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여(藺相如, 생몰년 미상)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조(趙) 혜문왕(恵文王)의 가신(家臣)이다. 「완벽(完璧)」, 「문경지교(刎頸之交)」의 고사로 알려져 있다.
경력
《사기》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따르면, 인상여는 원래 혜문왕의 환관이었던 목현(繆賢)의 객인(客人)이었다고 한다. 인상여는 여러 사료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출중한 지략으로 혜문왕을 보좌한 책사이기도 했다.
"책사 하나 잘 두면 100만 대군도 충분히 당해낼 수 있다." 라는 말은 바로 인상여의 비상한 책략을 두고 한 말이기도 했다.
한번은 목현이 죄를 지어 혜문왕의 노여움을 사서 처벌을 피해 연(燕)으로 망명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식객(食客)으로 있던 인상여가 목현이 연으로 망명하려는 이유를 물었고 목현은 "전에 연왕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연왕이 내 손을 잡고 친구가 되자고 했으니 내가 가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인상여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연은 약소국인데 비해 조는 강국입니다. 연왕이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 강국인 조의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총애를 잃고 노여움까지 산 당신이 연에 가봤자 연왕은 숨겨주기는커녕 당신을 잡아 돌려보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목현은 그의 말이 정연한 것에 놀랐고, 인상여는 이어 "여기서 차라리 스스로 처형대에 올라가서 조왕께 죄를 청하면 운좋게 용서받을 길도 있을 겁니다."라고 권했고, 인상여의 말을 따랐던 목현은 과연 혜문왕에게 용서받고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완벽
당시 조에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구슬이 보물로서 전해지고 있었는데, 진(秦)에서는 자국의 성 15개를[1] 줄테니 그 구슬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는 늘 조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는 강국 진이었고, 구슬과 성을 바꾸자고 한 약속도 실제로는 구슬만 빼앗긴 채 끝날 가능성이 컸으며 그것은 조 스스로가 진의 속국이라고 인정하는 굴욕적인 일로서 주변국에 대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한다면 「이 정도의 좋은 조건을 거절하다니 무례하다」며 트집을 잡아 조를 침공할 가능성도 컸다. 혜문왕은 군신과 상의했지만 의론만 분분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좋은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진에 사자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환관 목현이 혜문왕에게 "제 객인으로 인상여라는 자가 있는데 지용을 모두 갖춘 자입니다"라며 앞서 자신이 혜문왕의 노여움을 사서 연으로 망명하려 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혜문왕은 곧 인상여를 불러 이 국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물었고, 인상여는 "진은 강하고 조는 약하니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의 잘못은 진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혜문왕이 "그러나 구슬만 잃고 성을 받지 못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 일을 맡길 만한 사자가 없다"고 대답하자, 인상여는 "사자가 없다면 제가 진으로 가겠습니다. 성을 받지 못한다면 구슬을 온전하게 돌려보내겠습니다."[2] 라며 자청하여 교섭 역할로 발탁된다.
진의 도읍 함양(咸陽)으로 간 인상여는 진의 소양왕(昭襄王)과 대면하고 화씨지벽을 건네지만, 성 이야기는 하지 않고 구슬을 받아들고 총비와 군신들에게 보이며 자랑하기만 하는 소양왕의 태도에 성을 넘겨줄 뜻이 전혀 없음을 판단한 인상여는 "실은 그 구슬에는 조그만 흠이 있사옵니다."라며 잽싸게 구슬을 빼앗아 들고 기둥 옆으로 달려가서는 관이 벗겨질 정도로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선 노한 모습으로[3] "조에서 진의 말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조왕께서는 진을 믿고 5일간이나 몸을 청결히 하고서 화씨지벽을 넘기셨습니다. 이러한 조왕의 신의를 진왕께서는 참으로 무례하고 조잡하게 대하시니, 이제 이 구슬도 제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딛쳐 부수고 말겠습니다"라며 소양왕을 협박했다. 그제야 소양왕은 다급히 지도를 가져오라고 하면서 15성의 이야기를 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 성을 내줄 생각은 없다고 판단한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보물을 볼 때의 의식으로서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사이, 종자를 시켜 구슬을 가지고 몰래 조로 돌려보내는 한편 자신은 남아서 시간을 벌었다.
5일 뒤, 목욕재계를 마친 소양왕이 화씨지벽에 대해 묻자 인상여는 "역대의 진왕 가운데 약속을 굳게 지킨 왕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사와 진왕께서 성을 내주실 뜻이 없는 듯 하여 이미 조로 돌려보냈습니다. 15성을 넘겨주신다면 조에서는 구슬 따위 아끼지 않겠지만 거듭된 무례함에 대한 보상으로서 저는 사형을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의 군신들은 왕이 그를 처형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인상여의 대담함에 감탄한 소양왕은 "이 자를 죽여봤자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고 조의 원한만 살 뿐이다"라며 15성의 할양도 화씨지벽의 양도도 없던 일로 한 채 그를 잘 대접해 돌려보냈고, 한편 인상여가 진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의 시신을 국장으로 치르고자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혜문왕은 인상여가 무사히 살아돌아오자 기뻐하며 임시 가신이던 그를 정식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담력과 지혜만을 무기로 삼아 강국 진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화씨지벽을 지키고 조의 체면도 유지한 그의 모습은 훗날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4]
민지의 연회
기원전 279년, 혜문왕은 진의 초청으로 민지(澠池,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민지 현澠池県)에서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축수를 겸하는 회합에 불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회합이 벌어지는 민지는 진의 영내에 있었고 조의 국경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조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명목상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회합 장소에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진은 화씨지벽 문제에서도 보이듯 조가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걸핏하면 조를 쳐들어오기까지 하는 나라였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자리에 혜문왕은 나아가기를 꺼렸지만, 염파(廉頗) 등이 나서서 "가지 않는다면 조는 약하고 비굴한 나라 취급을 받을 것이고, 진은 더욱 기고만장하게 되어 다른 제후들까지 조를 넘보게 될 것입니다."라며 충고했고, 인상여도 동의하면서 자신이 혜문왕과 동행하겠다며 나섰다(혜문왕이 조를 떠나 민지로 향하면서 조에서는 30일 이내에 혜문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태자를 왕으로 세우고 진에 원수를 갚겠다, 는 확인을 거칠 정도의 각오를 다지는 등, 조에서는 혜문왕의 행차에 상당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민지에서 열린 잔치에서, 진의 소양왕이 혜문왕에게 "조왕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양국의 우호를 기념해 슬(瑟)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시지요"라고 주문했다. 어쩔 수 없이 혜문왕은 그 자리에서 슬을 연주했고, 소양왕은 그 직후 기록하는 관리를 시켜 국사에 "진왕이 조왕에게 슬을 타게 하였다"고 기록하게 한다. 이것을 조를 진의 신하 내지 일개 악사(樂士) 따위로 취급하며 업신여기는 것으로 본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다가가 질장구(缻)를 내밀면서 "진에서는 축제에서 질장구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는데, 양국의 우호를 기념해 두드려 주시지요"라고 주문했다.
진에 실제로 그러한 풍습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당시 중원의 다른 국가들이 천박하게 여기는 행위였고, 더욱이 왕에게 그런 것을 시키는 것은 무례하다며 소양왕은 분노했지만, 인상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지금 진왕과 저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밖에 안 됩니다. 제 목을 쳐서 그 피를 진왕께 뿌려드리리까?"라며 넌지시 "거절하시면 여기서 당신과 함께 죽겠습니다"라며 위협했다. 소양왕 가까이 있던 호위가 무례하다며 죽이려 했지만 인상여가 일갈하자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그의 기백에 놀란 소양왕은 하는 수 없이 질장구를 한 번 두드렸고, 인상여는 기록하는 관리를 시켜 국사에 "조왕이 진왕에게 질장구를 치게 했다"고 적게 한 뒤 "진왕 덕분에 잔치가 무르익었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뒤 진의 신하가 혜문왕에게 "우리 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귀국의 15성을 우리 왕께 헌상하는 게 어떻습니까"[5]라는 무례한 말을 던질 때에도 인상여는 "귀국도 우리 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함양 하나쯤 헌상하는 게 어떻습니까"라며 응수했다. 15성에 비하면 함양은 곧 진의 수도였기에, 말을 꺼냈던 진의 신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렇듯 시종일관 재치를 부리며 진의 무례함을 받아치는 인상여 앞에서 진은 끝내 조를 낮게 볼 수 없었고, 조로 돌아갈 때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탓에 진은 나서지 못했다. 이로서 인상여는 진 앞에서 대등한 외교 의례를 지키고 조왕의 신변뿐 아니라 조의 체면까지 모두 지켜냈다.
문경지교
귀국한 뒤 인상여는 진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상경(上卿)의 지위에 임명되지만, 앞서 숱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용장 염파는 그의 이례적인 출세를 시기하며,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인상여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털어놓으며 "내 기필코 한 번 그놈을 만나 수치를 주고 말겠다"고 별렀다. 출세한 군인으로 늘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며 진의 침공을 막아온 실적을 자부해온 염파였기에, 일개 환관의 식객으로 별다른 무공도 없이 말재주만 가지고 자신과 동격이 된 것도 모자라 지위가 자신보다 높아진 것에 염파는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반드시 그에게 수치를 주겠다"는 염파의 말도 정직한 그의 성격상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인상여는 염파와 만나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입궐하는 것조차 염파가 없는 날만 고르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외출한 인상여는 길에서 염파와 우연히 마주쳤고, 그대로 옆으로 숨어버렸다. 이러한 인상여의 모습에 실망한 종자들은 그날 밤 인상여에게 찾아가 "우리가 친인척을 떠나 나리를 섬기고 있는 건 당신의 높은 뜻을 존경해서였는데, 오늘 나리의 행동은 한낱 필부(匹夫)조차도 부끄러워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십니까. 더는 당신을 섬길 수가 없겠습니다."라며 항의했고, 듣고 있던 인상여는 "너희는 진왕과 염파 장군,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라고 물었고 종자들은 당연히 진왕이라고 대답했다. 인상여는 "난 그 진왕을 꾸짖고 나아가 진의 군신을 욕보인 자다. 이 상여가 염파 장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해보라. 진이 조를 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장군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장군이 다투면 둘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크게 다치게 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도 국가의 위급함을 개인의 싸움보다 우선으로 여겨서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궁중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염파는 깊이 부끄러워하면서 인상여에게 찾아가 그의 앞에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등에 지고 온 가시나무를 내밀며 "이 천한 자가 당신의 관대하심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 이 채찍으로 원없이 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께 지금껏 준 수모를 생각하면 그래도 부족하겠지만." 하며 속죄를 빌었는데, 인상여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이 있기에 조가 있는 겁니다."라며 용서했다. 더욱 감격한 염파는 "인상여,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목을 친다 해도 후회가 없겠소."라고 맹세했고, 인상여도 "나도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을 치겠습니다."라며 맹세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위해 목을 친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이것이 「문경지교(刎頸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6]
그 뒤
진은 인상여와 염파가 건재한 동안 조를 침범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정치, 군사 방면에서 조라는 국가를 지지한 버팀목이었고, 그 재능만큼이나 유대관계 또한 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상여는 병으로 쓰러지고 염파도 늙었다. 혜문왕의 뒤를 이어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자, 진은 장군 왕흘(王齕)을 시켜 조를 치게 하였다. 조는 염파를 총대장으로 삼아 출격하게 했고, 장평(長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노장 염파는 이 싸움에서 수는 비록 적지만 사기가 높은 진의 군사를 보고 농성전을 택했다. 정예병을 상대로 교전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숫자도 적보다 많은 데다 적이 먼 곳에서 온 원정군이라면 시간을 끌며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진군은 조군을 상대로 몇 번이나 도발해왔지만 염파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진군은 효성왕을 상대로 획책에 나서서, 조의 총대장을 염파가 아닌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 이름은 높았지만 실전 경험은 없었던 조괄(趙括)로 바꾸게 했다. 인상여는 이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효성왕에게 "왕께서는 명성만 듣고 조괄을 쓰려 하십니다만, 그것은 슬의 발에 아교풀을 칠해 고정시켜 놓는 것과[7] 같습니다. 조괄은 고작 명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글이나 잘 읽었을 뿐, 실전에서는 때를 맞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릅니다."라며 조괄의 실전 경험과 응용력 부족을 강조하며 염파의 해임을 철회시키려 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군의 총대장은 교체된다. 젊은 조괄은 적의 도발에 넘어가 우세한 병력으로 진군을 한꺼번에 치겠다며 전군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지만, 총대장이 조괄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왕흘 대신 진군의 총대장이 된 명장 백기(白起)에게 후방을 노출당하면서 조군은 산산이 무너져, 조괄 자신도 죽고 조는 45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다급해진 효성왕은 영토를 할양하고 화의를 맺었다.
그 뒤 인상여는 병사했다. 염파는 일시 조를 지탱하며 진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그 뒤 위(魏)와 초(楚)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많은 병력과 명신, 명장을 잃은 조는 차츰 약해져 매년 진의 침공을 받다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각주
- 이동 ↑ 당시 성 15개란 소국 하나의 규모와도 필적하는 것이었다.
- 이동 ↑ 구슬을 건드리는 일 없이 꼭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완벽'이라는 고사의 어원이 되었다.
- 이동 ↑ 이것은 「노발충관(怒髪衝冠)」, 또는 「노발충천(怒髪衝天)」의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 이동 ↑ 중국어로는 「완벽귀조(完璧歸趙)」라고도 부른다.
- 이동 ↑ 여기서 말하는 15성이란 앞서 진이 화씨지벽의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던 것. 진의 입장에서 15성 정도야 쉽게 줄 수 있지만 그 전에 조에서 먼저 주는게 어떠냐는 비아냥과 조를 속국 취급하며 깔보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 이동 ↑ 또한 염파가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졌다는 고사에서,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육단부형(肉袒負荊)」, 「부형청죄(負荊請罪)」의 고사성어도 생겨났다.
- 이동 ↑ 기러기발에 아교칠, 즉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출처:정보-책/수집-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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