 남는 대학자가 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정사에 매달리다 보면 학문을 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을테니 말이다.지금 우리가 고전으로 읽고  있는 글들 중  상당수가 지은이들이 유배 기간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또 선생이 비록 청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품을 가지셨으나 18년간의 유배 생활 기간은 통한의 세월은 아니었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남자 나이 40이면 기업체의 경우 중간 간부에서 고급간부로 가는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나이인데 그 나이에 유배를 가서 18년을 살아야했으니 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영화를 누리는 것과 죽어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중 택일을 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의 영화를 택할 것인데 선생은 당시의 실세들인 외척세력들에게 해배되기 위한 노력을 전혀 안했다고 하니 여기서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생은 또 서학-천주교-에 연루되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데 셋째형 정약종은 참수되고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죽으며 매제인 이승훈 역시 참수되고 만다.자녀들을 앞세운 마당에 형,매제까지 극형을 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이다.가정적으로 이런 비운을 겪고 18년의 유배셍활을 견디어 내면서  대학자로서 후대에 길이 칭송받게 되는  명저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결론적으로 선생이 학문하는 마음가짐이 기본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멋대로 생각을 해본다.

 

아책에서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선생의 기족사를 다루면서 강진에서 측실로 두었던 여인과 그 사이에 난 두딸의 이야기가 빠진 점이다.

 

'한국학 그림을 만나다.라는 책에 보면 다산 선생이 그린 부인 홍씨가 보낸 비단 치마 자투리에 그린 '이매도'를 이야기하면서 한점은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에게 주었고 다른 한점은 측실에게서 난 딸에게 주려고 그렸으나 전해주지 못했는데  그 전에 이 세모녀는  선생 본가로 갔으나 정실 풍산 홍씨가  받아주지 않아 친정이 있는 강진으로 다시 내려갔고 이후로는 소식을 모른다'는 내용이 있다.근데 위 소개 책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이 사실을  일부러  책에 안넣은 것 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학 ~'이 책을 읽을 당시엔 선생 본부인인  풍산홍씨가 참 모질다는 생각을 했는데 안 받아준 이유에는 생활의 곤궁 문제도 작용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한데 원래 성격이 까탈스러워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다는 내용이 며느리 이야기 편에 있는걸 보면 시앗을 안보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아닐까 싶다.18년간 가장의 책무를 못한 선생으로선 본부인의 의사를 거스릴 힘은 처음부터 없었을데고....ㅎㅎ

*다산선생 생가 - 집의 규모가 별로 안커 보였는데 사진으론 꽤 커보이네요.복원 전에는 초가가 아니었을까 멋대로 생각을 해봅니다.묘소는 집뒤 작은 산에 있는데 황순워선생 소나기 마을을 일차 갔다 온 탓에 지쳐 가지고 못 올라갔습니다.다음 기회엔 꼭 가봐야죠.^^

 

 

 

                                                                    2014.1.6 밤에 완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