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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고연희·김동준.정민 외)

Bawoo 2013. 12. 16. 00:24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ㅣ김동준,정민 외 지음ㅣ태학사

 

 

다양한 주제가 교차하고 충돌하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한국학, 그 치열하고도 매혹적인 탐구의 현장을 문학·역사·철학·미술·음악·연극·복식·군사 등 문文·사史·철哲·예藝를 아우르는 젊은 인문학자 27인이 저마다 기막힌 볼거리와 사연을 띄워 안내한다.
현재 우리 고전, 우리 인문학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이종묵·안대회·정민·김문식 등의 중견학자를 비롯하여 김동준·고연희·윤진영·사진실 등의 소장학자, 함영대·이경화·유재빈·이경미 등의 신진학자들이 붓을 들었다. 이들은 전부 공부 모임 ‘문헌과해석’을 통해 학교와 전공을 초월하여 함께 학문을 연찬해온 인연을 맺고 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했다.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다’는 그림과 문예가 만나 빚어내는 애틋하고 흥미로운 풍경들을 포착한다. ‘그림의 속살과 내면 풍경’은 옛그림을 꼼꼼히 읽어 그 시대와 마주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무대와 그림이 만날 때’는 무대 현장과 그 주변에 관한 스케치를 담았다. ‘그림, 인간과 역사를 논하다’는 그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복원해낸다.

국학·한국학의 현실과 전망
한국학은 무엇일까? 한류 열풍이 뜨거운 가운데 한국학에 대한 언급도 부쩍 늘었다. 한류의 확산과 지속 방안으로서 한국학이 요청되는가 하면 고급문화의 한류를 꿈꾸며 한국학을 육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학문적 객관성과 세계화의 과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국학이 아니라 한국학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울린다. “우리의 이 책이 한국학의 현 수준에 대한 자부로 읽히기를 바란다”라고 했듯(7쪽, 정민, 「장벽과 경계를 허문 열락의 공간에서」), 이 책에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 및 학계의 고민과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통섭과 융합의 시대, 국학을 세계화하여 한국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선결 과제로 지적되는 학제간 연구, 분과학문 간의 소통이 눈에 띈다. 그림을 통해 각자의 전공 분야를 풀어낸다는 설정 자체가 그렇고, 그렇게 풀어진 결과물 또한 글만 보아서는 필자의 전공을 가늠하기 힘든 사례가 많다.
하나의 주제를 서로 다른 전공 분야의 필자가 접근해 들어감으로써 시너지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와 ≪화성능행도병≫은 미술사(유재빈)·역사학(김문식)·서지학(옥영정)의 시선을 거치며 풍성한 읽을거리로 재탄생한다. 18세기 청과의 교류사는 한문학(이홍식·안대회)과 중문학(이창숙·안상복)의 필터를 거치며 한 폭의 세밀화가 된다. 대일(이경미)·대불(정병설) 외교로 확대되는 이 교류사 부분은 또한 한국학 외연 확대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서울 북악산 일대의 풍경을 포착한 화가의 시점을 추적하거나(진준현), 한강 일대에서 두호라 불린 지점을 추론하려는 작업(이종묵)은 한국학을 내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해줄 지방학의 면모를 띤다.
한국학은 한류의 마르지 않는 샘으로, 한류는 한국학의 대중화 채널로 주목받는 이즈음, 캐릭터 발굴기를 상세히 소개하면서도 섣부른 대중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작업(사진실)은 한국학 대중화라는 대내적 요청을 한층 비판적으로 수용한 예다.

대조와 비교의 코드로 읽기
이 책이 다루는 주제 가운데 최고最古는 고려불화(김선영)이고 최신最新은 박영효의 양장 사진(이경미)이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신라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언급되는 셈이다. 군사사 전공자가 피와 살이 튀는 전법과 살상무기를 다루는가 하면(노영구), 연희사 전공자는 예배의 대상에서 유희의 도구로 변모하는 산대의 실체를 좇는다(최윤영).
예악사상에서 비롯된 장악원·교방·군영의 제도권 음악(송지원)과 풍류정신으로 대변되는 비제도권 음악(임미선)은 문헌으로 추적할 수 있는 전통음악의 두 계보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접점을 찾아 서로를 흡수해 들이기도 한다.
선비들의 아회 모습도 자세히 살피면 서로 다른 속내가 드러난다. 겨울밤 차가운 달빛 아래 하얗게 피어난 분매를 감상하는 이유신의 아회에는 그야말로 순수한 아취가 깃들여 있다(신익철). 모처럼 친인척이 모여 개를 잡아 보신하고 여유를 즐기는 강세황의 아회에는 장마철 날씨만큼이나 울울한 사정이 숨어 있다(강혜선). 한때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죄인의 자식으로 몰리면서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심익운의 아회에서는 한층 비감이 묻어난다(이경화). 그림 한 폭의 비감으로 따진다면 다산이 소실에게서 얻은 딸아이를 위해 그린 매조도만 한 것이 없다. “혼자서 하늘가를 떠돌리”라는 섬뜩한 시참까지 겹쳐지며 찹착한 심정을 달랠 길 없이 흔들어놓는다(정민).

그림은 무엇인가
필진의 전공이 다양한 만큼 그들이 뽑아든 볼거리 또한 다채로워 새삼 그림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영남사림의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는 이황과 남명에게 그림은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약도다(함영대·윤주필). 조선시대 한 외무고시 응시자의 답안지는 그가 적어낸 답의 정오와 점수가 낱낱이 공개되는 다소 면구스런 것이지만 세월을 격한 우리의 눈에는 하나의 작품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기만 하다(정승혜). 영화가 motion picture이고 장면의 연속일 뿐이라는 사실도 다시금 새롭게 다가온다(사진실). 영화도 그림인데 사진이 안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찍힌 그림에 주목하는 작업이라면 사진은 액자가 된다. 액자나 표구를 통해서도 화가나 의뢰인, 소장자 등의 정보를 알 수 있듯 이런 사진은 다양한 자료와 만나며 주저리주저리 사연을 풀어놓는다(윤진영). 금강산 이곳저곳에 깊숙이 새겨져 세월을 잊은 듯한 바위글씨가 그림과 사진에 오롯한가 하면(고연희), 기록에만 전할 뿐 실체는 묘연한 정조의 귤 술잔이 행간에서 재구성되기도 한다(김동준). 하드픽처, 소프트픽처라고나 할까.
다양한 전공자와 그들의 협동이 빚어낸 오늘의 한국학을 횡으로 갈라 보이는 날카로운 매스이자 대중을 치열한 학문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쾌적한 요트, 이것이 이 책의 그림이다.

「문헌과해석」 100호 발행을 향해
대표 저자가 머리글에서 밝히고 있듯(7쪽) 이 책은 계간지 「문헌과해석」 통권 50호 발간을 기념해서 기획되었다. 1997년 창간 이래 학교 초월, 전공 불문이라는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학계와 대중에 가장 풍성한 담론을 생산해왔고, 현재 한국학을 대표하는 교양잡지로 뿌리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학!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는 다양한 주제가 교차하고 충돌하며 성장해 가고 있는 한국학을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음악, 연극, 복식, 군사 등 문·사·철·예를 아우르는 젊은 인문학자 27인이 저마다 기막힌 볼거리와 사연을 띄워 안내한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옛그림을 꼼꼼히 읽어 그 시대와 마주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그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복원해낸다. 예를 들어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와 <화성능행도병>은 미술사·역사학·서지학의 시선을 거치며 풍성한 읽을거리로 재탄생한다.

 

 

 

 

옛 그림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보다 [연합뉴스] 2011.02.21

 

 

# 1.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손권의 참모였던 육적이 어느 날 원술을 만났다. 원술은 귤을 내놓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육적의 소매에서 귤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무안했던 육적은 "늙은 어머님께 올리려 차마 먹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말 한마디가 원술의 마음을 울렸다.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귤은 귀하고 특별한 과일이었다.

정조는 귤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플 때는 귤차를 달여 올리게 했고, 정조 자신도 몸이 좋지 않을 때는 향귤차를 마셨다. 정조는 귤 껍질로 만든 귤잔인 귤배(橘盃)를 신하들에게 가장 많이 하사한 임금이기도 했다. 정조 6년에는 과거 시험의 수석을 차지한 이시수에게, 정조 8년에는 시험을 주관한 서형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10여 명에게 귤배를 하사했다.

또 귤배명(橘杯銘)이라는 독특한 문학작품을 지어 체제공, 이문원 등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 2. 다산 정약용은 보기와 달리 곰살궂은 데가 있었다. 친한 벗과 제자를 위해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1810년 강진에 귀양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아내의 편지와 치마가 배달됐다. 빛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이다.

다산은 붉은빛이 다 바래 노을빛이 된 치마의 솔기를 조심스레 뜯어 공책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해줄 당부의 말을 적어내려 갔다.

'하피첩'은 이렇게 정약용이 아내의 치마를 잘라 만든 서첩이다.

정약용은 또 아내의 치마로 만든 천 위에 시집간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 폭을 그려주었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부인이 여섯 폭짜리 낡은 치마를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돼 빛이 바랬기에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고 그 나머지를 써서 작은 가리개로 만들어 딸에게 준다."

신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 펴냄, 512쪽. 3만2천원)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그림과 고문헌을 통해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음악, 연극, 복식 등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들여다본 책이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투명성'에서부터 '정조 임금이 하사한 귤 술잔' '다산의 부정이 담긴 매조도 두 폭'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외무고시' '400년 전 화가의 눈에 비친 북악과 숙정문' '구한말 서울의 한 상업가 이야기' 등 시대와 주제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필자로는 인문학 대중화의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와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 중견학자들을 비롯해 김동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이경미 미주리주립대 방문교수 등 소장학자와 신진학자들을 포함해 총 27명이 참여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다'에서는 그림과 문예가 만나 빚어내는 풍경을 담아냈으며 2부 '그림 속살과 내면 풍경'에선 옛 그림에 담긴 역사와 그림 속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3부 '무대와 그림이 만날 때'에서는 무대 현장과 그 주변에 관한 스케치를 담았으며 4부 '그림, 인간과 역사를 논하다'에선 그림을 통해 역사를 되살려낸다.

옛 사람들의 삶의 멋과 향기가 책 곳곳에서 숨쉰다. 옛 그림과 고문헌을 통해 역사와 문화, 철학, 미술 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들의 솜씨도 단연 발군이다.

이 책은 한국학 계간지 '문헌과해석' 통권 50호 발간을 기념해 기획됐다. 

 

 

옛 그림으로 풀어본 역사 [문화일보] 2011.02.22

 

 

‘시경(詩經)’을 보면 동아시아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든 배다리(주교·舟橋)의 역사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에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정종(재위 923~949) 연간에 임진강에 부교가 설치됐다는 기록을 필두로 조선시대 왕의 행차에 배다리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배다리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조선후기 정조(재위 1776~1800)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에 설치한 배다리가 유일한 예다. 정조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사도세자 묘인 화성 현륭원에 행차한 행사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이를 8폭 병풍으로 그린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에 각각 실린 주교도(舟橋圖)가 바로 그것.

정조가 1790년 작성한 주교의 제도를 규격화한 ‘주교지남(舟橋指南)’과 1793년 배다리 전담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이를 수정해 올린 ‘주교절목(舟橋節目)’ 등을 보면 36척의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횡판(橫板)이라 불리는 판자를 덮은 뒤 모래와 황토, 잔디를 깔아 배다리를 완성했다. 김문식(사학) 단국대 교수는 최근 출간된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에 기고한 ‘정조의 화성행차와 배다리’에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주교도(사진)를 “조선 태종 때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뒤 정조 대에 정비된 한강의 배다리에 관한 그림과 기록 중 백미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의궤 그림은 배다리 구조 설명에 주안점을 둔 반면, 병풍 그림(‘노량주교도’)은 정조의 행차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둔 게 특징이다.

정조 연간 왕실회화의 기능과 정치성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유재빈씨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주교도로 보는 정조시대 실용회화’란 글을 통해, 기존 연구에서 서양화법의 적용으로 주목받았던 ‘노량주교도’의 투시원근법이 실용적인 새로운 기술의 반영인 동시에 이러한 기술이 상징하는 군주의 공덕(功德)을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중견 및 소장 한국학 연구자 27명이 필진으로 참여해 그림에 얽힌 다채로운 볼거리와 사연을 풀어낸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는 한국학 관련 공부 모임인 ‘문헌과 해석’이 발행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이 통권 50호를 발간한 것을 기념해 기획된 것이다. 지난 1997년 가을 창간호를 발간한 ‘문헌과 해석’은 출범 13년째인 지난 2010년 봄 50호를 돌파했다. ‘문헌과 해석’은 늦었지만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G-five센트럴프라자에서 50호 출간 기념 단행본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다’와 ‘그림의 속살과 내면 풍경’, ‘무대와 그림이 만날 때’, ‘그림, 인간과 역사를 논하다’ 등 4부로 구성된 책에는 이종묵(서울대)·안대회(성균관대)·정민(한양대)·김문식 교수 등 오늘날 한국학계를 이끄는 연구자들이 대거 필자로 참여해 옛 그림과 사진을 매개로 지식의 향연을 펼친다. 초정 박제가가 청나라 명사 손형에게 선물받아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뒤 윤행임·추사 김정희·윤정현 등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전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의종(재위 1628~1644)의 현금(玄琴) 이야기를 다룬 안대회 교수의 ‘숭정황제의 현금과 조선 지식인’ 등 흥미로운 글이 많이 수록돼 있다.

 

 

 

알면 보이느니 옛사람들 꿈도 욕망도… [한겨레] 2011.02.22

탈장르 한국학 모임 ‘문헌과 해석’ 책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펴내 그림·사진 속 시대상 객관적 추론


이렇게 야한 매화도 있었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세기 조선 화가 능호관 이인상 (1710~60)의 그림 <야매>(밤에 핀 매화·도판)엔 꼿꼿한 매화도, 달도 없다. 휙 번진 먹덩어리 속 흐트러지듯 피어난 꽃봉오리, 흐물흐물한 등걸들이 붉은 기운 속에 꿈결처럼 떠 있을 뿐이다. 지조를 상징한다는 매화는, 대개 옛 문인화 속에서 늦겨울 달밤 날카로운 등걸 위에 매운 향기 뿜으며 피지 않았던가. 유명한 선비화가 능호관은 왜 이런 추상화 같은 일탈을 꾀했을까.

한시 연구자인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최근 나온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 3만2천원)에서 능호관의 파격적 붓질을 18세기 조선 선비들의 멋 바람 탓으로 읽는다. 겨울밤 냉수를 얼려 얼음등을 만들고 안에 촛불을 밝혀 매화꽃을 감상하는 시짓기 모임이 당시 선비들 유행이었는데, 능호관이 이런 모임에서 얼음등촉에 비친 매화의 환상적 이미지에 반해 그렸을 거란 얘기다.

18세기 화가 이유신의 <가헌관매도>에도 집 안에 꽃핀 분매 앞에서 선비들이 모여 촛불에 비춰보며 감상하는 풍경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정신 수양을 넘어 뜯어보는 즐거움 자체로 당대인들의 시각 인식이 바뀌었다는 징표다.

<한국학…>은 옛 그림 속에 숨은 당대 사람들의 갈래갈래 삶과 꿈, 욕망 같은 내면들을 만나게 하는 책이다.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음악, 군사 등 전통 한국학 분야를 갈고닦아온 중견·소장 학자 27명이 그림 길라잡이를 한다. 책의 모태는 이들의 공부모임이자 지난 연말 50호를 넘긴 계간지 이름인 ‘문헌과 해석’. 책 필자인 안대회(성균관대), 정민(한양대), 이종묵(서울대) 교수 등이 주도해온 이 모임은 1997년 이래 매주 금요일 어김없이 발표회를 열며 소통하는 탈장르 한국학의 발판을 다져왔다.

<문헌과 해석> 50호 발간을 맞아 낸 이 저술의 묘미는 여러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통섭과 집요한 분석의 힘에서 우러나오는 듯하다. 특히 구한말 서울 부유층 일가족 잔치 사진을 추적해 가족사에 깃든 시대상을 복원한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씨의 글은 돋보인다. 출처를 고증해 사진 속 가족이 무관 출신 상인 주인섭 일가이며, 배경인 병풍은 이미지를 대조해 현재 미국 한 대학으로 건너간 십장생 병풍도일 것이라는 추론까지 끄집어낸다.

1866년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자들의 현지 송별식을 담은 그림 <선교사의 출발>(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장)을 뜯어본 정병설 서울대 교수의 글도 이채롭다. 송별식에 나온 저명음악가 구노, 그림 그린 화가의 아들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근대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의 유년 모습 등을 짚어냈다.

연구 역량에 따라 글들의 편차가 다소 엇갈리긴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한 궁중 광대들의 재조명(사진실),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 전쟁도에 엿보이는 조선군 전투 방식 변화(노영구),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현악기 숭정금이 조선에 들어온 사연(안대회), 국내 양복 패션 선구가 된 1882년 일본 수신사 박영효의 양복 사진의 촬영 전말(이경미) 등 호기심 넘치는 읽을거리들이 허물을 덮어준다. 그만큼 <한국학…>은 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에서 막강한 연구 집단으로 훌쩍 성장한 ‘문헌과 해석’의 폭넓은 학문 편력을 과시하는 저술이다.

필자들은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레스토랑에서 <문헌과 해석> 50호 발간과 책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이제 한국학계 등뼈가 된 자신들의 성취를 느꺼워했다.

 

 

문화도 역사도 우리 옛 그림 속에 다 있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국민일보] 2011.02.24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 외 26인/태학사


인문학 열풍을 타고 한국학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니, 인문학 열기의 핵심이 한국학이라 해도 좋을 터. 지리, 미술, 음악, 문학, 연극…. 여러 분야의 연구층이 활발한 대화를 나누며 한국학의 지평도 차츰 넓어졌다. 시기로는 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아우르는 역사 곳곳의 이야기들을 국학 계간지 ‘문헌과 해석’에 관여했던 인문학자 27명이 모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로 펴냈다. 옛 그림이나 유물,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학 입문서로도 손색 없는 대중서다.

예사롭게 지나갈 소재도 국학자에겐 훌륭한 이야기거리가 된다. 요즘에는 겨울마다 수량이 넘쳐 처치곤란한 귤은 조선시대엔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정조는 역대 군주 중에서도 귤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아프면 귤차를 끓여 올렸고, 신하들에게 ‘귤책(橘策)’이라는 책문을 쓰게 하기도 했단다. 어떤 모양의 잔인지는 미상이지만, 신하들에게 귤껍질로 만든 술잔을 종종 하사했다. 정조 자신도 향귤차(香橘茶)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귤을 바치는 제주 대정현·정의현 백성들에게 그가 내린 글이 남아 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를 멀리한다고 하지만 멀리 있어도 나의 백성이요 가까이 있어도 나의 백성이다. 귤이 소반에 올라오면 너희들이 고생스럽게 재배했음을 떠올리고, 말이 궁궐 뜰에 들어오면 너희들이 분주하게 길렀음을 생각한다”(111쪽) 그러나 민간의 귤나무에 손을 뻗치는 관(官)의 횡포에, 백성들은 왕의 글에 감동하기보다 집 앞의 나무를 베는 쪽을 택했던 모양이다.

쓴웃음이 나오는 사연도 있다. 명(明)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유품인 현금(弦琴) ‘숭정금’은 조선에 있었다. 조선에 오게 된 이유가 재미있다. 원래 소유자는 청대 한족 관리였던 손형이었는데, 명대의 유물을 관리하다 오해받는 게 싫어 벗 박제가에게 준 것이다. 손형은 애물단지를 처리한 것일지 몰라도 명의 유민임을 자처했던 조선 사대부들은 이 현금을 비할 바 없이 귀하게 여겼다. 박제가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서 죽은 삼학사 윤집의 후손 윤행임에게 현금을 주었다. 윤씨 일가는 오랫동안 숭정금의 주인이었고, 잠시 숭정금을 보관한 적 있는 김정희는 윤행임의 아들 윤정현에게 ‘숭정금을 보관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숭정금실’(崇禎琴室) 현판을 써 주기도 했다. 이들과 친했던 양반들도 숭정금의 유래를 노래한 시를 앞다퉈 지었다. ‘명나라 유민’인 양반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한 이 보물도 지금은 소실됐다.

고금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듯 이 책에 실린 그림들 역시 ‘읽기’가 중요하다. 유배지 강진에 있으면서 아내가 보내준 치마에 그림과 시를 적어 자식들에게 보낸 정약용의 ‘매조도’, 17세의 선조에게 68세의 이황이 올린 ‘성학십도’의 뒷이야기를 알고 나면 두 학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전해진다. 두 장의 전투화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詩箋剖胡圖)’와 ‘파진대적도(擺陳對敵圖)’를 통해서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조선군의 변화를 읽어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서는 거문고가 유행했던 당시 사대부들의 ‘풍류 레퍼토리’를, 서양식 정장을 입은 박영효의 사진에서는 물밀 듯 들이닥치는 근대의 조류에 구한말 사람들이 겪었을 정신적 충격을 본다. 예술과 역사가 서로 넘나들고, 정치와 정서가 뒤섞인다. 국학 연구에서 통섭과 융합이 중요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27명의 학자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다. 이 작업은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군데군데 충분히 삽입된 각종 도판과 국학 문외한들을 배려한 세심한 설명이, 교양으로 역사를 즐기는 이들 뿐 아니라 처음 한국학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하다. 고전의 한문 원전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읽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분량이 500여쪽에 달하지만 지치지도 않는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김동준 외 27인/태학사) [파이낸셜뉴스] 2011.02.24



한류 열풍이 뜨거운 가운데 한국학을 찾는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한류의 확산과 지속방안으로 한국학을 꼽는가 하면 한류의 고급화를 위해 한국학을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에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 및 학계의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다. 문학·미술·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저자 27인도 "우리는 이 책이 한국학의 현 수준에 대한 자부로 읽히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됐다. 1부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다'는 그림과 문예가 만나 빚어내는 애틋한 풍경을 포착했고, 2부 '그림의 속살과 내면 풍경'은 옛 그림을 꼼꼼히 읽어 독자에게 그 시대와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3부 '무대와 그림이 만날 때'는 무대 현장과 그 주변에 관한 스케치를 담았다. 4부 '그림, 인간과 역사를 논하다'는 그림을 통해 역사를 복원해냈다. 이 책의 특징은 하나의 주제를 서로 다른 전공 분야의 필자가 접근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것. 융합의 시대에 한국학을 세계적인 국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우선과제로 학제 간 연구, 분과학문 간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3만2000원

 

 

 

저들은 누구고 왜 여기 있나… 사진 속의 단서로 캐낸 역사 [한국일보] 2011.02.25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 김동준 등 지음/태학사 발행·512쪽·3만2,000원


문헌과해석誌 한국학자 27명 신라~구한말 그림·사진 연구 역사적 배경·등장인물 삶 파헤쳐

프랑스 파리의 한 성당에 걸린 샤를 쿠베르탱(1822~1908)의 유화 '선교사의 출발' 한 점이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림부터 살펴보자. 성당 안 강단에 네 명의 선교사가 서 있다. 이들 앞으로 사람들이 한 명씩 나와 포옹을 하며 작별을 고한다. 헌데 등장인물이 예사롭지 않다. '아베마리아'로 유명한 작곡가 구노(1818~93)와 조선 선교사 브르트니에르(1838~66)신부다. 또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도 이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 장면의 전후 배경에 물음표를 던진 정 교수는 그림에 등장한 네 명의 선교사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본다.

저자는 먼저 역사적 배경부터 훑는다. 19세기 아시아는 가톨릭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프랑스 선교자들도 포교 활동을 위해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로 대거 들어왔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1820~98)의 쇄국 정책 하에 선교자 박해가 매우 심했다. 책은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의 삶을 하나씩 들춰 내면서 그림에 감동을 더한다.

이외에도 26편이 더 있다. 한국학 연구자들이 한 편 한 편 풀어낸 연구 결과물은 다채롭고 재미있다. 책은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음악 복식 등 전통 한국학 분야를 치열하게 연구해 온 중견, 소장학자 27명이 역사와 예술을 넘나들며 이야깃거리를 쓴 것이다. 이야기는 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를 아우른다. 집필자는 1997년 창간된 계간지 문헌과해석 멤버들이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발표 모임을 가지고 장르를 초월해 한국학을 연구해 왔다. 이 책은 창간 50호 발간을 기념해 기획됐다.

책은 여러 학문 영역을 넘나들고, 치밀하게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구한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가족의 단체 사진 뒤 병풍을 추적해 시대상을 살핀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비슷한 사진을 찾아내 사진 속 주인공이 무관 출신 상인 주인섭이며, 그의 부인 박씨의 회갑잔치임을 알아낸다. 인물들에 가려진 병풍의 출처도 기어이 찾아낸다. 1882년 일본 사진사가 찍은 박영효의 사진 한 점에서 개항 이후 조선의 복식 제도 개혁의 단서를 찾아내는 이경미 교수의 글도 놓치기 아깝다.

이외에도 책에 소개된 실학자 박제가와 시서화에 능했던 나빙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림과 시, 유배지에서 부인이 보내 준 치마에 그림과 시를 적어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낸 정약용의 '매조도' 등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저자들은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도판과 삽화들도 충실히 실었다. 500여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쉽게 읽혀 한국학 입문서로 적당하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 외 지음/태학사 펴냄) [매일경제] 2013.02.25

 

 

문ㆍ사ㆍ철ㆍ예를 아우른 다양한 분야 젊은 인문학자 27인이 그림을 통해 독자들을 한국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옛 그림을 소개하며 그 시대와 마주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독자들은 역사를 복원하게 된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와 '화성능행도병'은 미술사학, 역사학, 그리고 서지학의 세 가지 시선으로 조명돼 풍성한 읽을 거리로 다시 태어난다.

 

 

 

 

옛 그림으로 풀어낸 우리 역사와 문화 [서울경제] 2011.02.25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정민·김동준 외 지음, 태학사 펴냄)


'문헌과 해석' 한국학 연구자 27명 참여 / 한문학서 복식사까지 입체적으로 분석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인기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은 조선조 정조임금 시절이 배경이었다. 드라마에서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이 좋은 유생들에게 귀한 감귤을 하사했다. '황감제(黃柑製)'라는 이 시험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그림을 따라 이 시절의 역사로 들어가 보자. 김남길이라는 18세기 화가가 남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한 장면인 '귤림풍악(橘林風樂)'이라는 그림이다. 감귤을 수확하는 제주 감사는 종묘(宗廟)에 진상할 준비에 음력 9월부터 속을 태웠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귤은 귀한 과일이었고 '문화적 네트워크'를 이룰 만큼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배경은 제주 관아 북쪽의 북과원(北果園). 제주 목사 이형상(1653~1733)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선비와 기녀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귤나무 사이로 선비들도 보이고 주변은 대나무가 방풍림처럼 둘러싸고 있다. 앞쪽에 위치한 두 건물의 현판이 눈에 띈다. 화면 왼쪽 망경루(望京樓)는 북쪽에 계신 왕을 사모한다는 뜻이고 그 옆 귤림당(橘林堂)은 국토 남쪽 끝에서 맑은 과일을 바친다는 '충정'을 상징한다. 그림 하단에는 1702년 임오년 제주 고원에서 수확한 귤의 수량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한 김동준 이화여대 교수는 옛 시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귤을 좇아 정조 임금이 하사한 '귤 술잔', 이른바 귤배(橘杯)의 정체를 찾아간다. 김 교수는 "툭하면 귤배를 하사한 정조의 의도는 맑은 향기를 품은 귤을 닮으라는 의도일 수도, 껍질까지도 아끼는 재활용의 슬기가 배어든 것일 수도 있다"고 풀이한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귤잔에 새긴 잠언이라는 뜻의 귤배명(橘杯銘)이라는 독특한 글을 통해 제왕의 여유와 포용을 아끼는 신하에게 전했다. 비록 귤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없으나 저자는 다양한 문헌을 통해 그 모양은 물론 향기까지 머릿 속에 그려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은 학술단체인 '문헌과 해석'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한국학 연구자 27명이 필자로 참여해 완성했다. 계간지 '문헌과 해석'의 50호 발간을 기념해 기획된 것이니 13년의 이상의 내공이 응축된 것이다. 한국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필진들은 한문학ㆍ역사학ㆍ언어학ㆍ미술사학은 물론 군사학ㆍ연극사ㆍ복식사 등을 고루 아우른다. 가령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와 '화성능행도병'은 역사학(김문식)과 미술사(유재빈), 서지학(옥영정)의 다각도 분석을 통해 입체적이고 풍성한 역사를 보여준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투명성(김선영)에서 지혜와 담(淡)의 미학을 볼 수 있는가 하면 다산 정약용이 부정(父情)으로 그린 매조도(梅鳥圖) 두 폭(정민),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외무고시(정승혜), 400년 전 화가의 눈에 비친 북악과 숙정문(진준헌) 등 시대와 주제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펼쳐진다. 학문 간 통섭을 추구한 학술 논문이되 일반인이 읽기 편하게 분량은 짧게, 소재는 참신한 것으로 엄선해 대중과 소통할 접점을 잘 잡아냈다. 3만2,000원.

 

 

 

옛그림에 얽힌 사연 엿보기 [동아일보] 2011.02.26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ㅣ정민 김동준 외 지음 512쪽·3만2000원·태학사


‘한 폭의 그림과 한 수의 시에서 빚어낸 생각이 끝이 없다.’

저자의 말대로 두 점의 매조도(梅鳥圖)에 얽힌 이야기가 설명과 함께 끝없이 이어진다.

1813년 7월 14일 다산 정약용은 큰딸의 혼인을 맞아 아내 홍씨가 3년 전에 보내온 치마를 잘라 딸을 위해 매조도를 그려 주었다. 아래 위 두 겹으로 매화 가지가 가로로 걸려 있고, 아래쪽 가지에는 멧새 두 마리가 엇갈려 앉았다.

그로부터 35일 후에 다산은 똑같은 크기에 비슷한 구도의 매조도를 한 점 더 그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록색 깃털의 멧새 한 마리만이 금세라도 날아갈 자세로 가지에 앉아 있다. 그림 아래에 적힌 7언절구 한 수도 왠지 슬프다.

딸을 시집보내고 그림과 시를 그려 준 다산은 얼마 안 있어 초당 생활 중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보았다. 혹 자기가 떠나면 혼자 남겨질 갓 태어난 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은 아닐까. 다산의 감춰진 애틋한 부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이렇듯 그림에 얽힌 다양한 볼거리와 사연을 담았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을 비롯해 사진실 중앙대 연희예술학부 교수, 이경화 세미원연꽃박물관 학예사 등 다양한 전공의 한국학 연구자 27명이 참여했다.

애틋한 부정뿐만이 아니다. 그림 속에 담겨진 전술(戰術)의 변화도 읽어낸다. 1588년 정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시전부락 여진족을 토벌하는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와 심하 지역에 파병된 조선군이 후금에 대항해 진을 펼친 ‘파진대적도(擺陣對賊圖)’에는 임진왜란 전후 조선군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그림을 통해 기병 위주의 편제와 전술체계를 가진 조선군이 임진왜란 이후 조총 제작 등에 따라 급속히 보병 위주의 편제와 전술 체계로 재편되었다고 말한다.

기록에만 전할 뿐 실체는 알 수 없는 정조의 귤 술잔부터 서양식 정장을 입은 박영효의 사진까지 책은 시대와 분야를 넘나들며 학문적 통섭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로 참여한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기 전에 정보이자 역사다. 그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복원하는 일은 한국학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했다. 1부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다’는 그림과 문예가 만나 빚어내는 애틋한 풍경들을 담았고, 2부 ‘그림의 속살과 내면 풍경’에서는 옛 그림에 담긴 역사와 그림 속 사람들의 속내를 훔쳐보며 그 시대와 마주 선다. 3부 ‘무대와 그림이 만날 때’는 무대 현장과 그 주변에 관한 스케치를 담았고, 4부 ‘그림, 인간과 역사를 논하다’에서는 그림을 통해 역사를 복원해낸다.

대중과 한국학의 만남을 표방하며 대표적인 한국학 교양잡지로 뿌리내린 계간 ‘문헌과 해석’ 통권 50호 발간을 기념해 기획됐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주간경향] 2011.03.03

 


공부모임을 통해 의기투합한 인문학자 27명이 그림과 사진을 매개로 특정 주제를 풀어낸 한국학 연구서다. 고려시대 불화부터 개화기 박영효의 양장 사진까지, 군사분야부터 시정의 악극까지, 문학·회화·공연·철학·역사 등 한국문화의 안팎을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정민 김동준 외 지음·태학사·3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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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 읽기 문화 그리기ㅣ고연희·김동준 정민외 지음ㅣ태학사

 

 

옛 그림을 인문학으로 탐사하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 읽기, 문화 그리기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문학, 철학, 역사, 회화, 복식 등 문화 전반을 망라한 다양한 도판을 찾아 매만진 32명의 집필진은 한국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그림에 자신의 삶과 시대를 담았던 조상들을 기리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한국, 중국, 일본의 교류까지도 그림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권말에는 그림과 사진 등을 통해 내용을 쉽게 확인할 있도록 ‘찾아보기’를 제공했다.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총 5개의 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우정과 교감, 고독과 위안, 자기 응시와 보편적 이상이 담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시대의 적층 위에 떠오른 흔적과 기록을 살펴보고, 감각적인 그림 속에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환경을 읽어낸다. 또한 국가의 권위를 표현한 ‘표상’과 세계간의 교류의 장을 연 ‘소통’의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는 네이버캐스트 ‘한국학, 그림을 만나다’ 연재를 통해 먼저 소개되었다. 옛 그림을 통해 한국학을 탐구한다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이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대중과 소통’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연구자 - 출판사 - 포털이 연계하여 함께 풀어간 것이다. 단순히 어렵다고 여겼던 ‘한국학’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동시에 우리 역사의 면면을 배우게 된다.

 

사도세자의 ‘개 그림’부터 ‘조선 통신사 행렬도’까지!
옛 그림 속 풍경의 인문학적 탐사로 한국학의 새 지평을 열다


궁궐에서도 개를 길렀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와인을 마셨을까? 우리나라 지도는 과연 어떤 모양일까? 조선 왕의 옥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가 ‘봉황도’로 격하된 까닭은? 조선 왕조 초상예술의 결정체라 할 어진御眞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1795년 수원 행차 시 정조는 왜 6천여 명의 수행 인원을 대동했나? 안산시 단원구와 단원 김홍도의 관계는 무엇이며, 소설의 안팎에서 그림을 그린 조선 여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
그림으로 옛사람들이 즐긴 진미를 음미하고, 파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상상하며 눈을 감는다.
새로운 세계가 황홀경처럼 펼쳐지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 거리를 거닐며,
날렵하고 매끄러운 도자기 위 비췻빛 하늘을 나는 학을 바라본다.
추사 김정희와 그 친구들이 나눈 깊고 애잔한 우정에 공감하고,
방랑의 천재 시인 이백의 삶에 취한다. 권세가의 아름다운 정원을 훔쳐보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가짜 즉위식을 파헤친다.

그림과 인문을 관통하여 한국학의 대지를 탐사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근 20년간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수능 점수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국사는 배우고 싶지 않다”는 고등학생들부터 조선을 건국한 이가 태조 이성계인 줄도 모르는 어른들까지. 이 같은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림’이라는 흥미로운 제재를 통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한국)’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가 태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총 5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부터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교류까지, 그림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이 그림에 자신의 삶과 시대를 담았다면, 이제 우리가 그림을 통해 그것을 읽어낼 차례인 것이다. 이 책은 ‘한국학’이라는 붓으로 그린 ‘한국’이라는 그림이다.

◎ 이 책의 내용


마음―그림, 가슴을 열다

외로움과 그리움, 혹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바람, 이 마음을 어찌할까?
만물도 그림도 그 시작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을 감싼 인간의 정과 내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림을 통해 한자리에 모은 옛사람들의 우정과 교감, 고독과 위안, 자기 응시와 보편적 이상을 곱씹다 보면 그들 또한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왕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비운의 왕자 사조세자가 그린 ‘개 그림’ 속에서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왕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고독했던 사도세자가 마음을 달래려 그림을 그렸다면,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황량한 이미지의 산수화를 통해 벗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황산 김유근을 이름이다. 그들은 드넓은 하늘 아래 나무처럼 서서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이백을 그리워하는 두보의 마음으로 좋은 그림으로 공유하고, 벗의 그림에 화제를 붙였다.
문인화가 이인상도 친구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영조 임금에게 직언으로 상소했다가 귀양살이하는 이양천에게 편지를 보내 “자네의 측백나무 그림이 여기 서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네! 자네도 훌륭한 화가야!”라고 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만고의 절개를 상징하는 측백나무에 군주의 귀를 거스르며 직언한 그의 상소를 비유하여 유명 화가라고 한 것이다. 이인상의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인 그의 발랄한 내면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인상의 글씨인 ‘고전古篆’에도 이처럼 해학이 가득하다.
이 밖에도 안산 바닷가의 박달나무 언덕 단원檀園에 모여 앉은 선비들의 마음자리, 아이에게 젖을 물린 아내를 바라보는 남성의 애틋한 마음, 흔들리다 저려오면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人心)을 도표로 그려 가르친 그림까지. 그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람은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 오늘날의 내 마음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옛 그림을 보며 스스로를 반추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감각―그림, 그 감각의 세계
몸 안에서 감각이 요동한다. 보고 만지고 즐기려는 몸의 요구가 감각의 영토를 만든다. 조선의 문인들은 어떠하였을까? 그들의 오감은 무엇을 감촉하고 빚어내었을까?
그림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감각을 자극하기도 했다. 맛있는 것을 음미하고 싶은 마음,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 즐거운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모두 감각이기 때문이다. 포도 그림을 보면 포도주 맛이 생각나고, 게 그림에 하얀 게살 생각으로 군침이 먼저 돌았다. 그림으로나마 붉은 꽃과 기이한 괴석, 젊은 여인의 몸을 소유하려 들기도 했다. 탐하고 가지려는 모든 감각을 만족시킬 수 없어 그림이 그려지고 글이 더해졌던 것이리라. 커다란 초록 잎 열대 식물인 파초의 강렬한 인상과 그 잎에 떨어지는 여름 빗소리, 노란 국화와 향기에서 빚어진 의미와 도상, 대나무의 기상을 수묵으로 표현한 묵죽은 감각이 그림 속에 풀어놓은 여러 색깔이다. 감각이 새겨진 옛 그림을 보노라면, 생리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혹은 정치적 환경이 그것을 건드리고 조정했던 것을 살필 수 있다. 감각의 제국은 언제나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사연―이야기를 품은 그림
하나의 이야기가 자기의 사연을 거느리고 그림으로 바뀌면, 그 속에 작동하는 시대의 문화 코드가 깊어진다. 이야기는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감각의 제국이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면, 시대는 그림 속에 사연으로 녹아든다. 그림의 뒤편에서는 언제나 인간사가 배접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품은 그림’들은 그렇게 시대의 적층 위에 떠오른 흔적과 기록이다. 예를 들어, 오랑캐에게 잡혀간 채문희가 자기 아이들과 헤어져 중국으로 돌아오는 내용을 담은 ‘문희별자’의 슬픈 장면은 조선 선비들에게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코드로 감상되었다. 풍류시인으로 각색되어 풍류주인의 이미지로 크게 유행한 당나라 이태백과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특별히 이상화되어 자주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송나라의 학자 소옹은 그림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역사 속 이야기일 것이다. 김홍도의 걸작을 주문하고 소유한 역관 이민식, 같은 호號로 활동하여 최근까지 혼동을 일으킨 조선후기 두 화가의 실상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의 발굴 또한 우리를 그림의 깊은 사연으로 안내해준다. 조선후기 소설에는 그림을 그려 삶의 애환을 표현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사회를 반영하기에, 옛 그림문화의 영역을 확대하여 바라보게 한다.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조선 문사들이 지은 독백의 글도 흥미롭다. 초상화와 초상자찬 속에 자기표현의 방식과 전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라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정치가이기 이전에 시詩·문文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표상―그림이 감싸 안은 국가
왕조와 국가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표상은 미술 분야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이며, 이미지의 위력과 가치를 생각하게 해주는 자료들이다.
‘표상’은 국가적 차원에서 기억되고 기호화된 광경이다. 초상화와 초상자찬이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표상’은 국가를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근대 역사의 급변 속에서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이미지도 함께 흔들린 까닭이다. 일제는 ‘호랑이’ 모양의 우리나라 지도 형상을 ‘토끼’로 비하했고, 이것은 해방 후에도 우리 교육에 지속되었다. 조선 왕의 권좌에 ‘일월오봉도’가 안치되었던 전통은 식민지 치하에서 금빛 바탕의 ‘봉황도’로 대체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에 의해 선택된 봉황도가 봉황 표장으로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통령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가 날조한 순종 황제 즉위식 가짜 이미지는 세계로 유포되어버린 지 이미 너무 오래다.
그러나 역사 이미지를 생산하려는 우리 조상들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예컨대 정조는 반차도班次圖를 재구하여 자신의 행적을 효과적으로 기록했다. 환궁이라는 시점과 혜경궁께 올리는 다반 진상이라는 의식은 각각 정조가 원행을 통해서 의도하였던 수도권의 발전과 대민 정치, 그리고 선친의 추존을 통한 왕위 정통성 강화를 드러내기 위해 채택한 것이다. 역사 기억을 제조하여 자신의 표상을 남겨준 사례다. 대한제국을 천명한 고종도 황제가 된 권위를 세우고자 제단 조경단을 새롭게 구축했다.
참담한 한국동란을 부산의 한 창고 속에서 잘 견딘 조선 왕의 초상, 즉 어진御眞이 서울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화재로 불탄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어간다. 사라진 어진들의 불멸화는 오늘날의 과제이다.
나라든 제왕이든 자신의 격에 어울리는 상징과 형식을 입어야 비로소 표상성을 획득한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표상은 무엇인가? 표상의 구축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고민해볼 대목이다.

소통―그림, 세계를 보다
그림의 이미지는 경계를 넘고 시대를 건너 전달된다. 시공을 넘나든 이미지들은 무엇을 소통시켰을까?
그림은 때때로 경계를 넘어 세계로 통하는 창문을 열기도 했다. 청자 하면 떠오르는 구름과 학의 문양, 즉 운학은 고려의 영원한 초상이지만, 이 문양은 원래 중국 송나라의 그림과 깃발에서 시작된 상서祥瑞의 메시지였다. 구름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학이 송나라 황실에서부터 시작해 고려청자 속 비췻빛 하늘까지 날아든 셈이다. 이미지로 소통된 여사와 정치가 운학문에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북경에 간 조선후기 연행사의 눈에 비친 유리창琉璃廠 서점 거리는 세계로 통하는 통로이자 황홀경 그 자체였다.
일본의 서적 속에 새겨진 조선의 풍속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일본 책 속의 조선 풍속화 두 장은 다른 나라를 건나도보고 표현하려는 욕구로 빚어진 이미지였다. ‘조선 통신사’가 감상한 일본의 궁중 음악 이미지, 일본이 기록한 ‘조선 통신사’ 수행 악대 그림도 양국이 서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소통은 한·중, 한·일뿐만 아니라 중·일 간에도 이루어졌다. 눈알이 주렁주렁 달린 복장의 약장수는 중국 송나라 연극을 표현한 그림에 등장했던 특별한 인물상이다. 일본의 가부키를 그린 우키요에浮世繪에도 덜컥 등장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눈알 복장 인물상이 전달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흐름이며 소통이다.
국제 전화는 물론 비행기,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는 다른 나라와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지금의 소통은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가? 이것은 역사 속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 것인가?

그림 속의 한국학, 한국학 속의 그림
2년 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로 뭉쳤던 계간 《문헌과 해석》 집필진이 또다시 의기투합한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해묵은 풍경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화면 밖으로 되살려냈다. 32명의 집필진은 문학, 철학, 역사, 회화, 복식 등 문화 전반을 망라하여 국내와 중국, 일본, 미국 등 각지의 소장 도판 목록을 뒤지고 하나하나 보석처럼 매만지며 다듬었다. 덕분에 이 책 속에는 옛사람들이 즐긴 진미부터 새로운 세계가 황홀경처럼 펼쳐지는 북경 유리창 거리, 권세가의 아름다운 정원까지 230여 개의 도면圖面이 은성하게 반짝인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수준 높은 고전 회화를 단지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고전 속에 있다고 답한다. 여기서 고전이란 문학 작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또한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자 고전이다. 그림을 읽어낼 수 있는 인문학적 힘을 기른다면, 우리 고전 회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옛 그림 속 풍경으로 읽은 인문학 [연합뉴스] 2013.11.12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도세자와, 부자가 아니라 군신 관계로만 대하며 늘 엄격했던 영조를 그린 듯하다." (20쪽)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알려진 '개그림'에 대한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과 교수의 설명이다.

한반도의 윤곽 안에 무엇을 그려 넣느냐는 문제를 대할 때도 단순히 그림을 해석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 식견이 필요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모습을 중국을 향해 고개 숙여 읍하는 노인의 형상으로 인식했다. 신라 말 도선대사는 우리나라의 땅을 대륙에 정박한 배의 형국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기 때 도쿄제국대의 고토분지로가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 모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자리 잡게 됐다. 이후 최남선은 대륙을 향해 할퀴며 달려드는 듯한 호랑이 지도를 선보였고, 다양한 '한반도 호랑이 지도'가 이어졌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한반도 지도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족의식과 정체성 문제에 맞물린 일종의 담론을 형성해왔다"고 말한다.

신간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태학사. 552쪽. 3만5천원)'는 이처럼 우리 시대의 대표 인문학자 32명이 옛 그림 속에서 인문학 등 한국학의 정수(精髓)를 살펴본 독특한 책이다.

2년 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를 쓴 필진이 다시 뭉쳤다. 문학, 철학, 역사, 회화, 복식 등 문화 전반을 망라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각지의 도면(圖面) 230여 개를 분석했다.

다룬 내용에 따라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5부로 나눴다.

정우봉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자모육아' 등에서 모자상의 세계를 들춰봤고, 함영대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 연구하려 한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의 '심학도(心學圖)' 등의 의미를 살펴봤다.

음식과 맛 등 감각의 세계를 다룬 분야에서는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강혜선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이 세부 주제에 맞춰 글을 썼다.

또 유미나 원광대 미술사학과 조교수는 오랑캐에게 잡혀간 채문희가 자기 아들과 헤어져 중국으로 돌아오는 내용을 담은 '문희별자도'의 슬픈 장면에서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사연'을 읽어낸다.

소통 분야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일본의 장편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에 신윤복 화풍의 풍속화가 실린 사연을 추적(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하기도 한다.

조선 왕의 옥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일제에 의해 '봉황도'로 대체된 뒤 지금까지 대통령을 상징하는 표장이 된 사연, 조선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오늘날 다시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 안산시 단원구와 단원 김홍도에 얽힌 이야기와 관련 그림 등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대통령 상징 봉황, 사실은 일제의 잔재 [한국경제] 2013.11.15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 고연희·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 551쪽 / 3만5000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는 그림으로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오는 개 그림은 두 마리 강아지가 어미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미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이 그림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부왕 영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기록으로는 접할 수 없는 사도세자의 마음이 감상자에게 전해진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역사·철학·문학·회화·복식 등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전공한 32명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그림으로 읽는 한국문화사다. 글로써 파악하기 어려웠던 문화의 씨줄과 날줄을 그림을 통해 복원하기 위한 시도다.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1부 ‘마음’에서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정과 내면을 들여다보고 2부 ‘감각’에서는 인간적 욕구와 취향을 살핀다. 3부에서는 사연을 간직한 작품들과 만나며 4부에서는 그림 속에 똬리를 튼 국가의 문제를, 5부에서는 조선의 울타리를 넘어 동아시아로 향한 선인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추사 김정희는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의 황량한 산수 그림으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퇴계 이황이 게 그림을 펼쳐 놓고 시를 읊조린 것은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헛헛함을 그렇게라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옛 사람의 마음 표현 방식을 읽게 한다. 조선시대 옥좌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일제 강점기에 ‘봉황도’로 대치된 것은 일제의 조선 격하 의도 때문인데 이것이 오늘날 대통령의 상징이 된 것이라는 지적, 일제가 한반도 지형을 호랑이 대신 토끼 모양이라고 유포한 것은 조선인의 기상을 꺾으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는 풀이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읽는다.

이미지는 문서 다큐먼트와 함께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대표적인 문화적 지층이다. 그간 미술사 전공자들만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해온 이미지가 한국학 전반을 아우르는 학자들에 의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당대인의 따뜻한 마음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이 지닌 최고의 미덕이다.

 

 

옛 그림에 켜켜이 숨은…한국인의 정신세계 [헤럴드경제] 2013.11.15

사도세자의 애견은 어찌됐을까?...‘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사도세자의 아픔 담은 ‘개 그림’ / 겸재 정선의 ‘파초가 있는 풍경’
문화·정치·사회적 환경이 오롯히 / 32명 학자가 만든 한국학의 성찬

길쭉하고 튼실하게 쭉 뻗은 앞다리, 동그랗고 몽실몽실한 귀와 오리처럼 긴 주둥이, 유난스럽게 짙고 긴 꼬리를 꼬고 무덤덤하게 뒤를 돌아보는 개 꽁무니로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반갑다고 날래게 달려오는 그림 한 점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사도세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개 그림’이다.

비운의 왕세자가 웬 개 그림을 그렸을까. 인문학자는 그림을 뜯어보고 사료를 꼼꼼히 살펴 한 마리 개에서 그린 이의 마음과 당시 생활상을 찾아낸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자식도 아껴주는 이로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도제자의 아픔은 개의 무연한 눈길 하나로 드러난다. 사도세자의 개는 토종견과는 다른 사냥개의 모습이다. 당시 궁중 화원이었던 김두량과 변상벽의 그림에서도 발견되는 개다. 인문학자의 상상력은 이를 사도세자의 애견으로 추정한다. 그림을 좋아한 세자는 유명 화원을 불러 함께 애견을 그렸다. 그 애견은 어디서 왔으며, 어찌 됐을까.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태학사)는 옛 그림으로 본 인문학이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정민 한양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등 32명의 인문학자가 그림 속 우리 문화와 역사를 읽어냈다.

책은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모두 5개의 부로 구성, 그린 이의 마음을 담아낸 작품을 비롯해 살아있는 듯 감각을 일깨우는 그림, 상징성을 지닌 그림, 한ㆍ중ㆍ일 3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그림 등 그 속을 들여다봤다.

대상을 보고 느낀 걸 그려보려는 게 그림의 기원이라면, 문인화는 선비의 취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심사정의 ‘자국괴석’은 바위 틈새에 핀 국화의 오연함을 도도하게 보여준다. 국화는 인고와 절개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군자의 자화상으로 읊어졌다. 유덕장의 ‘묵죽도’는 댓잎의 날카로움이 화폭을 찌를 듯하다. 파초도 문인이 사랑한 벗이었다. 담양의 소쇄원을 그린 ‘소쇄원도’에는 입구에 파초 한 그루가 보인다. 김인후는 소쇄원에 부친 시 마흔여덟 수 중 한 수로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를 지었다. 선비는 파초의 시원한 너른 잎과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문취에 시끄러운 마음을 흘려보낸 것이다. 문화코드가 그렇듯이 이야기를 지닌 그림은 세월과 함께 덧붙여지고 변주되면서 의미가 깊어진다. 오랑캐에게 잡혀간 한나라 귀족 채홍의 딸로 재주 많은 여인 문희의 사연을 그린 ‘문희별자도’는 대표적인 경우다. 오랑캐 땅에서 좌현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12년을 지낸 문희는 한나라 왕이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오지만 어린 두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애통할 뿐이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였던 김상헌은 전쟁 후 청에 압송돼 심양에 억루됐을 때 ‘문희별자도’라는 그림 한 폭을 얻어 들어온다. 후에 손자인 김수증에 물려주고 김수증이 송시열에게 발문을 의뢰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희별자도’는 주목받게 된다.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송시열은 발문에 명 중심 동북아질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랑캐 땅에 잡혀갔다 돌아온 채문희 이야기는 12세기 남송으로, 17세기 조선으로 이어진다.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여인은 심양으로 끌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지만 ‘환향녀’란 딱지를 붙여 냉대했다. 조선의 성리학자에게 절개를 잃는 건 최대의 오욕이었다. 시선 이백의 일화도 종종 그림의 주제가 됐다. 문인화가 이경은은 이백의 전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렸다. 술취한 이백이 당시 최고권력가였던 환관 고력사에게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다.

그림에는 문화ㆍ정치ㆍ사회적 환경이 녹아있어 옛 그림을 잘 읽으면 한국의 내력을 잘 알 수 있다.

 

 

궁궐 연희때 포도주… 그림으로 읽어낸 ‘조선의 속살’ [문화일보] 2013.11.15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 /태학사


그림을 통해서 조선시대 내면의 코드를 읽어 낸 책이다. 정사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역사의 속살을 그림을 통해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역사적 식견이 풍부한 내로라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수년에 걸친 작업을 묶어낸 결실이라 내용이 풍성하고 울림도 강하다. ‘궁궐에서도 개를 길렀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와인을 마셨을까.’ 조선 왕의 옥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가 ‘봉황도’로 격하된 까닭은.

이런 의문을 풀어가면서 여러 연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한 권의 책으로 묶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관점의 갈래를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으로 나눈 점이 돋보인다. 그 때문에 한국학의 정수(精髓)를 맛보면서 아름다운 미술관을 둘러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음’편에서는 옛 그림을 불러내 그림에 깃든 고독과 분노, 위안, 교감 등을 다뤘다.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개 그림’들에는 어린 왕자의 절규가 애처롭게 표현돼 있다.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도세자와 부자가 아니라 군신 관계로만 대하며 늘 엄격했던 영조를 그린 듯하다.” (20쪽)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알려진 개 그림에 대한 정병설(국어국문학) 서울대 교수의 설명이다. 추사 김정희의 산수화 및 그의 벗들이 그린 19세기 쓸쓸한 산수풍경의 이미지들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매체로 활용됐다. 조선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전서체 및 이를 기반으로 그려진 그의 회화 예술 속에는 발랄한 내면이 번득인다.

강세황이 그린 안산 바닷가 박달나무 언덕 단원(檀園)에 붉은 노을 드는 작은 한 화면으로 지금은 사라진 단원의 그림을 탐방하면 그림 속의 언덕에 모여 앉은 선비들의 생각과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마음 가운데 아이에게 젖을 물린 아내 혹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마음이 가장 짠하지 않을까. 신윤복의 아버지 신윤평이 그린 ‘자모의 육아’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이 흐른다.

‘감각’에서는 신체의 다양한 감각과 이에 따른 욕구 혹은 취향이 반영된 그림을 다뤘다. 신체의 촉감에서 감질나는 간지러움까지 표현된 신윤복의 풍속화, 미각에 홀려 군침을 흘렸다는 ‘포도’와 ‘게’ 그림 및 신선계 선미(仙味)로 농후한 ‘반도(蟠桃·복숭아)’ 그림이 소개된다.

책에 따르면 고려 왕실에서 와인을 마셨고, 포도주는 조선시대 연희에도 자주 올랐다. 파초에 듣는 빗소리와 국화의 향기에서 청각과 후각의 문화 코드를 읽는다. 수묵으로 표현된 대나무의 이미지에 대한 특별한 취향도 그림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인격의 탄력을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연구자들은 감각으로 표현되는 문화·정치적 배경을 탐구했다.

그림 한 폭에 숨겨진 이야기의 전말을 풀어내기도 한다. 오랑캐에게 잡혀갔던 채문희가 중국으로 돌아올 때 아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문희별자(文姬別子)’의 슬픈 장면이 조선 선비들에게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문제로 거론됐다. 당나라의 이태백은 풍류 시인으로 각색되어 풍류 주인의 이미지로 크게 유행했다면, 송나라 학자 소옹은 꽃길의 수레 속 여유작작한 모습으로 이상화돼 그려졌다.

그림의 내용뿐 아니라 그림의 제작, 소장, 평가에도 사연이 깃들었다. 역관이던 김민식이 김홍도와 심사정 걸작을 주문하고 소유했던 사정이 재미있다. 같은 시대에 같은 호(號) ‘초원(蕉園)’으로 활동하여 최근까지 혼동을 일으킨 두 화가, 김석신과 이수민의 사연도 담겼다.

‘표상’편은 주로 왕조와 국가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표상 즉 그림의 이미지가 행사한 위력의 측면과 표상의 조작문제를 다루었다. 근대로 드는 역사의 급변 속에서 한국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모습을 중국을 향해 고개 숙여 읍하는 노인의 형상으로 인식했다. 근대기에는 ‘호랑이’로 바뀌었고 일제는 ‘토끼’로 낮추었다.

일제 침략기 때 도쿄(東京)제국대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 모양이라고 주장하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 호랑이 지도론’이 존재했다. 경북 포항시 호미곶면 대보리 호미등(虎尾嶝)이란 지명을 보자. 호미등은 장기곶의 본래 이름이다. 이곳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꼬리에 해당됐다. 그래서 호미등으로 불렸다. 이후 최남선은 대륙을 향해 할퀴며 달려드는 듯한 호랑이 지도를 선보였고, 다양한 ‘한반도 호랑이 지도’가 이어졌다.

조선 왕의 권좌에는 ‘일월오봉도’가 있었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금빛 바탕의 ‘봉황도’로 격하됐다. 그 흔적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 표장의 봉황에 여실하다. 현전하는 순종황제의 즉위식 이미지들은 일제가 날조한 가짜 이미지인데, 세계로 유포돼 전한다.

조선시대 내부에서도 역사적 이미지의 생산 노력이 상당했다. 정조는 6000명의 수행원을 동반한 ‘반차도(班次圖)’를 만들어 자신의 행적을 효과적으로 기록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제공해 후손의 기억자료로 만들어 놓은 전략이었다.

대한제국을 천명한 고종은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제단 조경단을 새롭게 구축했다. 참담한 한국동란을 부산의 한 창고 속에서 잘 견딘 조선 왕의 초상, 즉 어진(御眞)들은 전쟁 후 서울로 옮기려 할 찰나에 화재로 불탔다.

‘소통’편에서는 시공간을 넘나든 이미지들이 다뤄졌다. 일본에서 판각된 어설픈 조선풍속 두 장면은 조선을 건너보고 표현하려는 일본인의 욕구였다. 조선 통신사가 감상한 일본의 궁중 음악 이미지나 일본이 기록한 ‘조선 통신사’ 수행 악대 그림에도 시선의 차이가 드러난다. 수십 개의 눈알이 주렁주렁 달린 복장의 약장수 모습이 해학적이다. 이는 중국 송나라 연극을 묘사한 그림에 등장했다가, 일본의 가부키(歌舞伎)를 그린 우키요에(浮世繪)에 덜컥 나타난다. 옛 동전에 새겨졌던 이미지들은 돌고 도는 돈의 속성으로 이리저리 소통됐다.

 

 

 

사도세자가 그린 '개' 자신을 표현한걸까 [매일경제] 2013.11.15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 고연희·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펴냄

 

 

조선시대 가장 불운한 왕자는 사도세자(1735~1762)였다. 아버지 영조와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8~9세 무렵이었다.

식탐이 강한 세자는 몸이 점점 불어났고,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국정의 일부를 대리청정했는데 이때 아버지로부터 더 큰 멸시와 무시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늘 긴장하고 움츠러들었다.

급기야는 강박증 때문인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의대증'을 앓았고 살인을 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세자가 죽인 사람만 1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세자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 닭이나 짐승을 죽여야 화가 내린다"고도 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는 짐승이라도 죽였던 것이다.

1760년 어느 날 그는 애견을 죽이기에 이른다.

사도세자는 학자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시를 짓고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설이 농후한 '개 그림'이 한 점 있다. 그림 가운데 큰 개가 있고, 작은 개 두 마리가 큰 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작은 개는 기쁜 듯 달려오는 데 큰 개는 무심한 표정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작은 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내놓는다.

사도세자는 궁궐에서 개를 길렀을까.

사도세자가 개를 길렀다는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궁궐에도 개가 있었음은 '승정원 일기' 등의 자료에 나온다. 그림은 시대의 반영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알면 알수록 그림을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최근 출간된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읽기다. 이 책은 인문학자들의 관점에서 여러 질문을 던진다. '옛 사람들도 와인을 마셨을까' '우리나라 지도는 언제부터 호랑이 모양이었을까' '조선 왕조 어진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책 속에는 230여 개의 도면이 수록돼 있다. 문학과 철학, 역사, 회화, 복식 등 문화 전반을 씨줄과 날줄처럼 입체적으로 엮어낸다.

 

 

 

옛 그림 속에 숨은 사도세자의 절규 [서울경제] 2013.11.15

■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정민 외 31명 지음, 태학사 펴냄)


대표 인문학자 32명 한·중·일 등 그림 해석 역사·문학적 의미 담아

병자호란 직후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 주전론자인 김상헌(1570~1652)은 청에 압송돼 선양(瀋陽)에 억류됐을 때 '문희별자도'라는 그림 한 폭을 얻었다. '문희가 아들과 헤어지다'란 뜻의 '문희별자도'는 중국 후한 말의 학자 채옹의 여식이자 뛰어난 문학가였던 채문희라는 여인이 흉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그림이다. 포로로 끌려간 문희는 오랑캐의 자식을 낳아 키우며 12년을 보내다가 십 수년이 지나서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타지에서의 오랜 고생 끝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기쁨보다는 그곳에서 낳은 아들과의 생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문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대표적인 인문학자 32인이 보석처럼 추리고 선별해 이야기로 구성한 이 책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3국의 수준 높은 옛 그림을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역사와 문학, 철학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3만 5,000원.

 

 

 


우리 옛 그림 속에서 한국의 숨결을 읽다 [세계일보] 2013.11.15

사도세자 ‘개 그림’왕자의 아픔·절규 / 왕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태학사/3만5000원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는 그림으로 애처로운 상흔을 달랬다. 사도세자가 그린 '개 그림' 속에는 왕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는 "엄격한 아버지 영조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던 사도세자의 아픔이 묻어난다"고 풀이했다. 신간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국내 인문학자 32명이 옛 그림 속에서 한국의 숨결을 찾아 전하는 독특한 책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반도 형상이 토끼 모양이라고 배웠다가 지금은 호랑이 형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우리나라의 모습을 중국을 향해 고개 숙여 읍하는 노인의 형상으로 그렸다. 신라 말 도선대사는 우리나라의 땅을 대륙에 정박한 배의 형국으로 인식했다. 그러다 일제강점 때 도쿄제국대의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 모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껏 전해진다.

최남선은 한반도를 대륙을 향해 할퀴며 달려드는 호랑이로 그렸다. 그러나 고토 이전에 이미 '한반도 호랑이 지도론'은 존재했다. 일례로, 포항시 호미곶면 대보리 호미등(虎尾嶝)이란 지명을 들 수 있다. 호미등은 '장기곶'이 본 이름인데, 이곳이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볼 때 꼬리에 해당한다 하여 호미등이라 불렸다고 한다. 호랑이 모양 지도가 토끼 모양으로 돌변한 것은, 서양 열강에 먹히는 근대기 조선을 표상하는 이미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한반도 지도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족의식과 정체성 문제에 맞물린 일종의 담론이었다고 풀이한다.

일제는 그림을 통해서도 조선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데 주력했다. 조선 왕의 왕좌 뒤에 세워졌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봉황도(鳳凰圖)'로 바꾼 것도 일제였다. 해와 달보다 초라한 봉황으로 대체한 것.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가 선택한 봉황도가 봉황 표장으로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통령 상징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에게 일본군 복식인 육군 대장복을 입혀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황제 즉위식을 일러스트로 그려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순종 황제가 대한제국과 결별한 채 일제의 휘하로 들어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정우봉 고려대 교수는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자모육아'를 통해 조선 후기 모자상을 들춰봤고, 함영대 고려대 연구교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율곡 이이의 '심학도(心學圖)' 등의 의미를 살펴봤다.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 강혜선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등은 음식과 세시풍속의 그림을 풀이했다. 유미나 원광대 미술사 교수는 청군에 잡혀간 중국 여인 채문희가 자기 아들과 헤어져 중국으로 돌아오는 슬픈 내용을 담은 '문희별자도'에서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고난을 읽어낸다.

인문학자 32인은 그림을 통해 문학, 철학, 역사, 회화, 복식 등 문화 전반을 망라했다. 이들은 국내와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소장 도판 목록을 뒤져 하나하나 풀이해 책으로 엮어 냈다. 책 속에는 모두 230여 점의 옛그림이 해설과 함께 들어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옛 그림도 더불어 감상할 수 있다.

 

 

 

시서화에 능통했던 선인들… 서얼 화가 이인상은 왜 ‘검선도’를 그렸을까 [경향신문] 2013.11.15

▲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 | 태학사 | 552쪽 3만5000원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진수는 공자의 독백이 아닌 제자들과의 대화이다. ‘팔일’편에 나오는 아래 글이 그 실례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는다. “선생님, ‘살포시 웃으니 보조개가 예쁘고, 눈동자 선명한 눈이 아름답구나.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하는 것 같구나’라는 <시경>의 구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공자가 “흰 비단 바탕을 마련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자하가 스승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예절보다는 인격을 먼저 갖추라는 얘기군요”라고 말했다. 그제사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비로소 자하와 시를 얘기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짧은 대화이지만, 그림 그리는 순서를 얘기하며 삶의 철학을 끄집어내고, 학문의 자세까지 거론하고 있다. 문학, 예술, 윤리학, 공부론이 망라돼 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학문의 통섭, 융합, 지행합일의 문제가 다 들어있는 셈이다.

이처럼 옛날의 공부는 구획되거나 분리돼 있지 않고 한 덩어리였다. 그래서 문·사·철을 꿰는 학자가 나오고, 시·서·화에 능통한 삼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소동파가 말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은 당나라 시인 왕유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림을 그리고 여백에 시나 문장을 쓰면서 시와 그림의 일체를 꾀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글이 어우러진 <경교명승첩>을 ‘시화상간첩(詩畵相看帖)’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인문학자 32명이 쓴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과거 통합의 전통이 오늘날 학문 연구와 글쓰기에서 어떻게 구현, 계승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우리 옛 그림 읽기의 글 모음집이다. 그렇다고 엄밀한 의미의 미술평론은 아니다. 필자 가운데 동양회화사나 한국미술사 전공자가 더러 있으나 역사, 한문학, 문헌학 연구자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그림과 문화를 읽어내는 시각과 깊이가 남다르다.

맨 처음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개 그림’에 대한 글을 보자. 필자(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국문학자이자 사도세자 연구의 권위자답게 그림에서 왕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 등을 읽어낸다. 필자는 “(그림 속의)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나아가 필자는 ‘동궐도’와 같은 그림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을 통해 궁궐에서 개나 고양이를 길렀으며 사도세자가 애완견을 데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결론짓는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보물 제782호)는 이파리가 져 성긴 나무숲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경학 연구자인 필자(함영대 고려대 연구교수)에게 이 그림은 풍경화가 아니라 풍경에 의탁해 화가의 정취를 그린 ‘심화(心畵)’이다. 필자는 송나라 진덕수의 <심경>-명대 정민정의 <심경부주>-이황의 <성학십도>-이이의 <인심도심도>로 이어지는 유학자들의 마음 공부의 전통을 설명하며 김홍도 역시 마음을 ‘소림명월도’에 담아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 이인상의 그림을 ‘서얼화’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것은 신분사를 통해 그림을 해석하는 경우다. 필자(장진성 서울대 교수)는 이인상의 ‘검선도’가 세상에 쓰이지 못한 서얼 화가의 비애를 그린 서얼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필자는 혹한 속에서 눈을 뒤집어쓴 채 버티고 있는 노송을 그린 이인상의 또 다른 작품 ‘설송도’ 역시 서얼이 맞이하는 죽음을 빗댄 ‘서얼화’라고 풀이한다.

‘화중유시’라고 하지만 그림과 시가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송시열 초상’(국보 제239호)에 보이는 송시열은 우람한 풍채에 당당하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작 ‘초상을 보며 나 자신을 경계하다(書畵像自警)’라는 글에 “네 모습은 파리하게 여위고 네 학문은 공소하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필자(김기완 연세대 강사)는 자신에게 엄격했던 선비들의 자의식의 발로라고 해석한다. “관직의 고하에 상관없이 수척한 외모, 즉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청빈하고 초탈한 선비”를 선호했던 옛 문인들의 문학적 초상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옛 그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선, 김홍도, 유숙, 장승업은 모두 ‘꽃 너머 작은 수레(花外小車)’라는 화제로 그림을 그렸다. 한 노인이 작은 수레를 타고 꽃구경을 하는 이 그림들은 모두 송나라 시인·철학자인 소강절의 청빈한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 청와대의 봉황 표장은 조선시대 군왕을 상징한 ‘일월오봉’이 일제강점기에 봉황 도안으로 대체된 데서 비롯됐다. 필자(김수진 서울대 강사)는 봉황이 1956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때 엠블럼으로 쓰인 이후 대통령의 상징물으로 자리 잡았다며 봉황표장을 ‘만들어진 전통’의 하나로 해석했다.

책은 옛 그림 속 풍경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이다. 공부 모임 ‘문헌과해석’이 기획해 ‘네이버캐스트’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화폭마다 아로새긴 사연들.. 전통그림으로 한국학 읽기 [한국일보] 2013.11.15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ㅣ고연희 등 지음ㆍ태학사 발행ㆍ552쪽ㆍ3만5,000원
사도세자가 그린 개 그림 중국 '문희별자도' 이야기 등 5가지 테마로 나눠 묶어 당대 문화 취향·의식 고찰

 

 

인터넷 포털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전통시대의 그림을 매개로 당시의 문화적 취향과 지식인들의 의식, 나아가 한중일 문화 소통 모습의 일단까지 짚어본 책이다.

안대회, 정민, 정병설 교수 등 계간 <문헌과 해석> 편집에 참여하고 있는 국문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학자 32명의 글을 다섯 가지 테마로 나눠 묶었다. '마음'에서는 비운의 왕자인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 그림이 등장한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한 처지가 이 그림에 녹아 있다는 설명이다. 추사의 '영영백운도'처럼 드넓은 하늘 아래 외로이 서 있는 두보의 모습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고, 퇴계, 율곡의 '심학도' '인심도심도'에서는 전통시대 철학자들이 마음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상하려 했던가를 알 수 있다.

'감각'으로 분류한 대목에서 독자들의 눈이 호사한다. 조선 문인들의 오감을 표현한 그림들 중 포도, 게 그림 및 그와 관련된 시들, 파초 국화 대나무 같은 문인화의 단골 소재들이 등장한다. '표상'에서는 한반도가 일찌감치 호랑이 형상으로 그려졌지만 그것이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토끼 형상으로 탈바꿈된 사연, 왕의 초상인 어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통'에서는 고려청자의 운학(雲鶴) 이미지가 '상서(祥瑞)'의 메시지를 담은 송나라 그림에서 온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이미지로 알고 있는 요소들이 중국 전래라는 것은 전통시대 중국 문화의 영향력을 새삼 일깨운다. 일본의 옛 장편역사소설 <에혼다이코기>에 실린 신윤복 풍의 풍속화는 해외의 풍물을 실감 나게 그리고자 한 일본 화가 교쿠잔의 노력의 결실이었다는 사연도 소개됐다.

눈길 가는 것은 '사연'으로 분류해 소개한 글들이다. 그 중에서도 유미나 원광대 조교수의 '문희별자도를 보는 조선 후기 문사들의 시각'은 전통 유학자들의 의식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중국 후한시대 학자 채옹의 외동딸이었던 문희는 중국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똑똑한 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인물. 그의 오점은 흉노에게 잡혀가 좌현왕의 첩이 된 뒤 12년 동안 아들 둘을 낳고 산 것이다. '문희별자도'는 그 '오랑캐' 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문희가 아들들과 이별하는 애달픈 사연을 담은 그림이다. 필자가 이 중국 그림 이야기를 한 것은 문희의 삶이 병자호란에 진 뒤 끌려간 당시 조선인의 삶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주전론자로 포로로 붙잡혀 갔던 김상헌이 얻어 온 '문희별자도'의 발문을 부탁 받은 우암 송시열은 그림의 사연보다는 멸망한 왕조인 명 황제에 대한 존경과 찬사에 급급한다. 실학자 이덕무의 시는 한술 더 떠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들뜬 봄날, 놓던 자수 잠깐 놓고서/ 채문희가 자식 이별하는 그림 보며 웃는다/ 부끄러워라, 박명하여 오랑캐에게 잡혀갔으면/ 죽음을 당할망정 두 아이는 왜 낳았던가' 조선 문인들의 의식 속에 문희는 정조를 잃은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비슷한 필자들이 참여해 수년 전 나온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에 이은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학'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있지만 거기에 끌려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학 일반의 모습을 아울러서 고루 전하거나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전통시대 그림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여담처럼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인문학의 보고 한국화, 오늘을 비추는 거울/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중앙일보] 2013.11.16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ㅣ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ㅣ태학사, 552쪽ㅣ3만5000원


이 책의 제목 머리에는 ‘우리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읽기와 문화 그리기’라는 메김말이 붙어 있다. 처음 이 책을 대하는 독자라면 도대체 무슨 책인가 감이 안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 읽으신 분이 있을 것도 같은데 2년 전에도 비슷한 책이 나온 바 있다. 그 책 제목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이고, 책머리에는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감이 잡힐 것이다. 옛 그림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다양한 접근이다. 옛 그림 읽기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내가 그 전공이다. 그러나 32명의 필자들은 옛 그림 읽기라는 것이 어디 ‘면허 난 사람’만 얘기한다더냐는 식으로 각자의 전공에 따라 자신이 본 대로, 탐구한 대로 서술해 간 것이다.

예를 들어 혜원(蕙園) 신윤복이 그린 ‘여인의 팔을 당기는 남정네’를 그린 춘화에 프롤로그 같은 그림이 있다. 내가 이 그림을 보는 시각은 인물묘사의 정확성과 괴석(怪石)과 나무를 표현한 아련한 필치이다. 그러나 필자는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괴석과 배롱나무가 당시 얼마나 값비싼 귀물이었고 중국산 태호석(太湖石)이 어떻게 수입돼 18세기 대가집에 장식되었는가를 논증한다. 그러면서 뼈있게 한마디 던진다. “감각의 제국은 언제나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이 책의 필자들이 핵심을 멀찍이서 관조하는 것은 마치 동양화의 공염법(空染法)이라는 기법을 연상케 한다. 달을 그릴 때 달무리를 그림으로써 빈 칸이 달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림의 저변만 맴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번 책에서 나는 이인상의 명작 ‘검선도(劍僊圖)’에 나오는 취설옹(醉雪翁)이 유후(柳逅)라는 선배 문인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석사논문으로 이인상을 쓰면서 그가 누구인지 몰라 당시 ‘문학사상’에 누가 알면 가르쳐 달라는 수필까지 쓴 적이 있다. 30년 묵은 궁금증이 후련히 풀렸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총 5부로 구성됐다. 제1부 ‘마음 그림, 가슴을 열다’는 그림을 감싼 인간의 정과 내면으로 안내한다. 우정과 교감, 고독과 위안, 자기 응시와 보편적 이상이 한자리에 묶였다. 제2부 ‘감각 그림, 그 감각의 세계’에서는 보고 만지고 즐기려는 몸의 요구가 빚어낸 감각의 영토를 담았다. 입맛과 향기, 파초에 듣는 시원한 빗방울과 댓잎에 깃든 인격의 탄력이 감촉된다. 제3부 ‘사연이야기를 품은 그림’은 숨겨진 그림 이야기의 방으로 초대한다. 사연의 적층 위에 떠오른 흔적과 기록이 흥미롭다. 제4부 ‘표상 그림이 감싸 안은 국가’는 국가적 차원에서 기억되고 기호화된 광경이다. 나라든 제왕이든 자신의 격에 어울리는 상징과 형식을 입어야 비로소 표상성이 획득됨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제5부 ‘소통 그림, 세계를 보다’를 살피다 보면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로 진출한 선조들의 모습이 확인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수준 높은 옛 그림 등 이미지 230여 개를 통해 오늘의 ‘나’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선택한 소재는 정말로 다양하다. 신한평의 ‘젖먹이는 어머니’, 이재관의 ‘파초’, 김홍도의 ‘단원아집’, 궁궐의 ‘일월오봉도’, ‘상감청자 운학문 매병’, ‘일본 소설 속의 조선 풍속화’…. 이런 그림들을 매개로 필자들은 그들 말대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종횡무진 구사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내심 얼마나 흐뭇한 마음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다름 아니라 우리시대에 이런 집체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 한국학과 인문학의 희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32명의 필자 중 내가 수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학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학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인지라 누가 무엇이 전공인지는 동업자(?)로서 이름 석자는 알고 있다. 한국사·한국문학사·한국한문학사·한국철학사·중국문학사·동양사상사·한국미술사·한국복식사 등등 한마디로 한국학 내지 인문학의 중견학자들이다.

이들은 계간 학술지 ‘문헌과 해석’팀이다. 이들은 10여 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다 같이 모여 차례로 발표하면서 기탄없이 토론하고 그렇 게 수렴한 성과를 이렇게 책으로 펴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 인문학이 위기다, 우리 학문은 학제간의 교류가 없는 것이 병폐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대신하여 말한다. 우리의 젊은 인문학자들은 그 흔한 연구비 한 푼 지원받지 못해도 스스로가 신이 나서 이렇게 우리 인문학을 가꾸어가고 있다고. 이번 주 금요일에도 이들의 모임이 있었을 것이고 2년 쯤 뒤엔 또 한 권의 책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문학은 살아 있음을 이 책은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 미술저술가.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7, 일본편 1~2), 『화인열전』『완당평전』등을 펴냈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 정민 외 지음) [조선일보] 2013.11.16

 

 

우리 시대 대표 인문학자 32명이 옛 그림 속에서 한국학의 정수를 살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부터 한·중·일의 교류까지 그림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책. 태학사, 3만5000원.

 

 

 

 

동생에 엄마 젖 뺏긴 신윤복의 질투? [동아일보] 2013.11.16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 김동준 정민 외 지음/552쪽·3만5000원/태학사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개 그림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새끼 강아지 두 마리가 반가운 몸짓으로 큰 개를 향해 달려가는데 정작 큰 개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이 그림을 두고 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 같다”고 해석한다. 사도세자가 어려서부터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지 못했듯이 이 그림은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도세자, 그리고 그에게 늘 엄격했던 영조를 그렸다는 분석이다.

연구모임 ‘문헌과 해석’의 인문학자 32명이 함께 쓴 이 책은 단순히 옛 그림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옛 그림을 매개로 한국의 역사 철학 문학 회화를 줄줄이 풀어낸다. 한국한문학, 조선시대사, 한국미술사, 한국고전소설, 한국음악학 등 한국학 각 분야 전공자들의 내공이 모여 알찬 양서를 빚어 냈다. 대중을 상대로 읽기 쉽게 썼고 컬러 도판 230여 점이 볼만하다. 이들이 2011년 출간한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의 후속편 격이다. 

흥미로운 그림은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중 하나인 ‘아기 업은 여인’. 혜원은 상식을 거슬러 아기 업은 여인마저 에로틱하게 표현했다. 날씬한 여인이 꽉 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아기를 업고 있다. 여인은 인심 넉넉해 보이는 여염집 아낙네가 아니라 기생에 가까운 외모이며, 차갑게 입을 다문 채 뭔가 생각에 빠져 있다. 반면 혜원의 아버지인 신한평의 그림 ‘자모육아’에서는 후덕한 여인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여인의 오른쪽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동생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것을 질투하는 듯한 표정으로 징징 울고 있는 게 재미있다. 여인 왼쪽의 여자 아이는 다 컸다는 듯 의젓해 보인다. 정우봉 고려대 교수는 “실제로 신한평은 두 아들과 외동딸을 두었는데, 우는 아이가 신윤복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18세기 화가 이인상의 ‘검선도(劍仙圖)’가 “서얼에 의한, 서얼을 위한, 서얼에 관한 그림”이라는 장진성 서울대 교수의 분석도 눈길을 끈다. 검선도는 서얼인 이인상이 역시 서얼인 선배 유후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유후가 거대한 소나무 아래서 신선처럼 수염을 휘날리며 매서운 눈매를 하고 앉아 있다. 장 교수는 그의 오른 무릎 아래 그려진 칼에 주목한다. 능력이 뛰어나도 고위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서얼에게 칼집 속에 든 칼은 무용지물이라는 점에서 신분적 불평등의 상징이었다. 이인상은 칼집에서 뽑은 칼을 그려 넣어 그 반대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물론 칼이 극히 일부만 뽑힌 것은 유후가 하급 관료로 일했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인물은 되지 못했음을 미묘하게 암시한다는 것이다.

책 속의 멋스러운 옛 그림과 저자들의 입담이 독서를 부추긴다. 초겨울 뜨뜻한 방에서 편안한 맘으로 뒤적이기에 딱 좋은 인문서다.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그림 보시오…옛그림인줄 알았더니 인문학 보이오 [서울신문] 2013.11.16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태학사/552쪽/3만 5000원

 

화폭 정중앙에 큰 개가 태산처럼 자리하고 있다. 작은 개 두 마리가 반갑게 달려오는데도 고개만 돌려 바라볼 뿐 무덤덤한 표정이다. 얼핏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그림이지만 그린 이가 사도세자라면 그림 속 구도는 달리 보인다. 엄격한 아버지 영조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광증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이 이 한 장의 그림 안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 느껴진다. 학자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이 강했던 사도세자는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말이 전해지는 이 ‘개 그림’에서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을 읽어 낸다. 따뜻한 부정을 느끼고 싶어 한 사도세자의 안타까운 마음과 아들을 부자 관계가 아니라 군신 관계로만 대했던 영조의 냉정한 태도를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고 풀이한다. 이 그림이 진짜 사도세자의 것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고, 큰 개와 작은 개의 품종이 다른 점이 미심쩍긴 하나 매우 흥미로운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인문학자 32명이 옛 그림 속 풍경에서 당대의 풍속과 시대상, 가치 등을 탐사한 책이다. 2년 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를 펴낸 계간 ‘문헌과 해석’ 팀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해 그림을 통한 한국학 탐구의 속편을 낸 것.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5개 키워드로 나눠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부터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교류까지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는 한국학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정우봉 고려대 교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인 어머니의 마음에 주목한다. 신윤복의 부친 신한평이 그린 ‘자모육아’는 어린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동생을 질투하듯 투정을 부리는 큰아들과 의젓하게 혼자 놀고 있는 딸을 좌우에 배치해 단란한 가족의 한때를 포착해 냈다. 신한평은 실제 윤복·윤수 두 아들과 외동딸을 두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림 속 울고 있는 아이를 신윤복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애틋한 모습은 현대에 들어 박수근의 ‘모자’(母子)로 이어졌다.

잎이 크고 넓은 파초는 남국의 열대식물처럼 보이지만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일찍부터 재배됐고, 제주도에선 자생했다. 그런 덕에 옛 문인들의 시문과 그림 속에는 파초가 자주 등장한다. 은자의 정원, 도사의 정원, 문인의 정원에는 늘 파초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강혜선 성신여대 교수는 파초 그림 중에서 가장 시원하게 그려진 예로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를 꼽았다. 사방이 신록으로 빽빽하게 에워싸인 사랑채 정원에서 탕건 차림을 한 흰 수염의 주인이 선물을 들고 온 방문객을 맞는 정다운 모습이 눈을 즐겁게 한다.

왕조와 국가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표상은 미술 분야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한반도 형상과 관련한 담론의 흐름을 다양한 도판과 함께 짚었다. 지금은 호랑이 지도론이 당연시되지만 일제시대에 유포된 토끼 형상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토끼 형상은 1903년 일본 도쿄국제대학의 고토 분지로가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하지만 포항시 호미곶면 대보리 호미등이란 지명이 보여 주듯 이전부터 한반도 호랑이 지도론은 존재했다. 정 교수는 “호랑이 모양 지도가 토끼 모양으로 돌변한 것은 급변하는 근대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이미지가 함께 흔들렸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했다.

책에는 이 밖에 1795년 수원 행차 시 정조가 왜 600명의 수행 인원을 대동했고, 안산시 단원구와 단원 김홍도의 관계는 무엇이며, 소설의 안팎에서 그림을 그린 조선 여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들을 소개한다. 글 하나가 20여쪽 안팎으로 한 번에 읽기 적당한 분량인 데다 총 230여개의 도판이 촘촘히 실려 있어 읽는 맛과 보는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서얼 화가 이인상, 선배 서얼을 그리다 [한겨레] 2013.11.147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ㅣ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ㅣ태학사·3만5000원


18세기 조선의 문인화가 이인상(1710~1760)의 그림 <검선도>는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그림이다."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주장이다. "서얼에 의한, 서얼을 위한, 서얼에 관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서얼인 이인상이 선배 서얼인 유후를 그린 그림이 바로 <검선도>다. 이인상이 그린 유일한 초상화이기도 한 이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은 유후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칼자루와 살짝 뽑힌 칼 밑부분이 조금 드러난다는 점이다.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유후는 60대 후반 늦은 나이에도 호구를 위해 하급 관료로 일해야 했는데, 장진성 교수는 그림 속 살짝 뽑힌 칼이 "관직을 맡기는 했지만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미관말직만 전전한 서얼들의 불행한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 교수를 비롯해 한국학 공부 모임 '문헌과 해석'에 속한 연구자 32명이 필자로 참여한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이들이 이태 전에 내 좋은 반응을 얻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의 속편 격인 책이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개 그림, 포도와 게 등 먹을거리 그림들, 정조 <환어행렬도>에 얽힌 사연, 1954년 부산 피난민 판자촌 화재 때 불타 없어진 어진(御眞) 40여점 등 그림을 매개로 풀어 놓는 한국학 이야기가 흥미롭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 고연희 외 (태학사) [MBN] 2013.11.17



'그림'을 통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이야기를 엮었습니다.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5개의 주제로 나눠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 한·중·일 동북아 3국의 교류 등 그림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았습니다.

출처 : moon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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